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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밀알감리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류창원권사
강화 교산교회, 존스 기념예배당과 옛 교회 (박물관 예정)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워 놓았고, 1892년에 그의 후임으로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해 왔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그 즉시 실천에 옮겨 강화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리 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장조계를 조직한 바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계도 실패하고 교인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50명의 계원중 유독 이승환이라는 성도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이승환 성도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강화 선교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올 수 있었다. 우선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최초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 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의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말에는 존스와 스크랜톤(W.B.Screanton, 시란돈 施蘭敦) 두 선교사가 이미 강화교산교회에 와서 유숙한 바 있고, 내리교회 백헬란 전도사는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을 교회 창립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창립된 다음 해인 1894년에는 이미 교항리에 초가 12간을 구입해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다. 이승환씨는 그후 매서인이 되어 전도에 힘쓰다가 1898년에는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강화 교산교회 계삭회 소속으로 권사 직분을 받는다. 술집 주인 이승환이 변하여 어엿한 권사님으로 존경받게 된 것이다. 이승환 권사는 더욱 전도에 열중했다. 주로 강화, 인천, 옹진지역을 중심으로 전도하다가 1901년 이후부터는 주로 영종, 삼목, 용유등 인근 도서를 돌면서 몇 개의 교회를 세운다음 1908년경에 영국 성서공회를 통해 이민해 가고 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하튼 강화 지역 교회들은 이승환 권사를 통해 복음이 최초로 전래되었다는 데서 그의 공로를 오래도록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존스 기념예배당과 옛 교회 (박물관 예정)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창립 110주년 존스기념 예배당 봉헌예배
구 교회
구 교회
구 교회
옛 교회 종탑
구 교회 내부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
강화의 양반 중 선상세례의 과정에 감명을 받은 이가 있었다. 벼슬을 하지 않고 초시 신분으로 교항(현 교산)에 서당을 차려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 영향력을 끼치던 김상임이 바로 그다. 김초시는 이승환 모자에 대한 존스 선교사의 사려 깊은 행동을 본 이후 한문성경을 전해받고 읽은 가운데, 자신이 찾던 ‘정감록’의 ‘십승지지’란 주요 비결이 바로 성경의 ‘십자가지도’ 임을 깨닫고 개종을 결심한다. 이후 김상임이 마을의 가신과 산당을 불사르고, 말씀 공부에 집중한 결과 교산교회 신앙공동체의 교인 수가 급증하게 된다. 서민층 일색이던 신앙공동체에 양반층이 합세하며 강화교산교회는 복음을 전 지역으로 확산시키게 된다. 김상임은 존스 선교사의 배려로 인천의 신학회와 평양의 신학회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1902년 4월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감리회의 한국인 3대 목사후보가 됐으나, 목사안수를 몇 달 앞두고 전염병이 창궐한 마을의 심방을 갖다가 감염돼 55세를 일기로 소천한다. 이후 교산교회 성도들은 김상임을 강화의 바울로 부르며 그의 신앙의 길을 따르며, 연이어 홍의교회(1896)를 거쳐 고부교회(1897) 상도교회(1899) 등 강화 전 지역의 교회개척을 위해 헌신하며 강화 어머니교회의 역할을 감당하게 됐다.
김상임 전도사 공덕비 후면
교회내부
교회내부 제단
교산교회 역사 전시실 (교회현관)
1917년
강화군 교산리교회 역사, 1917.5. 박봉래 목사 편찬
강화군 교산리교회 역사, 1917.5. 박봉래 목사 편찬
1925년 교적부
1943년
1943년
1950년 교적부
1950년 당회록
1952년 교회일지
1962년
1967년
1967년
1968년
리브가 권사
1939년 개역성경
역대 담임목사
역대 담임목사
교회 100년사
김상임 전도사
깅화중앙교회 역사자료관에 가면 강화선교의 개척자인 김상임전도사 사진을 볼 수 있다. 이는 최초로 공개된 귀중한 자료이다.
이은용장로의 노고로 김상임전도사의 손자인 김예기목사께서 기증하신 사진이라고 한다
김상임 전도사 묘
김상임 전도사 생가, 현재는 직계자손이 살고있다.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교항교회 (현 교산교회)에 김상임 전도사가 자기 집과 토지를 바친 문서 (강화중앙교회 역사자료관)
교항교회 (현 교산교회)에 김상임 전도사가 자기 집과 토지를 바친 문서 (강화중앙교회 역사자료관)
존스 선교사 (조원시 선교사)
조원시 목사의 노년기 모습
김찬희 박사가 입수, 지난 7월18일 인천내리교회에서 열린 '내리교회 창립 12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에서 처음으로 공개 했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조원시 (존스) 목사는 1888년 5월에 약관 20세의 나이로 선교사로 내한하여 약 5년간 배재학당에서 교편도 잡고 문서출판 사업도 하다가 1892년부터 내리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펼쳤다. 아펜젤러가 선교의 터를 닦았다면 조원시 목사는 그 터 위에 전도와 교육 전반에 걸쳐 괄목할만한 업적을 쌓은 내리의 아버지라 할만한 분이다. 그는 1892년에 한국 최초 초등교육기관인 영화학교를 개설했고 강화, 연안, 해주, 남양 지방에 전도를 시작했고 1894년에는 한국인 자력으로 교회당을 건축 봉헌했으며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조직하여 이동신학교를 개설했고 1901년 성탄절에는 내동 현 위치에 십자가형 벽돌 예배당을지었고 교인 다수가 하와이로 이민함에 따라 홍승하 전도사를 하와이에 파송하기도 했다. 한국 교회 찬송가 보급에도 공한한 그는 그 후 서울에서 신학월보를 창간하고 The Korea Review를 편집발간하였고 서울 YMCA 창립에 공헌했으며 1905년에는 초대 신학당 (현 감신대) 당장에 취임하였다. 조원시 목사는 1919년 5월 뉴욕에서 51세로 별세했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워 놓았고, 1892년에 그의 후임으로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해 왔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그 즉시 실천에 옮겨 강화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리 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장조계를 조직한 바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계도 실패하고 교인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50명의 계원중 유독 이승환이라는 성도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이승환 성도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강화 선교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올 수 있었다. 우선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최초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 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의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말에는 존스와 스크랜톤(W.B.Screanton, 시란돈 施蘭敦) 두 선교사가 이미 강화교산교회에 와서 유숙한 바 있고, 내리교회 백헬란 전도사는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을 교회 창립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조원시 (존스) 선교사 흉상, 인천 내리교회
존스 선교사 (조원시 선교사) 가족, 1895년 출생한 장녀 캐서린과 부부 (출처- http://cafe.daum.net/coreasan1)
1905년 하와이 이민을 방문한 존스 목사내외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로 인천 영화여학교 설립자이다.
존스 목사의 부인인 벵겔선교사 82세때 모습
선상세례가 있었던 장소 (출처- http://www.kyosan.zc.bz/)
미 감리회 소속으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다음으로 한국을 찾은 존스 선교사는 제물포지방 감리사로 활약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어에 능통하여 한국어사전 편찬, 한국 역사와 문학, 철학과 종교 분야에 관해서도 깊이 있는 저술을 남겼다. 강화지방 선교역사는 존스 선교사와 함께 그에게 복음을 전파 받은 강화 출신의 주막집 주인 이승환과 관련된다. 본인의 직업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세례를 받지 못하던 이승환이 존스에게 강화에 살고 있는 모친의 세례를 부탁했던 것. 지역 유림들의 반대로 존스 선교사가 강화에 들어오지 못하자, 갯벌에 정박 중인 배에서 한국 옷을 입고 기다리던 존스에게 한 밤 중에 모친을 등에 업고 찾아왔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이승환과 모친이 함께 세례를 받게 된다. 이 장면을 헤스(M.Hess) 선교사는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난폭한 반대로 세례예식은 마을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존스 박사가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은빛 찬란한 달밤에 한 노파의 기쁨의 잔이 넘쳤으니, 이는 죄 씻음 받은 기쁨의 잔이었다. 그녀는 강화의 겨자씨로 불리었다.”
선상세례가 있었던 장소
강화 복음의 씨앗이 되는 이승환의 집터
제물포에서 믿기 시작하여 고향인 서사면 증산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존스에게 선상세례를 받은 이승환은 과연 강화 선교의 '발판'이었다. 존스는 아직은 선교사에게 문을 열지 않는 강화에 제물포교인 이명숙을 전도인으로 삼아 파송하였으며, 이명숙은 증산동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강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강화의 첫 감리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되었다. 바로 이것이 '서사교회'(西寺敎會), '교항교회'(橋項敎會),'교산교회'(橋山敎會),'양사중앙교회'(兩寺中央敎會),등으로 불리다가 현재 '강화교산교회'(江華橋山敎會)로 불리는 강화 첫 감리교회의 시작이다.
강화 복음의 씨앗이 되는 이승환의 집터
교산교회 두번째 예배당 터, 김상임 전도사 생가 인근이다.
교산교회 두번째 예배당 터
강화 기독교 선교역사
보편적으로 한국 기독교의 역사가 그러했지만 특히 강화의 경우에는 복음의 수용과 전파과정에서 강화 토착인들의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역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외지의 선교사나 전도인들이 불모지 강화에 나타나 복음을 전해서 교회가 설립되기보다는, 강화 사람이 외지에 나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고향을 복음화시키려는 의지에서 복음 전도가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감리교회의 강화 선교 개척
한국 교회의 역사는 우리 민족과 기독교 복음이 만나서 이루어진 역사다. 민족의 역사 전통과 교회의 역사 전통이 한데 어우러져 새로운 역사 전통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우리 민족이 기독교(개신교) 복음을 받아들인 19세기 말은 민족의 시련과 수난기였다. 그리고 같은 시기에 다른 어느 지역보다 이러한 민족의 시련과 수난의 역사를 뼈저리게 체험했던 강화에서 기독교 복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강화 기독교(개신교) 복음 선교는 거의 같은 시기에 성공회와 감리교에 의해 개척되었다.성공회의 강화 선교는 1893년 7월에 워너 신부가 갑곶나루에 거처를 마련하고 고아들을 모아 가르친 것으로 시작되었다. 당시 강화에 있던 조선수사해방학당 교수로 영국인 교관들이 와서 활동하고 있어서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이 관청과 주민들로부터 큰 저항을 받지 않고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불과 20여년전, 신미양요를 통해 미국인들과 전쟁을 치른 경험이 있던 강화 사람들은 미국 감리교 선교사들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강화의 감리교 선교는 선교사들이 아닌, 토착 교인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것도 가오하의 정치. 문화.행정 중심이었던 강화읍에서 시작되지 않고 강화 변두리, 서북해안 작은 마을 시루미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시작된 강화 선교는 급속한 속도로 강화 전역에 확산되었으니, 강화 초기 교인들의 적극적인 복음 수용과 전도활동의 결과였다.
1. 미감리회의 강화 선교
<江都誌>는 강화 감리교회의 시작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西曆 一千百九十八年에 合衆國 宣敎師 趙元時君이 自甲串津으로 至南門하니 守門將이 抗拒不人하는지라 回程하야 本都 東北沿岸으로 船行하야 到西寺面 橋項洞하야 金氏家族의게 傳道하야 該地에 敎會堂을 創立하고 敎務를 梢梢壙張하니 東으로 月串, 南으로 砂器里, 東幕, 西으로 注文島까지 敎旗가 遍揚하니라"
연도나 구체적 사건 서술은 교정 되어야 하지만 이 진술은 강화 감리교회 시작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첫째, 미감리회의 존스 선교사가 처음에는 갑곶을 통해 강화읍으로 바로 들어가려 했으나 지방 행정당국의 저지를 받고 실패 했다는점, 둘째, 결국 강화 선교는 강화읍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북쪽에 위치한 서사면 교항동에서 시작되어 그곳으로부터 남쪽으로 확산되었다는 점, 셋째, 교항동의 '김씨 가족'으로 불리는 토착 교인의 개종과 입교로 강화 선교가 가능했다는 점 등이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강화 선교는 선교사들의 입성과 활동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강화 북부 토착 교인의 입교와 전도활동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한국 기독교 선교의 시작이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복음 수용과 전도에 의해 이루어졌다면, 그러한 대표적인 예를 강화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같은 사실은 선교사들의 강화 접근 실패 과정과 함께 강화 토착 교인 출현 과정을 살펴보면 확인된다. 강화를 한국성공회의 '이오나'로 삼고자 강화에 강력한 선교단을 파송했던 영국성공회는 이미 1893년 봄에 코프 주교가 강화를 방문하고 선교가능성을 파악한 후 그해 7월에 워너 신부를 갑곶나루에 정착시켰다. 같은 무렵 미감리회에서도 강화 선교 가능성을 모색하며 인천과 서울을 왕래하는 뱃길 중에 강화를 방문하였다. 특히 1892년 8월에 열린 미감리회 한국선교회 연회에서 인천(제물포)구역 담임으로 임명받고 인천으로 거처를 옮겨 본격적인 서해안 선교에 착수한 존스(G.H.Jones)는 이미 노병일, 김기범, 이명숙, 백헬렌 등 한국인 전도자들에 의해 마련된 선교 터전을 바탕으로 하여 그 영역을 넓혀갔다. 그 과정에서 강화는 그의 강력한 선교개척 희망지역이었다. 당시 한국 선교를 관리하고 있던 스크랜튼은 이미 1892년 말 이전에 존스가 강화 여행을 시도 하였음을 증언하고 있다. 스크랜튼이 본국에 보낸 1892년 12월 21일자 서한이다. "존스 형제는 최근에 제물포로 여행하면서 강화에 들렀습니다. 강화는 [한]강어구에 있는 큰 섬입니다. 그가 보고한 바에 따르면, 강화는 80평방마일 되는 곳에 인구 7만이 살고 있습니다. 이 섬은 선교사들에겐 처녀지(Virgin Soil)입니다." 그렇다면 존스의 1차 강화방문은 1892년 12월 21일 이전에 이루어 졌다는 말이다. 스크랜튼이 '최근에'(recently)라는 말을 쓴 것으로 미루어 1892년 11-12월 경에 이 여행이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존스의 여행보고를 바탕으로 해서 스크래는은 미국 선교본부에 1893년 선교보고 상황을 써보내면서 다음과 같은 전망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제물포와] 이웃해 있는 섬인 강화에는 7만명 주민이 있는데 우리에게 들어오라고 충동하고 있습니다. 강화를 얻게만 된다면 우리에겐 값진 보화가 될 것입니다. 사실 발판은 이미 얻어 놓았습니다." 여기서 스크랜튼이 말한 '발판'(a Foothold)이 정확하게 무었을 의미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선교기지 확보를 의미하는 것 같지는 않으나 나름대로 강화선교 가능성에 대한 확실한 담보를 얻었음을 암시한다. 후에 살펴보겠지만 이 '발판'이 바로 서사면의 '토착 교인'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아무튼 존스는 이미 1892년 12월 이전에 강화 여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그 여행이 곧바로 강화선교와 연결되었다는 흔적은 찻아볼 수 없다. 오히려 앞서 <江都誌>에서 언급했던 바, "趙元時君이 自甲串津으로 至南門하니 守門將이 抗拒不人하는지라"는 선교사 입성 거절을 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존스 자신이 1910년에 미감리회 한국선교15주년을 기념하여 펴낸 <한국 선교 상황>(The Korea Mission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내용이 나온다. 우리 [미감리회]선교사가 제물포 사업을 개척하기 위해 내려갔던 그해에, 그 [선교사]는 복음을 전하기 위하기 위해 강화를 방문했는데, 강화는 인구 5만 명으로 한강 삼각지, 제물포와 서울 중간에 위치한 큰 섬입니다. 그는 어느 날 갑곶이라 불리는 곳에 상륙하여 3마일 정도 떨어진 도성으로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성문을 지키고 있던 수비병이 그를 정지시키고 최고 책임자(강화 유수)의 허락없이는 들여보낼 수 없다고 가로막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성안으로 들어가 거리를 걷고 사람들을 만날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청원서를 써 보냈습니다. 그러나 최고 책임자는 청원서를 손에 들고 나와서, '나는 당신네 서양 선교사들이 뭘 원하는지 잘 알고 있소. 우리 한국 사람들은 당신들이 가져 온 것을 원하지 않소. 당신이 이 섬을 빨리 떠나면 빨리 떠날수록 우리는 좋을 것이며, 당신이 이 섬을 빨리 떠나면 빨리 떠날수록 당신한테도 좋을 것이요.' 하며 요청을 거부했습니다. 이처럼 거부당한 선교사는 한강으로 다시 돌아와 이교도가 운영하는 여관에서 외롭게 이틀 낮 밤을 지낸 후 제물포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그 선교사'는 존스 자신을 의미하는 것이 분명하다. 존스 자신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갑곶을 통해 강화에 상륙해서 남문을 거쳐 성안으로 들어가려 했는데 강화 유수가 직접나와 거절하는 바람에 결국 갑곶나루 여관에서 이틀간 묵다가 제물포로 철수하였다. 그렇다면 존스의 첫 강화 접근 시도는 실패로 끝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스크랜튼이 존스의 강화 여행 보고를 하면서, "강화에 '발판'을 얻었다"라고 진술한 근거는 무었일까? 결국 이 '발판'은 앞서 <江都誌>에서 증언한 서사면 교향동에 있었다.
2. 강화의 첫 세례교인
<江都誌>는 존스가 강화 남문에서 입성을 시도하다가 거절당한 후 다시 뱃길로 북쪽으로 올라가 강화도 서북부에 있는 '서사면 교항동'으로 가서 '김씨 집안'에 전도하여 선교 기반을 마련했다고 증언하였다. 이같은 사실을 증언하는 다른 자료가 있다. 1919년 7월, 존스가 별세했을 때 그의 생애를 기술한 기사가 <基督申報>에 실렸는데, 그 속에 강화 선교에 대한 증언이 있다. "뎌간에 특별한 일은 죠목사가 강화셩에 드러가서 젼도하려고 셩 남문 밧게 안져셔 강화류수의계 통지한즉 류수가 완고하고 거만된 마음으로 드리지 아니한즉 조목사가 온유한 태도로 겸손히 물너가 셩밧길로 도라 강화군 셔사동리에 당도한즉 외인의 비방함과 핍박이 심함으로 그 동리에 쳐음 밋은 형제 몃 분을 다리고 배를 타고 바다 우에셔 세레를 베프럿스며" 이 기록은 존스가 강화성 남문에서 강화 유수에게 배척당한 일과 서사면 교항에 상륙하였다가 배척받고 그곳 '토착교인'을 배로 불러내 세례를 베푼 일을 시차없이 연결시키고 있으나 두 사건이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우선 앞에서 1910년 존스 자신이 쓴 글에서, 존스는 남문에서 배척받은 후 갑곶 여관에서 이틀 머물다가 제물포로 철수하였다고 진술하고, 이어서 "토착 전도인을 한명 보내 복음 소식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고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존스가 곧바로 서사면으로 올라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리고 서사면을 방문한 것도 존스가 무작위로 그 곳을 방문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곳에 세례받기를 원하는 교인이 있어 그의 요청을 받고 서사면을 방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존스의 서사면 방문을 이끌어 낸 '토착교인'이 내리교회 역사에서 나타난 '이승환'이다. 다시 신홍식의 증언을 들어보자. "그러나 [계원] 五十人中에 信者 二人을 엇엇스니 一人은 리승환이라 조원시氏가 江華島에 傳道하랴고 數次 가 보앗스나 傳道할 기틀을 엇지 못한 것은 丙寅洋擾에 法國 美國 兵船이 드러와 接戰하든 곳이라 西洋人을 보면 원수로 녁이고 돌로 치려하며 迎接지 아니하니 傳道할 수 업게 되엿는대 이 때 맛참 리승환氏가 自己 故鄕 江華 西社로 도라가니 그로 인연하여 江華에 傳道門이 열니며 그러케 굿세든 人心이 漸漸 감화되여 全都에 敎가 傳派되엿더라" 인천 제물포 교회(현 내리교회)초기 전도인 김기범, 이명숙이 인천 사람들의 (교회에 대해)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계를 조직했다가 깨지는 바람에 오히려 곤경에 처했는데, 다행히 계원 50명 가운데 교인 두 명을 건질 수 있었고 그 중 한 명이 강화도 서사 출신 이승환이었던 것이다. 이승환은 인천에서 처음 복음을 접하게 되었고 그를 통해 강화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으니, 스크랜튼이 언급한 강화 선교의 '발판'은 이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 것을 알 수 있다. 1910년대 초부터 인천을 거점으로 하여 서해안 지역 여성 선교를 주관했던 헤스(M.Hess)는 '강화의 첫 세례교인'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제물포에서 술집을 경영하던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그는 기독교인이 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자기 직업 때문에 세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몇 달 지난 후 존스 박사는 강화 북부에 있는 서사로 와서 죽을 날이 멀지 않은 한 노파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노파의 아들이 바로 술집 주인이었는데, 그는 은밀하게 술집을 정리하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보다 건전한 방법인 농사일을 하며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아들은 늙은 어머니에게 성경 말씀을 들려 주었고 이번에 세례 요청을 한 것도 어머니를 위한 것이었지, 그 자신은 아직도 세례를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고 여겼다. 기독교를 미워하는 주민들의 난폭한 반대로 tk 세례예식은 마을에서 거행되지 못했다. 아들은 어머니를 등에 업고 존스 박사가 배에서 기다리고 있는 해안으로 나갔다. 그리하여 은빛 찬란한 달 밤에 한 노파의 기쁨의 잔이 넘쳤으니, 이는 죄 씻음 받은 기쁨의 잔이었다. 그녀는 강화의 겨자씨로 불리었다." 우리는 이 글에서 이승환의 직업이 술장수였다는 것과, 그가 제물포에서 믿음 생활을 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직업상 세례를 받지 못하였고, 직업을 정리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우선 늙은 어머니에게 전도하여 믿게 한 후,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존스에게 요청하여 존스의 서사 방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때에도 서사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 존스가 마을에 상륙하여 세례를 베풀지 못하고 밤중에 이승환이 어머니를 업고 교항마을을 거쳐 뒤펄개를 지나 존스가 있는 배에 올라 세례예식이 베풀어졌다는 사실등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그 유명한 강화의 '선상세례'이고, 강화의 첫 세례교인은 이렇게 해서 배출되었다. 해스보다 앞서 인천 선교를 개척했던 밀러는 또 다른 글에서 강화의 처음 세례에 대해 보다 자세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존스 박사는 강화 선교사업을 시작할 때 처음부터 성공하리라는 강한 확신을 갖고 있었다. 첫번째로 세례받은 인물은 나이 많은 여인이었는데 그녀의 아들은 제물포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그녀도 아들에게서 복음을 듣고 세례받기를 열망했다. 섬 주민들 사이에등에 업고 긴 뻘을 건너 배에 올랐고 거기에서 달빛에 예문을 비춰 읽는 가운데 여인이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존스 박사측 행위를 보고 한국인들이 감명받아 그들은 존스 박사에게 마을로 들어와 대화를 나누자는 요청을 하였다. 이 방문으로 김씨와 그의 가족 전체가 개종하게 되었다." 이 자료는 서사 주민들의 처음 반응을 보다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있으며, 그 반대의 주역이었으나 후에 개종하여 가족 전체가 교인이 된 '김씨'라는 양반에 대한 흥미있는 증언을 하고 있다.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양반 '김씨'는 바로 <江都誌>에서 언급되었던 서사면 교항동의 '김씨가족'을 의미하며 이승환과 함께 서사면 복음선교의 씨앗이 된 김상임(金商壬)을 말한다. 김상임에 대해서는 뒤에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3. 시루미 신앙 공동체
제물포에서 믿기 시작하여 고향인 서사면 증산에 돌아와 어머니와 함께 존스에게 선상세례를 받은 이승환은 과연 강화 선교의 '발판'이었다. 존스는 아직은 선교사에게 문을 열지 않는 강화에 제물포교인 이명숙을 전도인으로 삼아 파송하였으며, 이명숙은 증산동 이승환의 집을 거점으로 하여 강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서 강화의 첫 감리교 신앙 공동체가 탄생되었다. 바로 이것이 '서사교회'(西寺敎會), '교항교회'(橋項敎會),'교산교회'(橋山敎會),'양사중앙교회'(兩寺中央敎會),등으로 불리다가 현재 '강화교산교회'(江華橋山敎會)로 불리는 강화 첫 감리교회의 시작이다. 1917년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橋山敎會沿革>은 교회 시작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一八九四年 兄弟 李城完氏와 그의 母親이 主의 福音을 듯고 믿어 兩寺面 橋項里 뒷바다에서 宣敎師 趙元時氏에게 洗禮를 받음으로 福音의 傳播되기 始作하니라...仝年 長老 趙元時氏의 派送으로 仁川敎會 勸師 李明淑氏가 本郡 증산里에 往來하여 李聖完氏 自宅에서 四五人 兄弟 姉妹가 禮拜하다. 仝年 六月에 至하여 男女敎友가 五十餘名이 되니라" 이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李聖完'은 지금까지 살펴본 '이승환'을 의미하며, 강화의 첫 신앙공동체가 이승환의 자택이 있는 증산(시루뫼) 마을에서 시작되었음을 밝혀준다. 그러나 '1894년'으로 표기된 것은 수정을 요한다. 다른 자료는 이미 1893년에 증산에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음을 증언하기 때문이다. 우선 1893년-1894년 당시 한국 감리교 선교를 관장하고 있던 스크랜튼의 증언이다. 그는 1893년 12월 12일, 본국 선교본부에 보낸 서한에서 존스와 함께 강화에 다녀온 결과를 보고하였다. "강화에서는 연회 이전에 한 가족 전체가 세례를 받음으로 우리 [사업] 개척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하루 밤낮을 지냈으며 그 주변 이웃들과도 만났는데, 그들 중 몇 명은 [기독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곳은 시루미 북쪽에 있습니다. 남쪽 항구에 있는 여관 주인은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인데, 그는 이번에 학습인으로 받아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기도회를 가졌고 조사를 그 곳에 두어 그를 더 가르치도록 조처하였습니다. 이 섬을 여행하는데 모든 시간을 바칠 수 있는 조사가 필요한데, 현재 우리에겐 1894년도에 이러한 조사를 채용할 재정이 없습니다." 이 자료를 통해 1893년 8월 31일에 열린 한국 선교회 연회 이전에 이미 강화 '시루미'(증산)에서 개종하고 세례받은 한 가족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었고, 강화읍 남문으로 통하는 갑곶나루의 여관집 주인이 학습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인천과 강화 선교 책임자 존스도 1894년 선교 보고에서 전 해의 사업을 요약하는 중에, "제물포 사업은 아직은 두 거점에서 사업이 확장되어 가고 있는데 제물포항과 강화도에 있는 시리미가 그 거점입니다"라고 보고한 것도 '시루미' 개척이 1893년에 이루어졌음을 증언하는 자료다. 또한 존스 부인의 1894년 보고는 '시루미'사업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우리는 제물포에서 약 50마일 떨어진 강화라는 섬의 시루미에서 작은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나는 봄에 그곳 마을을 세차례 여행하였으며 헬렌은 작년 한해동안 여섯차례 방문했습니다. 그곳 사업은 아주 고무적이며 인근 마을로 퍼져나가고 있습니다. 그곳에는 세례받은 여인이 6명, 아동 세례 5명이 있는데 이들이 비록 무식한 부류 사람들이나 자신들에게 비추인 빛에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글을 통하여 시루미에 강력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존스 부인과 백헬렌이 주도하는 여성 선교사가 큰 성과를 얻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특히 답보상태에 빠진 인천 선교 상황에서 방물장수로 위장 침투해 들어가 인천 선교의 전기를 마련했던 전도부인 백헬렌은 강화에도 1년에 여섯 차례 여행하며 복음을 전해 1894년 이전에 여성 세례교인 여섯 명을 얻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존스 부인의 1895년 보고는 지속적인 '시루미' 사업의 내용을 증언한다. "사업을 개척한 두 선교 거점이 있으니, 제물포와 강화의 시루미입니다... 시루미에서는 한 여인이 교적부에서 제명되었으나 다른 한 여인이 추가되어 교인수는 처음과 변동없습니다. 지난 1년동안 저는 시루미를 방문할 수 없었지만 제 조사인 헬렌은 다섯 번 여행하여 모두 10주간 그곳에 머물면서 교인들을 가르치고 다른 마을들을 방문하여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헬렌의 보고로는 그곳 사업이 날로 번창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보고들을 종합해 볼 때 시루미 사업은 남성보다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음을 알 수 있다. 첫 세례고인이 이승환의 어머니였다는 사실, 인천 전도부인 백헬렌의 열성적 전도활동 등에서 시루미 신앙공동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즉 존스 부인의 표현대로 시루미 교인들은 사회적으로 '무식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으나 신앙적 열정에 사로잡힌 토착인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강화 감리교는 당시 사회 상황 속에서 소외당하고 억눌려 살아온 '민중'들과 접촉하는 것으로 선교를 시작하였다. 강화선교의 '발판'이 된 이승환의 직업(술집 주인), 학습을 자청한 갑곶나루 여관집 주인의 신분과 존스 부인이 '무식한 부루'라고 표현한 처음 여성 세례교인들의 신분 배경에서 감리교 선교의 민중지향적 성격을 읽을 수 있다. 이는 강화의 지식인 계층, 양반과 지방 토호를 선교 대상으로 삼았던 성공회의 선교 방법과 대비를 이룬다. 그렇다고 감리교의 강화 선교가 민중 계층에만 제한되었다고 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은 무식자와 유식자, 가진 자와 가난한 자의 공존,공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교회는 모든 계층, 모든 부류의 참여와 나눔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교회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된 인류사회'를 구현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교회는 민중의 참여와 함께 지식인, 지도급 인사들의 참여를 요구한다. 강화 감리교회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균형있는 신앙 공동체로 발전하였다. 그러한 균형과 조화는 이미 서사면 최초 감리교 신앙공동체에서 나타났으니, 그 계기는 교항동의 유력한 양반 김상임과 그의 가족들의 개종을 통해 이루어졌다.
4. 교항교회 설립
앞서 살펴본 <橋山敎會沿革>은 교회 시작을 진술하며 '이성완'(이승환) 모자의 개종과 이명숙의 전도활동을 진술하며 같은 해 사건으로 김상임의 개종과 전도활동을 언급하고 있다. "李聖完氏가 趙元時 宣敎師의 指導를 받어 美國聖書公會 賣書人이 되어 福音을 傳할 時 兄弟 金商林氏가 서울에 往來中 主를 믿고 姉妹 許조스편氏가 主를 믿는지라" 이승환 모자의 세례와 김상임의 개종을 같은 시기로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앞서 살펴본 밀러 부인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환의 고향 집에서 세례를 거행하지 못하게 한 일물이 '김씨'라는 유력한 양반이었으나 오히려 존스 목사의 사려깊은 행동에 감명받고 존스 목사를 초빙하여 대화를 나눈 후 개종한 것으로 되어 있어 이승환 어머니의 세례와 김상임의 개종을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그러나 다른 여러 자료에 의하면, 김상임의 개종 및 세례를 이승환 어머니 세례와 시차없이 연결시키기보다는, 김상임도 다른 통로로 기독교를 접하고 탐색하다가 이승환 어머니 세례와 그것을 계기로 선교사와 매서인들이 시루미에 자주 등장하게 되면서 직접 선교사를 만나 대화한 후 개종을 결심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김상임은 서사면 교항에 근거를 둔 전통 양반 가문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한학에 전념하여 과거 급제를 통해 입신출세를 도모하던 전형적 유학자였다. 나이 열 다섯되던 해부터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번번히 낙방하다가 사십(1887년)에 비로소 강화부 승부초시가 되었다. 이후 '김초시'는 벼슬에 나가지는 않았지만 고향인 교항동에 서당을 차리고 후학을 양성하며 지역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차에 이승환을 통한 감리교 선교가 바로 이웃 마을인 '시루미'(증산)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1902년 김상임이 별세하였을 때 그의 별세 기사와 함께 약력을 기록한 <신학월보>는 김상임의 개종 과정을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김 형뎨는 환족의 자손인대 죠션고적 풍쇽대로 글일기와 과거보기로 힘스고 셰월을 보내는거슨 아람답고 큰 사업으로 알앗더니 하로날 우연히 예수교 젼도하는 사람을 맛나니 비로소 진리드럿나니라 그러나 젼도하는 목사 하나 맛나여야 밋기를 쟉졍하겟노라 하여 이에 목사를 맛나니 그 권면하는 말을 깃부히 듯고 예수 밋기를 시쟉하엿난지라" 앞에서 살펴본 <橋山敎會沿革>이나 <신학월보> 기록은 김상임이 선교사(목사) 존스를 만나기 전에 이미 기독교에 대한 정보를 듣고 스스로 선교사를 만나 기독교의 정체를 알아보려는 결심을 하고 있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을 왕래하며 알 게 되었든지, 아니면 이명숙, 이승환 등 매서인을 통해 알 게 되었든지, 선교사와 교회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그는 직접 선교사를 만나보고 개종을 결심하였다는 말이다. 따라서 존스 선교사를 만나기 전에 나름대로 기독교에 대한 긴 탐색과정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김상임이 존스를 처음 만난 때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신학월보>기록이 1894년 8월 6일에 존스에게 학습받고, 그해 10월 8일에 세례를 받았으며, 그해 12월 12일에 만진례를 받은 것으로 정리하고 있고 <橋山敎會沿革> 역시 김상임의 개종, 세례를 '1894년' 사항으로 정리하고 있어 그가 존스를 만나 세례를 받은 것은 1894년 무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김상임의 개종은 그가 살고 있던 '교항'마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지역유지이자 학자로 영향력있던 '김초시'의 개종은 김씨 문종의 비판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지만, 교항 주민들의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을 씻어내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하여 교항의 사대부들 가운데 교인들이 생겨났으며, 이는 '무식한' 부류의 여성과 아이들로 구성된 시루미(증산) 신앙공동체와 다른 성격의 신앙공동체를 이루었다. 처음에 김상임을 비롯한 교항 마을 교인들은 증산에 있던 이승환의 집에가서 예배에 참석 했는데, 교인수가 늘어 장소가 비좁아 별도 예배처소를 마련하기로 하였다. 이에대한 <橋山敎會沿革>의 증언이다. "於是에 禮拜堂을 建立키로 捐補金 四十원을 거두니 橋項里에 草家 十二間을 賣出하여 敎會를 設置하다" 예배당 건축기금 40원을 마련하는 과정이나, 새 예배당의 위치가 '교항'으로 정해지는 과정에서 김상임을 비롯한 교항 교인들의 입장이 크게 반영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로서 서사면의 첫 감리교 신앙공동체는 시루미에서 '다리목'을 건너 김상임의 집 뒤쪽 교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예배당 마련 과정을 스크랜튼은 1896년 연회 보고를 통해 자세히 밝히고 있다. "강화에서는 아주 흥미있는 일이 시작되었습니다. 올해 저는 로드와일러(Rothweiler) 양과 함께 그곳을 한번 방문하였습니다. 저는 방문하는 길에 성인 10명과 어린이 1명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그곳에 예배당으로 쓰려고 낡은 집을 한 채 구입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런 의견에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만 상황을 고려할 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낡은집을] 사용에 적합하게 개축하는 데는 돈이 곱으로 들 것입니다. 그들은 이번 연회에서 이 문제를 논의해 줄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이후로 계속 도움이 필요한 지방 교회들이 나올 것인데 이에 대한 우리 입장을 어떻게 세워야 할지에 관해서 말입니다. 과연 우리는 그들을 도와주어야 할까요?" 강화 교인들이 헌금 40원으로 구입한 교항리 초가집은 수리비가 곱으로 들어야 할 낡은 집이었던 것이다. 스크랜튼은 기다렸다가 보다 건실한 예배당을 마련하도록 권면했으나 당장 집회 장소가 필요했던 강화 교인들은 자체 헌금을 모아 낡았지만 12칸짜리 초가집을 마련했던 것이다. 선교사들은 그 수리비 지원 여부를 고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강화 교인들은 선교사들의 지원에 큰 기대를 걸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애원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1898년의 존스 선교 보고에 '교항교회'교인들이 '예배당당을 마련하는 데 이미 120달러를 사용했다'고 보고하고 있는 것이라든지, 1899년 보고에 교항 교인들이'자립헌금으로 44달러 10센트를 모아 그중 5달러는 전도인 봉급으로 지급하고 있다'고 한 것들이 강화 교인들의 주체성과 자립에 바탕을 둔 선교 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강화 감리교회는 처음 출발부터 강한 자립의지를 보여 주었다. 그렇게 해서 설립된 교회는 선교사에 의존하는 교회가 아닌 자치교회의 모습을 갖출 수 있었다. 이러한 자립과 자치가 이루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강화 교인들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복음 수용과 전파라는 자전의 역사가 있었다. 강화는 이러한 3자선교의 구체적 실천장이 되었으며, 이후 강화 감리교회 역사를 규정하는 특징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하여 1893년 8월 이전에 서사면 증산(시루미) 마을의 이승환 모자가 세례받고, 그곳으로 이명숙 권사가 전도인으로 파송되어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시작된 강화 첫 교회는, 1894년 이웃 교항마을의 '김초시', 김상임과 그 일가의 개종으로 큰 힘을 얻었고, 교인들의 자체 헌금 40원으로 교항에 12칸 초가를 구입하여 예배당을 삼게 됨으로서 완전한 교회의 틀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하여 증산 마을의 '여성과 아이들'을 중심한 민중 계층과 교항 마을의 '양반 지식인' 계층이 함께 어울리는 아름다운 교회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설립된 교항교회는 이명숙, 이승환, 김상임, 백헬렌등 한국인 전도인들의 헌신적인 전도활동과 존스 목사 부부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짧은 시일 안에 강력한 교회로 자리잡게 되었으니, 1897년 2월 10일자 <조선크리스도인회보>는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강화 서사면 교항동에 사년전브터 서국 목사 쫀스씨와 죠션 교우 리명슉씨가 비로소 하니님 도를 힘써 젼파하야 작년에는 회당을 셜립하고 쥬일마다 례배하는 교우가 백여명인데 그중에 세례밧은 사람이 남녀로쇼 병하여 삼십륙명이요 학습인이 아해까지 합팔십여명이라 쫀스 목사는 재작년에 고국에 도라가셔 아즉 나오지 아니하엿는대 강화 교우들이 그 목사 나오시기를 형뎨가치 기다린다더라"
강화 교산교회
1. 교회설립과 시대적 배경
한반도 서해안 중심부에 위치한 우리 강화도는 그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반만년 역사 속에 민족적 수난이 있을 때마다 나라를 지켜온 최후의 보루역할을 해 왔다. 또 강화는 각 시대마다 역사적 산 증거로서 많은 유적과 유물을 간직하고 있다는 데서 이 나라 역사의 축소판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자연적 역사적 여건 속에서 이미 100여년전부터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여 이 지역이 새롭게 거듭날 수 있었다는 것은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이같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우리 양사지역 교산교회가 1893년부터 최초로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를 세움으로서 수많은 전도의 사역자들을 배출해 냈다는 데서 강화 개신교의 '모교회'라고들 한다. 정치적 쇄국주의와 보수 유학자들의 무서운 핍박속에서도, 자진해서 복음을 들여와 교회를 세우고, 목숨을 건 전도를 한 초기 교산교회 창설자들은 강화지역 교회사 차원에서 뿐 아니라 오늘의 개신교인 모두가 신앙의 사표로 삼아 마땅하다고 본다. 복음의 불모지에서 가난과 죽음을 무릅쓰고 예수를 전한다는 것은 분명 상상을 초월한 고난의 길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의 상황으로 감시의 눈이 많은 강화 읍내에는 성경을 들고 접근할 수 조차 없었기에, 이곳 외진 해변가 양사 지역에 먼저 복음의 씨가 뿌려졌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신앙 선배들이 이 어려운 사역을 시작한지가 벌서 1세기가 되었다. 이 뜻깊은 시기를 맞이하여 현실속에 안주해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은 또다른 깨달음과 사명을 주실 것을 믿는다. 이러한 믿음에서 우리 강화 교산교회가 걸어온 지난 100년 간의 발자취를 뒤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다짐해 보자는 의미에서 이 교회 연혁을 정리해 보는 것이다. 주지하는 바 이곳 강화도는 고려조 이후부터 계속 외세와의 갈등 속에 살아왔다. 특히나 조선조 말엽에는 프랑스 함대와 접전해 병인양요(1866)를 치렀고, 미국 함대와 접전해 신미양요(1871)를 치룸으로서 서양인과 그들 종교에 대해서는 무서운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많은 역사 기록들은 "당시 강화도민들은 서양 사람만 보면 돌로 치고 복수를 하려는 험악한 상황이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시대양상에 불과할 뿐 하나님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역사하고 계시었다. 오히려 서양인과 기독교에 대한 깊은 오해를 풀어주시고 이곳을 복음의 전초기지로 삼으셨던 것이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섭리일 뿐 인간의 힘으로 되는 일은 아니었다. 만약에 강화도민들이 13세기의 삼별초적 배타성을 발휘해 기독교를 박해했더라면 당시 인천, 강화지역에 작은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던 초대 교회는 여지없이 붕괴되고 말았을 지도 모른다. 강화도민의 회심과 복음 수용, 이것은 분명 한국에서 빛어진 "바울의 다메섹 사건"으로 보아도 좋을 것 이다. 실로 강화 땅은 한국 개신교 선교의 한 관문으로서 성별된 땅이요, 축복받은 땅이라 여겨진다. 이번 강화선교 100주년을 기해 하나님의 더 크신 사랑과 은총이 모든 교회 위에 함께 하시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2. 교산교회의 창립
가. 이승환 모자의 결신과 복음전래(1893년)
강화 지역에 예수의 복음이 전래되고 교회가 선 것은 대한 감리교의 모교회 격인 인천 내리교회에 의해서였다. 1885년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자 인천 내리교회를 세워 놓았고, 1892년에 그의 후임으로 존스(G.H.Jones 조원시 趙元時 1988.5.9 서울도착) 목사가 부임해 왔다. 존스 목사는 내리교회에 부임하자 인접 도서인 강화지역 선교에 깊은 관심을 가졌었고, 그 즉시 실천에 옮겨 강화 선교를 시작했으나, 강화 관.민의 냉대로 무위로 끝날 수밖에 없었다. 이와 때를 같이해 내리 교회 안에서는 전도의 방편으로 장조계를 조직한 바 있었으나 얼마 안 가서 계도 실패하고 교인도 잃고 말았다고 한다. 50명의 계원중 유독 이승환이라는 성도 한 사람만이 남아 계를 지키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이 이승환 성도는 강화 서사(양사)출신으로 제물포에 가서 술집을 경영하면서 내리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 그리하다 보니 강화 고향에 있는 이승환의 어머니도 이들을 따라 예수를 믿게 되고, 믿음이 생기자 존스 목사에게 세례받기를 원하게 되었다. 이것은 강화 선교의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었다. 존스 목사는 한복으로 변장하고 야음을 이용해 또 다시 강화에 올 수 있었다. 우선 서사 뒤쪽에 배를 정박하고 사람을 동리로 보내 정탐케 했다. 그러나 동리에 들어와 세례식을 행한다면 그 집을 불사르고 큰 봉변을 당하리라는 제보였다. 소요를 원치 않았던 존스 목사는 이승환 성도에게 노모를 배로 안내하도록 하였다. 이윽고 아들은 어머니를 업고 상당한 거리의 개펄을 건너 존스 목사의 배에 올랐다. 마침 달밤이라 달빛을 이용해 예문을 읽어가면서 무사히 세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것이 유명한 선교초기의 선상 세례요, 이 일이 계기가 되어 강화도에 최초의 복음의 씨가 떨어진 것 이다. 그 후 이승환 성도는 제물포의 술집을 정리하고, 고향 양사로 돌아와 보다 건전한 직업인 농사일을 하면서 전도에 힘썼다. 존스 목사는 가오하 양사를 당시 제물포교회와 함께 2대 선교 거점으로 보고 1893년 가을 이명숙 전도사를 강화 담당자로 파송하였다. 초기에는 교인 4-5명이 모여 이승환 자택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교회로서 신앙공동체가 형성되자 교인은 즉시 배로 증가해 10여명에 이르렀다. 이제는 하나의 어엿한 교회가 설립된 것이다. 1893년 말에는 존스와 스크랜톤(W.B.Screanton, 시란돈 施蘭敦) 두 선교사가 이미 강화교산교회에 와서 유숙한 바 있고, 내리교회 백헬란 전도사는 6차례에 걸쳐 10주간을 머물면서 강화 전도에 힘쓰기까지 했다. 이렇게 해서 강화교산교회는 1893년을 교회 창립원년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교회가 창립된 다음 해인 1894년에는 이미 교항리에 초가 12간을 구입해 교회를 이전하게 되었다. 이승환씨는 그후 매서인이 되어 전도에 힘쓰다가 1898년에는 아펜젤러 목사로부터 강화 교산교회 계삭회 소속으로 권사 직분을 받는다. 술집 주인 이승환이 변하여 어엿한 권사님으로 존경받게 된 것이다. 이승환 권사는 더욱 전도에 열중했다. 주로 강화, 인천, 옹진지역을 중심으로 전도하다가 1901년 이후부터는 주로 영종, 삼목, 용유등 인근 도서를 돌면서 몇 개의 교회를 세운다음 1908년경에 영국 성서공회를 통해 이민해 가고 만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여하튼 강화 지역 교회들은 이승환 권사를 통해 복음이 최초로 전래되었다는 데서 그의 공로를 오래도록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
나. 김상임 일가의 개종과 강화의 복음화(1893-1902)
서민층인 이승환 씨의 가족과 그의 동류인 부녀자들로만 구성된 초기 교산교회는 성장 부흥에 한꼐를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설립을 위해 이미 다른 측면에서도 역사하고 계시었다고 할 때, 교산리의 유력한 양반 김상임 씨가 바로 하나님의 선택받은 인물이었다. 김상임씨는 1848년 강화 양사 출신으로 16세에 이미 동몽과의 과거를 보아 상을 받은 준재로 성균관에서도 수학한 바 있고, 40세(1887년)에 승부 초시에 합격한 이름있는 양반이었다. 그는 과거 공부를 위해 서울을 자주 왕래하면서 기독교인과 자주 접할 기회가 있었고, 또 적지 아니한 관심을 갖고 있는 터였다. 그러던 차 이승환 모친의 선상세례를 계기로 선교사의 사려깊은 행위와 헌신적인 열의를 보고 많은 감명을 받게 되었고, 선교사와 매서인들이 양사에 자주 드나들면서 직접 선교사를 만나 대화 할 기회를 갖게 되자 김상임씨는 혼연히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 김상임 씨의 개종은 그의 문중만이 아니라 강화지역 복음화를 위한 결정적 계기가 될 수 있었다. 김상임 초시는 본래 성실하고 민첩한 분으로 기독교로 개종하자마자 주변의 비난도 개념치 아니하고 가신(家神)과 사당을 불사르고, 믿음과 말씀공부에만 전념하게 되었다. 이러한 김상임 성도의 적극적인 행보는 교산교회를 그 즉시 50명으로 부흥시켜 놓았고, 그와 친분있는 강화지역 지도급 인사들이 연이어 개종해와 강화 복음화는 비교적 순조롭게 이루어져 갔다. 김상임 성도는 1894년 10월에 존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좀 더 믿음이 돈독해지자 1896년 5월부터는 교산교회의 담당자의 직분을 맡을 수 있었다. 1896년 홍우동에 교회가 설립되었을 때 교산 교회에서 수도한 박능일 씨가 담당자로 파송되었고, 이때 초신자로 종순일, 권신일 씨가 입교했다. 1898년에는 본토 전도사 직분을 맏아 무려 10여 곳의 교회(개교회와 가정교회를 포함한 숫자인 듯 함)를 다스리며 선교 사업에 열중했다. 1899년에 존스 목사가 인천 우각동에 한국 최초의 신학회를 개설하자 김상임 전도사는 김기범, 김창식, 최병헝, 이명숙 등과 함께 지방 전도사 8명중 한 사람으로 신학회에 적을 두고 강의를 들었다. 이때의 강사진은 노보을(魯普乙, W.A.Noble), 조원시(존스), 서원보, 아펜젤러 등 미국인 선교사들 이었다. 여기서 김상임 전도사는 한국 최초의 신학과정 이수자가 된 것이다. 또 1900년에 평양에 신학회가 개설되자 김상임 전도사는 김경일, 박능일, 권신일 등 강화인 5명을 데리고 2년급 전도사 과정을 이수했다. 김상임 전도사에 인도되어 결신 입교한 강화인들중 박능일, 김봉일을 중심한 지도급 인사들이 모여 "주안에서 하나되어 복음을 전파하자"는 뜻에서 이름 끝자를 모두 한 일(一)자를 넣어 개명하고 서로 의형제를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동참한 이들은 권신일, 종순일,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박현일, 황도일, 제씨 등이며, 김봉일은 자기의 두 아들에게까지 은일, 환일로 개명시켜 놓았다. 이들 전도인들의 모임을 외지에서는 초대교회의 '강화 오 걸일:五 傑一'이라 칭하지만 실은 '오 걸일'이 아닌 '십 걸일:十 傑一'이 넘는 인원이 동참했고 그후 一자로 개명 결신한 분은 6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거의가 직접 간접으로 김상임 전도사를 통해 결신한 분들로 강화지역은 물론 서울, 경기 전 지역에 걸쳐 개척 전도인으로 크게 활약함으로서 초대 한국 개신교의 초석들이 되었다. 1900년 전후만 해도 한국 개신교가 복음의 거점을 확보한 곳이라고는 아직 10여곳에 불과했다. 또 이 무렵에는 예수교인에 대한 박해와 조소가 극심한 때였다. 이 같은 악조건 속에서 10여명의 십자가 군병들이 자진해서 대오를 짜고 나서는 기적같은 현상이 이곳 강화에서 이루어 졌다. 이들은 분명 하나님이 내세운 복음의 전초병들이었다면, 이곳 강화는 예수님이 당초에 제자들을 불러모았던 갈릴리 해변과 유사한 고장인양 싶기도 하다. 여하튼 그후 이들 <십 걸일>들은 주안에서 결의형제하고 나서 복음 전파를 행동으로 옮겼다. 1900년에 강화읍 잠두 교회가 설립 될 때에도 인도자는 역시 박능일씨이며, 초신자는 주선일, 허진일, 최족일, 김봉일 씨였다. 또 같은 해 교동교회가 섰을 때도 권신일 씨(1907년 목사 안수, 순위9)를 파송했다. 1905년 박현일 씨(1914년 목사 안수 순위 50)는 덕적도에 군인 신분으로 들어가 복무하면서 덕적 중앙교회를 세우고 초대 사역자가 된 후, 1909년에 도이명 선교사의 어학 선생으로 이임해 갔고, 그 후임으로 종순일(2대), 허진일(3대), 최족일(4대)목사 등이 연이어 덕적도에 들어가 교회를 개척한 사실이 있다. 종순일 목사는 1899년부터 강화 남부지역 선교를 시작해 1901년에 초지 부근에 기도처를 마련하고 피미교회를 세웠으며, 1903년 북도의 진축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한 후 강화 길상면에서 전도를 해 선두교회(1904년)와 선두중앙교회(1907년)를 설립하고 초대 담임자로 시무한 바 있다(1916-1926년) 결국 교산교회의 박능일 목사에게서 전도 받은 종순일 목사는 일생을 강화, 옹진지역 복음화에 선도적 역할을 하면서 한 평생을 보낸 것이다. 이처럼 '一'자로 개명 결의한 위의 '십 걸일'들은 거의가 목사 장로 등 성직의 길을 걸었지마는 특히 권신일, 최족일(1915년 목사, 안수순위 60) 두 분은 3.1운동에 깊이 관련되어 수감 휴직되는 수난을 겪기까지 했다. 이처럼 강화교회의 선구자적 역할을 하면서 많은 후배들을 양성해 온 김상임 전도사는 그 공로를 크게 인정받아 1902년 4월에 집사 목사 안수자로 내정되어 있었다. 한국 감리교에서 김기범, 김창식 목사에 이어 3번째로 목사 후보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영예의 안수식을 한달 앞두고 졸지에 세상을 뜨는 비운을 맞는다. 교회에 열병환자가 발생하자 그 환자를 심방한 후에 그 병에 감염되어 55세를 일기로 하나님께로 소천하고 만 것이다. "네 이웃을 위해 목숨을 버리면 그 보다 더 큰 것이 어디에 있겠느냐"하신 예수의 말씀을 그대로 이행했다고나 할까. 사실 당시의 감리교단은 하나의 큰 일꾼을 잃은 것이 애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902년의 신학일보는 김상임 전도사의 사망소식과 아울러 생애 선교업적등을 무려 3페이지에 걸쳐 소상히 보도해 주고 있다. 이것만으로도 그분의 교계 활동이 어떠했던가를 가히 짐작케 하고도 남음이 있다.
3. 고난속에 성장해 온 교회(1903-1970)
1903년 본 교회는 김경일 씨가 서구역 전도사가 되어 1907까지 순행시무하게 되고, 김상임 전도사의 차남 김우제 씨는 읍구역 제 2대 전도사로 파송되어 갔다. 1906년부터는 김상임 전도사의 장자인 김홍제 권사가 전담하여 교회를 처리해 갔고 전도사로는 방족신, 조내덕 양씨가 차례로 순회하였다. 이 때에 손승용씨가 읍구역 제 4대 전도사로 파송되면서 본 교회는 읍구역으로 편입되어졌다. 이 때까지 부임해 온 감리사로는 시란돈(스크랜톤 1900년 한국 선교지방 감리사), 조원시(존스 1888년 5월 9일 서울도착, 1901년 한국 서지방 감리사), 기이부(奇怡富 케이블 able,Elmer M. 1899년 9월 29일 서울도착, 1905년 한국 서지방(인천, 부평, 강화, 교동, 남양, 황해 및 연안구역 등) 교역자는 모두 8명(목사 1)에 불과했다. 1914년 한국인 최벙헌 목사(1902년 5월 18일 서울에서 모인 미감리교 선교연회에서 무어감독에게 집사목사의 안수례를 받음)가 서지방에 부임해 왔으나, 이 때는 일제의 핍박 속에 교회가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침체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1915년에 김홍제 전도사와 그의 부인 하덕신 씨가 깊은 영적 체험을 함으로서 오히려 교인수가 증가할 수 있었고, 제 2차 초가 8간의 예배당을 증축하여 교회의 면모를 새롭게 해 놓았다. 1916년에 벙커목사(1886년 7월 4일 서울에 도착)와 김유순 목사가 본 지방순회 목사가 되고, 김봉일 전도사와 그 부인 허나오미 권사가 수시로 본 교회를 왕래하여 대 예배와 사경회를 인도하자 교회가 부흥해 교인수가 70여 명에 이르렀다. 1917년 에는 읍내교회의 박봉래 목사가 본 교회 언혁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많은 자료를 수집해 '기독교 대한감리교 교산교회 연혁'을 편집해 놓았다. 그는 연혁 서두에서 "대개 기독교회가 서울에서 시작하여 인천에 설립되고 강화에 본 교회가 설립 된후 전도(全島)에 전파되니라"라고 전제하고, 그 당시까지의 교회 연혁을 개괄적으로 정리해 놓은 것이다. 그 후 본 교회 담당자로 시무한 바 있는 신응균 목사가 1970년 2월에 이것을 재 편집해 놓고 다른 곳으로 이임해 감으로서 오늘날까지 귀한 교회사 자료로 보존할 수 있게 되었다. 1930년에는 남북 감리회가 통합됨에 따라 본 교회는 '기독교 대한 감리회 강화구역 교산교회'로 명칭이 바뀌었다. 1930년대 이후 교회가 소강상태에 있었으나, 1950년에 박승도 전도사가 연회로부터 파송되고, 구역이 또 다시 나뉘어 '중부연회 강화지방 양사구역 교산교회'로 개편되면서 새로운 활력을 얻었으나, 뜻밖에 6.25동란의 비극을 맞고 말았다. 수복이후 다시 부흥을 가져와 신도수가 증가해 90명에 이르렀다. 1956년 에는 안광남 전도사의 주선으로 교단 본부로부터 100만원의 건축보조금을 받아 건축 자재를 구입할 수 있었다. 1958년 최창묵 목사가 부임한 후 김용기 권사가 교산리 산 201번지의 대지를 기증(1,320평중 1,000평은 52만원에 매입하고 320평은 기증받음)하자, 1959년 4월 김봉기 장로를 기성회장으로 정초식을 거행하였다. 온 교회가 2년간에 걸쳐 예배당 건축에 전력하던 중 교회가 거의 완공될 무렵 담임목사와 김봉기 장로 그리고 김정기 권사가 동시에 교회를 떠나게 되어 교인들은 아쉬운 작별을 하게 되었다. 1961년 신응균 전도사가 부임하면서 예배당을 완성하고 봉헌식을 올렸다. 1963년 덕하리에 기도처를 설치하고, 교인 일부가 분리하여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1964년에 17평의 주택을 건립하고, 1968년에는 최윤영 권사를 기성회장으로해 37평 규모의 교육관을 1년에 걸쳐 완공해 놓았다. 1970년에는 교회 옆의 밭 234평을 매입해놓았고, 동년 3월에 신응균 목사가 서울로 전임해 가면서 후임으로 임종락 목사가 부임해 왔다. 1977년에 "또 다시 30평의 성전을 증축했고(기성회장:김용기 권사), 1979년에는 슬라브 양옥으로 목사관을 신축했다. 1981년 구역회의 결의로 교산교회의 명칭을 '양사중앙교회'로 변경했다. 1982년에는 '새마을 유아원'을 설립해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1991년까지 9회에 걸쳐 약 300명의 졸업생을 길러내고, 원아수의 격감으로 부득이 폐쇄시키고 말았다. 1985년에는 담임자 임종락 목사의 성역 30주년 및 회갑기념 예배를 드렸고, 그 다음해에는 '교회요람'을 창간 배포하고, 아울러 일부 낡은 건물을 철거하면서, 24평 정도의 슬라브 양옥식당도 건축하였다. 1994년 구역회에서 교회명칭을 '강화 교산교회'로 다시 변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