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 11:18-12:6
능히 말과 경주하겠느냐
2017. 10. 9.(月)
1. 큐티는 점치는 것 같아, 라고 사람들은 말하곤 한다. 어릴 적, 어른들은 아침 일찍 ‘화투’로 하루의 운수를 보곤 하였다. 큐티도 그렇다는 것이다. 성경으로 그날의 운수를 확인하려는 것, 그걸 본 걸 게다.
실은, 오늘 본문은 딱 나를 위한, 오늘 하루의, 아니 적어도 한 주나, 한 달 동안 염두에 두어야 할 말씀이기에, 마치 점보는 것처럼 나를 위해 준비해 둔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저 말을 하는 거다.
2. 일단 본문부터 살펴보자. 상대의 말을 주의 깊게 들은 다음에서야 내가 말할 권리도, 질문할 자격도 생기는 법이다.
내가 드라마 작가라면, 오늘 본문은 1회 분량의 드라마로 만들 수 있겠다. 예레미야와 아나돗 사람들의 대결과 예레미야와 하나님의 대결. 특히 앞부분은 꽤 긴 분량이 나올 듯.
3. 말이 나온 김에 내가 묵상/큐티하는 법을 살짝 공개하련다. ‘상상하기’이다. 또는 ‘이야기로 만들기’이다. ‘이야기적 동일시’(narrative identification)이다.
그러니까 내가 아나돗 사람이 되어 보고, 예레미야도, 하나님도 되어 보는 것이다. 내가 아나돗 사람이라고 상상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 사건에 참여하는 것이다. 배우가 연기를 한다면, 내가 그 배우의 역할을 한다면, 어떻게 할까, 를 한참 생각해 보는 것이다.
4. 먼저, 아나돗 사람이 되어 보자. 일단 캐릭터 분석부터 해야겠지.
일단, 그들은 예레미야의 고향 사람이다. 1장 1절에 예레미야의 고향이 똑똑히 쓰여 있다. 그런 그들이 동향 사람을 죽이려는 음모를 꾸민다? 왜? 무엇 때문에?
내가 상상하라고 해서 본문을 이탈하라는 말은 절대로, 절대로 아니다. 본문 안에서 상상해야 한다. 본문 안에서 찾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는 그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는 곳은 두 군데다. 19절과 21절이다. 특히 21절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하지 말라.”
예레미야의 예언 내용이 아나돗 사람을 분개하게 만들었다. 그 내용은 뭔가? 간단하다. 망한다는 거다. 그렇게 살지 마라, 똑 바로 살아라, 이제 돌아서서 바르게, 의롭게 살라는 거다.
그것이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그들의 실체를, 누구나 다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그들의 내면을 까발린 것이다. 그들은 도무지 견딜 수 없다.
이제 그만 좀 하지,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한 두 번이지. 심판과 멸망의 메시지를 저렇게 주구장창 외치니 넘어갈 수 없구나. 저 한 놈만 없으면 되는데.
이런 마음을 감히 표현하지 못했다. 그래도 고향 사람이고 제사장 출신이고, 예언자가 아닌가. 쉽지 않다. 두렵다. 무섭다.
그러다가 서로의 눈빛에서, 지나가는 말투에서 이심전심으로 통한 거다. 그래서 어느 한 놈이 나선다. 겁 좀 주자고. 그것이 발전해서 ‘죽이자!’가 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Point
아나돗 사람처럼, 내가 아나돗 사람이라도 예레미야를 죽이는데 동의했을 거야, 라는 지점까지 상상을, 묵상을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5. 이들의 감정과 전략은 19절이다. 분노한 그들의 내면과 표정을 볼 수 있는 것은 19절이다.
어떻게 연기할 건가?
그리고
어떻게 예레미야를 죽일 건가?
그럴 듯한 명분을 만들어 예언자를 초대한다. 그걸 꾸며내라, 그게 재미다. 그래야 이야기가 된다.
6. 나는 여기서 지라르의 희생양 이론을 떠 올렸다.
그 전에, 고향 사람들까지, 어쩌면 최후의 지지자이었을 아나돗까지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예레미야 지지자는 없다고 단언해도 될 것이다.
이 상황에서 예레미야의 마음은?
어찌되었건, 이스라엘은 만장일치로 예언자를 거부한다. 만장일치에 의한 살해가 벌어지고 있다. 영문도 모른 채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죽을 뻔 했다, 예레미야는. “한 의인에 대한 사악한 무리의 만장일치적 살의(殺意)”라고 나는 <매일성경> 해설에 썼다. 이것이 한 사회가 내부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희생양 메커니즘이다.
이건 이쯤에서 마치자.
6. 이제는 예레미야에게로 가보자.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예언자는 순진무구한 캐릭터다. 돌아가는 판도 읽을 줄 모른다. ‘순한 어린 양과 같다.’
조력자도 없어 보인다. 18절에 하나님께서 친히 살해 음모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정말 하나님이 신적 계시로 알려줬을까?
두 가지로 해석 가능하다. 기독교인들이 무슨 일이 벌어지면,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지 않는가. 다른 누군가가 알려주었거나, 그 살해 음모가 실패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이것도 상상해서 이야기로 꾸미면 재미있을 듯.
다른 하나는 하나님 외에 적들의 음모를 알려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고립무원의 예레미야의 처지를 보여준다. 아, 눈물 난다, See.
다시 한 번, 만장일치적 반대에 직면한 딱 한 명의 희생양이 된 예레미야. 아, 예레미야여!!
7. 이번에는 그의 감정을 느껴보도록 하자.
명시적으로 그의 감정을 단어로 나타낸 것은 20절의 ‘나의 원통함’(개정), ‘억울한 사정’(새번역)이다. 그런데 공동번역과 영어성경에는 이 단어들이 없다.
더 좋은 것은 ‘주의 보복을 내가 보리이다’(개정)이다. 복수해 달라는 말에서 예레미야의 심정이 충분히 담겨 있다. 아마, 독자들은 예레미야의 이 심정은 보다 쉽게, 빨리 느낄 수 있으리라.
8. 그런데 좀 복잡한 것은
내 마음을 주님이 아신다니, 하는 말이다.
왜?
자신의 보복 감정이 사적인 복수가 아닌가,를 자기 검열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는 것일 수도 있다. 나는 떳떳하다.
앞의 것은 다양하게 읽을 수 있다. 자기 자신을 벼랑 끝에 세워두고 자신의 행위의 이면을 탈탈 털어내는 선지자의 독한 자기 성찰인가?
보복하려는 감정에 대해, 내가 선지자로서, 고향 사람들은 나를 적으로 죽이려고 했으나, 나는 그래도 되는가?
아니면, 저런 검열과 성찰을 통과한 다음에서야 복수 기도를 드린 걸까?
자기 분열적인가? 아니면 둘 다가 인간의 일반적 모습이 아닐까? 등등.
9. 예레미야의 반응은 두 가지다.
하나는 복수 해 달라는 거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정의로움에 대한 문제 제기다.
우리도 둘 다를 해야 하겠지.
그런데 예레미야의 질문이 좀 독하다. 아니 시니컬하다.
심중에서 우러나온 말로 보기 어렵다. 12장 1절을 보면, 시쳇말로 확 까발리면 이렇다.
‘하나님, 당신 똥 굵습니다.’
또는
‘말은 잘해’
혹은
‘말만 잘해’
나하고 이야기할 때는 정의로운데, 현실은 전혀 정의롭지 못하다, 그래서 당신에게 왜 이러냐고 따지고, 아니 조심스럽게, 진지하게 물으면, 하나님은 워낙 명철하신 분이셔서 논리적으로 또박또박, 기가 질릴 정도로 똑똑하게 잘 말하십니다, 그런 능력과 에너지로 세상을 똑 바로 만들지 뭐하는 겁니까? 나 참 기가 막혀서. 그러니 물어봐야 내가 질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
당신 참 잘 났습니다, 라는 냉소적인 예레미야의 질문이다.
시편 1편 3-4절을 예언자는 읊는다(12:2). 너무 잘 알 테니 인용하지 않으련다.
첫째는 현실이 그렇지 않다는 거고, 둘째는 당신이 심은 씨앗과 나무가 저렇게 자라서 악한 나무와 열매를 맺고 있지 않느냐는 거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 탓이다!
예레미야는 채권자라도 된 듯, 하나님에게 말한다.
당신이 말한 대로 하시오.
당신이 옳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보이시오,
말만 하지 말고!
10. 지친 예레미야가 보인다.
한밤중에 식칼 들고 두리번거리는 도둑놈 때문에 무서워 구석진 곳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웅크리고 있는 한 작은 어린 아이가 보인다. 그래서 예언자는 자신이 말을 잘 못하는 어린 아이라고 했나 보다.
다 싫고, 다 귀찮다. 열나게 외쳐 봐야 돌아온 것이라고는 적대적 살의다. 이제는 분노도 없다. 하나님이고 뭐고 때려치우고 싶다.
11. 하나님은 아나돗 사람들 보다 더 독하다.
이쯤이면, 예레미야를 다독일 법 하다. 오히려 다그친다.
역시 세다.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을 읽을 때, 유진 피터슨의 책, <주와 함께 달려가리이다>를 생각할 것이다. 맞다, 이 본문이다.
12:5-6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길을 걷는 것도 힘들어하면, 말과 달릴 수 있겠느냐?
땅에서 비실거리면, 홍수가 나면 어떻게 할 거냐?
스파링 상대에게 지면, 본 게임은 포기할거냐?
그러니까
하나님은 더 힘든 상황이 벌어질 거라고 말하고 있다. 그것에 비하면 이것은 암 것도 아니다. 약과다. 이걸로 툴툴 거리고 불평하면 더 큰 어려움이 닥치면 너는 콱 죽는다. 어깨 쫙 펴고,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두 주먹 불끈 쥐고 당당하게 싸우라는 거다.
이 말을 내뱉기까지 하나님은 고심하지 않았을까? 예레미야가 참으로 안쓰러웠을 것이다.
저 말 하고, 돌아서서 눈물 훔치지 않았을까?
저 말에 물기가 묻어 있다, 노기가 아니라.
12. 힐링, 힐링하는데, 하나님은 독설을 뿜으신다.
아, 힐링의 차원도 있다. 너, 잘 하고 있다. 잘 하고 있으니까 저렇게 반대를 하는 거야. 나도 네가 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더 잘하라고 하는 거지.
저 말에 예레미야가 위로를 받았을까?
그러나 그분은 상처를 다독이는데 시간을 쓰지 않는다. 여기서 ‘힐링’, ‘상처 받았다’는 말에 대한 성찰을 하게 만든다.
그런 말이 아주 조금은 도움이 된다. 그러나 그 상처만, 실패만, 과거만 들여다보게 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예레미야의 처지에서 보면, 참 힘들었다는 생각을 한다.
죽이려는 아나돗 사람들, 죽으라고 말하는 하나님. 아이고.
그런데 이게 답이 아닐까?
괜찮다, 괜찮다? 저 따구로 살면서 괜찮긴 뭐가 괜찮아. 바꾸어야지. 이미 앞에서 예레미야서는 우리에게 괜찮다고 말하는 거짓 선지자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날렸다.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카프카의 도끼가 필요하다.
꾸벅꾸벅 조는 선승의 어깨를 내리치는 죽비가 필요하다.
언제까지 위로이고 위안인가.
13. 이제 내 이야기할 차례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할까?
어제 일이다. 강단에 서지 않고 청중석에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앞에 서면 자꾸 이것저것 생각이 많아지고, 판단하게 되고, 그러면 내가 힘들다. 예배를 드리고 싶다! 이것이 나의 최근 소망이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는데 다들 힘이 없다. 찬송을 부르는 건지. 그래서 잔소리 쫌 했다. 블라블라....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내에게 호되게 혼났다 ㅎㅎ? ㅠㅠ?
다들 조용히 묵상하면서 찬송 부르는데, 노래를 잘 하지 못하니, 자신이 없어도 노래를 부르는데, 사람 수가 많지 않아서 소리를 죽이며 찬송하는데, 앞에서 목사라는 작자가 생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뭔 잔소리여, 잔소리는.....
괜히 내 기분에 교인들에게 쓴소리한 것이 아니라 잔소리한 거다.
에공. 미안해라.
그딴 걸로 신경질부리고, 지쳐서 징징거리면, 너, 뭐 될래? 뭐 할래? 내가 너를 그러라고 불렀냐? 난 네가 좀 더 대범하고 대단한 일을 하기를 바란다.
오늘 보니, 6절 땜에 확 깬다. 가족도 믿지 말란다. 뒤에서 딴 소리 한단다. 가족이 포인트가 아니고, ‘너에게 하는 좋은 말을 믿지 말라’가 초점이다.
예레미야는 칭찬이 듣고 싶었던 거다, 고향 사람들에게.
적어도 그들에게는 인정받고 싶었던 거다.
그런 거 기대하지 마라. 아예 싹을 싹둑 잘라 버린다. 하나님은 참 매정도 하시지.
고만하고 가서 네 일 해라.
더 뛰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