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
스님은 혼자서도 머리 잘 깎으시데요. 이발사는 직업적으로 스님과 잘 지낼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마주치면 잇몸을 드러내며 인사를 잘도 하는 목욕탕 이발사다. 오늘은 한증탕까지 따라와 말을 붙인다. 경험으로 미루어 이런 경우는 무언가 부탁이 있음이다.
삭발은 삭발염의削髮染衣 즉 머리를 깎고 물들인 옷을 입는다는 말을 줄인 말이다. 공부가 어느정도에 이르면 정식으로 스님이 되어 머리털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로 짧게 깎는 일을 말한다. 속가에 전해지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는 말은 상당부분 와전된 부분이 없지 않다. 면도는 면도칼 이라는 명사이기도 하고, 수염 따위를 깎는 작업을 말하는 동사이기도 하다.
중은 제 머리 제가 깎는다. 수염 깎듯 민다. 신라 때는 사금파리를 썼고 요즘은 면도기를 쓴다. 사나흘 건너 한 번 정도 두부 면도를 한다. 안면의 수염보다 머리카락은 많고 드세다. 그래서 스님들은 면도날 소모가 많다. 스님들이 엄지 척 하는 면도기면 저절로 매상이 오를 법 허건마는 면도기 회사는 ‘중머리’를 모델로 쓸 요량을 하지 않는다.
스님이 되려면 행자行者과정을 거쳐야 한다. 행자가 어린 머슴애인 경우 사미승 이라고도 하는데 산스크리트어로는 스라마네라Sramanera라고 한다. 스님이 되기 전 스님의 일을 도우며 불법을 공부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행자 생활은 시집살이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뒤돌아보면 수련이었고, 싫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꿋꿋이 이행함은 불도의 바탕이었다. 연령불문 먼저 출가한 선배를 존중하고 본받음은 겸손을 실천하는 교양함양이었다. 한 자 두 자 경전을 익힘은 삶의 이치를 배우고 닦으므로 하여 실행 가치가 충만해지는 시간이었다.
주민등록 나이는 통하지 않는다. 평등을 실천하는 기본은 스님이 된 지 몇 년 됐느냐이다. 지켜야 할 일거수일투족은 과거 속가 시절 그 어느 때보다 엄중하다. 자신에 대한 성찰이 처절하게 배어드는 시간이다. 스님 세계의 위계질서가 문란하면 도가 서지 않고, 군인이 자유로우면 국방이 무너진다. 분방한 자유를 통제하여 체계적 질서를 구축하는 시스템이 행자과정에 적용된다.
통제를 통한 자유를 유지 하기위한 방편으로 규율이 얼마나 훌륭한 시스템인지 체험하고 익히는 기간이다. 이 기간을 비뚤어지지 않게 견뎌내어 시험을 통과하면 수계受戒를 한다. 수계는 승려로서 지켜야 할 계율에 대한 서약이다. 계를 주는 수계사授戒師, 계단戒壇에 대한 여러 가지 작법을 가르치는 교수사敎授師, 그 작법을 실행하는 갈마사羯磨師와 그 자리에 입회하여 그의 수계를 입증하는 삼사칠증三師七證이 필요하다. 대외적인 선포의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다짐하는 지고지순한 절차이기도 하다.
이 때 거룩한 삭발식을 거행한다. 이 삭발이야말로 제 손으로 못한다. 이 경우의 삭발을 두고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 라고 한다. 큰스님이 우선 첫 가위질을 시작한다. 두어 줌을 자르고 나면 사숙이나 사형이 삭발을 마무리한다. 세상사람 모두가 모든 인연 다 끊고 세상을 등진 채 출가할 수는 없다. 스님이 되려면 속세 인연 몽땅 자른다. 뽐내던 지식도 남김없이 잘라낸다. 마침내 머리카락까지 자르고 공부를 한다. 탈속脫俗이라 하지만 달관의 세계를 추구한다.
나도 한 소식 만나 부처 돼 보겠노라고 사생결단을 서슴지 않는 도전이다. 기도할 때나 인사를 할 때는 합장을 하지만 헤엄을 칠 때는 스님도 두 손을 벌린다. 당연히 밥을 먹을 때도 손은 입으로 향한다. 먹은 만큼 발생한 우환을 해우소에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때로는 속인과 같아 보여도 행주좌와行住坐臥 자초지종 부처님 법식을 좇는다.
세신사와 이발사가 종일 마주 보고 있으니 별의별 이야기가 오고 갔겠지. ‘왜, 세신사 에게는 때 밀기를 시키면서 이발사에게는 면도를 맡기지 않느냐’는 트집인가. 내가 되물었다. “스님이 혼자 면도하는 게 이상했던가 보군요.” 이발사가 얼버무리듯 대답한다. “안 보이는 부분은 힘들 텐데 싶어서요.” 겸연쩍어 할 필요 없다는 식으로 내가 웃으며 말했다. “별소리 다 듣겠네요, 면도를 눈으로 하나요 손으로 하지요.”
이발 손님 유치하려고 하는 말이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이발 한지 오래돼서 요금도 모르겠네요.” 하였더니, 아니나 다를까 “하이고 스님, 마아 해 드리겠습니다.” “무슨 말이 그래요. 알뜰살뜰 벌어서 자식들 공부시켜야지요.” “이발은 불경기가 없습니다. 코로나하고도 상관없어요.” “그럼, 며칠 후 한 번 밀어주세요. 그리고 아들, 딸 이름과 생년월일시를 내 폰에 보내놓으세요. 삯도 안 받는다는데 아이들 진로나 한번 봐 주고 싶군요.”
아들놈 진학과 마누라 건강이 걱정이란다. 아들은 성격이 활달하고 손끝이 매워 이공계로 진학하는 것이 유망하겠다고 말해 주었다. 중학생이니 진로 결정을 적기에 물어온 셈이다. 마누라는 비만하고 혈당이 높아 약을 달고 산단다. 아직 젊으니 약에 의존하기보다 현미밥과 양배추를 꾸준히 먹으면서 매일 만 보 걷기를 생활화하도록 일러 주었다.
갱의실에서 물어도 될 일을 겸연쩍음을 감추고자 탕에까지 따라와 ‘중 머리’를 빌미 삼았다. 잘 마른 밤싸라기 냄새, 화로에서 익어가는 고구마 냄새, 내 어릴 적 나눔의 냄새다. 겨울밤 아랫목에 모여앉아 깔깔거리며 맞장구치던 그 시절. 내 생애에 가장 허심탄회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이발사는 내 기억 속 냄새를 풍기며 곁으로 다가왔다.
단도직입 시대에 예의를 갖추느라 슬쩍 우회하여 점잔을 흉내 내는 격식이 어색했다. 그럴 땐 어른이 먼저 담을 허물어 주는 게 자연스럽다. 중이 제 머리 못 깎는 다는 속담을 핑계 삼아 이발사에게 면도를 맡겨봄 직도하다. 세신사 에게 등을 맡기듯 또 하나의 소통이. 이렇게 또 한 사람 정 나눔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