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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흐마니노프 피아노협주곡 제 2악장 모데라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누군가가 원고지 4장 분량의 글 좀 써달라고 부탁하면서 생긴 ‘어마무시한’ 사건 하나. ‘우리가 인문학을 해야 할 까닭’ 한 마디로 ‘너희가 인문학 맛을 알어?’라는 뜬금없는 주제.
문사철, 내 전문도 아니다. 더 괘꽝스런 건 하루 안에 써줬으면 좋겠네 한다. 척하면 척 써내는 재주를 가지고 있는 줄 아나? 지금까지 내가 써온 글, 내가 다 알고 있어서 쓴 게 아니다. 내가 알파고도 아니고…. 쓰면서 배우는 것이 더 많다.
솔직히, 칼럼 한 꼭지 쓰려면 적어도 책 몇 권 정도의 자료는 들춰봐야 한다. 그래서 읽는 대로 나중에 써먹을 요량으로 짬짬이 메모하는 버릇이 있다. 허나 막상 그것 찾아내는 데도 시간과 노력이 만만찮게 든다. 별로 특출하지 않은 내 기억력도 한몫하지만 그것도 재확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금 연재하고 있는 ‘중국사’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모아놓고 읽은 책도 50권이 넘는다. 원고를 완성하고도 세 번 이상은 확인하고 수정해야 한다.
영화도 그러하다. 못본 것은 유트브에서 해결한다. 단돈 천원으로.
이렇게 징징거렸더니, 다짜고짜 그렇다면 내 글을 짜깁기라 폄하하시네. 쯥, 어떤 글쟁이가 자료 없이 글을 쓰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란 없다. 글쟁이가 하는 일은 기본 텍스트를 확인하고 목적에 맞게 정리하여 뼈대를 만든 다음 창의성을 보태는 일이다. 픽션도 그렇다. 해리포터도 북유럽신화에서 나왔다. 속절없다. 알아 달라고 보채봐야 나만 초라해지니 그만 한다.
오늘이 단오端午네. 창포 우린 물에 머리를 감았다는…. 단端은 처음, 오午는 5[五] 즉 다섯과 뜻이 통하므로 5월 초닷새라는 뜻. 음양학에서 이르기를 기수奇數(홀수)를 양陽, 우수偶數(짝수)를 음陰으로 치는데, 기수가 겹쳐 생기가 넘쳐나는 3월 삼짇날, 5월 단오, 7월 칠석, 9월 중양절 그 중에서도 단오를 일년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했다.
음양학은 『주역周易』에서 파생된 학문이다. 본디 전설의 삼황 중 한 분인 복희씨伏羲氏가 만든 경전이라지? 주역은 주周나라시대의 역易이란 뜻. 복희씨의 원전을 바탕으로 주문왕과 주공 단이 완성했다하여 ‘주周’자가 붙었다. 역易은? ‘변화’다. 따라서 주역이란 시시각각 변화하는 우주와 인간사의 원리를 집대성, 변화에 대처하도록 만든 자료다. 유가에서는『역경易經』이라 했다. ‘경전’ 즉 성현이 지은, 또는 성현의 언행을 적은 성스런 책이란 말씀이다.
단오라 하면 딱 떠오르는 사람이 있네. 나처럼 자기 좀 알아 달라 주구장창 보채던 이. 전국시대 초나라 정치인이자 대시인이었던 굴원屈原이시다. 수많은 나라가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다가 스러져갔던 전국시대, 대부분 작은 키 재던 도토리들이었고 진秦 · 초楚 · 제齊 세 나라가 주도권 쌈을 했던 시대.
전국말기가 되자 초楚의 힘이 좀 달렸다. 어려워지면 말들이 많아진다. 정치인들이 친진親秦파와 친제親齊파로 갈리어 서로 제 옳고 남 그르다 시비한다. 고려말에도 친명親明파와 친원親元파로 갈리어 혼란스럽게 하지 않았었나? 구한말에도 그랬다. 친러파, 친일파, 친청파 등등, 나라와 백성을 위해? 순진하신 생각. 제 몸 보신을 위해서였다.
굴원은 친제파. 근본 없이 힘만 센 진나라와 어울리느니 강태공을 시조로 한 제나라와 친하게 지내자고 주장한 개혁자. 친진파들은 수구세력이었다. 강력하게 개혁정책을 내세워 한때 주도권을 잡았었지만, 정치는 생물이다. 납작 엎드려 있던 친진 수구파들이 다시 상황을 역전시켰다. 굴원의 기댈 곳 임금(회왕)이 힘을 잃었다. 결국 친진파들의 모략에 의해 양쯔강 남쪽 지금의 후난성[湖南省] 창사[長沙] 북쪽 동정호洞庭湖 상류 멱라수汨羅水로 쫓겨나고 만다.
굴원은 변방에서도 열심히 상소문을 올린다. 전하 신 굴원 정말 억울하옵니다. 엮여도 너무 엮였습니다. 허나 신은 여전히 전하를 사랑하오며… 그러니 통촉하시옵고…, 어쩌고 저쩌고… 줄기차게 억울함을 호소해 봤으나 결과는 달밤에 개 짓는 소리라.
참 답답한 양반! 어디 정치 한두 해 해보셨나? 정치판이 어디 정의와 합리성에 의해 움직이나? 힘의 논리에 따라 흘러가지 않나? 구구절절 하소연해봐야 이미 그 사랑하는 임금님은 이빨 빠진 호랑이다. 허나 임금의 답이 없다고 중단할 굴원이 아니다. 전보다 더 간절히 그리고 버전까지 바꾸어 글을 썼으니 중국인들이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받드는 장편 시 <이소離騷>다.
그러고도 모자라 애먼 마을 어부 하나 붙잡고 징징댔던 일화를 시로 옮겼으니 그 유명한 <어부사漁父詞>가 되시겠다. 지나가는 죄 없는 어부 하나 붙들어 앉히고 주고받았던 이야긴데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나 이건 이래서 안 되고 저건 저래서 안 된다고 바른 말 하다가 결국 임금한테 팽 당했수.”
“…안됐네유.”
“이놈의 나라에는 인물이 없어요. 개탄스러운 건 날 알아주는 사람도 없더이다. 세상이 온통 흐린데 나만 깨끗하고, 다들 취해 있는데 나만 깨어 있으니….”
“그랬구먼유, 차라리 그 흙탕물로 큰 파도를 이뤄보지 그러셨슈?”
네 생각이 옳다고 생각했다면, 가란다고 갈 것이 아니라 거기서 피터지게 싸워보지 그랬냐는 핀잔이다.
“예끼 여보슈. 선비라면 적어도 관이나 옷을 걸칠 때 먼지를 떨어내고 입는 법. 이 내 청결한 몸에 그런 더러운 옷을 입으란 말이오? 차라리 상강湘江에 몸을 던져 물고기 밥이 되고 말지.”
“참 잘나셨네유.”
‘답정너’. 이미 답은 정해져 있으니 너는 딴죽 걸지 말고 내 말에 맞장구나 치라는 굴원. 그게 무슨 대화인가? 차라리 말이나 걸지 말든가, 듣고 있자니 어부 귀에 딱지가 생길 노릇. 참다 참다 결국 한 마디로 아프게 대꾸하시는데 참으로 명언이라.
“긍게. 내 말인즉슨 창랑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흐리거들랑 발을 씻으면 된잖냔 말유.”
내 주장이 아무리 옳더라도 이미 대세는 기울어졌으니 ‘불뚝골’만 내고 있을 게 아니라, 인정할 건 인정하고 후일이나 도모하라는 말씀 아니신가? 아! 이게 몸으로 부딪치면서 세상사 원리를 터득하신 이름 없는 어부의 내공이다. 생각이 있는 자라면 엄청 쪽팔렸을 법. 얼마 지나지 않아 굴원은 멱라수에 몸을 던져 기구한 생을 마감했다.
‘회재불우懷才不遇’라. 세상을 다스릴 재주를 가졌음에도 자신의 재주를 알아주는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당나라 때 시인 왕유王維는 이런 상황에서 무기력과 좌절, 분노와 외로움으로 힘들어하는 마음을 ‘무료불평無聊不平’이라 하여 과거에 낙방한 친구를 위로했다. 아무튼 충정심이 아니라 쪽팔림과 무료불평이 굴원을 극단적 선택으로 내몰았으리라는 게 내 삐딱한 시선이다.
아직도 굴원이 ‘세상에서 가장 답답한 시인’이라는 내 생각을 바꿀 생각이 없다. 내 사정 알아달라는 하소연에 답이 없다 하여 목숨을 버려서야 되겠는가. 좀 더 유연했어야 옳았다. 훗날을 기약하며 웅크릴 줄 알아야 했었다. 명장 한신도 저잣거리에서 장돌뱅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지 않았나?
중국에서 이런 내 시각으로 굴원을 평가했다가는 제 명命 유지하지 힘들다. 나라와 주군에 대한 충성심의 아이콘으로 무려 2천년 이상 받들어 모셔온 것이 중국인들이다. 임금에 대한 사모의 정을 절절하게 나타내면서 자신의 결백함을 호소했던 시 <이소離騷>를 <이소경離騷經>으로 이름하여 경전으로 떠받드는 정도다.
굴원의 충성심을 기리는 중국인들의 마음은 이뿐 아니다. 자결한 음력 5월 5일 단오절端午節을 그를 추모하는 제일祭日로 정했다. 용머리를 장식한 배를 타고 북을 치면서 노젓기 경주를 벌이는 용선경도龍船競渡도 당시 굴원의 시신을 훼손치 못하도록 북을 쳐서 물고기가 쫓던 퍼포먼스에서 유래했다.
멱라수(지금의 멱수汨水) 강가에는 그의 무덤과 함께 사당이 세워져 지금도 그의 애국충절을 기린다. 작년 후난TV와 프로그램 계약관계로 장사에 출장 갔다가 짬 내어 굴원의 묘지를 방문한 적이 있다. 처음 낙화암 보고 실망했던 기억이 절로 소록소록, 이름만 거창했지 참 볼 것 없더구먼. 허나 그건 내 생각이고, 굴원 사당 앞에는 현지인들이 향을 피우기 위해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중국인들의 대단한 애국심? 아니다. 관우나 악비처럼 이미 굴원은 돈과 명예나 주는 기복신祈福神 구실을 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작곡자이자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Rahmaninov의 <피아노협주곡 제2악장 모데라토 Rachmaninov piano concerto No.2 in C minor, op.18 [Moderato]>는 누구나 좋아하는 명곡이다. 나도 즐겨 듣는 편이다. 그런데 최근 이 곡을 듣다가 굴원의 기구한 일생을 보았다. 너무 엮었다고? 말 좀 더 들어보시고 비난하시라.
먼저 라흐마니노프가 좌절 상태에서 자서전을 쓰듯이 곡을 만든 것이 <피아노협주곡>이란 사실부터 주목해 보자. 작곡가로서 관현악단의 지휘자로서 그의 ‘입뽕’은 참담했다. 게다가 사촌누이와의 결혼도 가족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좌절의 연속.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굴곡진 심정을 표현하듯 써내려간 관현악곡이 바로 <피아노협주곡>이었다. 곡이 아름다우면서도 장엄미를 풍기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러하듯 굴원의 영혼과 삶 역시 아름다웠으나 무거웠다.
협주곡 중 모데라토를 잘 들어보시라. 도입 부분이 참으로 비장하다. 쿵쿵! 큰 종을 울리듯 두드리면서 시작되는 건반소리는 스러져가는 조국 초나라의 부흥을 위해 개혁 의지를 다지는 젊은 날 굴원의 스탠스 그 자체이다. 이어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등 여러 현악기들이 화음을 쏟아내는데 절대적 지지자였던 회왕과 개혁세력들이 굴원을 든든하게 뒷받침하는 것처럼 들린다. 건반이 빨라지기도 하지만 경쾌하다. 관악기인 오보에와 플롯까지 어우러지면서 물 흐르듯 이어지니 초반 굴원의 개혁정책이 순탄해짐과 같다.
중반, 팀파니 등 타악기가 분주해진다. 트롬본과 트럼펫 등 금관악기의 소리도 심상치 않다. 피아노를 두드리는 소리도 빠르고 격해진다. 굴원이 친진파 세력에게 집중 견제를 받다가 결국 내침을 당하는 듯하다. 후반 초입, 독주에 가까운 바순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소리는 멱라수 어부가 굴원의 하소연을 부드럽게 받아주는 것 같다. 이후의 진행은 대체로 평화롭고 부드럽다.
그러다가 후반부에서 갑자기 여러 악기들이 리듬감을 재촉하면서 긴장감을 주기 시작한다. 참을 만큼 참았던 어부의 핀잔 그리고 굴원이 느낀 수모감이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무료불평이 터져나오듯 피아노의 손놀림이 격해지더니 마침내 과격하고 장엄하게 두드리는 피아노 건반 소리를 끝으로 악장 마감. 굴원이 멱라수에 몸을 던지는 순간의 다름 아니다. 지나친 억지라 나무라도 좋다. 내 생각일 뿐이며 강요할 생각도 없다.
소개하는 동영상은 2008년도 스위스의 루체른에서 열린 오케스트라 페스티벌에서의 연주 장면이다. 위암으로 베를린필하모니오케스트라 상임지휘 자리에서 물러난 명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 가 지휘하고 엘렌 그리모Helene Grimaud가 솔로피아노로 협연한 매우 의미 있는 화면이다. 그녀는 이 곡으로 경연에 입상하여 데뷔한 경력을 가졌다.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인 셈이다.
다른 설명은 생략하더라도 엘렌 그리모를 소개하지 않을 순 없다. 워낙 그녀의 광팬이기 때문이다. 연주도 대단하지만 화면에서 보는 바처럼 깨끗하고 지적인 그녀의 외모가 나를 마음의 연인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등이나 가슴골 드러나는 화려한 드레스를 잘 입지 않는다. 조명발 받기 위한 짙은 화장이나 속눈썹 붙이는 일도 흔치않다. 머리는 그냥 깔끔하게 빗어 뒤로 질끈 묶으면 끝이다. 억지로 꾸미지 않는 자연미인. 그저 깨끗한 맹물 냄새나는 여자다.
이런 여자만 보면 난 사족을 못쓴다. 오래봐도 싫증나지 않는다. 나이가 들수록 더 아름다워진다. 향수 풍기는 여자보다 막 수영장에서 나와 수돗물 특유의 락스 냄새 풍기며 지나가는 여자가 더 섹시해보인다. 나이가 많거나 적거나 짙은 화장을 한 여자에게는 절대 관심이 없다. 내 눈에 짙은 화장은 썰어 진열해 놓은 고기 빛깔을 더 붉게 보이려 켜놓은 정육점 불빛 같다. 이건 순전히 내 개취향(지극히 개인적인 취향)이니 왜 그러고 사느냐고 타박주진 마시라. 난 이러구러 산다.
엘렌 그리모의 인문학적 소양도 다분하다. 자연과 책, 미술과 인간적 교감을 많이 경험할수록 풍부한 음악적 감성 재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음악관이다. 저서도 여러 권 있다. 생태계에도 관심이 많다. 늑대를 키우는 피아니스트로 유명한데, 운전 중 국도에 쓰러져 있는 늑대를 발견하여 치료한 것이 계기란다. 지난 5월 초 예술의전당에서 세 번째 한국 콘서트를 가졌다.
내 마음의 연인 엘렌 그리모의 연주 즐감하시면서 멋진 새 달 6월 맞으시길.
첫댓글 연주 음악 올려주시어 감사합니다.
넘 좋아요.
잘 듣고 갑니다.
즐거운 저녘시간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