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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 일시: 2016년 4월 3일 (일)
o 날씨: 약한 비
o 산행경로: 독립문역 - 인왕산 국사당 - 선바위 - 인왕산 - 창의문 - 북악산 - 청운대 - 숙정문 - 말바위 전망대 - 삼청공원
o 산행거리: 6.6km
o 소요시간: 3시간 20분
o 지역: 서울시 종로구
o 일행: 나홀로
o 산행정보: 인왕산
오늘 산행지는 조선 도읍지 선정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인왕산과 북악산이다.
인왕산은 서울시를 분지로 둘러싸고 있는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조선이 건국되고 도성을 세울 때, 북악산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을 좌청룡(左靑龍), 인왕산을 우백호(右白虎)로 삼았던 조선조의 명산이다. 산의 높이 338.2m이며 인왕산이라는 이름은 이곳에 인왕사(仁王寺)라는 불교사찰이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인왕산은 산 전체가 화강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바위, 해골바위, 모자바위, 돼지바위, 코끼리바위, 범바위, 매바위, 치마바위 등 기묘한 형상의 바위들이 많다. 봄에는 진달래가 만발하고 곳곳에 약수와 누대(樓臺)가 있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이를 배경으로 한 산수화가 많은데, 특히 정선의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와 강희언(姜熙彦)의 《인왕산도(仁王山圖)》 널리 알려져 있다.
일제강점기에 산 이름에 왕(王)자를 쓰지 못하고 인왕(仁旺)으로 고쳤다가, 1995년 와서야 인왕(仁王)이란 본래 이름을 되찾았다. 또한 청와대를 경호하는 군사적인 이유로 1968년 1월 21일출입이 통제되었다가 1993년 3월 25일 정오부터 개방되었다.
산행 출발지인 3호선 독립문역에 내리니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비 예보가 있어서 우산을 준비하지 못했는데....큰 비는 아닐 것이라 예상하며, 또 봄비를 맞는 것도 나름 나쁘지 않겠다(?) 싶어 무작정 인왕산으로 뛰어 들었다. 독립문역에서 아파트단지를 끼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니 무학공원과 인왕사 일주문이 보인다. 아파트 단지의 담장에 걸쳐 있는 벚꽃과 개나리꽃이 화사하다...
▼ 무학공원 (산행들머리)과 인왕사 일주문
[인왕사] 조선왕조실록에 태조가 인왕사에서 조생스님을 만났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조의 후원으로 늦어도 1397년에는 사찰이 창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창건주는 무학대사와 조생선사이며 매월 초하루 보름마다 내원당에서 법회를 올리고 강설은 호국인왕금강반야바마밀경을 설하였다고 한다. 세종때는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명칭을 인왕산이라 칭하고 사찰을 인왕사라 부르게 되었으나, 연산군때 궁궐이 보인다하여 복세암과 금강굴과 함께 인왕사도 폐사되었다. 그 후 복원되어 상당기간 유지되었으나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폐사지만 남게 되었다. 이후 1910년경 선바위를 중심으로 박선묵 거사가 선암정사를 지어 서옹, 탄옹, 자인, 대원 스님 등이 뒤를 이었으며 대원암, 보광전, 관음전, 극락전을 짓고 수도 정진하였다. 1942년에는 조계종 봉은사 말사로 편입되었고, 1977년에는 인왕사 내 5개 전각과 토지가 인왕사에 증여되어 1988년에 전통사찰 인왕사로 문광부에 재정드록되었다. 상고역사실록에 의하면 도선국사는 인왕산과 선바위가 왕기가 서리는 길지라고 하였다고 한다. 민족신앙의 대상이자 약 일억오천만년전 생성되었다고 추정되는 선바위는 천년을 이어온 한민족 정신의 뿌리로서, 기도 정진하는 자는 꼭 소원을 이룬다는 일명 '소원바위, 선바위'로 신앙의 대상이 되어왔다. (안내판)
무악공원을 지나면 몇개 사찰들이 보이고 그 사이로 길을 따라가면 국사당과 마주하게 된다. 인왕산은 고려시대부터 불교사찰이 많았던 곳이며 현재도 5~6곳의 사찰과 암자가 있다.
▼ 인왕산 국사당
[인왕산 국사당] 이 사당은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남산을 신격화한 목멱대왕(木覓大王)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이곳은 목멱신사로도 불렸다. 경대부는 물론 일반 백성도 이곳에서 제사를 지낼수 없었다. 이곳은 나중에 굿당으로 변하였는데, 현종 대 학자 이규경(1788~?)이 지은 <오주연문장전산고>란 책에는 국사당이란 명칭과 함께 현존하는 무신도의 기록이 있다. 국사당은 원래 남산 팔각정 자리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사람들이 조선신궁을 지으면서 1925년 지금 위치로 옮겨 지었다. 자연 암반위에 아담한 맞배집을 세웠다. 본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 이지만 옮긴 뒤에 양쪽에 한 칸씩을 첨가하여 5칸이 되었다. 이곳은 조선 후기 관청에 소속된 장인의 간결한 솜씨를 보여주는데, 명확한 건립 시기는 밝혀지지 않았다. 사당 안에는 중요민속자료 제17호로 지정된 무신도가 걸려 있는데 그 솜씨가 다른 무신도에 비해 뛰어나다. 지금도 이곳 국사당을 무대로 내림굿, 치병굿, 재수굿 같은 굿판이 벌어지고 있다. 국사당 뒤로는 무학대사 또는 태조 부부의 모습이란 전설이 깃든 선바위(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가 있고, 암자도 여럿 있어 명당 인왕산의 면모를 보여준다. (안내판)
국사당을 지나 언덕을 오르니 조망이 터지기 시작한다. 그 언덕위에 선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 선(禪)바위
[선바위] 이 바위는 아이를 갖기 원하는 부인들이 이곳에서 기도를 많이 하여 '기자암(祈子巖)' 이라고 불린다. 바위의 모습이 마치 스님이 장삼을 입고 있는 것처럼 보여 참선한다는 '선(禪)'자를 따서 선바위라고도 불린다. 이 바위가 태조와 무학대사의 상(像)이라는 설화와 태조부부의 상이라는 설화가 전한다. 일제가 남산에 있던 국사당을 이 바위 곁으로 옮긴 뒤부터는 이 바위와 국사당이 함께 무신을 모시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옛 문헌에는 조선 태조때 한양으로 천도할 무렵 선바위에 관한 설화가 전한다. 한양 도성을 쌓을 때 무학대사는 선바위를 도성안에 둘수 있게 설계하려 하였고 정도전은 성 밖에 두도록 설계하려 했었다고 한다. 정도전이 선바위를 도성안에 들이면 불교가 성하고 도성 밖에 두면 유교가 흥할 것이라고 태조를 설득하여 결국 도성 밖에 두었다는 것이다. 무학대사가 탄식하며 "이제부터 승도들은 선비들의 책 보따리나 지고 따라다닐 것이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왕산을 볼 때면 이 바위ㅏ 가장 눈에 띄는데 조선초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이 바위를 인상 깊게 보았다는 것이 이 설화에도 나타난다. (안내판)
선바위를 지나면 거칠지 않은 암릉을 따라 등산로가 이어지고, 곧 바로 산수유전망대와 해골바위를 마주하게 된다.
▼ 해골바위 밑에 핀 진달래
▼ 해골바위
인왕산에는 타포니(Tafoni)가 발달한 토르(Tor)가 많다. 주로 서울시 무악동 남쪽기슭 135m 고도에 위치한다. 인왕산의 토르는 주빙하 기후에 의해 화학적 풍화가 진행되어 생성된 것과 후빙기에 절리 발달에 따른 차별침식으로 생성된 것이 있다고 한다. 흔히 타포니는 토르와 관련되어 발달한 경우가 많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화강암 토르에서 관찰되는데 인왕산 또한 그에 해당한다. 토르에서 타포니가 발달한 부분은 다른 부위보다 풍화가 더욱 진전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백과사전)
해골바위에서는 무악재를 바라보니 노란 개나리가 온 산을 물들이고 있다.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를 더하니 꽤 괜찮은 풍경이다.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무악재 방향
해골바위를 올라서면 아래로는 선바위, 위로는 큰 바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는 얼굴바위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 해골바위에서 바라본 얼굴바위
해골바위를 지나서 모자바위 방향으로의 등산로는 없으며, 오른쪽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를 따라가면 모자바위 아래 큰 암벽에 새겨진 석불이 있다. 암릉사이에 핀 진달래와 개나리꽃이 한폭의 산수화를 방불케 한다.
▼ 모자바위 마애불(?)
모자바위 마애불을 지나 동쪽으로 더 걷다보면 몇개의 무속신앙터를 지난 후 사직공원 방향에서 올라오는 성곽길과 만나게 된다. 인왕산이 명당이라 그런지 사찰은 물론 무속신앙과 관련한 것들이 많이 보인다. 성곽길에서부터는 잘 정비된 돌계단이 인왕산으로 이어진다.
▼ 인왕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모습 (맨위가 범바위 기점)
성곽길의 동쪽의 청와대 방향은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 왼쪽을 바라보니 암릉위로 요상한 모습의 바위가 눈길을 끈다. 인터넷을 찾아보니 모자바위라고 한다. 엄마가 아들을 안고 있는 모습을 닯았서 붙여진 이름이다. 또 한편으로는 호랑이바위(?)라는 의견도 있다. 호랑이바위라 생각하고 다시 살펴보니 중국 호도협 아래에 설치되어 있는 호랑이像이 오버랩되기도 한다. 깊고 거친 호도협을 힘차게 건너뛰는 호랑이의 모습이....
▼ 母子바위
성곽길을 따라 올라가면 언덕위가 범바위 기점이다. 이곳에서는 인왕산은 물론 서울시내의 사방팔방 모습이 조망된다.
▼ 범바위 기점에서 내려다본 서울시내 (남산 방향)
▼ 범바위 기점에서 바라본 인왕산
인왕산 능선은 남북으로 길게 이어지는데 남쪽으로는 행촌동과 사직동이 있고 동쪽으로는 필운동, 누상동, 옥인동, 신교동, 청운동으로 이어지며 북쪽 산허리에 자하문 고개를 통해 북악산(北岳山)과 연결되는 인왕산길이 지난다. 서쪽으로는 서대문구 홍제동이 있다.
범바위 기점 바로 옆에 범바위가 있다. 듬직하게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라고 하는데....ㅎ
▼ 인왕산 방향에서 바라본 범바위
범바위를 지나 나무계단 아래로 내려서면 포근한 흙길이 얼마간 이어지다가 다시 인왕산을 오르는 돌계단이 나타난다. 오르막 입구에 있는 나무계단을 올라서니 오른쪽(남쪽) 방향에 우뚝솟은 바위 하나가 시선을 당긴다. 매바위라고 한다. 매의 모습을 닯은 것인지, 매가 사는 곳인지......
▼ 매바위
매바위를 뒤로 하고 오르막 돌계단이 계속된다. 거리가 얼마되지 않기 때문에 거친 숨소리도 부담이 없다.
▼ 인왕산 정상부에서 뒤돌아본 범바위 방향
언덕을 올라서면 인왕산 정상까지는 비교적 완만한 등산로가 이어진다. 일부 구간은 바위를 직접 쪼아서 돌계단을 만들었다. 인왕산 정상에는 삿갓바위가 정상석 역할을 하고 있다.
▼ 인왕산 정상
[인왕산] 경복궁 서쪽에 있는 인왕산은 조선시대 이래로 동쪽에 위치한 낙산,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남산, 그리고 북쪽의 북악산과 더불어서 도성을 지키는 산으로 꼽혀왔다. 인왕산을 달리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인왕산이 임금이 계신 궁궐의 오른쪽에 위치하고 있어서 ‘군주는 오른쪽에서 모신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경복궁을 지을 당시에는 도성의 주산을 인왕산으로 삼자는 무학대사와 북악산이 주산이라는 정도전의 주장이 맞섰다고 한다. 정도전은 예로부터 제왕이 남쪽을 향하여 다스렸지 동쪽을 향했다는 것은 들어보지 못했다는 논리를 지속적으로 펼쳤다. 결국엔 정도전의 주장대로 북악산을 주산으로 하고 경복궁이 들어섰지만 무학대사는 끝까지 반발하며 2백년 뒤에 가면 내가 옳았음을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도성을 세운지 2백년뒤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등 큰 변란이 끊임없이 일어났으니 무학대사의 주장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펌)
정상 봉우리에서 북쪽을 바라보니 치마바위와 그 뒤쪽으로 북한산의 모습이 흐릿하지만 장쾌하다.
▼ 인왕산 정상에서 바라본 기차바위(앞)와 북한산(뒤)
정상봉우리에서 철계단을 따라 내려서면 다시 성곽길과 만나고, 북악산 산행을 위해 창의문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 뒤돌아 올려다 본 인왕산과 치마바위
[치마바위 전설]조선 제10대 임금이었던 연산군의 폭정으로 중종반정이 일어났다. 박원종, 성희안 등이 주축이 된 반정이 성공하여 진성대군이 조선 제11대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니 이 분이 중종이다. 중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된 분이 단경왕후이니 이 분은 바로 연산군의 추종자였던 신수근의 딸이었다. 신수근은 중종반정의 반대세력으로 반정과정에서 역적으로 참살되었으니 왕후는 역적의 딸인셈이다. 반정공신들이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왕비를 그대로 존속시킨다면 자신들의 처지가 위태롭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사로이는 왕비의 친정아버지를 죽인 장본인들이 아닌가. 아무래도 후환이 두렵고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역적의 딸을 왕비로 삼을 수 없다는 공신들의 끈질긴 요구가 날마다 계속되었다. 결국 중종도 어쩔 수 없이 왕후 신씨를 폐위시켜 인왕산 밑에 있는 사가로 내보낼 수밖에 없었다. 왕후로 책봉된 지 불과 7일 만의 일이었다. 그러나 중종과 폐비 신씨는 10여년을 두터운 정으로 함께 살아온 부부가 아니던가. 그들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부부였기에 신하들의 강요에 못 이겨 헤어졌지만 그 정을 쉽게 지울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중종은 종종 경회루에 올라 폐비 신씨가 살고 있는 인왕산 쪽을 바라보곤 하였다는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폐비 신씨는 인왕산에 올라 병풍바위 밑에 있는 바위에 궁중에서 입던 치마를 걸쳐놓아 왕이 바라볼 수 있게 하였다고 한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신씨가 70세에 죽을때까지 51년동안 아침에 치마를 펼쳐 놓았다가 저녁이 되면 거둬들이면서 서로간의 사랑의 정을 주고 받았다고 하니 얼마나 애달픈 사랑이야기인가.... (펌)
창의문 방향의 등산로는 성곽을 따라 내려간다. 내려가는 길은 왼쪽으로 북한산과 평창동 일대가 그림처럼 다가온다. 고관대작과 부자들이 왜 북한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평창동에 모여드는지를 알것같다.
▼ 창의문으로 내려가면서 바라본 북한산과 평창동
성곽길을 따라 내려오면 청운동 등산로 입구로 이어지고, 청운공원을 거쳐 창의문으로 연결된다. 인왕산 등산거리는 대략 3km 정도이며, 천천히 역사와 자연과 서울시내의 조망을 즐길 수 있는 다시 오고싶은 곳이다.
▼ 청운동 등산로 입구 (인왕산 날머리)
창의문으로 가는 중간에 청운공원이 있으며, 청운공원안에는 윤동주 시인과 관련된 기념물이 많이 있다.
▼ 序詩亭 (서시정)
▼ 활짝 핀 청운공원옆 도로변 개나리
▼ 윤동주 시인의 언덕
윤동주 시인의 언덕을 지나면 눈앞으로 창의문이 다가온다.
▼ 진행방향으로 바라본 창의문 방향
창의문으로 가기 위해서는 성곽길을 내려선후 창의문앞 교차로를 건너야 한다.
▼ 창의문
[창의문] 서울성곽에는 동서남북에 4대문, 그 사이에 4소문을 두었는데 창의문은 서대문과 북대문 사의 북소문으로 '올바른 것을 드러나게 하다'는 뜻이 있다. 그러나 창의문은 북소문으로 불린 적은 없었고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 불려왔다. 태종 13년(1413)에는 풍수학자 최양선이 "창의문과 숙정문은 경복궁의 양팔과 같으므로 길을 내어 지맥을 상하게 해서는 안된다" 고 건의한 것을 받아들여 두 문을 닫고 소나무를 심어 통행을 금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세종 4년(1422)에는 군인들의 출입 통로로 이용할 수 있게 했고, 광해군 9년(1617)에는 궁궐 보수 작업때 석재의 운반을 위해 열어주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보면 당시에도 길 자체는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창의문이 서울성곽의 문루로서 제구실을 하게 되는 것은 영조 17년(1741) 이곳을 수출할 때였다. 당시 훈련대장 구성임이 "창의문은 인조반정(1623년)때 의군이 진입한 곳이니 성문을 개수하면서 문루를 건축함이 좋을 것" 이라고 건의한 것이 받아들여져 비로소 세워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1956년 창의문 보수 공사 때 천장 부재에서 묵서로 된 기록으로 확인되었고, 지금 창의문에는 인조반정 때 공신들의 이름을 새겨 놓은 현판이 걸려있다. 창의문의 형태는 전형적인 성곽 문루의 모습으로, 서울의 4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무엇보다도 수백년간 사람의 발길에 길들여진 박석이 윤기를 발하고 있다. 특히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으로 설치된 한쌍의 누혈(漏穴)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맵시있게 조각되어 이 성문의 건축 단장에 매력을 더해주고 있다. 그리고 성문의 무지개 모양 월단(月團) 맨 위에는 봉황 한쌍이 아름답게 새겨져 있는데, 속설에 의하면 이는 닭 모양을 그린 것으로 창의문 밖 지형이 지네처럼 생겼으므로 지네의 천적인 닭을 그려 넣은 것이라고 한다. (안내판)
창의문 바로 옆에 창의문 안내소가 있다. 여기서 신분증을 지참하고 방문 신청서를 작성한 후 방문증을 교부 받아야야만 북안산을 올라갈 수 있다. 방문가능 시간은 하절기(3~10월) : 09:00-16:00 / 동절기(11~2월) : 10:00-15:00 이고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 휴관) 은 방문이 불가능하다
▼ 창의문 안내소에서 북악산으로 올라가는 등산로 모습
북악산 정상으로 향하는 계단은 제법 가파르지만, 잘 정비된 나무계단이라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
▼ 뒤돌아본 등산로
[서울성곽]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지 한달도 못되어 한양 천도 계획을 명하고, 태조 4년(1395)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서울성곽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길이 59,500자(18.2km)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석성으로 계획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기을 농한기인 8,9월 49일 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는 동시에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서울성곽을 전면 石城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확장 사업을 벌였다. 세종 4년(1422) 1월 겨울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명 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고, 이 공사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 수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서울성곽의 골격이다. 이후 서울성곽을 재정비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간 서울성곽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본래 서울성곽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울성곽은 제구실을 하지 못해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성곽 자체는 전란으로 인한 큰 피해는 없었다. 임진왜란의 경험을 토대로 인조는 서울성곽과는 별도로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과 강도성(강화도 산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결국 굴복하고 청나라와의 삼전도 맹약 중에는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서 서울성곽은 방치된 상태로 놓아둘 수 밖에 없었다. 그 후 약 70년이 지난 1704년, 숙종은 일부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조약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서울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나아가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도성의 방어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것이 근대사회로 들어오면서 의도적으로 헐어내기 이전의 서울성곽이다. 이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 부설을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리며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길이 18.2km 중 산지 성곽 10.5km만 남게 되었다. 2006년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서울성곽을 가능한 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그 정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안내판)
왼쪽으로 보이는 북한산이 기분을 한층 업시켜 준다. 비봉능선 중간에 사모바위도 보이고, 그 위쪽으로 문수봉, 의상능선..... 북한산은 언제 어디서 보아도 명산의 면모를 보여준다.
▼ 북한산 능선 (비봉능선, 의상능선, 문수봉....)
▼ 쉼터도 지니고.....
쉼터를 지나 다시 가파르게 계단을 오르니 오른쪽이 북악산 정상이다. 정상에는 백악산이라 새겨진 정상석이 있다. 산아래 청와대 방향으로의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등산로 중간 중간에 군인(?)들이 등산객들의 행동을 감시(?)하고 있다.
▼ 북악산 정상
[백악산] 백악산은 조선시대에 한양을 도읍으로 전할 때 主山으로 삼았던 산인데 현재는 북악산으로 불린다. 조선 건국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도시를 새로 구성하였는데, 우뚝 솟은 백악산을 북쪽의 주산으로 삼아 배경이 되게 하였고, 지금의 남산인 목멱산을 안산(案山)으로 두어 남쪽 경계로 삼았다. 동쪽의 낙산이 좌청룡, 서쪽의 인왕산이 우백호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주산인 백악산 아래에 경복궁을 짓고 이를 기준으로 하여 한양 도성 계획을 세웠다. 곡 백악산은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의 도성을 계획할 때 중심이 되었다. 문화재 명칭을 백악산으로 한 것은 조선시대 도성 축성의 의미를 되살리고, 조선시대의 각종 사료에 나타나는 "백악(白岳)"의 지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서울성곽(사적 제10호)과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명승 제36호)등이 있는 백악산 일원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안내판)
▼ 북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남산 방향
북악산 정상을 내려오면 바로 아래에 1.21사태의 소나무가 당시의 사건을 일깨워준다.
▼ 1.21사태 소나무
[1.21사태 소나무]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김신조 등 31명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타운(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과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 중 현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흔적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21사태 소나무'라 부르고 있다. 무장공비 일당은 당시 청와대 및 주변시설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침투간 아군복장과 민간복 착용, 취객으로 위장하는 등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도발을 자행하였다. 1월 21일 교전후 14일간 작전 결과 침투한 31명중 1명 도주, 29명 사살, 1명 생포(김신조)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68.4.1) 되었다. (안내판)
1.21사태 소나무를 지나 얼마간 내려가면 청운대가 나온다.
▼ 청운대
청운대는 제법 넓찍한 공터에 쉴수 있는 벤치도 마련되어 있다. 여기에는 진달래와 개나리 대신 활짝 핀 목련꽃이 산객들의 피로를 씻어준다.
▼ 청운대에 활짝 핀 목련화
청운대에서는 성곽 안쪽이 현재 보수중이라 잠시 성곽 밖으로 나갔다가 아래쪽 다시 성곽 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 청운대에서 바라본 북한산 방향
성곽길을 따라 걷는데 한무리 사람들이 모여있어 살펴보니, 해설사가 북악산과 성곽에 관하여 자세하게 설명을 해주고 있다. 다음번에는 가족과 함께 이런 시간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사를 좋아하시는 어머니를 한번 모시고 올 수 있으면 좋으련만......팔순의 노구를 업어서라도.....
성곽길을 걷노라니 과거의 역사속으로 들어온 듯한 기분이다. 북악스카이웨이와 숙정문 방향의 갈림길에서 숙정문 방향으로 우틀하여 얼마간 내려가니 성곽과 어우러진 숙정문이 자태를 드러낸다.
▼ 숙정문
[숙정문] 숙정문은 서울성곽의 북대문으로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예를 숭상한다'는 뜻)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 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태조 5년(1396) 처음 서울성곽을 쌓을 때는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옮겨졌다고 한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성곽 동서남북에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어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가뭄이 심할 떄는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아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종16년(1416)에 기우절목(기우제 시행규칙)을 만들면서 북쪽은 陰, 남쪽은 陽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처럼 숙정문 지역은 풍수지리적으로 음기가 강한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 에는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을 면할 수 있다" 는 풍속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사고' 라는 저서에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시 문을 닫아두게 했다"는 정반대의 속설을 전하고 있다. 숙정문은 오랫동안 문루가 없어 월단(무지개 모양의 석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 일대 서울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안내판)
숙정문 일대는 '소나무보호군락지' 로서 수많은 노송들이 서식하고 있다. 뜨거운 도시의 열기를 식혀주는 시원하고 상쾌한 곳이다.
▼ 소나무보호군락지
성곽과 어우러진 소나무와 그곳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한폭의 그림이다. 다시 얼마간 내려오면 왼쪽으로 삼청각과 성북동 마을의 모습이 시원하게 조망된다.
▼ 내려다본 삼청각
삼청각은 우리나라 3대 요정 중의 하나였는데, 지금은 전통공연, 문화체험 등의 공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그때 그시절에는 둘도 없는 권세가들을 주무르던 곳인데....세상은 세월따라 흐르고 또 변하는 것이다.
성북동 마을은 현재에도 정치가, 기업가, 배우 등 유명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답게 품격있는 대저택의 모습이 많이 보인다.
▼ 내려다본 성북동 마을 방향
바로 아래에 말바위 안내소가 있다. 방문증을 반납하고....
▼ 말바위 안내소
말바위 안내소를 조금 내려오면 말바위 전망대에 도착하게 된다. 말바위 전망대에서는 북악스카이웨와 성북동 마을, 그리고 그 뒤로 정릉 방향의 조망이 좋다. 오늘은 부슬부슬 내리는 봄비가 주인공이다.......
▼ 전망대에서 바라본 북악스카이웨이(왼쪽) 방향
이곳에서는 와룡공원과 삼청공원 방향의 갈림길이다. 3호선 지하철을 타야 하기 때문에 삼청공원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삼청공원 방향으로 약간 내려가면 오른쪽으로 서울시내를 시원하게 조망할 수 있는 조망명소가 있다.
▼ 조망명소에서 바라본 서울시내
▼ 조망명소에서 바라본 인왕산(중간)과 북악산(우측)
조명명소를 지나면 깨끗하게 정비된 등산로(말바위 등산로)를 따라 삼청공원까지 내려가게 된다.
▼ 삼청공원으로 내려가는 등산로 (말바위 등산로) 모습
▼ 말바위 등산로에 핀 진달래
▼ 말바위 등산로 입구
말바위 등산로 입구를 나서면 좌우로 임도같은 길이 이어진다. 아무방향으로 가더라도 만날 듯.... 삼청공원 후문 쪽을 방향을 잡고 내려가니 작은 계곡속에 자그마한 정자가 하나 보인다. 영무정이라고 한다.
▼ 영무정
영무정 앞의 큰 바위에 "영무정 사계'라는 詩가 새겨져 있다.
"영무정 주변에서 도락이 이루어지고 군현들이 운집하니 사계절 형통하네 온화한 봄 절벽에는 진달래꽃 만발하고 한여름 폭포에는 물방울이 시원쿠나 아름다운 금수단풍 시흥에 취해보고 새하얀 설경때는 속정에서 깨어나네 삼청공원 비경속에 그대와 나 함께하니 이곳을 찾는 이는 영원토록 영화하리"
영무정 바로 옆이 삼청공원 후문이다. 이것으로 인왕산과 북악산 연계산행이 종료되었다. 인왕산과 마찬가지로 북악산도 약 3km 내외의 비교적 짧은 산행거리지만 역사와 자연과 문화를 느낄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 삼청공원 후문 모습
삼청공원 후문에서 정문쪽으로 향하는 길에는 벚꽃과 개나리가 삼청공원의 정취를 더해준다.
▼ 고목에 핀 벚꽃
▼ 삼청공원 정문
삼청공원 정문에서 삼청로를 따라 내려오니 마실나온 인파가 엄청나다. 안국역으로 이어지는 북촌마을 길도 마찬가지.... 역사와 현대가 함께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