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잘 쓰는 법 4 – 수필의 시작은 어떻게 써야 할까? - 유튜브 김정빈 교수의 [문학으로 삶을 읽다]
시이든 소설이든 희곡이든 시작 부분은 매우 중요하다. 당연히 수필 또한 그러하다.
표준적인 수필은 2백자 원고용지 15장 정도로 쓰여지는데, 이는 시에 비해 길지만 소설, 희곡에 비해서는 굉장히 짧다. 이것은 수필에서 시작 부분이 소설, 희곡의 시작 부분보다 더 중요함을 의미한다.
소설과 희곡은 길기 때문에 처음에는 독자의 흥미를 끌어내지 못하더라도 점차 흥미를 끌어낼 수 있지만 수필에는 그런 시간 여유가 적다는 뜻이다.
글은 독자에게 읽히려고 쓰는 것이다. 따라서 독자가 강한 흥미를 느끼도록 할 필요가 있다. 초심 작가들이 잘못을 범하는 글쓰기 법 가운데 자기가 쓰려고 하는 내용 중 가장 새롭거나 멋진 것을 앞이 나아니라 뒤에서 말하는 것, 그럼으로써 시작 부분에서 흥미를 끌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는 논리학에서 귀납법이라고 말하는 방식에 해당하는 글쓰기 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 모든 인간은 죽는다 –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가 귀납법의 논리 전개 순서이다.
연역법은 그와 반대되는 논리 전개 방식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가 연역법의 논리 전개 순서이다. 요점은 가장 중요한 “죽는다”가 처음에 나오느냐 마지막에 나오느냐는 것이다.
독자의 흥미를 끌기 위해서는 가장 중요한 것을 처음 말하는 연역법적 서술이 좋다. 예를 들어 기르던 반려 고양이가 죽은 사건을 수필을 쓴다고 해보자.
이를 귀납법으로 쓰려면 반려동물 중 고양이를 선택한 이유, 2. 고양이를 입양한 일, 3. 고양이가 나의 가족으로 친화된 과정, 4.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깊어지는 단계, 5. ‘똘이’라고 이름지어준 그 고양이의 매력, 6, 똘이가 병에 걸린 일, 7. 똘이를 치료하기 위해 나와 가족이 쏟은 갖가지 정성, 8. 마침내 고양이가 죽은 일, 9. 그 사건을 통해 내가 느낀 점, 10. 생각한 점의 순서가 될 것이다.
그에 비해 연역법은 가장 먼저 9. 고양이가 죽은 일, 10, 그 사건 때문에 내가 받은 충격과 슬픔, 11. 그 사건을 겪는 과정 또는 그 사건이 계기가 되어 내가 생각한 것 중 하나를 맨 앞에 쓴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 셋 중에서 가장 강력한 부분은 8번일 것이고, 따라서 이 부분을 가장 먼저 쓴다. 그런 다음 1로 돌아가 똘이와의 인연을 서술하기 시작하고, 고양이가 죽는 과정에서 받는 느낌과 그 뒤에 나에게 일어난 생각을 서술한다.
그런데 처음에 고양이의 죽음을 말하기는 하지만 그 과정을 세세하게 다 묘사하다보면 양이 많아져서 독자를 집중시킬 수 없다. 간단명료하게, 박력있게 그 부분을 쓰기 위해서는 고양이의 죽음 가운데서도 가장 힘있게 독자에게 호소되는 부분 중심으로 써야 한다. 나머지 부분을 쓰고 싶으면 후반부의 8고양이의 죽음에서 부연에서 언급하면 된다.
글쓰기에 정답은 없다. 그렇기는 해도 정설, 즉 대체로 정답이라 할 만한 답은 있다. 그래서 정설을 말해보면, 시작 부분 첫 문장은 간략하면 간략할수록 좋다.
문장은 가장 적게 잡아도 주어와 술어를 이루는 두 단어만은 있어야만 성립한다. 따라서 한 문장을 두 단어로 된 짧은 문장으로 쓰면 좋다. 특히 글의 내용이 강하거나 힘차야만 되는 것일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부드러운 내용을 전하는 경우라 해도 가능한 한 복잡하지 않은 문장, 즉 단문으로 쓰는 편이 좋다. 특별히 그래야만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두 문장 이상을 하나로 묶는 복문은 도입부 문장으로 좋지 않다.
예를 들어보자. 피천득의 수필 <인연>을 “지난 사월에 춘천에 가려고 하다가 못 가고 말았다.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두 문장을 하나로 묶어서 “지난 사월에 나는 성심여자대학에 가보고 싶었는데 못 가고 말았다.”라고 고쳐보자.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훨씬 불명료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피천득의 문장은 앞에서 말한 연역법으로, 즉 “춘천에 가지 못했다.”는 가장 중요한 결론을 먼저 말한 다음에 왜 가지 못했는지는 나중에 말하는 방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다시 또 한 가지. 피천득은 “춘천”과 “성심” 여자대학교를 시작 부분에서 언급하는데 “성심은 ” 그 다음 부분부터 “성심여학원”을 다닌 아사코에 대한 추억을 이끌어내기 위한 장치 역할을 하고 “춘천”은 글의 마무리 부분에서 “오는 주말에는 춘천에 갔다 오려 한다. 소양강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 것이다.”를 이끌어냄으로써 수미일관한 느낌, 즉 통일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피천득의 글은 높은 품격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쉽게 읽히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비교적으로 보아 단문은 많고 복문은 적기 때문이다. 피천득의 문장은 거의 다 단문이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 이 문장은 단 두 단어로 된, 글로 쓸 수 있는 가장 짧은 형태이다. 작가는 이렇게 수필을 청자연적에 비유하는 간결한 한 마디로써 순식간에 독자를 사로잡는다.
수필의 첫 문장으로서 이처럼 훌륭한 사례를 찾기는 매우 어렵다. 한편으로는 간결하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그 비유가 참신하기 때문에 이 문장은 독자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여늬 작가들은 이렇게 쓰지 않는다. 그가 문학적인 창의력을 한껏 동원하여 “ 수필 = 청자연적”이라는 아이디어를 내는 것까지는 혹 가능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는 단 두 단어로 된 이런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예를 들어 “나는 수필을 청자연적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쓴다. 그래도 거기까지는 봐 줄만하다. 어떤 작가는 거기에 더 많은 말들을 붙여서 이렇게 쓸지 모른다.
“나는 오래 전부터 수필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왔다. 그러던 붕 지난 주말에 덕수궁 박물관에서 청자연적을 하나 보게 되었다. 내가 본 그 연적은 연꽃 모양을 한 것으로 똑같이 생긴 꽃잎들이 정연히 달려 있었는데, 다만 그중에 꽃잎 하나만이 약간 옆으로 꼬부라졌었다. 그리고 ”그때 나에게 한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그렇다. 수필은 청자연적 같은 것이다!”
하지만 피천득은 그렇게 쓰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수필은 청자연적이다.”라고 말하면서 맨 끝에 가서야 덕수궁 박물관에서 본 청자연적 이야기를 한다.
이 또한 앞에서 본 <인연>과 같은 3단 구조, 즉 처음에 청자연적을 말하고, 중간 부분이 끝난 다음에 마지막 부분에서 다시 청자연적을 말하는 방식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글 또한 수미일관성을 얻게 되었다.
이상 단문이 가진 장점을 말했지만 단문, 단문, 단문 …만으로 글을 이어가면 글은 호흡이 가빠진다. 그래서 피천득은 단문과 복문을 능란하게 혼용하면서 글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수필은 청자연적이다”에 이어 이 문장의 달인은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 맵시 난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걸어가는 숲속으로 평탄하고 고요한 길이다.”라고 단문이 아닌 복문으로 글을 씀으로써 리듬감을 만들어낸다.
수필에 대한 비유물이 첫 문장에서는 하나이고, 둘째 문장에서는 셋이다. 셋째 문장은 둘째 문장의 마지막 비유물을 부연하고 있다.
둘째 문장 안에서만 보면, 난과 학에는 그 사물을 수식하는 형용사가 없다. “깨끗한 난이요, 고귀한 학이요.”가 아니라 그냥 “난이요, 학이요.“이다.
하지만 그 다음 비유물인 여인에 대해서는 다르다. 여인은 그냥 여인이 아니라 “몸 맵시 난렵한 ”여인인 것이다.
이것은 글이 뒤로 갈수록 부드러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 문장이 대나무의 곧은 줄기 같다면, 둘째 문장은 대나무의 잎과 같고 셋째 문장은 그 잎들이 대나무의 줄기와 함께 바람에 흔들리는 것과 같다.
강하게 말함으로써 독자를 사로잡은 다음 부드럽게 독자를 휘감는 그 글 솜씨가 참으로 놀랍다.
단문, 또는 간결체만이 글의 시작 부분에서 독자를 사로잡는 것은 아니라, 피천득은 <조춘>을 복문으로 시작한다.
“내게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면 계절이 바뀌는 것이요, 희망이 있다면 봄을 다시 보는 것이다. 내게 효과가 있는 단 하나의 강장제는 따스한 햇빛이요, ‘토닉’이 되는 것은 흙냄새다.” 가 그것이다.
복문인데도 이 글은 독자를 매혹시킨다. 필자는 앞에서 예로 든 수필을 대나무에 비유했지만, 이 글은 봄날에 휘청거리는 수양버들을 연상시킨다. 간결하고 힘찬 맛이 아니라, 부드럽게 휘감기는 다른 맛을 지닌 멋진 문장인 것이다. 그것은 작가가 복문을 잘 이용했기 때문이다.
두 문장이 대조되는 개념 또는 사물로 짝지어진 것을 “병문”이라고 한다. 騈병은 말들이 짝을 지어서 달리는 모양을 의미하는 글자이다.
앞에서 예로 든 문장이 그것이다. 기다려지는 것이 있다면 과 희망하는 것이 있다면, 강장제인 따스한 햇빛 과 토닉인 흙냄새가 짝지여져 있음을 볼 수 있다.
글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독자를 단박에 사로잡는 “새로움”이다. 이에 대해서는 세 번에 걸친 지난 강의에서 누누이 강조했다.
예술은 창작이고 창은 세상에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작업이다.
인간이 예술에 매혹되는 까닭 중 하나는 예술이 늘 똑같이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게 해주기 때문이다.
지루함에서 벗어나게 하려면 늘 보던 색깔과 모양 (미술), 늘 듣던 소리 (음악), 늘 주고받던 말 (문학) 수준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좋다.
그 멀어짐은, 문학에서 시는 이미지의 참신함으로써, 소설(희곡)은 서사의 참신함으로써 생겨한다. 그리고 수필은 시적인 장점과 소설적인 장점을 두루두루 구사하는 또는 구사해야만 하는 장르이다.
따라서 좋은 수필가가 되려면 먼저 시와 소설에 대해 통달해야만 한다.
시를 모르는 수필가는 운율감이 넘치는 글을 쓸 수 없으며, 능숙하게 비유법을 사용할 수도 없다. 소설을 모르는 수필가는 서사를 어떻게 풀어나가야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지를 알지 못할 것이다.
시 공부는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생략적이고 함축적으로 사용하는 능력을 길러주고, 비유법에 통달할 수 있도록 해준다.
소설 공부는 전하고자 하는 내용을 정밀하고 풍부하게 묘사하는 능력을 길러 줄 뿐 아니라 인간의 여러 가지 삶의 양태를 간접적으로 관찰하고 경험하고 이해하게 해준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한용운은 <님의 침묵>에서 가장 중요한 “님은 갔다”라는 결론부터 말한 다음 “푸른 산빛을 때치고 단풍나무 우거진 숲길을 따라 차마 떨치고 가는”님을 묘사한다.
그러고 나서 떠나간 님에 대한 자신의 생각, 즉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운운의 내용을 진술한다.
더하여, 이 탁월한 시인은 님이 떠나간 사건을 여러 가지 비유로 묘사한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 “차디찬 티끌이 되”어 버린 “한숨의 미풍” 등이 그것이다.
또 이 시인은 역설법을 사용하여 독자를 긴장시킴으로써 (거꾸로 말하면 독자는 긴장하게 되니까) 독자가 정신을 집중하면서 이 시에서 떠나지 못하도록 붙든다.
“님의 말소리에 귀먹음”,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음”이 그것이다.
일상적으로 볼 때, 귀먹음과 눈멀음을 나쁜 것이다. 그렇지만 그것이 님의 말소리에 대한 귀먹음이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의한 눈멀음이라면?
너무나도 달콤한 속삭임이어서 귀가 먹은 듯하고, 님의 얼굴이 너무나도 광서 눈이 먼 듯했던 사랑의 순간순간들! 이것은 분명 일상적인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부터 멀리 벗어남이다.
세익스피어는 <멕베스>의 첫 장면에서 마녀 셋을 등장시킨다. 그리고 그 한 장면으로 이 위대한 작가는 단박에 관객을 극 안으로 끌어들인다.
글로만 되어 있는 희곡을 읽어서는 마녀가 등장하는 그 장면에서 연극을 보는 것 같은 충격과 놀라움을 느끼지 못할 것이고, 그래서 잘 몰입이 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소년 시절에 이 연극을 명동 한복판에 있었던 국립극장에서 본 적이 있다. 지금부터 오십 년도 넘는 그때 본 장면이 아직까지도 뇌리에 생생하다.
두 시간이 넘는 긴 공연에서 지금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그 장면과 함께 뱅코우의 군대가 몸에 나뭇가지를 붙이고 전진하던 장면뿐이다.
하지만 이 장면이 흐릿하게 남아 있는 옛 사진 같다면 세 마녀가 등장하는 맨 첫 장면은 대리석에 조각으로 새긴 것처럼 또렷하게 내 기억에 남아 있다.
세익스피어는 최고의 작가, 최고의 심리학자이고, 인생을 최고 수준으로 통달한 사람이다.
톨스토이는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도입부 첫 문장을 “모든 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숫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기 나름의 불행을 안고 있다.”라고 쓰여 있다. 이 소설의 전체 흐름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이로써 소설 역사상 둘째로 꼽기에는 너무나도 위대한 이 작가는 연역법으로써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의 도입부 또한 매우 유명하다. “지방 경계에 있는 긴 터널을 빠져 나가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진 듯 했다.” 가 그것이다.
둘을 비교해 보면, 톨스토이의 문장이 삶을 평가하는 태도, 즉 철학적인 기초 위에서 서술되고 있는데 비해 가와바타의 문장은 대상을 관찰하고 느끼기만 하는 태도, 즉 이성이 작동하기 이전 단계에서 느끼고 감흥하고 감각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톨스토이 문장은 철학 에세이적인 것이고, 가와바타의 문장은 문학 수필적인 것이다. 전자는 이성에 호소하고, 후자는 감성에 호소한다.
따라서 철학 에세이가 아닌 문학 수필을 쓰고 싶은 작가는 톨스토이 문장보다는 가와바타의 문장이 품고 있는 문학적인 표현법의 장점을 깊이 음미하면서 곰곰 생각하고 생각해보아야 한다.
가와바타의 이 문장 또한 단도직입적이다. 피천득은 자신이 어떤 과정을 거쳐 “수필 = 천자연적”이라는 아이디어를 얻게 되었는지에 대해 구구하게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수필은 청자연적이다”라고 결론부터 말한다.
가와바타 또한 주인공이 어떤 직업을 가진 사람인지, 어디에 사는지 등은 일체 말하지 않고 그가 언제 왜 여행을 떠났는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는다.
가와바타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사물의 외적인 전개 양상이 아니라 주인공이 느끼는 감각, 그리고 그 감각을 내면에서 소화해 나가는 감수성이다.
그래서 작가는 외향적인 묘사는 다 생략하고 “지방 경계에 있는 긴 터널을 빠져 나가자 ,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까지 하얘진 듯했다.”라고 쓴다.
이 짧은 두 문장 안에는 여러 가지 느낌과 내용이 풍부하게 담겨 있다. 정답은 아니지만 필자가 이 문장에서 읽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경계를 벗어난다. 그 경계는 터널로 되어 있다. 터널을 지나는 동안 이쪽 세계로부터 저쪽 세계로 건너가는 느낌이 든다. 그 느낌은 터널이라는 캄캄한 동굴을 거침으로써 더욱 더 강해진다.
마침내 저쪽의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그 세계는 이쪽과 전혀 다른 신세계이다. 불교는 번뇌로 가득찬 이 세계를 벗어난 “저쪽 세계”를 지향한다. 그 피안이 “눈이 자욱히 내린 나라”설국으로서 문득 열린다.
때는 한 밤중이다. 그런데 그 밤은 칠흑 같은 밤이 아니다. 은은히 빛나는 하얀 빛이 있다. 그 은은한 빛은 어둠과 어우러져 말로 표현할 수 없으리만큼 매우 신비롭다.
이렇게 많은 내용을 단 두 문장으로 함축해서 묘사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 첫 구절을 읽는 것만으로 독자는 앞으로 주인공에게 펼쳐질 운명을, 또는 이 소설이 어떤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어떤 문학적인 효과를 목표삼고 나갈지를 은은히 예감하게 된다. 그리고 실제로 이 소설은 첫 문장이 풍기는 무드로 가득 차 있다.
소설은 서사문학이지만 이 소설에서 서사는 중요하지 않다. 이 소설에는 시작, 전개과정(클라이맥스)이 없다. 절정이 없이 잔잔한 무드로만 이어지는 실내악 같은 소설인 것이다.
수필이야말로 무드의 문학이다. 시는 이미지를 창조하고, 소설은 서사를 창조한다. 그리고 수필은 시와 소설의 장점을 이용하고 평론, 철학까지도 이용할 수 있다.
그 모든 것들을 이용하여 수필가는 무드를 창조한다.
자신의 인격과 성격을 결합하여 자신만의 무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무드는 이미지와 비슷하다. 그러나 이미지에 비해 무드는 시간성이 길다.
어떤 매력적인 사람을 만난 다음 집으로 돌아 와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느꼈던 또 그 사람이 만들어냈던 무드의 아름다움, 멋, 행복 등을 기억한다.
훌륭한 수필가에게는 자신마의 무드가 있다. 피천득에게는 피천득의 무드가 있고, 이상에게는 이상의 무드가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볼 때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수필적인 소설이라도 말해도 좋다.
고전을 읽어야 한다. 명작을 공부해야 한다. 그냥 읽어서는 안 된다. 건성으로 공부해서는 안 된다. 사랑해야 한다. 문학을 사랑해야 하고, 그 안에 담긴 삶의 아름다움을 읽어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삶을 사랑해야 한다. 그 사랑을 문학 언어로 수필적 무드로 풀어내야 한다.
* 옮긴 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