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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巖 朱論介(의암주논개)
傳說哀愁濤南江: 전설도 서러워서 물결치는 진주 남강,
(전설애수도남강)
義娘紅魂魄開花: 논개의 붉은 넋이 꽃이 되어 피 는 구나.
(의랑홍혼백개화)
無心歲月曲遶流: 무심한 세월속에 강물은 굽이돌아 흐르는 데,
(무심세월곡요류)
矗石樓夜悲波聲: 촉석루에 밤이 오면 슬피 우는 물결소리,
(촉석루야비파성)
忠烈節義巖獨啼: 나라와 님 을 위한 굳은절개 바위 되어 홀로
(충열절의암독제) 우네
殉國義擧民族魂: 나라를 위해 결연한 희생정신은 민족 의 정신을
(순국의거민족혼) 일어 켰으니
論介崇仰壹輝光: 논개를 높이 우러러 보아 한결 같이 밝게 빛이
(논개숭앙일휘광) 날것이며,
半萬年史一佳人: 반만년 우리역사에 가장 아름 다운 여인 이지요.
(반만년사일가인)
모석 주영곤
義巖 朱論介(의암주논개)
文公曾孫潛來東 : 주문공의 증손이며 남송의 태학사 주잠
(문공증손잠래동) 깨서 고려 땅에 오셨고,
祖氣魄繼論介崇 : 선조님의 굳센 기상과 진취성 있는 위대한
(조기백계논개숭) 가르침을 이어받은 주 논개님을 우러러본다.
倭酋毛谷村六助 : 임진왜란 때 진주성 함락 후 왜장 거두인
(왜추모곡촌육조) 게야무라 로구스게를,
義巖抱俱死江中 : 남강가운데 의로운 바위에서 끌어안고
(의암포구사강중) 강물 속으로 함께 몸을 던졌으니.
民族魂興亂克服 : 민족의 정신을 일으키고 왜란의 어려운
(민족혼흥난극복) 고비를 이겨 내였습니다.
半萬年史一點紅 : 반만년 우리나라 역사에 아주 특별한 여걸이
(반만년사일점홍) 며,
義娘萬世一佳人 : 의랑 주논개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의랑만세일가인) 여인 이지요.
忠烈精神輝光窮 : 조국과 님 을 위한 고고한 희생정신은
(충렬정신휘광궁) 영원히 밝게 빛날 것입니다.
우편번호: 4 7 2 6 8
주소: 부산시 부산진구 개금 온정로 5, 1511호 (개금동,성원샹떼뷰)
성명: 주영곤 朱英坤 아호: 모석 牟石
휴대폰: 010-3559-5479 전화: 051-893-5479
의암 주논개 (義巖朱論介)
1,논개의 출생
충절의 여신 의암 주 논개님 은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부락에서 아버지 주달문 어머니 밀양박씨 사이에 무남독녀로 선조7년(1574년) 갑술년(甲戌年) 갑술월(甲戌月:9월) 갑술일(甲戌日:3일) 갑술시(甲戌時)에 태어났다. 논개는 4갑술(四甲戌)을 등에 업고 태어났다는 (産)은 논 (狗)술은 개를 이두(吏讀)의 한자음을 따 논개로(論介)로 작명 했다고 전해져 오고 있다.
2,논개의 가계
신안주씨 중앙 대종회가 밝힌 논개의 가계(家系)를 보면 신안주씨는 고대 중국의 전욱제(顚頊帝)의 후에로서 주(邾) 나라를 다스렸든 명문 집안이며, 중국, 강서성의 옛 지명인 신안(新安)을 본관(本官)으로 하고, 성리학(性理學)의 창시자인 성현 문공(文公) 주자(朱子) 희(熹 : 1130-1200)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한국의 주씨는 주자의 증손(曾孫)인 남송(南宋)의 한림원 태학사이신 청계공(淸溪公) 주잠(朱潛)이 서기 1224년 7명의 한림원학사 와 함께 고려에 망명하여 능주(陵州)에 안착 하신 후 순창 무주 진안 등지를 순방하며 서당을 개설하여 성리학을 가르쳐서 고려 후기에서 조선 500년 동안 문화 발전에 근간을 세워주신 분이시다. 그 분의 후예를 가르쳐 신안주씨(新安朱氏)라고 부른다.
잠(潛)의 아들은 고려의 좌승상 여경(餘慶)이시고, 손자는 고려 때 명재상으로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으신 열(悅)이시며, 증손자는 고려 때 예부상서 인장(印長)과, 삼사좌윤 인원(印遠), 첨의부사 인환(印還) 등 삼형제이신데 신안주씨 가문에서는 인장(印長)을 장파(長派), 인원(印遠)을 중파(中派), 인환(印還)을 계파(季派)라고 한다.
논개는 중파인 7世,인원(印遠)의 후손으로 그 계대(系代)를 살펴보면 인원(印遠)→ 8世,이부상서 원지(元之)→ 9世,호부상서 사충(思忠)→ 10世,정당문학세자사부 문익(文翊)-→ 11世,의정부좌찬성 자정(子精)→ 12世,진주목사 인(寅)→ 13世,전의부정 하(夏)→ 14世,사헌부감찰 서(序)→ 15世,연일현감 내근(乃謹)→ 16世,통정대부 식(軾)→ 17世,응경(應敬)→ 18世,혁(赫)→ 19世,달문(達文)→ 20世, 논개(論介)로 이어져 내려 왔다고 밝히고 있다.
3,최경회 약력
충의공(忠毅公) 최경회(崔慶會)는 조선중기 문인(文人)이자 무인(武人)으로서 자(字)는 선우(善遇)이고, 호(號)는 삼계(三溪), 시호(諡號)는 충의(忠毅)이고 본관은 해주(海州)이다. 1532년 전라도 화순현 삼천리에서 아버지 천부(天符) 어머니 순창임씨 사이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1546년(15세)에 나주 김 씨와 결혼했다. 그 후 송천(松川) 양응정(梁應鼎)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부친상을 당하고, 1557년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선생에게 수학하여 1561년 사마시 생원, 진사 양과에 합격하고, 1567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서 급제하여 성균관 전직, 사헌부 감찰, 형조좌랑을 거쳐, 1574년 옥구현감, 1575년 흥양현감을 거쳐, 1577년부터 1579년까지 장수현감을 지냈다.
그 후 1579년부터 1581년까지 무장현감, 1582년부터 1583년까지 영암군수, 1584년부터 1587년까지 영해부사, 1587년부터 1590년까지 담양부사가 되었으나, 모친상을 당하여 사직하고 1592년 7월에 모친상 중에 의병장이 되어 금산 무주 전투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1593년 4월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진주성으로 들어가 전투준비를 하고 싸웠으나 1593년 6월29일 진주성이 함락되자 책임을 지고 남강에 투신자살 하였다.
4,최경회와 의 인연
논개의 생애에서 가장 큰 인연은 최경회(崔慶會)와 만난 인연일 것이다. 최경회와 만남을 통해서 논개의 생애가 전개 되었으며 죽음을 결행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논개와 최경회의 만남은 논개의 아버지 주달문이 죽자 논개 모녀가 숙부 주달무와 함께 살게 되었는데, 이때 주달무가 김풍헌 이란 자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아넘기려는 사건이 일어나 이사건의 재판과정에서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와 처음 만난 것이다.
논개 아버지 주달문이 죽은 뒤, 숙부 주달무는 대곡리 부자인 김풍헌의 집 민며느리로 들여보내는 문제를 김풍헌과 은밀하게 모의했다. 김풍헌이 대가로 제의한 조건은 파격적이었다. 주달무는 그의 형수 박씨 부인에게 살림을 합치자고 설득했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박씨 부인은 시동생의 고마운 마음에 감동되어 동의 했다. 그 후 주달무는 김풍헌 에게 약속한 금품을 받았다. 며칠 뒤 박씨 부인은 시동생이 저질러 놓은 비인간적 처사를 알고 그날로 어린 딸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안의현 봉전 마을로 도망쳤다. 그러자 김풍헌이 장수현감에게 고소를 했다. 주달무는 이러한 소식을 듣고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 장수현 관아에서 나온 포졸들에게 체포된 박씨부인은 어린 논개를 데리고 장수현감 앞에 끌려 나왔다. 재판에서 박씨 부인은 무죄 선고를 받았다. 이제 겨우 4살밖에 안된 어린아이를 민며느리로 데려갈 생각을 했다는 그것 자체만으로도, 이미 김풍헌은 인륜을 모독하는 죄를 범한 것이며, 처음부터 반인륜적 목적으로 하여 체결된 주달무 와의 모든 계약은 무효이며, 따라서 주달무 에게 지급한 금품은 김풍헌 스스로의 책임 일뿐, 논개모녀에게 반환 하라고 요구할 권리가 없다는 내용의 판결을 내렸다. 도망갔던 주달무도 끝내 체포되어 김풍헌 에게 받은 금품일부를 되돌려주고 곤장을 맞은 뒤 감옥 에 갇혔다. 김풍헌도 오히려 곤장을 맞고 재판은 끝났다.
그러나 논개 모녀의 사정은 여전히 절망적 이었다. 논개를 데리고 울고 있던
박씨 부인이 최경회 현감에게 호소(呼訴)했다. 원래 살던 주촌으로 돌아가고 싶지만 그곳은 이미 시동생 식구들의 원망과 저주가 기다릴 뿐이며, 설혹 주촌 으로 돌아가 살게 된다 하더라도 김풍헌이 장차 무슨 보복을 해올지 두렵다고 했다. 그러므로 어디 살만한 곳이 생길 동안만 이리도 장수현 관아에 머물게 해 달라고 눈물어린 호소를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최경회 현감은 논개 모녀에게 며칠 동안만 관아에서 지내다 떠나라고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최경회 현감 부인 김씨는 논개모녀를 내아(內衙:관아의 안채)로 불러 들렸다. 논개 어머니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난 김씨 부인은 우선 박씨부인의 덕성과 예절에 호감이 갖고, 무엇보다 어린논개의 총명함에 마음이 끌렸다. 그리하여 최경회 현감부인 김씨의 보호아래 논개모녀는 새로운 삶이 시작 되었고, 그렇게 1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김씨는 논개모녀를 친척처럼 여기게 되었다.
최경회는 1579년 무장현감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때 김씨 부인이 최경회 현감에게 논개모녀도 함께 데려 가자고 권했다. 박씨 부인의 바느질 솜씨와 부엌살림 솜씨를 무엇보다 높이 샀다. 그러자 최경회는 논개모녀를 불러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물었다. 박씨 부인은 노비(奴婢)로 삼아도 좋으니 함께 데려가 달라고 간청 했다. 최경회는 부인 김씨와 논의한 끝에 관아의 침방(針房) 관비(官婢)로 논개모녀를 등재 시킨 뒤 정식 수행원으로 삼아 무장현 으로 데려갔다. 그때부터 논개모녀는 김씨의 보살핌을 받았다. 특히 논개의 총명함은 김씨의 가르침에 의해 경 이롭게 빛을 더해갔다.
박씨 부인은 논개에게 일찍부터 최경회 현감과 김씨 부인의 은해를 잊지 말아야 하며, 이 은혜를 갚지 못하면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을 반복해서 말했다. 최경회 현감과 김씨 부인께서 논개모녀에게 두 가지 은혜를 베풀 었 다고 박씨는 믿었다. 최경회는 계속 변방으로 옮겨 다니다가, 1583년 영암군수, 1584년 영해부사로 영전했다. 영해부사로 있던 중에 사도사정(司䆃寺正)이란 중앙관직을 임명 받았다. 사도사정이란 궁중의 미곡과 간장 등의 공급을 맡은 관리 이다, 그때 김씨부인은 벌써 여려해 동안 지병을 앓고 있어서 서울로 따라가기가 어려웠다. 김씨 부인은 논개를 유심히 살폈다. 2년 전에 어머니 박씨부인을 여이고 혼자가 된 논개는 나이 13살에 불과 했지만 웬만한 살림은 능히 보살필 수 있었다. 그동안 나주김씨가 가르쳐 온 덕분일 것이다. 김씨부인은 최경회에게 논개를 데려가서 음식과 의복 수발을 받으라고 권했다. 논개는 최경회를 따라 서울로 갔다.
그 후 1590년 초봄 최경회는 담양부사로 임명되어 돌아왔다. 그때 최경회는 59세였고 논개는 17세였다. 담양부사로 부임하면서 최경회는 논개를 부실(副室)로 맞아들였다. 그리하여 논개는 17살 되던 해에 최경회의 소실이 되었다. 논개가 최씨문중 사람이 된지 9개월 뒤인 1590년 12월에 최경회는 어머니 순창임씨 의 상(喪)을 당했다.
최경회는 담양부사 직을 사직하고 고향 화순으로 떠날 때 논개에게 장수로 돌아가서 기다리라고 권했다. 부모의 상을 당하여 고향으로 돌아갈 때 첩실을 데려 갈수 없기 때문이다. 논개는 이 권유를 받아들였다. 논개는 이미 최경회를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던지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자라고 있었던 모양이다.
최경회는 모친상을 당한 상주의 예를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모친 상중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조선은 위기에 처해있었다. 최경회는 더 이상 빈소만 지키고 있을 수가 없어 의병장(義兵將)이 되었다. 금산 무주 남원이 워낙 다급하여 그곳에서 전투를 벌였다. 그는 이미 환갑의 나이였다. 최경회는 의병을 더 많이 모집을 해야 했다. 그리하여 1592년 장수현 월강평야에 의병청(義兵廳)을 설치하였다. 장수사람들의 헌신적 협조는 큰 보탬이 되었다. 들판은 넒고 은밀한 곳 이여서 군사훈련 장소로서는 적격 이였다. 더욱이 가까운 무주 진안 용담 남원 임실 등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했다.
의병들은 최경회의 덕망과 인품을 흠모하던 청년들로 800여명의 의병을 모아 훈련시켜 남원과 전주지방에 출몰하는 왜적을 공격했다. 최경회의 월강평야 군영은 논개의 내조로 활기에 넘쳤다. 논개는 부인들과 함께 의병들의 전투복과 식사를 마련하여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그러니 의병들은 논개를 항시 감사하게 생각하고 논개를 모르는 의병은 한사람도 없었다. 최경회는 9월 중순까지 장수에 머물다가 남원으로 떠났다.
논개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1593년 4월 21일 최경회는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로 임명 되었다. 논개는 혼자서 남장으로 변장하여 진주로 가서 우여곡절 끝에 진주성 안으로 들어가 최경회를 만날 수 있었다.
진주성 안은 왜군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한 준비로 긴장되어 있을 때이다. 결국 전쟁은 시작되고 1593년 6월 29일 왜군 10만 대군과 맞붙은 2차 진주성 5주야 전투에서 수많은 관 민군이 전사하고 진주성은 왜적에게 함락당하고 최경회, 김천일, 고종후 세 장수는 조정을 향해 큰 절을 한 뒤 스스로 진주성 함락의 책임을 지고 남강(南江)에 투신자결하자,
논개는 조국과 남편의 원한을 갚기 위해 8일 뒤 1593년 7월 7일(칠월 칠석 날) 19세 논개는 촉석루(矗石樓)에서 왜군의 승전 축하연회가 있음을 알고 진주 기녀들 틈에 끼어 몰래 들어가 왜장(倭將) 게야무라 로구스게(毛谷村六助)를 의암(義巖)으로 유인한 뒤 강물 속에서 풀어지지 않게 열손가락 마디마디에 반지를 낀 손으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순국(投身殉國)하였다.
5, 의병들의 논개 반장경위(鄭東柱 선생의 記述)
진주성이 함락된 후 성을 탈출하여 목숨을 건진 전라도 의병들의 수는 이 전투의 참담함을 그대로 말해주었다. 최경회 장군과 함께 진주성으로 들어온 의병은 500여명 이였다. 전투가 끝났을 때 420여명이 전사하고 겨우 80여명 정도밖에 안되었다. 최경회와 함께 온 의병들의 대부분은 화순과 능주, 장수가 고향인 전라도 청년들이었고, 그들 모두는 최경회에 대한 절대적인 존경과 흠모의 마음으로 최후까지 그의 곁에서 전투를 치렀으며 가장 큰 희생을 기록했다. 그런 만큼 전라도 의병들은 다른 의병장 휘하의 의병들에게 서는 보기 어려운 특별히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했다. 최경회가 자결한 순간을 곁에서 지켜본 전라도 의병들은 형언하기 어려운 참담한 심정으로 최후를 맞았다. 그 의병 가운데 장수지역 출신들은 논개와 최경회의 관계가 지닌 매우 특별한 의미를 중요하게 여겼을 것이다.
최경회가 자결하던 날의 남강은 열흘이 넘게 계속된 폭우로 범람했다. 수많은 시체들이 격랑 치는 강물에 떠내려갔다. 살아남은 80여명의 의병들은 왜적들의 경계심이 다소 늦춰질 때까지 몸을 숨겨야만 했다. 왜적들은 성을 함락한 후 다시 진주 외각지대를 초토화에 나섰고, 그 며칠 후 논개가 왜장을 살해 했다는 소문이 진주인근 100여리 밖에까지 순식간에 퍼졌다 다시 며칠 후 왜적들은 울산과 부산 쪽으로 완전히 철수했다.
이때 진주 외각지대에서 숨어 지내던 최경회의 의병들은 진주에서 동쪽으로 7십리 떨어진 남강의 한 물굽이에 수백구의 시체들이 떠 밀려와 쌓여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강을 따라 지수목이라는 곳에 도착하니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시체를 건져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할 수 없어 그곳 사람들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들의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 해 주었다. 진주성이 함락된 이틀 뒤 호남의병 몇 명이 이곳으로 와서 한 의병장의 시신을 수습하여 산기슭에 무덤을 만들지 않고 평장(平葬)을 해 두었는데 그 시신이 진주 병사라는 소문을 들었다고 했다.
그리고 하루 전에는 진주 사람들이 배를 타고 내려와서 여자의 시신을 건져 역시 평장을 했다는 것이다. 의병들은 평장을 하여둔 두 곳을 조심스럽게 파헤쳤다. 먼저 가매장해둔 것은 최경회의 시신이었고, 뒤의 것은 논개의 시신임이 확인되었다. 의병들은 마을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관 두 개를 마련하여 일단 장수까지 운구해 가자는 목표를 세웠다. 지수에서 의령 쪽으로 건너 안의까지는 약80km 거리였다. 관을 메고 걷는 길이기 때문에 하루 밤낮이나 이틀가량 걸리는 길이다. 가면서 묘소문제를 논의했다.
최경회의 시신을 떠메고 화순까지 간다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 그리하여 논개와 한곳에 매장해 두었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이장을 해도 좋으리라는 데 뜻을 모아졌다. 그러자 논개의 묘지도 문제가 되었다. 장수에는 묘소를 돌보아줄 사람도 마땅치 않았다. 논의 끝에 논개의 묘지로 최종 결론이 난 곳은 논개의 선조들이 살았고 지금도 일족이 많은 함양군 서상면 방지 부근 이였다. 안의에서 서상까지는 약16km이다. 의병들은 함양군 서상까지 와서 방지마을이 보이는 산비탈에다 두 사람의 묘소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6, 논개의 생가와 사적지
①논개의묘소
논개의 묘소(墓所)는 경남 함양군 서상면 방지마을 양지쪽 산비탈에 있다. 논개묘소 뒤편에 최경회 경상우병마사 묘소가 있으며, 묘소좌측 계곡에 의암논개반장의병추모비(義巖論介返葬義兵追慕碑)가 세워져 있다. 이 추모비는1989년 1월 12일 최락건 함양군수가 세웠는데 그 비 뒷면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의암논개 : 남강의 시원(始源)인 금당리(金塘里) 탑시골 남강과 함께 푸르게 흐르는 찬란한 역사의 꽃 의암(義巖) 논개(論介)의 묘(墓) 있나니 진주성이 무너져 흩어졌던 의병들이 지수(智水)목 남강기슬에서 이제 막 원수를 갚아 햇살같이 웃음번진 열아홉 청춘의 의암 논개죽음 건져 한여름 이백리길 낮에는 왜병피해 사흘을 이슬 속에 총총히 반장하여 가신님 고향길목 의병들의 창의지인 덕수 의 영봉아래 양(陽)바르게 묻었구려 이곳 함양이 천령(天嶺)의 옛 땅 어질고 착한 사람들이 대대로 살았거니 그 밤에 목숨 건 의병선인(義兵先人)들이시여 오늘 이 고을 군민들이 비(碑)하나 세우고 거룩한 충의(忠義)를 삼가 추모(追慕)하옵나니 민족(民族)의 애인(愛人)으로 영원(永遠)할 의암혼(義巖魂)이 충효(忠孝)와 정절(貞節)의 그때 그대로 천령합곡(天嶺含谷)의 터전에 전(傳)해지게 하소서.
위의 비문 내용을 보면 남강아래 지수 목에서 논개의 시신을 건져 의병들이 반장하여 이곳에 묻었다고 되어있다.
②생가지(生家地)
논개의 출생지는 전라북도 장수군 장계면 대곡리 주촌 마을, 대곡 초등학교가 있던 곳이다. 1986년 대곡저수지를 만들면서 마을전체가 수몰되어 저수지근처 약200여평 부지에 생가만 복원해 두었다가, 정부에 수차 건의한 보람이 있어 전두환 대통령의 배려로 원 생가에서 300여m 떨어진 곳에 부지 8340평을 마련하여 1986년에 시작하여 1987년에 조성한 현재의 위치에 새로 복원하였다.
③의암사(義巖祠)
1956년 호남절의록, 호남삼강록, 의암 주논개 사적비등 사실을 근거하여, 장수군내 각계인사가 성금을 모아 건립을 추진하면서 비롯된 것이다. 이당 김은호가 여러 가지 고서와 전문가의 의견을 종합하여 그린 영정을 봉안하고, 당시 부통령이신 함태영(咸台永)의 친필 휘호로, 의암사(義巖祠)현판을 각자하여 걸었다. 그 후 논개의 영정을 모시고해마다 제사를 모셔 왔는데 1973년에 의암사 성역화 사업을 추진위원회가 결성되고 정부지원과 주민들의 협조로 1974년 11월에 현 위치인 장수읍 두산리 산 3번지 8566평에 이르는 대지를 조성하여 사우(祠宇)를 이건(移建)하였다.
④진주의기사(晉州義妓祠)
의기사는 1593년 6월 29일 임진왜란 제2차 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 민, 관, 군이 순절하자 조국의 원수를 갚기 위해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 순절한 의기 논개를 제향하기 위하여 세운 사당이다.
인조7년(1693년)에 진주의 선비들은 논개의 순국한 바위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전각하고 경종2년(1722년)에는 그 위쪽에 의암 사적비를 세웠다. 영조16년(1739년) 병사 남덕하는 의기정포(義妓旌褒)를 계청하여 왕의 윤허(允許)를 받아 의기사를 창건 하였고, 이 후 세 차례의 중수와 중건이 있었다. 지금 건물은 1956년 의기 창렬회에서 시민의 성금으로 시민의 성금으로 재건하였다.
7, 주논개의 의암(義巖)과 봉작(封爵)
의암(義巖)은 논개의 죽음을 슬퍼하고, 추모하기 위해 위암(危巖)을 의암(義巖)으로 고쳐 부르는 진주 사람들의 애틋함을 담아 의암(義巖)이라는 전서체(篆書體) 글씨를 정대융(鄭大隆)이라는 선비가 글씨를 써 바위에 새기게 되었으며 논개의 진실을 전하는 최초의 금석문(金石文)이 된 것이다. 의암(義巖)은 예문관((藝文館)에서 내려진 사호(賜號)라고 1975년 간행한 벽계승람(碧溪勝覽) 절의편(節義篇) 에서 밝히고 있다.
임진왜란 중의 충신, 효자, 열녀들을 뽑아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東國新續三綱行實圖)에 논개의 순국사실을 누락시킨 것은 유교 윤리에 젖어있던 보수적인 사대부들의 편견으로 유몽인이 쓴 어우야담에 논개의 순국사실은 자세히 기록하였으나 관기로 표현한 부분이 정열(貞烈)로서 표창이 불가하다는 주장이었다. 그 후 계속되는 진주성민들의 분노와 매년 계속되는 추모제를 통하여 의혼(義魂)을 위로하였는데, 1721년(경종1년)에 경상우병사 최진한(崔鎭漢)은 주논개의 의열(義烈)에 대한 국가적 포상을 비변사(備邊司)에 건의하였다. 이때 구체적인 포상방법은 봉작(封爵)을 내려주고 사당(祠堂)을 건립해 주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20년 뒤 1739년(영조16년)에 경상우병사 남덕하(南德夏)의 노력으로 진주성에 의기사(義妓祠)라는 사당이 건립 되었으며, 의기논개지문(義妓論介之門)의 사액(賜額)을 내려 받고, 추모제(追慕祭)가 국고로 매년 행해지고 있다.
⁎ 논개 순국 147년이란 긴 고난 후 국가의 포상을 받게 된 것이다.
※ 장수군에서는 매년 음력 9월 3일 의암 주논개 추모제전을 열고 있다.
※ 진주에서는 5월 넷째 금, 토, 일, 3일간에 걸쳐 논개 제례 봉향 등의 호국 참배행사를 진주성 에서
거행하고 있다.
※ 함양군 서상면 금당리 방지 주논개 묘역에서 칠월칠석날에 함양군이 후원
하고 성균관 유도회 안의지부가 주관하는 추모제가 매년 열린다.
※ 상총박남(上塚博男)은 논개의 충절을 흠모한 일본 현지에서 배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