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동이 터오면서 전날 오후부터 내리던 빗줄기가 차츰 수그러들 기 시작했다. '비극의 光州'에 흩뿌려진 피비린내를 씻겨내기라도 하려 는 듯 가랑비가 추적거리고 있었다. 계엄군은 여전히 시내를 장악, 주요 도로에 3개 공수여단 10개 대 대 병력을 배치하고 지나는 차량과 시민들을 검문. 검색했으나 또다시 도청으로의 행렬은 이어졌다.
이날 오전은 비교적 평온한 상태가 계속됐으나 舊중앙고속 터미널 앞 에서 새로운 움직임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침 식사를 하기 위해 이 곳에 모여든 5-6명의 택시 기사들이 더이상 당하고만 있을 수 없다 며 우리도 일어서야 한다는 의견을 교환했고 이는 삽시간에 기사 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오후 4시가 되자 기사들은 光州 무등경기장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무도 집결장소를 말하지 않았지만 공용터미널이 계엄군에 장악돼 대부분의 시외버스가 이곳에서 승객을 내려줘 자연스럽게 집결지로 선 택됐다. 일부 기사들이 지금 당장 도청으로 가자는 의견을 제시, 오 후 5시께 50여대의 택시를 끌고 光州역으로 몰려나왔으나 계엄군에 의해 저지당해 무등경기장으로 되돌아 갔다.
오후5시께 공수부대원들의 무차별 가격에 분개한 택시기사들이 50 여대의 영업용 택시를 몰고 광주역에 집결, 계엄군을 쓸어버리겠다고 시위를 하였고... '95년 7월 검찰의 5.18관련 사건 수사결과 발표문' '무등경기장에는 어느새 2백여대의 차량이 모여들었다.
비슷한 시각인 5시 50분께. 충장로 입구 쪽에서 5천여명의 시위 군 중이 스크럼을 짜고 도청을 향해 돌진해 가고 있었다. 이들은 맨몸 으로 계엄군과 충돌, 많은 부상자를 내면서도 애국가 등을 부르며 물러설 줄 몰랐다.
이때 유동 삼거리 쪽에서 시민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시민들은 계엄군이 뒤쪽에서 공격해 오는 것으로 생각, 일부가 몸을 피하려 들었다. 이 순간 박수와 함성 소리가 터져 나왔다.
수많은 차량들이 비상 라이트를 켜고 경적을 울리면서 도청을 향해 밀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한통운 소속 12t 대형트럭과 고속버스. 시 외버스 등 15대의 차량이 앞장서고 2백여대의 회사 택시가 錦南로를 메운채 뒤따르고 있었다. 트럭위에서는 20여명의 청년들이 태극기를 흔들어 댔다.
'도청 옥상에서 내려다 본 광경은 장관이었다. 헤드라이트 불빛이 유 동 삼거리에서 부터 금남로 4가까지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시민들은 우리의 용사들 잘한다. 이기자. 이겨야 한다고 소리 지르고 박수를 치며 열렬히 환영하면서 대열에 끼어들고 있었다. 시위 군중은 순식 간에 수만명으로 불어났다" '김영택著. 실록 5. 18 광주민중항쟁 中' 차 량 행렬이 舊동구청 앞에 이르자 이곳에서 버티고 있던 공수대원들 이 뒷걸음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7시 45분께 전일빌딩 앞길에서 장갑차로 바리케이드를 치고 재차 전열을 정비했다. 시위 차량과 시민들도 이들에 막혀 더이 상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20m 가량 거리를 둔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이 순간 공수부대원 뒤에 있던 경찰이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쏘아대 기 시작했고 이를 신호로 공수대원들이 진압봉과 대검을 휘드르며 운 전 기사와 시위대를 두들겨 패고 연행해 갔다. 이들은 시위차량을 향 해 돌격해 대검이 착검된 소총으로 자동차 창문을 깨뜨린뒤 차 안 으로 뛰어들어 무차별적구타와 연행을 실시했다.
잠시후 자욱한 최루탄 속에 버스를 앞세운 시위대는 군인들과 육박전을 벌여 전일방송 부근의 금남로에는 비명과 함성이 끊이지 않았 다. 20여분간 계속된 이 충돌이 끝나자 시동이 걸린 수십대의 버스. 트럭. 택시사이에는 머리가 깨지거나 어깨가 내려앉아 피투성이가 된 채 실신한 부상자들이 여기저기 즐비했다.
안내양 차림의 20대 처녀 2명은 운전사 차림의 30대 남자를 부등켜 안고 통곡했고 쓰러진 환자들을 이송하며 '환자가 위독하니 앰뷸런스를 빨리 보내라'는 목메 인 소리가 유혈극의 참상을 잘 말해 주고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가 5월 22일자에 보도하려 했다.
검열과정에서 삭제된 부분' 시위 군중과 군경 사이에 수십차례에 걸쳐 밀고 밀리는 공방이 계속되면서 일부 시위대가 光州소방서로 몰려가 소방차 3대를 가지고 온뒤 소방호스로 물을 내뿜으며 최루가스를 제거하고 군경저지선의 장갑차 앞으로 밀 어닥쳤다.
그러나 이곳의 방어선은 그야말로 철통 같아 무너뜨릴 수 없다는 판단을 한 시위대는 노동청 쪽을 공략키로 했다. 이곳은 공수 부대가 아닌 경찰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으며 길이 넓어 차량 진입이 비교적 수월했기 때문이다.
차량 시위 소식을 전해들은 광주고속 운전사 배용주씨도 동료 2명과 함께 차고에서 버스를 몰고 밤 9시께 노동청 앞에 도착했다. 대형버 스 10여대가 모이자 시위대는 저지선을 무너뜨리라고 소리쳤다. 버스 가 시위대 전면에 나서자 최루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배씨는 저지선에서 50여m 가량 떨어져 있다 경찰 저지선을 향해 전속력을 내 돌 진해 갔다. 이때 최루탄 한발이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들어와 터지자 배씨는 달리는 차에서 그대로 뛰어내렸고 차량은 시동이 걸린채 경찰 을 향해 계속 돌진, 경찰관들을 깔아 뭉개고 말았다. 이 사고로 함 평경찰서 소속 정충길 순경등 4명이 그자리에서 숨졌고 5명이 중경상 을 입었다.
지난 18일 부터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던 시민들은 차량 시위 소식 을 접하고 너나 할 것 없이 도청을 중심으로 운집, 밤이 깊어가고 있 었지만 해산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시 외곽의 군.경 저지선이 속속 무너지고 있다는 전언에 사기 충천해 있었다.
계엄군은 이제 도청과 光州역, 全 . 朝大 등지에서만 볼 수 있었다. 밤 11시가 넘어서자 계엄군은 도청 방어에 위태로움을 감지하고 마침내 M16소총 발포를 시작했다.
이날의 차량시위는 지난 18일 부터 계엄군에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했 던 시민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줬다. 그동안 수세적 입장에 있던 시민 들이 우리 손으로 光州를 지켜내자는 공세적 자세로 바뀐 것이다. 이 는 光州 시민들이 마침내 민중항쟁의 주체로 떠오르는 순간이었으며 '해방 光州' 를 기약하는 시발점이기도 했다.
첫댓글 감사히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