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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일 (2015.12.27.일) : 두 번째 수도 폴론나루와.
아침 식사 후 8시경에 Tour를 시작했다. ‘폴론나루와’는 숙소가 있는 ‘시기리야’에서 동북 방향으로 66킬로미터 거리에 있으니 대략 2시간 거리다. 이곳은 첫 수도 ‘아누라다푸라’가 ‘타밀’족에게 점령 되자, ‘싱할라’ 왕조는 10세기에 ‘폴론나루와’로 수도를 옮기고 이곳에서 다시 찬란한 문화를 일구었다. 특히 12세기 ‘파라크라마 바후 1세’는 수많은 사원을 짓고 수많은 관개용 저수지를 만들어 ‘폴론나루와’를 부유하고 아름다우며 세계적인 불교 중심 도시로 발전시켰다. 그때 조성된 많은 불교 건축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지금도 유적을 발굴하고 있다.
지금 보기에도 어마어마한 넓이의 인공호수 ‘파라크라마 사무드라(Parakrama Samudra)’가 도시의 중심을 이루고 있었다. 여긴 열대 지역인데 왜 이렇게 관개시설에 힘을 썼는지 알 수가 없었다. 호수의 구조를 보면 가뭄에 대비한 형식인데 차라리 홍수에 대비해 저지대의 배수지를 만드는 것이 비가 많은 열대지방에 맞지 않나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먼저 고고학 박물관에 들러 1인 25$의 통합입장권을 구입했다. 그리고 박물관의 여기저기를 둘러보았는데 유물들이 전부 복제품이라고 적혀 있었다. 좀 김이 빠지긴 했지만 대신 유리를 사이에 두지 않고 가까이 볼 수 있는 것이 장점이기도 했다.
하루 한 명씩 미녀를 본다고 했는데 오늘의 미녀는 박물관에 근무하는 아가씨였다. 무슨 일이 있는지 우리 앞을 여러 번 왔다 갔다 하여 충분히 관찰할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진을 찍지 않았다니). 어제 박물관 아가씨가 투피스를 입은 현대식 복장의 늘씬한 미녀라면 오늘은 키가 153㎝ 정도에 몸무게는 43㎏ 정도 되는 - 어떻게 그리 정확히 아느냐고 묻는다면, 그래서 전문가라고 대답해 주겠다. - 스리랑카 전통 복장인 노란 사리를 걸친 통통한 아가씨였다. 작되 나올 것은 나오고 들어갈 곳은 들어간, 힌두 조각상에 나오는 풍만한 가슴과 둔부, 그리고 상대적으로 가는 허리를 가진 아가씨였다. 힌두교의 조각상이 과장이 아니라 실제의 형상에 가깝다는 것을 나는 이 아가씨를 통해 느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상당히 섹시한 면이 있었다. 혹자는 그녀가 브래지어를 했는지 아니면 옷 자체에 비밀이 있는지 궁금해 했다. 왜냐하면 뒷면은 등의 1/2을 드러내고 앞면은 가슴 아래부터 아랫배까지를 슬쩍 드러내는 디자인인자라 궁금해 할 수도 있겠다. 단언컨대 일반적 브래지어는 없다고 본다. 아마 천으로 감싸는 방식이 아닐까 추측했다.
이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 아가씨에게 직접 물어 보는 수밖에 없겠는데 그럼 어떻게 영어로 말해야 할까? “How do you care your breast, a bra, or the other?”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care’ 대신 ‘keep’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울까. 일단 이렇게 물어보면 대답은 따귀겠지. 그러나 영어는 일상생활 중 생기는 의문을 영어화해서 생각하는 것이 실력 향상의 지름길이기에 이러한 생각이 전혀 쓸데없는 생각은 아닌 것이다. 물론 쓸데있는 생각도 아니지만.
박물관을 나와 호숫가를 따라 가다가 차를 세우고 드디어 오늘의 첫 번째 유적지 ‘로얄 팰리스’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조금 흐르던 날씨가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드디어 굵은 빗방울을 내리기 시작했다. 사리를 걸친 안선생과 윤선생은 비에 젖은 사리가 다리를 휘감아 상당히 계단 오르내리기가 불편해 보였다. 궁궐터로 가기 전 유적지를 한 군데 들렀는데 손에 무엇을 들고 있는 모습이었다. 어떤 인물인지 모른다고 하는데 손에 든 것이 패엽경(貝葉經) 모양처럼 보여 아마 불교와 관련된 유적일 듯했다.
< 머리와 얼굴과 옷차림을 아무리 봐도 부처의 모습은 아닌 것 같다. >
초기에 부처님의 법은 스님들의 입에서 입으로 암송하여 구전되었다. 스리랑카에 불법이 전해진 후에, 불경을 야자수 나무의 일종인 다라수 잎에 새겼다. 다라수 잎을 일정한 크기로 자른 후, 철필로 경문을 긁은 다음 새겨진 홈에 잉크를 붓고 닦아낸다. 이것을 건조한 다음 양쪽에 구멍을 내어 끈으로 묶어 만든 경전을 「패법경」이라 한다. 그렇다면 손에 든 것은 축 처진 것으로 보아 패엽경이 아닐까 한다.
퉁퉁한 배를 보면 그 당시는 굶주려 여위였을 일반 서민도 아닌 듯하고, 부처상을 지금껏 보아왔으되 원만한 신체의 부처와 오랜 수행으로 야위어 배가 쏙 들어간 부처는 있었지만. 저렇게 배가 나온 부처는 본적이 없다. 그렇다면 신하가 ‘파라쿠라마 바후 1세’에게 패엽경을 바침으로써 부처의 법을 따르기를 권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경우 ‘파라쿠라마 바후 1세’ 때의 가장 훌륭한 신하였다고 생각되는 인물을 찾아 그 사람이라고 주장하면 되겠다. 역사는 노출된 사실과 합리적 상상의 결합이다. 이런 훌륭한 말을 마구 만들어 내는 것으로 보아 나는 상당히 현학적 사람인 듯 하다.
< ‘싱할라 왕조’의 ‘파라쿠라마 바후 1세’가 지었다는 궁궐 >
이 궁궐은 4면이 모두 45.7m인 정사각형 바닥 터에 높이 30m의 7층 규모로 지은, 당시 기술로는 획기적인 규모의 건축물이었다. 튼튼한 벽과 36개의 기둥으로 만들어진 이 궁궐은 모두 50개에 이르는 방과 두 개의 넓은 홀이 있었다. 3층까지는 벽돌로, 그 위의 4개 층은 나무로 지었는데, 지금 이 궁터에는 불에 탄 흔적과 3층까지의 일부 무너진, 두꺼운 벽체만 남아 있다. 문득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옛터’가 떠오른 것은 우연일까?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나 이곳이나 패배한 역사의 흘러간 뒷면이 아니던가? 월색이 고요한 밤이나 비 내리는 쓸쓸한 풍경이나 모두 나그네의 설운 회포를 말하기 좋은 배경이 또한 아닌가?
< 궁궐 동쪽에는 왕이 대신들과 회의하는 집회장이 있는데 사자가 새겨진 왕의 옥좌를 중심으로 대신들의 이름이 새겨진 돌기둥이 줄지어 서 있다. 우리로 보면 품계석이라고 할까 >
< 참 통통하고 귀여운 사자상이다. 스리랑카를 사자국(獅子國)이라 한 것이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온갖 모양의 사자가 다 있다. 이리 귀여운 사자라면 애완용으로 권하고 싶다 >
< 동남쪽 끝에는 왕자의 목욕장이 있다. 지금도 맞은 편 길 건너 제법 넓은 강이 흐르고 있다 >
다시 차를 타고 북쪽 잠간 가니 '쿼드랭글'(Quadrangle)dl 나타난다. '쿼드랭글'은 성벽으로 둘러싸인 사각형 터 안에 12개의 사원 건축물이 모여 있던 곳이다. 싱할리 왕조 시절에는 석가모니의 치아를 모신 불치사가 이곳에 있었다. 여기는 전체가 불교 유적이므로 모자와 신발을 벗어야 했다. 여기는 ‘바타다게(Vatadage)’라는 유적이 유명한데 이는 2m 높이에 서 있는 아름다운 불탑으로, '쿼드랭글' 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예술적인 건축물이다. 네 군데의 입구 계단 앞에는 저마다 '문스톤'(moonstone, 반월석)과 '가드스톤'(guardstone)이 있고, 계단을 올라가면 네 곳 모두 좌불상이 있다. '문스톤'은 윤회를 나타내고, '가드스톤'은 입구에서 악마가 들어오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하는데, 북쪽 입구의 것이 그 형태가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다. ‘바타다게’ 불탑 건너편으로 한때 불치사였던 '하타다게'(Hatadage)가 있다. 그리고 남쪽 입구로 들어오면 맨 먼저 왼쪽으로 보이는 불당이 ‘투파라마’이다. 거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으며 지붕도 남아 있어 중후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법당 안의 불상은 오랜 세월 속에서 모습이 많이 훼손되었으나, 2m 두께의 두꺼운 벽에 뚫린 구멍으로 햇빛이 들어와 불상의 얼굴을 비치게 배려한 점이 이채롭다. 그 외에도 연꽃 줄기 모양의 ‘니산카라타 만타파’와 전탑 형식의 ‘사트마할 프라사’와 엄청난 크기의 'Stone-book'이 있었다.
< ‘바타다게(Vatadage)’의 부처상으로 동서남북으로 네 분을 모셨다. 왼쪽 겨드랑이 부분이 막힌 것은 장삼을 표현한 것이다. 뒤에 보이는 것이 다고바, 혹은, 스투파라고 하는 탑이다. 이와는 다르지만 제주도에는 방사탑이라 해서 악한 기운이나 귀신을 쫓는 탑이 집 앞에 세워져 있으니 탑이란 건 숭상이나 추념(追念)의 목적과 벽사(闢邪) 목적으로 세워졌다고 하겠다. 비에 젖은 모습이 너무도 처연하여 정말 부처님께서 수행하시던 때의 모습을 떠올려 불교 신자가 아닌 나도 뭔가 가슴이 숙연해졌다. >
< 한 때 불치사였던 ‘하타다게’의 깨어진 불상들. 너무 심하게 깨어져 있고 마구 조립한 듯 보여 슬프고 아쉬웠다. >
‘바타다게(Vatadage)’나 ‘하타다게’는 모든 게 너무 부서져 있고 다시 조립한 흔적도 뚜렷이 나서 문화적 감흥을 주기에 부족했다. 그야말로 뭉개진 불상을 전시해 놓은 느낌에 꿰맞춘 듯한 느낌이 들어 아쉬웠다. 관리도 문제지만 돌의 재질 자체가 무른 듯했다. 이들이 이렇게 부서진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했다.
<니산카라타 만타파 : 연꽃 줄기 모양의 이 유적은 왕이 불교경전을 경청하던 곳이라 하며, 사트마할 프라사다는 태국의 건축가가 지었다는 7층 전탑인데 층마다 부처상이 있었는데 일부 훼손되었다. >
< ‘투파라마’의 불상 : 실내에 있는 불상이 왜 이렇게 윤곽이 뭉개졌을까? >
< '바타다게' 입구의 '문스톤'. 사원이나 대탑마다 문스톤의 모양이 조금씩 다르지만 그 기능은 같다. >
< 엄청난 크기의 Stone-book. 어떤 내용을 적어 두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자기들에게는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겠지. 그런데도 이렇게 노천의 빗속에 두다니....... >
< ‘하타다게’ 사원의 돌로 쌓은 벽면. 아마 그랭이 공법 비슷해 보이는데 이런 공법은 불국사에도 있고, 잉카문명에도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당시는 보편적인 기술이었던 것 같다. >.
참,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도 기록하는 것이 나의 일이라 참 그렇다. 그러나 기억을 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뇌리에 너무 깊이 박힌 사건이 일어났다. 그건 ‘갈 비하라’로 가기 위해 다시 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 다리를 건너기 위해 차의 속력을 조금 줄인 상태에서 왼쪽 다리 난간에 사이좋게 앉아 있던 수원숭이가 갑자기 암원숭이를 짓누르더니 앞뒤로 마구 급히 엉덩이를 흔들고 입을 벌려 자신의 긴 송곳니를 드러내어 자신의 흥분된 감정을 극적으로 표현하였다. 행위는 순식간에 끝이 났는데 암놈은 길 가다가 봉변을 당했다는 듯이 우리를 힐껏 보고는 사라졌다. 수놈이 한 그 다음 행동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짓이었다. 그는 자기 고추 대가리에 아직도 묻어있는 자기 몸에서 사출된 단백질 덩어리를 떼어 먹기 시작했다. 흰 껌처럼 늘어지는 것을 두어 번에 걸쳐 깨끗이 떼어 먹고는 유유히 사라졌다. 어떻게 저런 짓을 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했지만, 인간적 윤리나 관념 없이 긍정적으로 보면 무엇이든 허비하지 않으려는, 참으로 건강한 자연의 리사이클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다행히 여자들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있었다면 건강한 원숭이와 비교 당해 얼굴 붉힐 뻔 했다.
‘폴론나루와’ 관광의 하이라이트라 함직한 ‘갈 비하라’는 ‘바위 사원’이라는 뜻이다. 50m 높이의 바위 절벽 면에 자연석을 파내어 조각한 세 개의 거대한 불상이 있는데, 거대한 크기에서 흔히 느끼게 되는 위압감보다는, 완만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이루어진 자태며 온유한 표정이 오히려 편안함과 고요한 감동을 안겨 준다. 야외에 있는 불상들이 어떻게 이 정도로 완전한 상태로 유지되었는지, 폐허 같던 ‘쿼드랭글’의 유적을 보다가 정말 제대로 모습을 갖춘 부처상을 보니 경이로움마저 느낄 정도였다.
< ‘갈 비하라’의 전체적 모습. 왼쪽부터 좌상(坐像), 그리고 석굴 좌상, 입상(立像), 와상(臥像) 등 세 가지 형상의 부처상을 볼 수 있다. >
< 맨 왼쪽에 있는 석가모니 좌상(坐像)은 높이가 4.6m나 되는데, 바위의 결을 따라 있는 자연 무늬가 석가모니가 입고 있는 옷인 듯 아름답다. >
< 왼쪽에서 두 번째 석굴 사원에는 작은 불상들이 모셔져 있다. 지금은 앞면에 유리로 막아두어 그 안쪽을 선명히 볼 수 없다. 다행히 먼저 간 여행객이 있어 인터넷에 사진을 올려 두어 허락 없이 도용하였다. 죄송. >
< 석굴 사원 오른쪽에는 높이 6.7m의 입상이 팔을 교차시킨 모습으로 서 있다. 석가모니의 수제자 아난다가 곁에 누워있는 석가가 열반에 들어 슬픔에 젖은 모습을 표현한 것이라고 하는데, 연화 좌대에 서 있는 점으로 보아 석가모니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팔짱을 끼고 있는 것이 슬픔에 젖은 모습이라는 건 조금 이해가 가지 않는 해석 같았다. 차라리 아래의 연화대로 보아 석가모니의 입상이라 보는 것이 맞을 듯하다. >
< 맨 끝에 석가모니 열반상이 누워 있다. 길이가 무려 13.4m나 되는 열반상은 평온한 자태로 누워 열반에 들려 하는 모습인데, 얼굴 표정이 참으로 우아하고 부드럽다. 특별히 이 사진을 고른 이유는 앞에 달려가는 아가씨 때문이다. 키에 비해 엄청 작은 머리에 종아리의 굵기가 들고 있는 우산과 같다. 앞에 내가 이야기를 한 싱할라족의 신체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얼굴은 안 보여서 그렇지, 대강 다 예쁘다. 그런데 머리를 대개 기르는데 엄청 검은 머리가 반 곱슬머리 정도여서 그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
< 앞에는 큰 바위가 있어 올라가 보았더니 기이한 조각이 있었다. >
< 앞의 큰 바위에서 발견한 조각. 왼쪽 부분에 발가락 다섯 개가 있는 발바닥이 두 개, 발바닥의 방향으로 보아 두 사람의 발인 듯한데 가운데 선은 왜 그렸을까? 그리고 원숭이의 해괴한 짓을 보아서인지 남성 성기 아래 원숭이 두 마리가 교미하는 장면처럼 보이는 조각. >
생선과 치킨커리 덮밥으로 점심을 해결한 후 사파리 투어를 갔다. 원래 계획했던 ‘민네리아 국립공원’에는 요즘 동물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고 해 ‘차민다’가 소개해 준 곳을 갔다. Habarana에 있는 ‘Hurulu Eco Park’로 주로 코끼리를 볼 수 있는 모양이다.
< 코끼리를 발견하자 순식간에 차들이 모여들어 난장판이 되었다 >
< 야생의 공작새가 자주 눈에 띄었다 >
사파리는 생각 외로 힘들었다. 비포장 길을 계속 달려 코끼리를 발견할 때까지 다녀야 하니 언제 끝날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자리에 앉아 갔는데 비포장 길을 갈려니 몸의 균형을 잡느라고 팔에 힘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팔이 아플 정도였다. 그래서 일어서서 다리로 균형을 잡았더니 훨씬 편했다. 다만 낮게 드리워진 나뭇가지가 있으니까 전방을 계속 살펴야 다치지 않는다.
< 사파리 도중 만난 사람들. 표정이 밝고 웃음이 많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
오다가 담불라의 슈퍼마켓에 들러 빵과 사과와 포도, 치즈와 콜라를 구입했다. 가지고 온 컵라면과 빵으로 저녁을 대신할 작정이었다. 점심 때 커리를 먹어서 이제 점차 커리는 보기도 싫을 지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챙겨둔 버터를 빵에 발라 먹으니 그것도 나름 맛이 있고 오히려 커리보다는 낫다는 생각을 했다. 이 사람들은 왜 쌀국수를 먹지 않을까? 사과는 모양은 예쁜데 좀 떫은맛이 났고 포도는 미국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나는 동남아 같은 곳에 가면 내가 먹어보지 못했던 열대과일들을 실컷 먹고 오리라는 생각을 늘 했다. 그런데 차츰 그런 열대과일에 대한 나의 환상은 깨어졌는데 그건 열대과일이 생각 외로 맛이 없다는 것 때문이었다. 나는 파인애플을 엄청 좋아하는데 여기서 먹는 파인애플은 우리나라 슈퍼에서 파는 것보다 당도는 떨어지고 신맛은 강하다는 것, 그리고 바나나는 예상 외로 비싸면서 맛도 없다는 것. 김병만이 나오는 ‘정글의 법칙’에서 스타 플루트(star fruit)를 보고 엄청 맛있을 거라 생각하고 인도네시아에서 샀다가 거의 다 버린 일. 내 나름대로 이유를 생각했는데 대기업의 개량된 맛에 익숙해져 원래 과일이 지닌 맛에서는 만족을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우리 방에서 저녁식사 후 한잔하면서 남은 일정을 대략 조정을 하고 내일은 캔디로 가야하기에 짐정리를 했다. 11시도 되기 전 피곤해서 골아 떨어졌다.
♠제 6 일 (2015.12.28.월) : 세 번째 수도 캔디를 향해.
일어났더니 비가 오고 있었다. 지금은 건기인데 벌써 사흘째 비가 내리니 참 고약하다. 12월에도 보통 10일 정도는 비가 온다더니 가기 전에는 더 비가 오지 않겠지. 식사 후 check-out한 다음, 8시에 오늘의 tour를 시작했다. 오늘의 주 일정은 담불라에 있는 황금사원과 석굴사원을 보고 캔디로 이동 후 현재 부처의 치아 사리를 모시고 있다는 불치사를 본 후 호텔 check-in까지다.
< 동굴사원 앞 황금사원. 동굴사원은 그림의 좌측에 있는 오르막길로 30분 정도 올라가야 한다. >
여기서 느낀 점은 사원에 들어갈 때 모자와 신발 이외에 가발도 벗겨야 한다는 것이다. 모자를 벗어야 한다면 가발도 같은 취급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게다가 신체의 노출을 꺼려 반바지 입는 것을 금지한다면 여자들의 쫙 달라붙어 신체의 모든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는 옷도 금지해야 하지 않을까? 마치 전신 수영복을 입은 듯한 여자들이 왔다 갔다 하면 평온한 자태로 누워 열반에 들려 하는 부처가 눈을 감지 못할 것 같다. - 사람들은 아마 내가 눈을 떼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할까?
< 석굴 사원 전체적 모습. 제1 석굴에서 제5 석굴까지 회랑으로 이어져 있다. >
기원전 3세기에 만든 담불라 석굴사원은 스리랑카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석굴사원으로, 담불라를 불교의 중심지로 만들어 주었다. 천연의 바위굴을 이용해서 만든 이 사원은 다섯 개의 석굴로 이루어졌고, 불상 153개와 왕의 석상 3개, 그리고 힌두 신상 4개가 안치되어 있다.
제1 석굴 ‘신들의 왕 사원’은 가장 오래된 석굴로, 길이 15m나 되는 와불상이 있고, 벽과 천장에는 석가모니의 일생과 스리랑카 역사를 그린 프레스코 벽화가 가득하다. 제2 석굴 ‘위대한 왕의 사원’은 석굴 중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우며, 56개의 불상이 있고 천장에는 역시 석가모니의 생애와 싱할라족의 역사가 그림으로 그려져 있다. 제3 석굴 ‘위대한 새로운 사원’은 18세기에 만든 것으로 57개의 불상과 9m 길이의 와불상이 있다. 제4 석굴과 제5 석굴은 근대에 새로 만든 석굴이다. 제1 석굴사원을 뺀 나머지 네 석굴 사원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오르며 내리며 많은 원숭이들을 만났지만 음식을 달라고 하든지 모자나 선글라스를 빼앗아 달아나는 녀석은 없었다. 모두 자기들끼리 놀거나 졸거나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할 뿐이었다. 개들이나 소들이나 원숭이나 모두 순하고 착한 것이 이곳 사람들을 닮아 그런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발리와 대만에서 사람에게 달려드는 원숭이를 주의하라는 경고문을 본 걸 생각하면 엄청 차이가 났다.
< 제2동굴은 '마하 라자 비하라 (Maha Raja Vihara)'라하는데. '위대한 왕의 사원'이라는 뜻이다.
담불라 최대의 동굴로서 폭이 약52m, 깊이는 25m에 이른다. 입상의 모습이 우아하다. >
관람을 마치고 차로 돌아가는 중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해 은행 입구에서 비를 잠시 피했다. 마침 앞에 사리를 입고 머리에 천을 두른 늙은 아줌마가 있었는데 갑자기 안선생이 그 여자의 머플러를 잡더니 뜬금없이 “How much?”라고 물으니 그 여자는 “I’m Indian.”이라고 답했다. 도대체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이란 말인가? 생전 처음 보는 여자에게 다짜고짜 “머플러 얼마 주었냐?”하니까 “난 인도 사람이걸랑.”이라고 한 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나중에 왜 그런 질문을 했느냐고 물으니 ‘그 천이 좋아 보여서’라나?
담불라에서 캔디까지는 남쪽으로 74㎞를 가야 하므로 약 2시간 소요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교통 정체가 심해서 거의 3시간 걸렸다. 캔디는 스리랑카 중부에 있는 캔디고원(해발 488m)에 있는 도시다. 15세기에 세워져 1815년 영국에 점령되기까지 싱할라 왕조의 마지막 수도로서 500년 동안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였다. 식민지 유산도 많이 남아 있지만, 스리랑카 전통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높으며, 빼어난 불교문화 유산 등 전통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가장 스리랑카다운 도시다. 덕분에 유네스코에서 지정한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다양한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석가모니의 치아 사리를 모신 달라다 말리가바(불치사), 캔디왕국의 궁궐, 그리고 아름다운 캔디호수 등이 있다.(인터넷 참고)
< 캔디 전 절벽 전망대에서 맥주 한잔. 안주는 어제 남은 과일. >
< 차민다에게 부탁해 중국음식점으로 가자고 했더니 ‘Bamboo Garden’으로 안내 한다. 사진은 ‘해물 볶음 국수’인데 맛이 좋다. 탕수육, 새우볶음, 마파두부, 밥까지 시켜 오랜만에 배불리 먹었다. >
일단 12월 31일 콜롬보 갈 기차표를 예매하기 위해 캔디역으로 갔다. 캔디는 정말 엄청나게 교통이 복잡하다. 삼거리에서 체증이 생기니 거의 10분 정도 꼼짝도 못한다. 신호등이 없고 교통순경이 수신호로 정리를 하다 보니 엉망이다. 한참을 기다려 삼거리에서 빠져 나가니 바로 캔디역이었다. 그러나 스리랑카에서는 10일 전부터 기차표 예매가 가능하여 이미 모든 좌석이 매진이란다. 하는 수 없이 버스로 가기로 하고 버스 정류소 위치만 확인하였다.
이때, 스리랑카의 여행사인 ‘Alpha Travels & Holidays’의 미스 김에게서 차민다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우리의 상태를 묻고 콜롬보에서 우리가 묵었던 ‘새피어 호텔’의 지배인 이름을 물었다. 그래서 다시 방문해 “꼭” 가르쳐 주기로 약속을 했다. 아마 도착하던 날 여행사에서는 비용을 지불했는데 우리에게 제공되지 않은 석식 문제인 듯 했다. 반드시 고자질하고야 말리라고 굳게 다짐하며 평균나이 61세의 네 사내는 아주 신이 났다.
먼저 스리랑카 최대의 식물원이라는 ‘페라데니야 식물원’ (Peradeniya Botanic Gardens)으로 갔다. 14세기에 싱할라 왕조의 왕실 정원으로 조성했던 것을, 19세기 영국 식민지 시대에 현재와 같은 형태의 식물원으로 다시 조성했다. 4,000여 종의 열대 식물, 300여 종이 넘는 난초와 거대한 야자수, 과수원 등이 풍성한 볼거리를 제공할 뿐더러 생태학적 가치가 뛰어나, 인도네시아 ‘보고르 식물원’과 함께 아시아 최고의 식물원으로 꼽힌다고 한다.
< 넓은 잔디밭이 여러 군데 조성되어 있어 눈이 시원하게 느껴진다. 식물원은 많은 식물을 오밀조밀 심는 것 보다 이렇게 훤하게 조성하는 것이 좋아 보인다. 가로수처럼 보이는 것이 콜롬보 성당에서 본 대왕야자 나무다. >
< 왕죽이라 해야 하나 엄청난 굵기의 대나무가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대나무 하나만하면 평상 하나 만들고 남을 크기다. >
< 여기서도 호기심이 많은 여자애들은 방긋방긋 웃으며 “하이”라고 먼저 인사를 건넨다. “하이”라고 대답해 주면 아주 좋아서 깔깔거리는 것이 우리나라의 가여운 청소년들과는 지구에서 안드로메다 성운 정도로 거리가 멀다. 지나가는 아주머니에게 사진을 좀 찍어달라고 하니 ‘스마일’을 강요한다. 어쩔 수 없이 스마일해서 찍은 사진이 바로 이 사진이다. 네 명이서 웃으며 찍은 사진은 이것이 유일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웃음을 잃어 버렸다. 웃는 것을 어색하게 생각하다 보니 점차 웃음도 우릴 떠난 게 아닌지. >
한 시간 정도 이리저리 다니며 구경을 했는데 오랜 역사와 함께 관리가 잘 되어 있어 상당히 편안하고 상쾌한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이 띄었다. 그것은 담배 피우는 사람을 볼 수 없다는 것.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대개 서양 사람들이었고 스리랑카 사람들이 담배를 피우는 것은 여행 내내 3사람 보았을 정도였다. 한 사람은 차 안에서, 한 사람은 시장 안 계단에서, 한 사람은 자기 집에서 피우고 있었다. 불교의 교리에 그런 것이 있나라고 생각했지만 스리랑카에는이슬람교도과 기독교도들도 많은 데 그건 아닌 것 같았다. 터키에서 남자나 여자나 자리에 앉자 바로 담배부터 끄집어내는 것을 보지 않았는가. 제약이 심한 곳일수록 담배를 많이 피우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금강산 여행에서 북한 남자들도 지독한 골초였다. 그래서 차민다에게 물어 보았더니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도록 법으로 정해 놓았다고 한다. 참 법을 엄정하게 집행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 정도로 사람들이 지키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금연 구역을 정해 놓았지만 잘 지켜지지 않는 것 같다. 그 이유는 엄정한 단속이 있어야 하고 그에 따른 처벌이 따라야 하는데 단속 자체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이고 주변에 누가 흡연하다가 벌금을 내었다는 말을 들어 본적도 없다. 법은 있되, 집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법이 아니다.
< 윤선생 참 사진 못 찍는다. 포인트는 좀 더 왼쪽에 있는 아가씨인데 제일 중요한 건 놓치고 병풍들만 찍어 놓았다. >
식물원 안 카페가 있어 커피 2잔을 시켜 잔 2개를 더 달라고 해 4명이 나누어 참 구차하게 마시는데 옆에 삼베 같은 천의 옷을 입은 키 큰 서양인과 스리랑카 아가씨가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서양인은 머리가 허연, 나이가 한 65세 정도는 보이는데 아가씨는 스물한둘 정도로 앳되어 보일 뿐만 아니라 참 예쁘게도 생겼다. 둘의 관계가 부녀는 아닐 것 같으니 스승과 제자이거나 여행객과 가이드 정도의 관계 정도인 듯하다. 어쨌든 서양인은 능력자처럼 보여서 부러웠다. 적어도 그는 차 한 잔을 시켜 둘이 나누어 먹지는 않으니까. 나도 다음에는 혼자 여행을 와서 저런 가이드하고 다녀야 되겠다는 터무니없는 생각을 하여 스스로 찌찔이임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오면서 선물가게에 들러 안선생은 코끼리 3마리, 윤선생은 티셔츠, 정선생은 오리 등을 사고 바로 불치사로 갔다.
불치사는 석가모니의 진신 치아 사리를 모시고 있는 사원으로, 스리랑카에서 가장 성스러운 장소인 동시에 전 세계 불교 신자들의 순례지이기도 하다. 신성한 불치 사리는 석가모니 부처의 다비장을 치렀을 때 나온 왼쪽 송곳니로, 362년에 인도에서 스리랑카로 넘어온 뒤로 몇 차례 천도를 거쳐 캔디의 불치사의 모시게 되었다. 즉 수도를 옮기면 새 수도에 불치사를 세워 이를 모셨기 때문에 불치는 왕권의 상징이라 해도 되겠다. 불치사는 비말라다 르마수리야 1세가 다스리던 1600년 무렵 2층짜리 건물로 처음 세웠으나 원래의 건물은 흔적이 없고, 현재의 건물 형태는 18세기에 지은 것이다. 캔디호수 호반에 위치한 불치사는 붉은 기와를 얹은 건물이 호수와 어우러져 멋진 정취를 자아낸다. 실내는 수많은 불교 미술과 싱할라 전통 건축 양식으로 호화롭게 장식되어 있다. 불치사리는 사원의 맨 위층, 금과 갖가지 보석으로 만든 겹겹의 사리함 안에 소중히 모셔져 있으며, 사리함은 하루에 세번(04:30, 10:30, 18:30) 치르는 푸자(pooja) 의식 때 일반인들 앞에 선보인다.
< 불치사의 야경. >
캔디호수 옆에 위치한 불치사는 스리랑카 제일의 사찰답게 엄청났다. 마침 저녁 예불 시간이어서 북소리에 맞추러 의식이 진행되었고 우리는 사리함 주변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양을 드리는 것을 보았다. 밤이어서 제대로 구경을 하지 못하고 대리석 부처가 좌우로 앉아 있는 방에서 부처의 일생을 그린 회화를 보고 나왔는데 입장료가 1인당 1,000루피임을 생각하면 밤이 아닌 낮에 와서 찬찬히 살펴보는 게 좋을 듯 했다. 우린 정말 수박 겉핥기식으로 보고 나온 것 같다.
언덕의 중턱에 위치한 4성급 ‘세렌 그랑 호텔’(Serene Grand Hotel)에 도착해 check-in 후 호텔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는데 시간이 늦어 그런지 별다른 요리가 없어 피쉬커리 두 종류를 시켰다. 4성급 호텔의 6,220루피 짜리 음식치고는 별로여서 바가지를 쓴 느낌이었다. 그래서 내일부터 절대로 여기서 저녁식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 때 ‘차민다’가 우릴 찾아 와 내일 일정을 소화하려면 7시에 출발을 해야 하고 점심 먹을 곳이 없으니 자기가 호텔 주방에 부탁해 도시락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누와라엘리야’로 갔다가 거기서 32㎞ 떨어진 ‘호튼플레인 국립공원’ 트레킹을 하려면 아침 일찍 출발해도 호텔 도착이 밤 10시는 넘을 것 같아서 방에 모여 한잔을 하며 내일의 일정 중 ‘호튼플레인 국립공원’ 트레킹을 생략하기로 했다. 그래서 내일 아침은 역시 8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이번 일에서 우리는 ‘차민다’가 처음 생각했던 뒤통수치는, 나쁜 놈이 아니라 실제로는 매우 성실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고급 음식점에서 식사를 할 때 그는 우리보다 늘 값싼 음식을 시켰다. 아마 첫날 우리에게 20$짜리 투어를 권한 것도 여기까지 와서 빌라에 있지 말고 이것이라도 즐기라는 선의에서 한 행동일지 모르겠다. 그리고 여기에서 외국인 상대의 음식점은 대략 1인 1,000루피 정도였으니 ‘헝그리 라이언 레스토랑’에서 그리 바가지를 쓴 것도 아니었다.
♠제 7 일 (2015.12.29.화) : 누와라 엘리야를 향해.
아침 일찍 일어나니 세탁 욕구가 강하게 일어나 팬티 2장과 티셔츠 2장을 빨았다. 안선생도 심심한지 빨래를 했다. 양말은 처음 이틀을 제외하고는 계속 맨발로 다니니까 거의 빨래할 필요가 없었는데 티셔츠와 팬티는 날씨가 더워 땀을 흘리니 하루에 매일 빨랫감이 나왔다. 아침식사는 아제 저녁보다는 훨씬 괜찮았다. 그렇다고 커리가 나오지 않은 것은 아니고 – 커리는 어제 피쉬 커리에서 손을 들었다 - 나도 이제 빵으로도 식사를 대신할 정도로 커리에 지쳐 있었기에 나 스스로 빵에 적응하기로 한 것이다. 내 나이 60에 드디어 빵을 밥이나 국수 대용으로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커리의 엄청난 반작용으로 일어난 깨달음이었다.
이번 아침 식사에서 새롭게 등장을 한 부식이 있었으니, 정선생이 E-mart에서 구입한 '종갓집 김치'에서 만든 고들빼기김치였다. 짭짤하면서도 달달한 젓갈 맛이 지금까지 우리가 겪었던 모든 미각적 피로를 위로해 주었다. 들깻잎과는 같은 듯하면서도 다른 맛이어서 새로운 메뉴로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보통 여행을 다녀보면 부식 같은 것은 마지막에 많이 남는데 이번 여행은 모자랐다. 그만큼 이번 여행이 미각적으로 힘든 여행이라는 증거겠다.
누와라 엘리야는 스리랑카 중남부에 있는, 해발 1,889m의 산악 도시이다. 스리랑카에서 가장 높은 산 피두루탈라갈라(2,524m) 바로 남쪽에 있는 이 도시는 고원지대 특유의 서늘한 기후 덕분에 식민지 시절에 많은 영국인이 이곳에 별장을 짓고 살았다. 도시의 공공건물과 집, 거리, 공원 등이 빅토리아 양식의 영국풍이 주를 이루어서 마치 영국의 어느 시골에 와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런 분위기 때문에 이 도시는 ‘리틀 잉글랜드’ 라고도 불린다. 누와라 엘리야는 무엇보다 가장 좋은 맛의 차 재배지로 유명하다. 식민지 시대에 영국인들이 이곳에서 대규모 플랜테이션으로 차를 재배했으며, 지금도 스리랑카의 주요 차 재배 지역으로 손꼽힌다. 차 재배와 가공의 전 과정을 견학할 수 있다.(인터넷 참고)
말이 1,889m이지 산길이 장난이 아니다. 게다가 비까지 내려 운전은 더욱 힘들었다. 3시간 정도를 달려가니 제다(製茶)공장이 나오는데 안내하는 아줌마가 나와 영어로 각각의 공정을 설명해 주었다.
< 차가 만들어지는 공정을 나름대로 차근차근 설명하는데 가끔씩 모를 단어들도 있었다. 예를 들면 “덖다” 같은 단어를 영어로 이야기했는데 내가 차의 공정을 알고 있기에 이해할 수 있었지만, 영어 사전에서 ‘덖다’라는 단어는 찾지 못했다. >
차의 종류도 다양하여 여러 가지 약자로 표기하였는데 아마 글자가 많을수록 좋은 것 같았다. 선물용으로 티백 형식의 다섯 상자(5,000루피)와 집에서 먹을 것은 깡통에 든 것으로 1개(1,500루피)를 총 6,500루피를 주고 샀다.
< 휴게소에서 바라본 폭포. 3개가 있는데 여긴 2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 물을 이용해 수력발전을 한다고 한다. >
< Mackwoods 차 공장과 박물관이 있다. 몇 개의 산인지 모를 정도로 산 아래에서부터 산꼭대기까지, 그리고 그 다음 산도, 그 다음 산도 계속 차밭이다. 제주도의 오설록이나 보성 차밭은 여기에 비하면 차밭이라 명함 내어놓기가 부끄러울 정도로 그 규모가 엄청나다. 이렇게 넓으니 일일이 찻잎을 딸 엄청난 노동력이 필요했고 그래서 영국은 인도 타밀족을 싼 임금에 끌고 와 부려먹었겠지. 우리가 차를 타고 갈 때도 빗속에서 여자들이 찻잎을 따고 있었다. >
< 고개를 넘어 ‘누와라 엘리야’로 가는 도중, 길가의 상점들이 곳곳에 눈에 띈다. 아마 아내는 차밭에 찻잎을 따고 남편은 가게를 보는 모양이다. 식료품 가게가 있다가 또 꽃집이 몇 개씩 계속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는 고랭지여서 채소가게가 계속 보이고, 차민다도 여기서 5개월 된 아이와 아내를 위해 채소를 샀다. 여기 것이 싸고 맛이 좋단다. 우리는 그사이에 내리는 비에 다시 물을 더하고. >
채 1평도 되지 않을 가게에서 제법 대여섯 평 남짓한 점포까지, 비 오는데 여자아이 세 명이 채 5㎝도 되지 않을 것 같은 당근 5개 정도, 파 서너 뿌리, 그리고 무언지 모를 채소 서너 가지를 돌 위에 나름 진열해 놓고 파는 모습과 거대한 Mackwoods회사가 꾸며놓은 인위적 차밭, 수려한 자연 경관 속에 비루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인생. 창밖의 사람들은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경제적 노예처럼 느껴졌다. 원래 삶은 현실적 문제라서 그리도 팍팍한 것일까?
드디어 고개를 다 내려가니 시가지가 나타나고 경마장이 호숫가에 펼쳐져 있었다. 호수에는 모터보트도 다니고 오리배를 타고 뱃놀이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 캔디의 호수는 주변 산책로로 사람들이 다닐 뿐 물놀이하는 사람을 못 보았는데 여기서는 여러 가지 유람선과 식당선 같은 배도 눈에 띄었다. 호숫가에는 공원시설도 되어 있어 평일임에도 사람들이 많았다. 요즘은 7시에 아침을 먹어서인지 12시만 되면 점심시간이라고 누가 알려주는 것처럼 식당을 찾게 된다. 여행에서 기대만큼 불안한 것이 음식이다. 그래서 정말 신중을 기하고 여행 전 철저히 사전 조사해 가야하는 것이 맛집이다. 그러나 아직 맛집의 개념이 스리랑카에는 도입되지 않은 것 같다.
‘차민다’의 추천을 받아 – 추천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 - 그레고리 호숫가에 있는 ‘Calamander Lake Gregory’라는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일단 사람들이 제법 많다. 그리고 깨끗해 보이고 메뉴판이 제법 세월의 때가 묻어 있다. 메뉴를 아주 세밀하게 살펴보니 반가운 이름이 눈에 띈다. ‘나시고렝’, 우리 식으로 보면 볶음밥이니까 누가 하더라도 그리 실패할 음식은 아니다. 안선생과 윤선생은 첫날 저녁 콜롬보에서 먹었던 치킨 비리야니를 시켰다. 맥주 2병에 간을 해서 마시며 맛있게 먹었다.
< ‘치킨 비리야니’로 고수풀을 얹었고 위에 닭고기를 얹어 ‘나시고렝’보다 비싸다. >
< 인도네시아에서 자주 먹었던 나시고렝. 왼쪽에 있는 것은 잼처럼 단맛이 났다. 오른쪽 옆에 있는 것은 닭고기. 전체적으로 맛이 괜찮다. >
식사 후 빅토리아 공원으로 갔다. 빅토리아 공원은 오던 길로 돌아가 경마장 지나 조금 가니 있었다. 1인 300루피를 내고 들어가니 캔디의 ‘페라데니야 식물원’에는 못 따라 가지만 시내 중심가에 있어 이용하기가 좋다. 이리저리 산책을 하다가 나올 때가 되어 입구 쪽으로 오는데 갑자기 엄청난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쩔 수 없이 큰 나무 밑에서 비를 피하고 있는데 비는 언제 그칠지 알 수가 없다. 이때 저 멀리 누군가가 오고 있었는데 그건 우산 3개를 든 ‘차민다’였다. 마침내 ‘차민다’가 우리를 감동시키고 말았다. 원래 내일부터는 우리가 교통편까지 다 해결해 다니는 진정한 자유여행에 들어가 ‘차민다’는 오늘까지 계약이 끝나게 되어 있었다. 다시 고개를 넘어 오면서 일정을 조율해 콜롬보에서 보내는 1월 2일 ‘차민다’를 다시 하루 운전기사로 고용하기로 ‘알파 여행사’의 미스 김과 의논을 했더니 다행히 잘 해결이 되었다.
캔디 시내로 들어와 길가에 차를 주차 후 길 건너 전기구이 통닭을 두 마리 1,200루피를 주고 구입했으나 차들이 계속 이어지는 바람에 통닭을 사러간 안선생과 윤선생이 길을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웬 노인이 2루피를 달라고 해 주었더니 자기가 앞장서서 차를 막으며 길을 건너서 다행히 건너올 수 있었다. 스리랑카는 별의별 직업이 다 있을 수 있구나. 그리고 다시 와인 스토어에서 라이온 맥주 큰 것을 8개 1,600루피를 주고 샀다. 호텔에 도착 후 ‘차민다’와는 1월 2일 콜롬보 새피어 호텔에서 아침 8시에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방에서 상당히 큰 통닭 2마리와 남은 음식으로 저녁식사 겸 술 한잔을 했는데 남은 소주인 1.8L짜리 대포 한 발과 소주 0.4L 전부를 Lion beer large 6개에 말아서 다 해치우고 취침했다. 이로써 한국에서 가져온 소주는 완전히 끝이 났다. 내일부터는 증류주인 ‘아락’이나 ‘보드카’를 살 예정인데 일단 토속주인 ‘아락’을 먼저 맛보기로 했다. ‘아락’은 우리나라 안동소주와 혈통이 같은데 몽골제국에 의해 전 세계로 퍼진 술이다. 터키와 인도네시아에서도 ‘아락’이 있었다. 29일 밤 술자리에서 안선생은 조금 무리해 damage를 입은 듯하다.
♠제 8 일 (2015.12.30.수) : 캔디 시내 구경.
오늘은 캔디 시내 산책이니까 천천히 일어나도 되는데 몸이 그렇지 않아 5시 40분에 일어났다. 바깥이 소란스러운 듯해 커튼을 걷으니 베란다에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여러 명 와 있다. 뭔가 대접을 하고 싶었지만, 우리 먹을 것도 근근한 처지라 사진만 몇 장 찍어 주었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귀찮은 존재겠지만 이방인인 우리로서는 참으로 진객(珍客)이라 아니할 수 없다. 잔나비 띠인 나로서는 헤어졌던 사촌 여동생의 가족들을 만나는 듯 반가웠다. 게다가 내년은 병신년으로 이들의 해이니까 미리 축하해 주려고 왔나?
7시에 식사를 하고 9시 30분에 로비에서 만나 일정을 시작하기로 했다. 문제는 비가 내린다는 것이다. 건기라고 왔더니 날씨가 도와주질 않는다. 비가 오면 생각해야할 문제가 많이 생긴다. 그럴 때는 농담이 최고다. 이번에 회자(膾炙)된 명언들은 “볕 날 때 건초를 말려라.”, “물 들 때 배 띄워라.”, “Put, when opening.” 등이다.
< 아침마다 누가 머리를 빗겨주는지 머리스타일이 상당히 세련되어 보인다. 앞의 원숭이가 엄마이고 뒤에 두 마리는 새끼인데 오른쪽 녀석이 머리 모양으로 보아 애를 먹이게 생겼다. 사람이 오래 살다보면 원숭이 관상도 눈에 보인다.>
9시 30분 로비에 모여 10$을 주고 콜택시를 불러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툭툭이를 탔으면 2대 400루피로 해결되었는데 우리는 당시 아는 것이 없었다) 콜롬보 행 Luxury bus는 아침부터 30분 간격으로 출발하며 요금은 1인 285루피라는 값진 정보를 얻은 우리는 바로 옆에 있는 재래시장 구경을 하기로 했다. 채소 가게와 육류, 생선, 과일 등 시장 안은 살아 펄떡이는 생물처럼 요란하고 생기에 넘쳤다. 그러나 나는 시장에 온 목적이 있는 남자다. 반드시 목적을 달성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목적을 조용히 달성했다. 그 목적이 무엇인가는 당분간 비밀이다.
< 단호박과 여주도 보이고, 크고 작은 토마토, 가지 등이 보인다 >
안선생은 목에 거는 지갑을 샀고 마그네틱도 몇 개 샀다. 마그네틱은 가죽으로 된 것이어서 조금 스리랑카답다는 생각에서 살 생각을 했더니 아주 젊은 주인이 1개에 150루피라는 것이었다. 디스카운트라고 했더니 어쩌구 저쩌구하며 아주 선심을 쓰듯 7개 1,000루피라는 것이었다. 이때 내 눈에 한 마그네틱 뒷면에 100루피라고 적힌 것이 보였다. 바로 그걸 보여 주고 마그네틱 7개를 제 자리에 다 붙이니 자식이 당황하기 시작해 마그네틱 7개에 100루피 짜리 열쇠고리를 하나 더 주겠다고 했다. 단호하게 싫다고 했더니 7개에 700루피를 달라고 했다. 물론 더 깎을 수 있었지만 기다리는 사람도 있고 해서 700루피를 주었다. 난 아직도 스리랑카에서 정찰제라고 해서 산 물건이 정말 정찰제 가게에서 정당한 가격을 준 것인지 의문이 든다. 모르는 사이에 날씨가 화창하게 들어 이젠 더위를 걱정해야 했다.
< 번잡한 시장의 복판에 나 같이 이해타산을 따지는 사람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같은 정원과 분수를 만들어 두었다. 이런 게 스리랑카다운 것이다. >
시장 구경을 마치고 우리는 바로 근처에 있는 캔디 역으로 갔다. 다시 확인했지만 역시 콜롬보 행 기차표는 구할 수 없었다. 근처 은행에 가 공금 240달러를 루피로 환전한 후 높다란 곳에서 캔디 시내를 내려다보고 있어 전망대 구실도 한다는 ‘바히라와간다’절(Bahirawakanda temple)로 가기로 했다. 일단 ‘차민다’를 보냈으니 모든 교통수단은 스스로 해결해야 했기에 처음으로 툭툭이를 1대에 300루피를 주고 2대에 나누어 타보기로 했다. 오토바이 한 대에 3사람이 탄 셈이라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는데 힘이 달려 지그재그로 올라갔다. 게다가 매연이 그대로 들어오고 끼어들기, 앞지르기, 경음기 사용 등 툭툭이는 다른 사람이 타고 가는 것을 볼 때는 낭만적이며 서민적으로 보였는데 막상 내가 타보니 보기와는 딴판으로 엄청 힘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얼마나 잡았는지 모른다. 다 낡아빠진 툭툭이가 어제 뺀 듯한 벤츠에 50㎝ 간격을 두고 붙어 가는데 내가 간이 쫄깃쫄깃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툭툭이를 한 번 타고 나면 온 몸에 힘이 쏙 빠졌다.
< 1993년에 만들어진 이 불상는 높이가 88 feet라 하니 88 × 30.48㎝ = 2682.24㎝이니 약 27m 높이의 불상이다. 아파트의 경우 한 층의 높이가 2.7~2.8m 정도니까 대략 10층 높이의 불상이다. >
캔디 시내의 전망을 보기 위해 층계를 올라갔으나 마지막 부분은 자물쇠로 잠겨 있었다. 내 생각에는 부처의 뚫린 눈을 통해 보지 않을까 하며 내심 기대했는데 아쉬웠다. 그래도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하여 땀을 식히면서 눈 아래 펼쳐진 푸른 숲 사이의 캔디 호수와 그 옆의 불치사 등 많은 건물이 한눈에 들어와 기분이 좋아졌다.
< 보라, 우주의 빛을 다시 우주로 환원하는 겸손한 리사이클 型의 이마를. >
< 천사의 트럼펫이 일반적으로 흰색과 노란색을 봤는데 여긴 분홍색이다. >
절 밖으로 나와 불치사 입구에서 만나 불교박물관으로 가기로 하고 안선생과 나는 먼저 툭툭이를 타고 출발해 12월 28일 불치사로 들어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뒤차가 오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고 하늘에서 빗방울은 듣고 신경질이 나는데 중년이나 된 사내가 안선생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코리아’라고 하니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묻는 것이 들린다. 그리고는 ‘하이스쿨 티처’라고 말하는 것도 들렸다. 나는 삼거리에서 차가 오는 방향을 계속 보고 있었는데 뒤차는 여전히 오지 않았다. 나중에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물으니 한국에 자기 일자리를 구해 줄 수 없느냐고 하더라는 것이다. 아마 자기 눈에 안선생이 한국의 돈 많은 사장으로 보인 모양이다.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지만 어쨌든 딱한 일이다.
30분 넘게 기다려도 오질 않아 원래 가기로 한 불교박물관으로 가 보기로 했다. 일단 불치사로 들어가 표 파는 곳까지 가 봐도 없어 불교박물관을 물어 가던 중에 불교박물관 쪽에서 윤선생이 우릴 찾으러 오는 것이 보였다. 이야긴 즉 오다가 툭툭이가 고장이 나서 늦었고 기사가 다른 입구에 내려 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지 않으면 그저께 들어간 입구로 와야지 되지 않느냐고 타박을 주었다. 서로 잃어버리는 이런 일이 다반사로 생길 수 있으니 한 사람은 유심칩을 사든지 데이터를 사용하든지 간에 휴대폰을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는 생각을 했다. 구글 지도만이라도 볼 수 있으면 상당히 편리한데 몽땅 차단을 하고 다니니 이런 일이 생기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기다린다고 점심시간도 지나 시장했기에 얼른 근처의 식당으로 갔다. 나시고렝과 해물덮밥을 각 2개씩 주문했는데 해물덮밥은 지나치게 양도 많고 달아서 거의 1개는 손도 대지 않고 남겼다. 우리는 관습적으로 4명이면 4그릇을 주문하는데 여기서는 일단 다른 음식 3가지를 시켜 나누어 먹는 것이 옳을 듯했다. 만약 모자라면 그 때 그 중 제일 나은 것 하나를 추가하면 되는 것이다.
이때 옆 좌석에 운전사 겸 가이드 한 명을 대동해 남자 1명 여자 2명이 앉았다. 옷차림과 치장이 한국인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국말을 했다. 반갑게 인사를 하니 대전 사는데 부부와 부인의 친구라 했다. 그리고는 영어가 공용어라고 해서 핸드폰의 번역기를 믿고 왔는데 공항에서는 대강 되더니 그 이후로는 알아듣지를 못한다고 했다. 엄청 순진무구해서 용감한 분들이다. 그래서 일단 가이드와 의사소통이 안 되어 행선지 지시부터 문제라는 것이다. 마침 한국말을 하는 필리핀 친구가 스리랑카에 있어 그 친구에게 한국말로 하면 그 친구가 가이드에게 스리랑카식 영어로 지시하고 있다고 한다. 3자 통역으로라도 문제가 해결된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이 식당에서는 거스름돈인 300루피를 팁으로 바가지를 섰다. 우리는 외국인이라서 조심하지 않으면 바로 당한다. 특히 툭툭이.
불치사 뒤와 붙어 있는 국제 불교 박물관(International Buddhist Museum)에 1인당 500루피를 주고 마침 장(腸) 트러블이 생겨 화장실이 급한 윤선생을 두고 세 명이서 들어갔다. 신발도 벗고 모자도 벗고 엄숙한 마음으로 들어갔는데 웬걸 서양인 남녀가 구경하는데 여자는 허벅지가 다 드러난 반의 반(1/4)바지 차림이었다. 입구에 돈 받는 스님도 있었고, 입구를 지키는 사람도 있었는데 이들의 눈에는 이러한 차림이 보이지 않는 건지 아니면 500루피의 입장료가 이들의 눈을 잠시 멀게 한 건지, 16개국 대표로 참석한 부처들이 돌아앉을 차림새로 유유히 돌아다니는 서양 여성의 차림새는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박물관에는 한국, 중국, 일본, 인도, 캄보디아, 미얀마,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티베트 등 불교가 전파된 16개국에서 2009년 각각 부스를 설치한 후 자기 나라의 대표적 불교 사원이나 유적 등을 홍보하고 있었는데,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관은 상대적으로 매우 초라해 보였다. 물론 그것이 현재 한국 불교의 위상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늘 종단 내의 권력다툼으로 고기 비린내와 여성의 살 냄새와 게워 올린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불교계의 비리 때문에 이런 일에 신경을 쓸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건 아닐까? 이곳을 오게 된 불교 신자라면 내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한번 평가해 보기 바란다.
거의 한 시간 정도 관람을 한 후 밖으로 나오니 윤선생이 아까 박물관에서 본 서양인 남녀가 바깥에 나와 불상 옆에 붙어 서서 몇 분 동안의 진한 키스를 하다가 관리인에게 쫓겨났다고 전해 주었다. 갈비하라로 가다가 다리에서 본 원숭이보다 못한 인간들이다. 원숭이는 본능에 따랐지만 윤리적 관념과 인간이 살아가야 할 지표를 가르치는 불교적 유물을 보고 나와 부처상 옆에 붙어 서서 동물적 본능에 따르는 행동을 하다니! 이 인간들은 숙소에 들어 박혀 본능적 행위나 하고 있지, 왜 불교박물관까지 와서 물을 흐리고 있단 말인가?
박물관 입구를 지키는 사람아, 물 관리 좀 해라.
< 참 아름다운 천수관음상이라 사진을 찍고 보니 사진금지 표식이 보였다. 하지만 모조품이기에 문화재를 훼손한 건 아니겠지. >
< 펠리컨처럼 생긴 새 >
밖으로 나와 캔디호(湖) 산책길을 따라 걸었다. 호수 안에는 많은 물고기가 와글거리는 것이 보였는데 이 역시 ‘낚시 금지’라 보호하는 것이었다. 많은 오리와 나무 위의 박쥐를 보다가 펠리컨처럼 생긴 새를 보았는데 진짜 펠리컨이 맞는지 모르겠다. 호숫가를 돌다가 지쳐 커피라도 마시려 카페를 찾으니 없었다. 다시 불치사 쪽으로 걸어내려와 ‘Natural Coffee’라는 카페를 찾았다.
팸플릿을 보니 원래 스리랑카도 커피 산지였는데 갑자기 커피나무에 전염병이 돌아 다 죽어 버려 그 때 영국인이 차를 심기 시작해 실론티가 유명해졌다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시 커피를 심기 시작 해 요즘은 제법 커피가 생산된다는 것이었다. 스리랑카 산(産) 커피를 한 잔씩 시켜 넣고 정신을 차려 보니 오늘의 미인은 윤기 나는 까무잡잡한 피부색에 호리호리하면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카운터에 앉아 계산하는 아가씨이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가게였는데 윤선생이 일본말로 약간의 대화를 나누어 ‘Food City’라는 슈퍼마켓의 위치를 알아내었다. 가끔은 요긴한 윤선생의 회화 실력.
카페에서 750루피를 주고 커피를 각자 몇 개 구입을 하고 ‘Food City’라는 슈퍼마켓으로 갔다. 건과일, 토마토, 사발면 2개 등을 1,500루피에 구입 후 툭툭이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근처 빵집에서 남은 샌드위치 2개를 사와 맥주 2캔으로 저녁을 차렸다. 가져간 사발면 2개가 남아 있어 오늘 산 스리랑카 사발면 2개는 수프를 버리고 한국에서 가지고 간 수프를 넣으니 한국 맛이었다. 각자 샌드위치 1/2개에 사발면 하나, 그리고 윤선생이 가져온 즉석 북엇국을 끓여 저녁을 대신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스리랑카에 도착하자마자 중간 냄비 하나에 휴대용 가스레인지를 사서 가지고 다니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럼 시장에서 무엇이든 사서 식사든 안주든 만들어 먹을 수 있을 텐데.
오늘로서 캔디 관광은 끝이 났고 내일은 콜롬보까지 버스로 가 첫날 묵었던 새피어 호텔까지 가야 했기에 짐을 챙겨야 했다. 누와라 엘리야의 차 공장에서 산 홍차가 부피가 커서 나는 겨우 우겨 넣었으나 안선생은 가방이 작아 짐 꾸리기에 애를 먹다가 결국 보따리를 2개로 만들고서 9시경 취침했다.
< 2부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