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회암 바윗덩어리 앞에서
사위가 물속처럼 고요하다. 입춘이 지났다고는 해도 산그늘마다 하얀 눈이 쌓여있다. 그 흰 눈이 커다란 응회암 바윗덩어리를 바라보는 내 마음을 원시로 데리고 간다.
바위 밑 응달쪽에도 잔설이 있다. 눈과 이어진 바위 아랫부분에 습기가 번진다. 습기 때문인가 이끼의 파란색이 더욱 선명하다. 그 위 가느다란 바위틈 사이로 뿌리를 내린 마른 풀잎이 바람에 떨고 있다. 사철 푸른 잎을 달고 있는 소나무 외에는 봄을 알리는 연초록의 새싹이나 나뭇잎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도 응회암 바윗덩어리 앞에서 봄을 맞이하고 있다.
지난겨울은 몹시 추웠다. 추위를 이기지 못해 겨우내 집에 머물렀다. 아직 추위가 꼬리를 길게 드리우고 있으나 용기를 내 달비골 입구까지 와 지구의 원시를 본다. 숨 쉬고 있는 바위, 살아있는 바위, 내 삶보다 더 아프고 괴로운 삶을 그 무게만큼이나 침묵하며 견뎌왔을 바윗덩어리 앞에 서 있다.
바윗덩어리 위에 소나무 한 그루 설 수 있기까지 참 많은 세월이 흘렀다. 소나무가 먼저 마음을 열고 여기에 삶의 터전을 잡고자 했는지, 바위가 심심해 먼저 땅이 좀 척박하더라도 같이 살자고 했는지 나는 모른다. 지금 이 자리에 함께 있음이 기적 같다는 생각이다.
소나무는 좁고 가늘게 벌려진 바위틈 사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거센 바람이라도 불면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하나, 하늘 향해 두 팔을 벌리고 웃고 있다. 솔잎은 가는 바람에도 몸을 흔들며 추위 속에서도 햇빛을 받아 광합성을 한다. 나무줄기에 층층이 달고 있는 가지의 흔적 따라 몇 년 생이나 되었을까 헤아려 본다. 적어도 이십여 년은 더 되었음이 확실하다. 좋은 토양에 씨앗을 박은 다른 소나무에 비해 수관이 형편없고 줄기가 가늘고 수고가 작다.
오래된 이야기다.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을 때다. 학부형은 대단히 흥분하고 있었다. 자기 아이를 때린 학생은 공부도 잘하고, 옷도 잘 입고, 동네 부잣집 아이란다. 자기 아이가 부잣집 아이한테 맞은 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라, 선생님들의 편견이 더 분하다며 악을 쓰고 있었다. 오랜 시간 상담을 하면서 아픈 마음을 달래주고, 가슴에 응어리진 이야기를 들어준 후에야 그는 바위에 선 소나무 같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이 가난하게 태어났고, 그 가난을 이겨볼 욕심으로 온갖 고생하며 열심히 살았으나 아버지보다 별로 나아진 게 없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신은 처음부터 너무 척박한 땅에 뿌리를 내렸다. 자기 아이가 부모를 잘 못 만나 이렇게 차별받고 있다며 울분을 토했다.
식물의 씨앗이 좋은 토양에서 자랄 때와 자갈밭에서 싹을 틔워 자라는 모습이 너무 다름을 봤다. 동물도 같다. 먹을 것이 많고 안전한 곳인지, 먹을 것이 귀하고 주위에 자기보다 힘센 짐승이 많아 늘 불안 속에 사는 것은 삶의 질이 다를 수 있다. 바위틈에 뿌리를 내려 사는 소나무가 어떻게 여기밖에 자리를 잡을 수 없었는지 안타깝다.
응회암 바윗덩어리와 소나무의 만남을 다시 생각한다.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화산이 폭발했다. 그때 나온 먼지가 쌓여 수억만 년을 서로 엉키어 떨어질 줄 몰랐다. 그러다 또 다른 폭발로 땅속 깊이 들어갔을 것이고 그 위에 흙과 돌이 쌓여 오랜 세월 압력에 눌리고 눌려 바위가 되었다. 그 바위가 융기 현상으로 다시 지표면으로 나와 풍화되어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이곳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그리고 수억 년 바위로서 단단함을 자랑하다 표면에 먼지가 쌓이고, 거기에 태양열에 의해 수분이 생겼다. 이 같은 현상의 반복으로 표면의 먼지가 날아가지 못하게 되자 지의류가 붙어 바위 위에 생명이란 것이 처음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바위에 붙은 지의류가 수 억 년 동안 자리하고 있는 사이, 삶의 여건이 조금 나아지자 이끼류가 찾아와 자리 잡게 되었고, 다시 수 억 년이 지나자 외떡잎식물과 쌍떡잎식물이 찾아와 함께 살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바위 옆에는 무덤 두 기가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입춘이 지나 다소 따뜻해진 날씨에 봄볕을 받는 모습이 평화롭다. 어느 집 조상인지 터를 잘 잡았다는 생각이다. 좀 불안한 것은 앞에 난 길이 너무 가까워 사람들이 편리를 핑계 삼아 길이라도 넓히게 되면 죽어 잡은 터마저 오래 보전하지 못하고, 살은 섞어 없고 뼛조각 몇 개 남은 시신이 어느 산천에 다시 묻히게 될까 걱정스럽다.
그 불안함은 무덤만이 아니다. 길과 경계를 이루며 낭떠러지 위에 붙어 있는 바윗덩어리도 같은 운명이다. 인간은 언제라도 필요하고 편리하다면 길을 넓힐 수 있다. 이곳 길이 넓어지게 되면 바위도 제자리를 보존할 수 없고, 바위 위에 있는 못생긴 소나무도 생을 마감할 수밖에 없다.
공연한 걱정이 아니다. 길 건너편에는 터널 공사가 한창이고, 먼지막이 천 조각 사이로 보이는 굴속에 흙을 가득 실은 대형 화물 트럭이 분주히 들락거리고 있다. 터널이 완공된 후 여기가 갑자기 개발이라도 된다면 상황은 언제라도 돌변할 수 있다.
응회암 바윗덩어리가 자기의 몸에 소나무 한 그루 붙이고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살기 위해 보낸 세월을 생각해 본다. 지구의 자연적인 변화와 인간이 편리를 위해 무분별하게 훼손시키는 속도의 차이에 숙연함이 느껴진다. 그래도 봄은 오고 있다.♡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