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봉 스님은 금강산 신계사에서 머리를 깎으면서부터 이날 이때까지 한 번도 자신의 본명과 속가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입 밖에 낸 적이 없는데, 찬형이라는 본명과 두 아들 영발이와 영실이의 이름까지를 대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찬형이라는 본명은 혹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두 아들의 이름까지를 부르는 데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녀석들이 무슨 도깨비 같은 말들을 하고 있는 게야. 대체 내게 무슨 손자가 있다고 그러는 게야.”
“방장스님의 큰 자제분 영발이가 지금 서울에 살고 있다고 해서 보성수좌가 급히 데리러 갔습니다. 하오니 조만간 만나보게 될 것이 옵니다, 스님.”
그러나 효봉 스님은 순간 표정을 바꾸며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런 잠꼬대는 그만 해라. 다 지난밤 꿈같은 전생(前生)의 일, 꿈을 깨야지. 꿈을…”
효봉 스님은 돌아눕더니 다시 눈을 감고 무자화두를 거듭 거듭 외었다. 제자들은 스님이 판사를 하다가 늦깎이로 출가했으므로 세간에 아들과 딸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았으나 그 이름 ’이찬형’은 몰랐다. 호적이 있기는 했으나 거기에 적힌 이름은 이원명(李元明)이었으므로 그 이름이 속가의 이름인 줄로 알고 있었다.
이원명을 호적에 올리게 된 것은 금강산 여여원에 있을 때이다. 여여원에 양로원을 설립할 때 고성 면장이 찾아와서 효봉 스님에게 이사로 취임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사로 등록하려면 호적이 필요했다. 그러나 호적을 요구하자 그 자리에서 이사에 취임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고성면장이 생각다 못해 호적을 만들어주면서 도장을 달라했다. 스님은 이때 이원명이라 새긴 도장을 주어 호적에 올리고 주소는 평양에서 고등보통학교를 다닐 때의 하숙집 주소를 적어주었다.
그러나 스님의 부인하는 태도는 수도인의 의지를 보인 것일 뿐 내심으로는 혈육의 정을 끊지 못하는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이기도 했었다. 미래사에 있을 때 하루는 해인사 주지를 지낸 금담(錦潭)스님이 문안을 왔다. 두 노장스님은 오랜만에 만나서 그동안에 쌓였던 회포를 풀면서 밤이 깊은 줄도 몰랐다. 법담(法談)은 세간에서 출세간으로 또 출세간으로 넘나들다가 원효대사를 만나고 있었다.
“방장스님, 설총은 효성이 지극해서 아버지 영각(靈閣)에 초하루 보름으로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참배를 했다면서요?”
“그런 말이 있지. 설총이 원효 대사 영각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아들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는 거야.”
“도인(道人)도 혈육은 못 속이는 모양이지요?”
“제가 듣기로는 방장스님도 속가에 아들을 두고 왔다던데 아들 보고 싶지 않으세요?”
“응, 보고 싶어. 할멈은 안 보고 싶어도 아들은 보고 싶어.”
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금담스님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효봉 스님에게 큰절을 올렸다.
“방장 스님, 저에게 도의 끝을 보여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스님!” 대개 이러한 질문을 받으면 모든 것을 초탈한도인인 체하며 거짓말을 하는 것이 상례인데 효봉 스님이 솔직히 말해주자 금담스님은 진리의 모습을 보여준 것에 감사하여 큰절을 올렸던 것이다. 그런데 왜 이번에는 마음 속을 솔직히 열어 보이지 않고 전생(前生)의 일이니 잠꼬대 하지 말라며 돌아누운 것일까. 스님이 지금 보이는 도의 끝은 과연 무슨 의미일까.
서울로 가족을 만나러간 보성 스님이 손자 이인목과 손자며느리, 증손자를 데리고 표충사에 내려온 것은 그로부터 사흘 뒤였다. 그러나 스님이 속가에 대해 비밀을 지키려고 애써왔고, 속명이 탄로 났음에도 혈손에 대해 무심한 태도를 제자들은 굳이 들추어내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남에게 보이기 싫은 상혼과도 같은 것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가족을 대면시킬 때도 세심한 배려를 했다. 마치 스님을 존경하는 표충사 신도의 가족이 병문안 온 것처럼 가장(假裝)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그러나 피는 속이지 못하는 것일까. 손자 이인목은 스님을 보는 순간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할아버지! 제가 손자 인목이옵니다.”
효봉 스님은 큰절을 올리는 낯선 젊은이가 혈육인 줄 알면서도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아주 담담하게 말했다.
“뭐 ? 영발이의 아들이라고?”
그리고는 고개를 돌리고 돌아누워 버렸다.
“아버지는 지금 일본에 출장 가 있습니다. 그리고 할머니는 전라도 광주에서 사시다가 2년 전에 세상을 뜨셨습니다.”
인목이의 할머니, 바로 세속에서 인연을 맺은 부인이 2년 전에 작고했다는 말을 듣자 스님은 눈을 감았다. 실로 운명은 기구했다. 부인이 살았다는 광주와 송광사는 같은 전라도 땅이고, 그것도 바로 이웃이 아니던가.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던 남편이 차로 불과 한 시간 남짓 달려가면 되는 송광사에 스님이 되어 있었다니….
얼마나 한 맺힌 삶이었을까. 하루아침에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훌쩍 떠나 가버린 남편. 작은 아들은 이제 겨우 걸음마를 할 때였고, 큰아들도 코흘리개 철부지였으니 전쟁 통에 남편도 없이 두 아들과 딸을 키우면서 얼마나 많은 날을 한숨과 눈물로 지셨던가.
부인은 가끔 기대가 섞인 목소리로 “너희 아버지가 어딘가 살아계시기는 하실 터인데…” 하며 눈시울을 적셨다.
행여나, 행여나 하며 기다리다가 하는 수 없이 집 떠난 날을 제삿날로 잡아 제사는 지내면서도 문득 남편이 사립문을 밀치고 들어오는 환상을 얼마나 그렸던가. 이러한 부인의 마음이 통했던 것일까. 스님은 어느 해부턴가 집을 떠나온 날은 해마다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스님이 날짜를 챙겨서 새 옷으로 갈아입는 날은 머리를 깎고 스님으로 태어난 날과 이 날이었다. 시자들은 이 날을 무슨 날인지 궁금했다.
“방장스님, 오늘이 무슨 날인데 새 옷을 갈아입으십니까?”
“응, 내가 속가를 떠나온 날이야. 꿈을 꾸었는데 내가 속가에를 갔더라구나. 가서 보니 커다란 상에 음식을 골고루 장만했어. 대접을 잘 받고 왔지. 아마 내가 떠난 날을 잡아 제사를 지내는 모양이야.”
이렇게도 세속 인연은 질긴 것인가. 손자를 눈앞에 두고 돌아누운 효봉 스님의 마음은 어떠할까. 인생무상을 절감하는 것일까. 오랜 수행을 했으니 모든 것을 초월해서 마음에 아무런 물결도 일지 않을까. 스님은 ‘무(無)라, 무(無)라’만을 부를 뿐 그 이상 입을 닫고 말을 하지 않았다.
손자며느리는 서울에서 내려오며 스님에게 잠옷을 만들어주려고 융으로 싼 옷감을 가지고 왔다. 몸의 크기를 모르니 재어보고 만들어 주려는 생각이었다. 이 당시 융은 보드랍고 따뜻해서 스님도 솜옷의 안쪽에 융을 댄 옷을 즐겨 입었다. 손자며느리는 그날 밤 꼬박 밤을 새워서 잠옷을 지었다.
손자와 손자며느리 그리고 증손자가 떠나고 난 뒤에도 스님은 아무런 말 한마디도 없어 부쩍 무(武)자 화두를 쉬지 않았다. 그러나 기력은 마지막 꺼져가는 촛불처럼 아물거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스님은 하루 한 끼 드시는 공양마저 거추장스러운 듯하였다. 오직 무(無)자 화두를 들고 가부좌를 튼 채 앉아 있었다.
스승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구산 스님이 말문을 열었다.
“스님, 이제 곧 큰아들도 만나보게 될 것입니다. 일본으로 급히 연락을 했습니다. 기력을 회복하셔야지요, 방장스님!”
“공연한 소리들 하는구나. 때가 되면 가야지…”
“방장스님, 가시기 전에 한 말씀 남기셔야죠.”
“나는 그런 군더더기 소리 안 하련다. 지금껏 한 말들도 다 그런 소린데….”
스님의 표정이 밝아지며 어린아이 같은 맑은 웃음이 잔잔히 입가에 돌았다. 그리고 이렇게 읊었다.
五說一切法(오설일체법) 내가 말한 모든 법
都是早騈拇(도시조병무) 그것 모두 군더더기라네.
若間今日事(약문금일사) 오늘 일을 묻는가
月印於千江(월인어천강) 달이 일천강에 비치리
이것이 스님의 마지막 열반송(涅盤頌)이다
“나 오늘 갈란다.”
서기 1966년 10월 15일 음력으로는 9월 초이틀 새벽 세시. 예불모실 시각에 스님은 이승과 저승의 문턱에 서 있었다.
“얘! 거기 누구 없느냐 ? 나 좀·일으켜다오.”
밤새 곁에 었던 시자가 부축해서 일으켜드리니 평소에 정진하던 자세로 가부좌를 툴고 앉았다. 그리고는 구산스님을 찾았다.
“나 오늘 갈란다.”
지긋이 눈을 감고 바른손에는 손때 묻은 호두알을 천천히 굴렸다.
따르록, 따르록, 따르록…~
호두알 굴리는 소리와 화두 드는 소리가 엇갈리기도 하고 서로 겹치기도 하였다.
“무( (無) )라, 무라, …”이렇게 시간은 무겁게 흘렀다. 스승과 제자의 문답이 오고갔다.
날이 밝아 아침이 되어서도 가부좌를 튼 자세는 그대로 흐트러지지 않았다. 오전 열시. 문득 호두알 굴리던 소리가 멈추었다. 그리고 표정이 굳어졌다.
효봉스님은 이렇게 열반에 들었다. 세속의 나이 일흔 아홉, 법랍 42년.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신 것일까. 천황산 골짜기에서 108번의 열반종소리가 하늘로 은은히 울려 퍼졌다.
이날따라 사명대사의 추제(秋祭)가 있는 날이어서 밀양 읍내는 물론 원근의 많은 신도들과 유지들, 그리고 학생들이 표충사 추제를 시작하는 종소리로 알았으나 효봉 스님의 열반종소리임을 뒤늦게 알고 모두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여 묵념을 올렸다.
출처 : 효봉(曉峰) 스님 이야기(불일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