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길 13기 순례로 인한 두 달 간의 휴지기를 끝내고 다시 만난 평화의길 순례단원들의 얼굴엔 11월의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했던 하루였습니다. 도시보다 농촌에서의 가을이 더 열정적이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도 잠시, 한 겹씩 옷을 벗어낼 정도로 벅차게 오르는 기온으로 앞으로 겪어나갈 계절이 우려되기도 하였는데요. 우리가 다니는 순례 길이 기온의 변화를 여실히 체감하며 다니는 여정이기에 더욱 상심스러웠던 것 같습니다. 여튼,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아직 떠나지 않은 이 가을, 좋아하는 원두를 내려 따뜻하게 손에 든 커피를 들고 오래도록 낙엽 속에 앉아 있고 싶은, 농밀한 가을 정취를 만끽한 하루였어요.
오늘 우리는 희망의순례자 마지막 29번째 여정을 다녀왔습니다. 바로 진안리 성지입니다. 그와 연계하여 청주 교구의 연풍 순교 성지, 안동 교구의 여우목 성지, 마원 성지를 같이 두루 돌아보았습니다.
연풍순교성지
우리는 평길단은 4시간을 바쁘게 달려 겨우 11시 미사 시간에 맞춰 연풍 순교 성지에 들어섰습니다. 정갈하게 꾸며진 아담한 성지가 ‘아... (우리) 성당이구나!’ 하는 반가움이 드는 곳이었어요. 어느 지역을 가더라도 성당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우리 집 같은 익숙함과 특별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연풍’은 ‘연이어 풍년이 드는 곳’이라는 매력적인 지명을 가진 곳으로, 박해 기간에 신앙을 지키려는 선조들이 문경새재와 이화령을 넘어 피신해 들었던 곳입니다. 지리상으로 한양까지 연결되는 길이었으며, 최양업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 칼래 강 신부는 연풍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며 교우촌을 순방하였다고 합니다. 행정구역상 현에 이를 정도의 큰 행정 구역이었던 연풍은 병인박해 때에 수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순교한 곳이기도 한데 그중에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성인은 황석두 루카 성인입니다.
연풍의 병방골이 고향인 황석두 루카(1813~1866년) 성인은 과거 급제를 위해 한양으로 가던 중 한 주막에서 만난 선비로부터 천주교 신앙을 전파받고 감화되어, 부친이 “천주학을 버리든지, 작두날에 목을 맡기든지”라고 강요하자 “결코 진리를 버릴 수는 없습니다”라고 하며 칼날에 자신의 목을 들이밀 정도의 신심을 드러내었습니다. 이후 부인과 동정 부부로 살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을 뒷받침하며 전교 회장으로서 일생을 교회에 헌신하다가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신부, 장주기 요셉 회장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성인의 시신은 갈매못에서 홍산면 삽티를 거쳐 고향 병방골로 이장되었다가, 1979년에 묘가 발견되어 3년 후 연풍 순교 성지에 모셔졌습니다.
권상우 베드로 주임신부님의 나긋하지만 결코 나긋하지만은 않은 열띤 성지 설명과 그보다 더 나긋하지만 또 나긋하지만은 않았던 후원독려송을 들으며 열기 가득한 미사를 드린 후, 우리는 올갱이국과 맛난 찬의 점심 식사를 하고 여우목 성지로 향했습니다.
여우목 성지
문경새재에는 안동 교구에 속하는 여우목 성지, 마원 성지, 진안리 성지 - 세 곳의 순례지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중 여우목 성지는 성인 103위 중 이윤일 요한 성인과 서치보 요셉 가정에 의해 이루어진 교우촌입니다.
문경과 충북 단양의 경계를 이루는 대미산의 여우목 고개는 험준하기로 유명한데, 예로부터 경상도 사람들이 서울에 가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거쳐 새재고개를 넘어가야 했다고 합니다.
1839년 기해박해를 피해 충청도에서 이윤일 요한 가정이 여우목으로 이사를 왔고, 경상도 초대 교우였던 서치보 요셉 가족도 피난을 오면서 여우목에 자연스럽게 교우촌이 형성되었습니다. 이후 서치보 요셉과 대구 감영에서 옥사한 아들 서인순의 묘를 이곳으로 이장하면서 여우목이 성역화가 되었는데, 순교가 아니라 병사한 서치보 요셉의 묘소로 인해 정확한 위치가 추정 가능했다고 합니다. 이윤일 요한 성인의 묘는 대구 관덕정 순교 기념관에 안장되어 있습니다.
여우목 성지로 들어서는 길 초입에는 머리에 십자가를 매단 지팡이가 있습니다. 혹시 숲에 뱀이나 독충이 있을까 하여 순례객들을 위해 마련해 놓은 것인데 작은 것 하나 놓치지 않는 안동 교구의 정성이 느껴졌습니다. 돌아본 세 곳의 성지 모두 작지만 따뜻함이 느껴진 이유도 그것입니다.
마원 성지
문경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된 것은 1801년 신유박해 이후, 경계인 충청도 지방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산이 깊은 문경에 찾아들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영남 북부지방은 예부터 산이 험해 천주교 신자들이 관군을 피해 숨기 적합한 곳이었습니다. 백화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마원 성지도 여우목 성지처럼 산과 골이 깊어 교우들은 화전을 일구며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던 곳입니다.
1866년 병인박해의 서슬퍼런 탄압은 새재고개를 넘어 백화산 자락까지 들이닥쳤고 교우들은 충주, 상주, 대구 등지로 압송돼 끔찍한 고문과 함께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많은 교인들이 순교의 길을 택했습니다. 마원 성지는 당시 경상북도 지방을 담당하던 칼레 강 신부를 모시고 피난을 하다가 잡혀 순교한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있는 곳입니다.
박상근 마티아는 경상도 문경에서 하급 관리를 지냈으며 중년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착실한 천주교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병인박해 시 숙모 마리아와 친척 박 막달레나와 같이 체포되어 상주로 끌려가 옥살이를 하던 중 교수형으로 순교하였고, 당시 박상근 마티아의 나이 30세였습니다. 이후 100년이 넘어 1985년 박상근 마티아의 묘가 마원리 문중 산에서 발견되었고, 안동 교구는 마원에 순교 성지를 조성하기로 하여 지금의 마원 성지가 조성되었다고 합니다. 성지는 작지만 어여쁘게 잘 관리되어 있었고, 햇살이 나무 사이사이로 내리비치는 정경이 신비감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진안리 성지
희망의순례자 29번째 여정지인 진안리 성지는 최양업 신부님이 선종하신 곳입니다.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49년 중국 마카오에서 사제 서품을 받고 입국 시도 다섯 번 만에 성공해 교우촌을 찾아다니며 사목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낮에는 숨어 지내고, 밤에는 교우촌을 찾아 성사를 주는 생활은 고달프기 이를 데 없었고 박해 시대의 가혹한 사목 현실에 녹초가 되기 일쑤였을 것입니다. 그는 1861년 한양에 있는 베르뇌 주교에서 사목 보고를 하러 가다 문경새재와 이화령 고개의 갈림길인 진안리 오리터 주막에서 약주 몇 잔과 약간의 음식을 얻어먹고 큰 병으로 쓰러졌다고 합니다.
쁘레디시움 신부님의 자료에 의하면 박해 시기에 정확한 지리적 장소를 알리지 못하는 현실에서 최양업 신부님의 선종에 대해, ‘내가 머문 곳(베론)에서 180리 떨어진 어느 작은 고을에서 예수, 마리아를 두 번 외친 후 (장티푸스로) 선종하였다.’고 전합니다. 추정컨대 지역적으로 마원에서 떨어진 외곽 지역에 있는 작은 주막을 지칭하는 것으로 주막집 후손들의 간헐적 진술을 토대로 그 터가 있었던 현재의 장소에 진안리 성지를 조성하였다고 합니다.
프랑스에서 순례를 마치고 돌아온 안동 교구 소속의 정도영 베드로 신부님과 절묘하게 만남이 성사되어 성지에 대한 해설을 들을 수 있었는데, “가슴 속에 교회를 세우고,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 바로 ‘성사’다”, 라는 감동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척박하고 초라한 성지에 순례객도 좋지만 신부님들이 순례했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들으며 시노달리타스 운동을 굳이 외치지 않더라도 실천하는 행동에서 신자들에 대한 사랑과 그가 하고자 하는 열심한 본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진정한 목자의 삶 중에 계신 것이지요. 신부님의 열정 가득한 사목 활동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순례를 위해 풍동성당 미인 5분(이지영, 김미자, 장성심, 홍순진, 한선희)께서 아침 식사 대용으로 맛있는 콩떡을 준비해 주셨고, 금촌성당 이은옥 수산나 자매님께서 건강 음료수를 준비해주셨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매듭 묵주팀에서 준비한 묵주는 성당 없이 성지를 관리하고 계시는 정도영 베드로 신부님께 봉사자들에게 쓰시라고 전달해 드렸습니다. 뜻깊은 봉헌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우리들의 여정에서 떨어진 낙엽을 보며 길 위에 어여쁜 꽃이 피었다는 표현으로 주님이 베푸신 만추를 만끽하신 우리 평길단원들, 4곳의 성지를 연이어 방문하는 긴 여정임에도 피곤을 달래며 한마음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또한 13기 신앙의길을 완주하고 늠름히 귀환하신 봉사자들과 신규 단원들 진심으로 수고하셨고 환영합니다. 다음 달에 베론 성지에 들리겠지만 이미 희망의순례자 30군데를 완주하신 단원들께도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완주하지 못하신 단원들도 연이어 순례를 이어가 꼭 완주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오늘 방문한 성지가 많아 글이 길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 읽으시느라 고생하셨구요. 다음 달 12월에는 정기 순례와 정기 총회, 송년 회식까지 중요한 일정이 있는 달입니다. 꼭 참석하여 새로운 임원단 선출 등 주요한 안건들에 자신의 귀중한 의견을 보태어 한발 더 발전하는 평화의길 순례단이 되는데 기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건강 잘 챙기시어 12월 순례에 반갑게 만날게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