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유재란역사 답사지 -난중잡록의 저자 」
** 의병장 조경남 장군 **
- 남원시 이백면 소재 의충사(義忠祠) -
※ 난중잡록조경남 장군을 배향하고 있는 남원시 소재 의충사 답사.
1. 일 시 : 2021. 3. 11.(목) 09:30 ~ 17:00
2. 장 소 : 남원시 이백면 초촌길 706-7. // 조경남 장군 묘역(063-625-5965)
(사)정유재란역사연구회
▣ 의병장 조경남 장군 의충사(義忠祠)
** 남원시 이백면 의충사(義忠祠) 조경남(趙慶男, 1570~1641) 장군을 찾아서....
예부터 남원은 지리적으로 천혜(天惠)의 요새를 방불케 하는 조건을 지닌 고을이다. 동으로는 백두대간 지리산, 서쪽으로는 섬진강의 상류인 요천강이 흐른다. 전주, 구례, 운봉, 장수로 통하는 길목이다.
이 때문에 조선시대 교통 통신제도인 역참이 설치됐던 군사적 요충지다.
이곳이 유학자이면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의병장이었던 산서(山西) 조경남(趙慶男, 1570~1641) 장군의 고향이기도 하다. 남원에서 가다보면 오동초등학교를 가기전 굴다리 400m전 커브길 우측으로 보면 의충사 조경남 장군 묘역 1km라는 이정표를 만난다.
< 장의문 >
** 우회전하여 조금 직진하면 의충사의 홍살문이 나온다. 홍살문을 지나면 바로 주차장이다. 주차장 앞에 가로막고 있는 외삼문은 장의문(仗義門)이다.
< 사적비 등 비군(碑群) >
< 경모재(景慕齋) >
< 강당(講堂) >
** 조경남 장군은 1570년(선조 3)~1641(인조 19). 남원군 주천면 내송리(당시 남원도호부)에서 태어났다.
조선 중기의 무인이며, 본관은 한양(漢陽), 자는 선술(善述), 호는 산서(山西)·산서병옹(山西病翁)·산서처사·
주몽당주인(晝夢堂主人)이다. 아버지는 사직 벽(璧)이며, 어머니는 남원양씨이다.
** 조경남은 6세 때 아버지 조벽, 13세 때 어머니가 세상을 뜨자 이때부터 외조모 손에 양육되었으나, 그
기상이 활달 하였다라고 전하고 있다. 장군은 사대부 가문에서 태어나 사대부 의식이 투철하였을 뿐만 아니라
문재(文才) 또한 뛰어났다고 한다.
10세에 진사 유인옥(柳仁沃)에게 입문해 글을 써 남을 놀라게 했다. 13세에는 난리를 예견하여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18세에는 자수성가한 조선 중기 문신이자 의병장 조헌(趙憲)의 문하로 들어가 의리와 도덕을 터득했다.
39세에 향시(鄕試) 양장(兩場)에, 45세에 삼장(三場)에 합격하고서도 광해군의 어지러운 정치를 비난하고
벼슬하지 않았다.
< 의충사(義忠祠) >
< 조경남 장군의 영정 >
** 인조반정 후 54세에 겨우 진사에 등과 하였으나 세상과 인연을 끊고 방장산(方丈山) 용추동(龍湫洞)에 별업(別業)을 짓고 산서병옹이라 자처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삼학사(三學士)의 심양(심陽) 순절 소식에 충의를 읊기도 하였다. 사후 주포서원(周浦書院)에 향사되었다.
**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정유재란 최초의 의병장인 조경남은 원래 남원에 살던 28세 평범한 서생이었다.
그러나 1592년, 수많은 사람들의 운명을 뒤흔들었던 전쟁의 소용돌이에 그의 인생도 전환점을 맞게 된다.
남원부 관아에서 서기일을 하면서 보고들은 모든 소문과 상소, 격문을 일기에 기록해가며 패전에 울고 승전에 웃으며 점차 자신도 그들처럼 싸우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 조경남 선생의 신도비 >
** 그러나 막상 정유년 8월 왜군이 남원에 들이 닥쳤을 때, 그는 성에 남지 않고 가솔들과 산속으로 피난을
떠났다. 막상 닥치니 겁도 났을 것이고 가장으로서 차마 가솔들을 다 죽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원이 함락되고 한 달간 왜적이 곳곳에서 살인과 약탈을 일삼는걸 보면서 이대로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남원으로 돌아간다.
** 혼자 싸울 수는 없으니 여러 친척, 친구들을 불러놓고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각설하고~ “형님들~ 영남에서 변이 닥쳤을 때 그 사람들은 싸울 줄을 몰라 저마다 자기 살 길만 찾았는데,
서생인 곽재우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많은 적을 베어 많은 고을들을 수복했소. 그런데 우리 고을은 왜적이 본도에 들어온 뒤로 왜적을 토벌하여 사로잡고 목 베어 마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비록 무시무시한 왜적이 득실거려 방책이 없다 하지만 이 땅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맨손으로라도 싸우다 죽어야 할 판인데 우리가 이렇게 숨어있어야 되겠습니까~? 지금 적은 분산되어 있고 길은 험하니, 이곳 지리에 익숙한 우리에게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자~ 모두들 같이 싸웁시다~!!” 라고 외쳤다.
“즉 우리도 할 수 있다 한번 해보자~ 이거죠. 한번 도망친 사람들이라고 다 겁쟁이들만은 아닙니다.”
조경남의 감동적인 연설은 여러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충의를 가진 선비들인 형들은 모두들 일어나 조경남의 어깨를 붙잡으며 “왜적 토벌하고 사로잡고 목 벨 사람을 뭐하려 멀 리가 찾겠나? 우리가 지금 여기에 있는데 ‘응~’ 경남이 잘 가게, 자넨 진짜 충의지사야 멋져. 그럼 안녕히! 우린 영원히 자넬 잊지 않을거야.” 이렇게 환송해 주었다.
< 조경남 장군의 묘 주위 마을 >
** 23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그 해 8월 가산을 풀어 모집한 의병 500여 명을 이끌고 운봉 팔랑치 첫 싸움에서 왜적 100여 명을 전멸시켰다. 이어 육십령 전투에서의 승전을 비롯해 정유재란 때 불우치 매복전, 궁장동 혈전, 하동 추격전, 탄음과 산음의 화공전 등 크고 작은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왜적 수천 명을 섬멸하며 호남을 지킨 명장이 되었다.
** 왜적을 속이고 지형지물을 최대한 이용한 병법과 용병술로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도 단 한차례 패한 적이
없었다. 부하들도 한 명의 희생이 없어 당시 ‘제갈공명의 환생’이라 불렀다. 임진왜란 당시 순국한 의병장
조헌의 주제자인 장군은 적과 맞서 싸우며 왜병을 직접 격퇴한 무패의 의병장이 된 것이다.
< 조경남 장군의 묘 >
** 이 같은 공적을 인정해 조정에서 호조참의(정 3품) 벼슬을 내렸지만 그는 끝내 사양했다. 또한 병자호란으로 나라가 또 위태롭게 되자 67세의 노령을 무릎쓰고 의병을 모아 청주까지 진격했다. 인조가 청에게 항복하는 바람에 통분하여 되돌아 왔다.
< 난중잡록 책 >
** 우리가 알고 있는 난중잡록(亂中雜錄)은 장군이 57년 동안 국내 중요 사실을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서책이다. 직접 체험한 전쟁 종군기이기도 하다. 몸소 견문한 정치, 문화, 사회성을 가식이나 과장 없이 광범위하게
기술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 대해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보다 폭넓게 다루고 있다.
** 이괄의 난, 정묘·병자호란 등 중요 사건과 풍속, 민간생활 등을 상세하게 적어놓아 귀중한 역사적 자료로
평가된다.
** 1649년(인조 27) 선조실록 수정청에서 난중잡록을 빌려다가 8년간이나 참고 사료로 활용했다. 이후 16권 한 벌로 필사해 규장각에 보관하고 나서야 1657(효종 8) 원본을 되돌려 받았다고 한다.
장군은 생전에 많은 책을 썼다. 난중잡록 이외도 성리학 주석 3권, 윤리변 5권, 오상통론과 소견록 각 1권의
저서가 전했으나 화재로 모두 소실됐다. 때마침 첨지중추부사 최시웅이 빌려 간 난중잡록 8권만이 현재 남아 있을 뿐이다.
** 이후 장군은 말년에 지리산 동쪽 초입인 남원시 내송리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틀고 살았다. 인근 지리산
명승지를 두루 찾으며 뜻 맞는 문인들과 교류하며 풍류를 즐겼다. 장군은 1641년 5월 7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그 후 사림의 건의로 사헌부 비평, 승정원 좌승지(정3품), 호조참판(종2품)에 추증됐다. 현재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에는 1986년부터 남원시와 그의 후손들이 기금을 모아 정비한 사당 의충사(義忠祠)와 묘가 있다.
장군이 집필한 ‘난중잡록’은 후손들이 보관하다 현재는 남원시 향토박물관에 위탁보관 중이다. 현재 생존 중인 그의 12대손 조영진(71. 남원시)씨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남원은 물론 인근 지역 곳곳에서 왜적을 섬멸했던 장군의 일화가 ‘조장군 이야기’로 불리며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다”고 말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군의 출생지였던 주천면 은송리에 있는 생가는 아직 복원되지 않고 있어 안타까움이 더한다. 남원시는 하루빨리 이러한 애국충절의 고장이 남원임을 증명할 수 있도록 장군의 생가도 복원하여 명실상부한 의병장 조경남 장군이 거듭 날수 있도록 노력해 주길 바라면서 발길을 돌린다.
※ 유랑자의 2021. 02. 24 다음 카페 기록에서 발췌 함.
※ 의충사 : 전북 남원시 이백면 초촌길 110-9 (지번) 이백면 초촌길 706-7
< 남원성 전투 상황 >
< 난중잡록 책 >
< 전쟁의 참혹한 상항을 기록하다 >
< 산서 조선생 연보 >
< 조경남, 난을 기록하다 >
< 임란기 남원의 인물과 그 기록 특별전을 열며 >
< 정충록 >
< 의병들,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다 >
< 변사정, 의병을 모아 왜군에 항전하다 >
< 안영, 금산전투에서 순절하다 >
< 양대박, 운암전투 승리의 주역 >
◈ 예상 일정 참조
1) 사무실 출발10:00
2) 10:30 구례 산동 산수유마을 11:30
3) 12:00 주천면 송림식당 & 남원 추어탕 13:00
4) 13:30 이백면 조경남 장군을 찾아서 15:00
5) 16:00사무실
※ 운봉 황산벌, 오수 혼불문학관, 춘향이 묘 와 구룡폭포, 천은사, 성삼재 코스
첫댓글 - 정유재란역사 인구회에서, 의병장 조경남 장군을 배향하고 있는
남원시 소재 의충사 답사를 뜻깊게 생각하며, 사진과 해설로 잘되었 올려주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