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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안] 차식[車軾]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유몽인(柳夢寅)| 신도비 및 묘갈6-조,,최,채,
차식[車軾]의 신도비명(神道碑銘) -유몽인(柳夢寅)
동진(東晉) 대원(大元) 무렵에 차씨(車氏) 성(姓)에 제능(濟能)이란 이름을 가진 분이 신라(新羅) 미추왕(味鄒王)을 섬겨 승상(丞相)이 되었다. 정지상(鄭知常)이 저술한 ≪서경야사(西京野史)≫에, “제능은 유루(劉累)의 후손이다. 기자(箕子)가 동래할 때 네 부족과 같이 왔는데, 제능의 선조가 바로 그중의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로 등국(登國)ㆍ은보(殷甫)ㆍ연광(延廣)ㆍ휘만(徽曼)ㆍ지(知)ㆍ온백(溫伯)ㆍ순(楯)ㆍ엄(渰)ㆍ누한(婁漢)ㆍ순계(盾堦)ㆍ단식(段式)ㆍ헌(憲)ㆍ도강(渡康)ㆍ검부(儉夫)ㆍ건신(建申)이 있었고, 승상 승색(承穡), 사공(司空) 공숙(恭叔)에 이르기까지 18세가 전해졌는데, 14세가 승상을 지냈으니, 대대로 혁혁하여 문벌이 융성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다.
헌덕왕(憲德王) 김언승(金彦昇)이 임금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자 승색의 부자가 은밀히 나라의 원수를 갚으려고 꾀하다가 탄로가 나 고구려 빙주(俜州)로 도망가 숨어살며 그의 할아버지 검부(儉夫) 아내의 성을 따라 양(楊)을 유(柳)로 바꾸어 승색은 유환(柳桓)이라 부르고 공숙은 유숙(柳淑)이라 불렀다. 이때부터 5세를 지나 효전(孝全)에 이르러 고려 태조가 남쪽의 정벌에 나설 때 수레를 준비하여 군량(軍糧)을 공급하는 등 그 공로가 매우 컸으므로 효전의 옛날 성인 차씨를 회복한 다음 연안(延安)으로 관향을 삼고 식읍(食邑)으로 천호(千戶)를 받았으며 대광백(大匡伯)에 봉해졌다.
차효전이 태보(太保) 차수비(車秀毗)를 낳고, 차수비가 광평 시랑(廣評侍郞) 차계린(車季隣)를 낳고, 차계린이 내사(內史) 차용기(車用杞)를 낳고, 차용기가 시어 중승(侍御中丞) 차백소(車伯炤)를 낳고, 차백소가 평장(平章) 차무동(車茂銅)을 낳고, 차무동이 서평백(西平伯) 차계한(車稽漢)을 낳고, 차계한이 빙주백(俜州伯) 차자순(車子順)을 낳고, 차자순이 간의(諫議) 차유개(車幼塏)를 낳고, 차유개가 삼한 대장(三韓大將) 차중규(車仲規)를 낳고, 차중규가 태복시사(太僕寺事) 차거수(車擧首)를 낳고, 차거수가 병부 시랑(兵部侍郞) 차약춘(車若椿)과 승상(丞相) 차약송(車若松)을 낳았다. 차약춘의 아들 차덕위(車德威)는 우군 병마사(右軍兵馬使)를 지내고, 차덕위의 아들 차척(車倜)은 참정(參政)을 지내고, 차척의 아들 차수아(車受阿)는 낭장(郞將)을 지내고, 차수아의 아들 차송우(車松祐)는 중흥백(中興伯)에 봉해졌다.
차송우가 현종조(顯宗朝)에 최충헌(崔忠獻)의 손자 최의(崔誼)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위사 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었으므로 그가 사는 현(縣)을 복주(復州)로 승격시켰다. 그리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적을 토벌한 공로가 있어 특별히 제기(祭器)를 하사하였는데, 그의 나이 1백 7세 때 간신(奸臣) 임연(林衍)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후사(後嗣) 차득규(車得珪)는 도총제(都摠制)의 벼슬을 하고, 차포온(車蒲溫)은 승상의 벼슬을 하고, 차종로(車宗老)는 지방어(知防禦)의 벼슬을 하고, 차원부(車原頫)는 간의(諫議)의 벼슬을 하였다. 간의 차원부는 고려 말엽에 조정에서 물러나 평산(平山) 수은동(水雲洞)에서 숨어살았다. 그때 요동(遼東)을 정벌하자는 의논이 제기되어 우리 강헌 대왕(康獻大王)이 걱정한 나머지 공정 대왕(恭定大王)과 같이 편복(便服) 차림으로 차원부를 찾아가 그 의논의 전말에 대해 이야기하자, 차원부가 의리를 들어 정벌이 불가하다고 극력 말하니, 강헌 대왕이 의롭게 여기어 그렇게 하겠다고 승낙하고 나서 떠났다. 그 뒤 강헌 대왕이 나라를 세우고 공신을 책봉할 때 차원부가 극력 사양하기를, “우리 가문이 대대로 고려를 섬긴 지 이미 5백 년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왼쪽 옆구리에 금 비늘이 달린 저 혼미한 임금이 여전히 살아있는데, 어떻게 감히 두 가지 마음을 품어 우리 조상들의 충렬(忠烈)을 무너뜨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강헌 대왕이 한양(漢陽)에다 도읍을 정한 다음에 차원부를 옛날 친구의 관계로 불러 궁중에서 묵게 하였는데, 그때 마침 비가 내렸다. 강헌 대왕이 차원부의 손을 붙잡고 동원(東苑)으로 나가 소매 속에서 파씨 몇 되를 꺼내 풀 사이에 뿌리면서 말하기를 “옛날 내가 서촌(西村)에 사는 그대를 찾아갔을 때 오후가 되어 매우 배가 고파 그대의 마당에 자란 파나물을 배불리 실컷 먹었다. 지금 내가 손수 이 파를 심어 나의 친구로 하여금 머물러 먹게 하려고 하니, 이는 옛날의 뜻을 잊지 않은 것이다.”고 하였는데, 지금의 서총대(瑞蔥臺)가 바로 그곳이다.
어느 날 강헌 대왕이 또 차원부와 더불어 후원(後苑)으로 나가 주위의 사람들을 물리고 왕위를 이양하는 일에 대해 말하니, 차원부가 매우 놀라며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당 태조(唐太祖)와 송 태조(宋太祖)의 고사를 보지 않았습니까? 어찌하여 이런 말씀을 꺼내십니까? 일찍 이럴 줄 알았으면 죽어도 감히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였다. 강헌 대왕이 말하기를, “내가 공을 위하여 고치도록 하겠오.” 하였다. 차원부가 이로 인해 극력 떠나려고 하니, 강헌 대왕도 감히 만류하지 못하였다.
그때 권신(權臣)인 하윤(河崙)ㆍ정도전(鄭道傳)ㆍ함부림(咸傅霖)ㆍ조영규(趙英珪) 등은 모두 차씨 가문의 서얼(庶孼) 출신이었는데, 차원부가 족보에다 사실대로 기록하였다. 이로 인해 이 네 사람들이 이를 갈고 있다가 틈을 타 참소하기를, “차원부는 역적 정몽주(鄭夢周)의 외종형제(外從兄弟)이기 때문에 나와서 개국(開國)을 돕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의 큰아들은 원비(元妃)의 종조(從祖) 항열이므로 장차 태제(太弟)에게 이롭지 못할 것입니다.” 하고, 가병(家兵)을 거느리고 송경(松京)으로 가 차원부를 죽이고 그의 가족 81명도 모두 살해하니, 그의 아들 중랑장(中郞將) 차안경(車安卿)은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 뒤에 공정 대왕(恭定大王)은 그 억울한 사실을 살피어 찬성(贊成)의 벼슬을 추증하였고, 혜장 대왕(惠莊大王)은 교지를 내려 그의 자손을 등용하였으며, 공순 대왕(恭順大王)에 이르러 유신(儒臣) 박팽년(朴彭年)에게 명하여 ≪설원기(雪冤記)≫를 편찬하였다.
간의의 부자가 무고하게 죽은 뒤로 그의 어린 아이 차상의(車尙義)는 달아나 목숨을 부지했고 차상의의 아들 차보인(車寶仁)은 동서남북으로 떠돌며 연명을 하였다. 차보인의 아들 차계성(車繼成)이 떠돌아다니다가 고향으로 돌아와 비로소 무예를 닦아 호군(護軍)이 되었지만 호군은 한산한 벼슬이었고, 차계성의 아들 차광운(車廣運)이 경전(經典)을 익혀 누차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떨어지고 향리의 선발로 인해 교수(敎授)가 되었으나 교수는 녹봉이 박한 벼슬이었으니,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삼한(三韓)의 큰 성씨가 여기에 이르러 극도로 쇠퇴하였다.
교수가 철원(鐵原) 최지(崔漬)의 딸에게 장가들어 정덕(正德) 정축년(丁丑年, 1517년 중종 12년) 9월 26일에 공을 낳았다. 공의 휘(諱)는 식(軾)이고 자(字)는 경숙(敬叔)이다. 공이 태어나자 총명하여 10세에 시서(詩書)를 외웠다.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 선생에게 글을 배워 경전(經傳)과 사서(史書)를 꿰뚫었고 또 문장을 아름답게 잘 지어 동료보다 뛰어났다. 그리하여 약관(弱冠)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가정(嘉靖) 정유년(丁酉年, 1537년 중종 32년)에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하고, 계묘년(癸卯年, 1543년 중종 38년)에 문과(文科)의 갑과(甲科)에 제2등으로 급제하여 관례에 따라 내섬시 직장(內贍寺直長)에 임명되었다.
역임한 관직은 내직으로 성균관(成均館)ㆍ호조(戶曹)ㆍ봉상시(奉常寺)ㆍ교서관(校書館)ㆍ승문원(承文院) 등 여러 부서의 좌랑(佐郞)ㆍ주부(主簿)ㆍ교리(校理)ㆍ교감(校勘)의 벼슬을 하였으며, 외직으로 통진(通津)ㆍ황주(黃州)ㆍ해주(海州)ㆍ평해(平海)ㆍ고성(高城) 등 여러 고을의 현감(縣監)ㆍ군수(郡守)의 벼슬을 하였다. 그리고 여덟 번 전적(典籍)을 하고 다섯 번 직강(直講)을 하였으며 세 번 판관(判官)을 하였다. 조정에 나가 벼슬한 지 30여 년 만에 벼슬이 겨우 4품밖에 안 되었으나 마음가짐이 담담하여 하위에 침체된 것을 개의치 않았다. 공이 고을을 다스릴 때 자상하고 간이하며 관대하였으므로 아전과 백성이 친애하였다. 고성(髙城)을 다스릴 때 공적이 있었는데, 관찰사가 보고하자 임금이 특별히 옷감의 안팎감을 하사하였다.
공은 평생 동안 가정 살림의 유무를 묻지 않고 오직 서가에 있는 수천 권의 책만 마주 대하여 낮부터 밤까지 보면서 스스로 즐거워하였다. 후진들을 게을리 하지 않고 가르쳐 사는 곳마다 성취시킨 인재가 많았다. 산수의 경치가 좋은 고을에 부임하여 한가롭게 즐기었다. 고성(高城)은 신선의 고을이었다. 아름다운 곳을 얻어 작은 정자를 지어놓고 해산정(海山亭)으로 호칭하였는데, 사람들이 영동(嶺東)의 누대 중에 경관이 제일 좋다고 일컬었다. 만력(萬曆) 갑진년(甲辰年, 1544년 중종 39년)에 평해(平海)로 나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는데, 평해 역시 신선의 경관이었다. 그런데 상중(喪中)에서 막 기복되어 문서를 처리하기에 불안하였기 때문에 그 이듬해 2월 11일에 병환이 나 향년 59세로 군(郡)에서 세상을 떠났다.
공이 저술한 문집이 56권이었는데, 전란의 불길 속에 유실되어 다만 몇 편만 수습되었으니, 애석하다. 공이 성년(成年)이 되었을 때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인정을 받고 더욱더 문학을 갈고 닦아 이때부터 당세에 이름이 드러났다. 공이 과거에 합격하였을 때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과 같은 방(榜)이었다. 소재는 문원(文苑)의 철장(哲匠)이었는데, 입에 침이 마르도록 공의 문장을 추켜세웠다. 직강(直講)이 되었을 때 선비 강문우(姜文佑)란 사람이 문장에 능하였으나 서얼(庶孼) 출신이었기 때문에 과거를 볼 수 없었다. 국법에 서얼이 과거를 보려면 반드시 먼저 추천장(推薦狀)을 제출해야만 사관(四館)에서 과거를 보도록 허여하였다. 그런데 중세부터 그 법이 폐단이 생겨 선비들이 더러 남의 서명을 모사하였다. 강문우가 그의 이름을 바꾸고 전적(典籍) 안해(安海) 및 공의 서명을 모사하였다. 안해가 그것을 알고 언관(言官)에게 말하려고 하니, 공이 말하기를, “강문우가 지난해에 과거에서 삭제되었는데, 금년에 또 과거에서 삭제한다면 좋지 않다. 내가 차라리 벌을 받더라도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겠다.”고 하였으나, 안해가 문제를 제기하여 강문우를 과거에서 삭제하여 금고(禁錮)시켜버렸다. 그 이듬해 안해가 눈병이 나 앞을 보지 못하게 되자 매양 ‘공의 덕은 따라갈 수 없다.’고 감탄하였다.
공이 일찍이 공정 대왕(恭靖大王) 원침(園寢)의 전사관(典祀官)으로 차출되었다. 공정 대왕이 왕위에 있은 지 겨우 몇 년이 되어 세제(世弟)인 공정 대왕(恭定大王)에게 왕위를 전수하였으므로 세대가 이미 멀어지자 한식(寒食)에만 제사를 지냈으나 제수가 정결하지 않았다. 공이 특별히 정성을 기울여 재계하여 몸을 깨끗이 하고 또 제수를 장만하는 사람과 사당을 지키는 노복으로 하여금 자신처럼 깨끗이 씻도록 하였는가 하면 밥을 짓는 쌀과 주찬(酒饌)을 하나도 빠짐없이 몸소 점검하였다. 제사가 끝났을 때 날이 새지 않아 재계하는 방으로 돌아가 잠시 졸고 있었는데, 어떤 궁인(宮人)이 명을 전달하기를, “전하(殿下)께서 정전(正殿)에 납시어 차식(車軾)을 보려고 합니다.”고 하였다. 공이 관복(冠服)을 입고 탑전(榻前)에 나아가 엎드리니, 임금이 말씀하기를 “지난날에는 제사를 맡은 관리들이 관례만 따라 하여 제사에 정성이 없었고 또 제물이 정결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대는 정성과 제례를 다하여 여러 가지 음식을 다 먹을 수 있으므로 내가 가상히 여기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그대의 어머니가 병이 있다고 하기에 내가 좋은 약을 주니, 알도록 하라.”고 하였다. 그때 공의 어머니가 송도(松都)에 있었는데, 대하증(帶下症)을 매우 심하게 앓았으나 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공이 돌아가는 길에 큰 수리 두 마리가 큰 물고기 하나를 빼앗으려고 중천에서 빙빙 돌다가 그 물고기를 말 앞에다 떨어뜨렸다. 그것은 바로 한 자 남짓한 뱀장어였는데, 뱀장어는 대하증에 가장 좋은 약이었다. 공이 가지고 돌아가 어머니에게 해드리니, 병이 곧바로 나았다.
공의 부인 이씨(李氏)는 관향이 아주(牙州)인데, 습독(習讀) 이계원(李繼元)의 딸이자 만호(萬戶) 이순명(李順命)의 손녀이다. 부덕(婦德)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가문이 화기애애하였다. 공보다 18년 뒤에 세상을 떠나 장단(長湍) 백룡산(白龍山) 선영 묘좌 유향(卯坐酉向)의 자리에다 합장(合葬)하였다.
5남 3녀를 낳았다. 큰아들 차은로(車殷輅)는 관례를 하기 전에 일찍 죽었고, 둘째 아들 차금로(車金輅)는 족형(族兄)인 첨사(僉使) 차희여(車希呂)의 후사가 되었으며, 셋째 아들 차천로(車天輅)는 정축년(丁丑年, 1577년 선조 10년) 문과에 급제하여 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이 되었고, 넷째 아들 차운로(車雲輅)는 계미년(癸未年, 1583년 선조 16년) 문과에 장원하여 그 또한 봉상시 첨정이 되었다. 차천로와 차운로가 모두 원종 공신(元從功臣)에 책록되어 공에게는 예조 참판(禮曹參判)이 부인에게는 정부인(貞夫人)이 추증되었다. 다섯째 아들은 차하로(車夏輅)이다. 큰딸은 내금위(內禁衛) 전득춘(田得春)에게 시집가고, 둘째 딸은 장응봉(張應鳳)에게 시집갔으며, 셋째 딸은 충의위(忠義衛) 이여춘(李汝春)에게 시집갔다. 차천로는 왕실 금천정(錦川正)의 딸에게 장가들어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차전곤(車轉坤)이고 딸은 어리다. 차운로는 왕실 고산령(高山令)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차심극(車深極)이고 둘째 아들은 차혼극(車渾極)이며 셋째 아들은 차연극(車淵極)이고 딸은 어리다. 차은로는 이를 갈 무렵에 기이한 재주가 있어 문인(文人) 최입(崔岦)ㆍ이산해(李山海)ㆍ고경명(高敬命) 등과 이름이 나란히 나 세상에서 팔문장(八文章)으로 일컬어졌다. 그런데 14세에 향시(鄕試)에 합격하고 17세에 병으로 죽었다. 병이 극도에 이르렀을 때 푸른 옷을 입은 동자가 자리 위에 서서 말하기를, “천상에서 새로 백옥루(白玉樓)를 지어놓고 너를 불러 ‘백옥루 기문’을 지으려고 한다.”고 하니, 차은로가 사양하기를, “내가 태어나 나이 스물이 안 되어 부모의 은덕을 갚지 못하였다. 그대가 나를 위해 상제(上帝)에게 청하여 나를 수십 년만 더 살게 해주어 효도를 끝마치게 한다면 죽어도 한이 없겠다.” 하였다. 그 동자가 가더니 오래 있다가 다시 와서 말하기를, “천상에 그대를 대신해 ‘백옥루 기문’을 지을 사람이 별로 없어서 상제가 나의 말을 윤허해 주지 않으니, 네가 빨리 가야겠다.” 하였다. 그날 밤 부모가 꾼 꿈도 똑같았다. 차은로가 죽을 무렵에 단정히 앉아 결별하기를, “불행하게도 일찍 죽어 결국 우리 부모를 저버리게 되었습니다. 마땅히 상제에게 호소하여 7일 있다가 다시 와 곁에서 모시겠습니다.” 하고, 말을 끝마치자마자 죽었다. 그 뒤 죽은 지 7일이 되어 차천로가 태어났는데, 그의 얼굴이 매우 빼닮았다. 공이 세상을 떠난 날 밤에 차천로가 곡하다가 혼절하여 쓰러졌는데, 공이 도포 차림에 홀(笏)을 들고 평상에 걸터앉아 말하기를, “이리 오너라. 천로와 운로야! 내가 저승에 갔더니, 주벽(主壁)의 대관(大官)이 책상을 짚고 큰 소리로 말하기를, ‘네가 왜 문장을 두 아이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부질없이 가지고 여기에 왔단 말인가? 빨리 가서 나누어주라.’고 하기에 잠시 왔다.” 하고, 이어 옥처럼 해맑고 소반처럼 큰 물건을 품속에서 꺼내어 보이며 ‘이것이 문장이다.’고 말하면서 두 쪽으로 쪼개어 형제에게 주니, 형제가 꿇어앉아 받아가지고 엎드려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차천로가 이내 깨어났는데, 그의 문장이 강하(江河)처럼 풍부하고 운금(雲錦)처럼 찬란하여 경각간에 천만 마디의 말을 쏟아냈으므로 비록 수십 명이 받아쓰더라도 미처 따라 쓰지 못하였는가 하면 한 번 쓴 다음에는 고치지 않았으나 갈수록 더욱더 기이하였다. 차운로는 ≪주역(周易)≫을 전공하여 상당히 깊이 통달하였으며 글을 지을 적에 초안을 잡지 않은 채 종이를 펴놓고 곧바로 쓰되, 마치 번개가 휩쓸고 바람이 몰아가듯이 하였으나 모두 웅장하고 실질적이었다.
만력(萬曆) 을묘년(乙卯年, 1615년 광해군 7년) 3월 초하루에 일식이 있었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조진(趙振)이 측후(測候)하고 나서 말하기를, “이날 규성(奎星)의 분야에서 일식을 하였다. 옛날에 규성의 분야에서 일식을 하면 문장의 선비가 반드시 죽었다. 사영운(謝靈運)과 범엽(范曄)이 죽은 것도 이 재앙에 응한 것이다. 지금 들은 바에 의하면 첨정(僉正) 차천로의 병이 위독하다고 하니, 이 재앙에 응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그 뒤 얼마 안 되어 차천로가 과연 죽었다.
아! 공이 세상을 떠난 지 이미 45년이 되었다. 그의 두 아들은 모두 당세의 문장 대가였으니, 그들과 왕래하면서 사문(斯文)으로 서로 허여한 사람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므로 그의 선친을 위해 묘소를 치장하려면 의당 문장을 최고로 잘한 사람을 택하여 해야 할 것인데, 굳이 나 유몽인(柳夢寅)의 졸렬한 말을 기다린 것은 무엇 때문인가? 지금 그의 형이 비록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 아우의 눈이 더욱더 크니, 내가 어찌 감히 경솔하게 작은 무당의 말을 하여 큰 무당의 비웃음거리를 만들 수 있겠는가? 한 가지 애석한 것은 헌원(軒轅)의 성씨로 용을 길들이던 그 후예가 기자(箕子)를 따라 동방으로 건너와 상하 수천 년 사이에 승상의 벼슬을 하기를 마치 지푸라기를 줍듯이 하였다가 말엽에 이르러 화란(禍亂)이 거듭 닥친 바람에 그의 자손들이 곤궁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저 낮은 가문 작은 지파로 어(魚) 자(字)와 노(魯) 자도 분변하지 못하는 자들은 오히려 휘황찬란한 관복을 입고 일세에 영화를 뽐내고 있는데, 저처럼 큰 문벌의 뛰어난 재주로 백관의 밑에서 움츠리고 있다가 끝내 높은 거리에서 힘껏 달려보지 못하고 말았으니, 이는 인재(人才)가 천공(天工)을 탈취하면 조물주의 시기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의당 선행을 하려는 자가 게을러질 것이다. 이내 본말을 자세히 서술하고 나서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가문의 내려온 세대가 아득하니 소전1)(小典)의 후예였도다. 유웅(有熊)에서 비롯되니 황제(黃帝)가 탄생했도다.2) 우(虞)나라 이상은 모두 다 도당씨(陶唐氏)였지만, 하(夏)나라에서는 어룡씨(御龍氏)가 되었고 상(商)나라에서는 시위씨(豕韋氏)가 되었도다. 이렇게 그 계통이 일정치 않다가 기자(箕子)가 제후에 봉해졌을 때 도당씨 가문의 장손이 따라왔도다. 시조 차공(車公)은 동진(東晋)에서 비롯되었고 신라와 고려를 이어오는 동안 모두 20개의 종파(宗派)가 되었도다. 중세(中世)에 유씨(柳氏)로 변했다가 5세를 내려와 옛날의 성씨로 되돌아갔도다. 대대로 충성을 지켜오다가 거듭 재앙을 만나니 가문의 운수가 뒤틀려 떠돌아다니며 정착하지 못하였도다. 옛날의 고을에 이르니 바로 천마산(天摩山)이었도다. 성거산(聖居山)과 나란히 있으니 가파르게 울쑥불쑥하며, 험준하고 우뚝하게 솟아 숭궐(崧闕)을 내려다 보며 진압했도다. 뒤에 있는 강의 큰 파도는 낙하(洛河)의 근원과 통했도다. 가없이 질펀하니 물결이 넘실넘실 서해의 바다로 흘러들어가도다. 왕씨(王氏)의 고려가 망하니 인걸이 모두 다 없어졌도다. 지령(地靈)이 응결되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도다. 영정(英精)이 꿈틀거리니 광채가 뭉치었도다. 쉬지 않고 터지니 예지(叡智)와 문명(文明)이 발로되었도다. 공이 이때에 탄생하니 문장이 고상하고 화려했도다. 번뇌를 크게 깨뜨려버리니 순수하게 천연으로 이루어졌도다. 그렇지만 하위의 관직에서 맴도니 본래의 마음이 괴로웠도다. 가슴에 안고 지하로 들어가 버렸으니 그 누가 그 쌓인 포부를 꺼내단 말인가? 하늘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내가 그대를 외롭게 하지 않으리라. 그대가 얽매여 산 것을 가련히 여겨 그대에게 여유로운 보답을 하리로다. 두 개의 구슬이 영롱하니 그 영기가 찬란하도다. 지위를 갖지 않고도 형통하니 공(公)도 아니고 경(卿)도 아니었도다. 자운(子雲, 한(漢)나라의 문장가 양웅(揚雄))은 문하의 생도이고 상여(相如, 한(漢)나라의 문장가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막상막하였도다. 기운3)(機雲)도 개미처럼 납작 엎드렸고 파영4)(坡穎)도 포복하며 감히 견주지 못하였도다. 백룡(白龍)의 언덕에 묘소가 있는데, 비석이 우뚝 서 있도다. 내가 지은 글이 아부에서 나오지 않았으니 천추토록 치우치지 않을 것이로다.
각주 1) 소전(小典) : 고대의 제왕인데, 유교씨(有蟜氏)에게 장가들어 황제(黃帝)와 염제(炎帝)를 낳았음. 2) 유웅(有熊)은 고대의 나라 이름이다. 황제 헌원씨(黃帝軒轅氏)는 본래 유웅국(有熊國) 임금인 소전의 아들임. 3) 기운(機雲) : 진(晉)나라 육기(陸機)와 육운(陸雲) 형제로 아울러 일컬은 것인데, 걸출한 형제의 비유로 사용한 것임. 4) 파영(坡潁) : 소식(蘇軾)의 호는 동파거사(東坡居士)이고, 그의 아우 소철(蘇轍)의 호는 영빈유로(潁濱遺老)이므로 그들의 형제를 지칭할 때 파영이라고 하는데, 이 역시 걸출한 형제의 비유로 쓴 것임. 贈禮曹參判行平海郡守車公 軾 神道碑銘 竝序
粵在東晉大元中。而有姓車名濟能者。事新羅味鄒王爲丞相。鄭知常西京野史稱濟能劉累之後。箕子來東。以四族俱。濟能之先卽其一也。其後有登國有殷甫有延廣有徽曼有知有溫伯有楯有渰有婁漢有盾堦有段式有憲有渡康有儉夫有建申。至丞相承穡司空恭叔凡傳十八葉。爲丞相者十四世也。其奕世茂閥可想。憲德王彦昇弑君自立。承穡父子陰圖報國讐。事露竄匿高句麗俜州。蒙其祖儉夫妻姓變楊爲柳。承穡稱柳桓。恭叔稱柳淑。自此傳五世至孝全。當麗祖南征。辦車乘餫軍餉。功甚鉅。復孝全舊姓爲車。因籍延安。食邑千戶。封大匡伯。孝全生太保秀毗。秀毗生廣評侍郞季隣。季隣生內史用杞。用杞生侍御中丞伯炤。伯炤生平章茂銅。茂銅生西平伯稽。稽生俜州伯子順。子順生諫議幼塏。幼塏生三韓大將仲規。仲規生太僕寺事擧首。寔生若椿。兵部侍郞。若松丞相。若椿之子德威爲右軍兵馬使。德威之子倜爲參政。倜之子受阿爲郞將。受阿之子松祐封中興伯。顯宗朝平崔忠獻之孫誼之亂。錄衛社功。升所居縣爲復州。入元朝討賊有勳。特賜祭器。年一百七歲。爲奸臣林行所害。其似續有曰得珪。官都摠制。曰蒲溫。官丞相。曰宗老。官知防禦。曰原頫。官諫議。諫議於麗末退隱平山水雲洞。時犯遼議起。我康獻大王憂之。與恭定大王便衣訪原頫。語其顚委。原頫擧義理力言其不可。康獻大王義之。諾而去。曁開國將策勳。原頫力辭曰。家世仕麗朝已五百年。況左脅金鱗。彼昏尙在。何敢二心。衊我先人忠烈耶。曁康獻大王定都漢陽。以故舊召之。至則舍諸禁中。會天雨。上携原頫手歩出東苑。袖撥蔥種數升。散之草間曰。昔子訪子西村。日晏飢甚。飫子場葱。今手種此。欲留我故人以食之。所以志舊意也。今之瑞蔥臺。卽其地。一日。又與之後苑。辟左右。語及輪傳宗社事。原頫大驚曰。殿下獨不見唐宋兩祖乎。若之何發此言。早知如此。死不敢來。上曰。吾爲公改之。因力求去。上亦不敢留。時權臣河崙鄭道傳咸傅霖趙英珪皆車門孼出也。原頫直書諸族譜。四人厲牙。抵巇讒之曰。原頫以逆賊鄭夢周外從兄弟。不來佐命。且以冢嗣元妃從祖行。將不利於太弟。率家兵殺原頫於松京。夷其屬八十一人。其子中郞將安卿自縊死。厥後恭定大王察其冤。追贈贊成。惠莊大王降旨錄用子孫。至恭順大王朝。命儒臣朴彭年撰雪冤記。自諫議父子死不辜。稚兒尙義逃竄延喘。尙義子寶仁。東西南北於糊口。寶仁子繼成。流徙還故都。始業武爲護軍。散職也。繼成子廣運習經籍。屢擧不勝。因鄕選爲敎授。冷官也。數千載三韓大姓。至此而替極矣。敎授娶鐵原崔漬女。以正德丁丑九月二十六日生公。公諱軾。字敬叔。生聰明。十歲誦詩書。受學於花潭徐先生敬德所。貫通經史。又能美詞翰。絶異疇類。弱冠魁鄕解。嘉靖丁酉。捷進士。癸卯。登文科甲科第二。例授內贍寺直長。其歷官也。內之成均,戶曹,奉常,校書,承文諸司。爲佐郞,主簿,校理,校勘等官。外之通津,黃州,海州,平海,高城諸邑。爲縣監,郡守等官。八爲典籍。五爲直講。三爲判官。立朝三十餘年。官才四品。處懷恬如。不以淪滯芥意。其莅邑。慈祥簡寬。吏民親愛之。治髙城有勣。因方伯褒啓。特賞以表裏。平生不問生産有無。只對架書數千卷。晷繼膏以自娛。訓後進不懈。所居多成才。出宰山水。蕭散怡愉。高城。仙郡也。得佳處起小亭。號海山亭。人稱嶺東樓觀第一。萬曆甲戌。求補平海。平海亦仙境也。以其纔起草土。不安簿領。明年二月十一日。病卒于郡。享年五十九。公所著文集五六卷。失於兵火。所收拾秪若干篇。惜也。公結髮。見知遇於金慕齋安國。益掞文擩學。自此著名當世。其登第。與盧蘇齋守愼聯榜。蘇齋。文苑哲匠也。推引公詞章喋喋不離口。其爲直講也。有士子姜文佑者能文章。以庶孼錮其擧。國法應擧者。必受先進薦狀。四館許其科。中世法弊。士子或摸之。文佑變其名。模典籍安海及公名署。海知之。欲告言官。公曰。文佑往年削其科。今年又削之不祥。吾寧受辜。有不忍也。海發之。削文佑科錮之。明年海目疾喪明。每歎公之德不可及。公嘗差典祀官。祀恭靖大王園寢。恭靖大王在位纔數年。傳位于世弟恭定大王。世代已遠。只祭寒食而庶羞不蠲。公別致誠虔。齋沐潔身。又令膳夫祠僕湯洗如己。修粢盛酒饌。無不躬視。祭罷夜未艾。歸齋房假寢。有宮人傳呼曰。殿下御正殿。引見軾。公冠服陞伏榻下。王若曰。向者祀官。只循故常。饗不恪。又不涓潔。今爾盡誠禮。庶品皆可御。予用嘉之。聞爾母有疾。予賜爾良藥識之。時太夫人在松都。患帶下之疾苦甚。藥不效。歸路見兩大鼶爭一大魚。盤中天。墮之馬前。卽鰻鱧也。其大尺餘。鰻鱧。帶症上藥也。公歸以奉太夫人。病立愈。夫人李氏系出牙州。習讀繼元之女。萬戶順命之孫。婦德完備。閨門雍睦。後公十八年而歿。合葬于長湍白龍山先塋。其原卯坐酉向。生五男三女。長曰殷輅。未冠而夭。次曰金輅。爲族兄僉使希呂之後。次曰天輅。丁丑文科。奉常寺僉正。次曰雲輅。癸未文科壯元。亦僉正奉常寺。以天輅,雲輅竝錄原從勳。贈公禮曹參判。妣貞夫人。次曰夏輅。長女適內禁衛田得春。次適張應鳳。次適忠義衛李汝春。天輅娶宗室錦川正女。生一男一女。男曰轉坤。女幼。雲輅娶宗室高山令女。生三男。深極,渾極,淵極。女二人幼。殷輅髫齕有奇才。與文人崔岦,李山海,高敬命等齊名。世稱八文章。十四魁鄕擧。十七病死。疾極。有靑衣童子立于席上曰。天上新建白玉樓。招汝作記。殷輅辭曰。生年未二十。未報父母恩德。若爲我請上帝丐我數十年。俾得終孝。死無恨矣。惎童子去。久而復來曰。天上別無人可替汝記者。上帝不余頷。汝其速行。是夜。父母之夢亦同。臨歿端坐與訣曰。不幸夭折。終負吾父母。當訢上帝。七日還來侍側。言訖而歿。死後七日。天輅生。其面目極肖。公沒之夜。天輅哭泣昏仆。髣髴見公袍笏踞床曰。來。天輅雲輅。我往冥府。主壁大官據案厲聲曰。汝何不以文章分與兩兒。空持到此。可速往分之。吾故暫來也。仍出懷中一物。瑩然如玉。大如盤者曰。此乃文章也。手劈爲兩段。分與兄弟。跪受俯伏。因忽不見。天輅遂蘇。天輅文章如江河滂沛。雲錦煒燁。晷刻之間。注筆千萬言。雖數十手不及寫。一下筆。不加點竄。愈益奇。雲輅攻易。頗通蘊奧。其爲文不起藁。展纸立寫。揮洒如電掃風驅。而皆雄偉着實。萬曆乙卯年三月朔。日有食之。開城留守趙振候之曰。是日也日食于奎之分。古者日食于奎之分。文章之士必殞。謝靈運范曄之死。亦應是災。今聞僉正車天輅病革。得無應是災乎。未幾。天輅果卒。嗚呼。公之歿已四十五載。其二子皆當世詞宗。其所與往返。以斯文相與者凡幾何人耶。爲先人賁其墓道。宜擇文章之最高絶者。而必待夢寅拙辭者何也。今者其兄雖已逝。其弟之眼眶尤大。夢寅何敢輕發小巫之言。貽大巫捧腹乎。獨惜乎軒轅之姓。擾龍之裔。隨箕子而東。上下數千年。取台鼎如拾芥。而至季葉禍亂荐臻。以致子孫迋邅。彼卑門小派不辨魚魯之夫。猶煒煌金紫。矜耀於一世。以如許巨閥雄才。帖耳於百僚之底。卒不能騁力高衢。豈夫人才奪天工。爲造物所忌剋者非耶。宜夫爲善者怠也。遂備敍其本標。係以爲之銘。銘曰。 遼哉家世。小典之裔。權輿有熊。誕降黃帝。自虞以上。叶戾良反 氏是陶唐。夏爲御龍。豕韋於商。厥系不常。箕子受封。唐胄來從。鼻祖車公。肇晉之東。于羅于麗。俱二十宗。中世變柳。五傳復舊。忠貞世守。荐罹殃咎。家運蹠盭。絜絜靡屆。故邑是戾。天摩之山。與聖居匹。㠥峗嶱嵑。㠑巋嶻嶭。俯壓松闕。后江洪波。通源洛河。澎濞滉漾。滀溚漭泱。入于西洋。王氏覆軫。人傑殪殄。地靈鬱愍。悠久不泯。蚡蝹英精。癰疣光晶。潰決不停。敷發濬明。公於是生。高文麗藻。大破懊惱。亹然天造。一命潦倒。拂刺素心。卷懷入地。疇拔蘊抱。上天曰吁。非我汝孤。憐汝拘拘。報汝紆餘。雙璧瑛瑛。有燁其英。不位而亨。非公非卿。子雲門生。相如難見。機雲螘伏。坡穎蒲服。不敢與京。白龍之坡。斧堂嵯嵯。貞珉有峨。我文不阿。千秋不頗。 |
출처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 낙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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