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대의 간신 유자광
조선 3대 간신을 뽑아 보라고하면 역사학자들에 따라 견해가 달라진다.
보통 임사홍(임사홍 아들 임숭재), 유자광, 김자점등을 뽑으나 학자에 따라 김자점 대신 이완용, 한명회, 김좌근등을 넣기도 한다.
유자광은 조선 3대간신에서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그러나 역사속 인물들을 하나만의 잣대로 충신, 간신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는 어렵다.
구한말 나라를 팔아 먹은 이완용 등 매국민족반역자들이야 우리가 쉽게 간신 매국노로 칭할 수 있다. 그러나 한명회, 유자광 등 평화시 권력다툼에서 권모술수에 능해 권력의 정점에 선 자들을 단순한 간신으로만 보기는 힘들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권력을 획득하여 사용하는 사람들을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는 권력을 획득하기위해 권모술수는 물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비열한 음모, 협박, 무력까지 서슴없이 쓰는 타입이다. 이들은 권력을 획득한 이후에도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들은 권력의 속성과 본질을 꿰뚫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부류중에서도 가끔 정도전이나 한명회처럼 권력 안정기에 접어들면 선정을 베풀기도 햔다.
두 번째 부류는 권력을 정상적인 방법으로 획득하고 그 획득한 권력을 나라와 백성 그리고 그들이 모시는 군주를 위해 일하는데만 전념하는 부류이다. 우리는 이들을 충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은 평화롭고 안정된 시대에 권력의 정점에 있었기에 역사에서는 크게 족적을 남기지 못한다. 황희정승 정도가 이런 부류에 해당 된다.
문제는 권력속성이란 것이 간신, 충신을 구분해서 보는 눈이 없다. 권력속성의 본질은 현실에서 힘 있는 편에 서있다.
이 두 부류가 권력쟁취에 나서면 첫 번째 부류가 현실 권력투쟁속에서는 대부분 승리한다.
첫 번째 부류는 현실 속에서 영특한 두뇌, 재능과 학벌, 가문등 많은 것을 갖추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또한 인간적 매력도 풍기면서 사람들을 주변에 끌어 들이기도 한다. 권모술수에 능해서 한 번 잡은 기회를 놓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이런 뛰어난 재능과 능력을 나라나 민족보다는 자기 안위와 가문의 부침에만 신경을 쓴다. 참담한 일이지만 우리 역사에서 능력있는 이들이 권력을 가졌었고 이들은 나라나 백성들보다는 권력 그 자체 편에 서는 경우가 많았다.요즈음 정치적 사태에서도 많이 보고 있는 현실이다.
두 번째 부류는 거의 일밖에 모른다. 권모술수도 비열한 행위라 생각하고 아예 생각하지도 않으려 한다. 너무 맑고 원칙주의자들이라 주위에 사람들도 모이지 않는다. 이들은 평화시에는 훌륭한 관리가 될 수 있지만 권력투쟁 격변기 속에서는 권력의 희생자가 될 뿐이다.
이처럼 권력투쟁 격변기에 승리자는 항상 첫 번째 부류들이다. 우리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들을 역사는 간신으로 부르기도 하지만 나라를 세우거나 정권을 탈취해서 선정을 베풀었던 경우도 가끔 있다.
하지만 그들은 현실 속에서는 승리자들이었다. 그래서 역사가 간신으로 뽑는 대부분의 일생을 보면 그들은 평생을 호위호식하며 천수를 누리다 죽는다.이처럼 간신과 충신은 그 당시 그들이 처한 상황이나 각 시대적 상황에 따라 여러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기 때문에 획일적으로 구분하기는 쉽지 않다.
또 간신이라고 불리는 인물들도 그들 전생애를 살펴보면 일관된 간신 면모를 보이기 보다는 상황에 따라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유자광이가 그 대표적인 역사적 인물이다.
유자광은 조선의 3대 간신에 빠지지 않는 희대의 간신으로 불리우기도 하지만 일부 야사에는 조선민중의 영웅으로도 나온다.
유자광은 서얼출신이다. 조선은 태종 때 '서얼차대법'을 만들어 서얼의 벼슬자리를 원초적으로 차단 한다.
조선사회는 아무리 좋은 가문 아버지 자식으로 태어나도 정실부인 자식이 아니면 서얼이라 했다. 즉 정실부인이 아니고 일반 백성출신을 첩으로 취해 자식을 얻으면 서자라 했고, 일반백성도 아닌 노비나 기생등 천한신분 여성을 첩으로 얻어 자녀를 얻으면 얼자라 했다. 이 둘 을 합쳐 서얼이라고 한다.
이 서얼출신들은 아버지가 영의정이라고 해도 벼슬 길이 제한되었고 문과 과거시험은 아예 볼 자격조차 안줬다. 무과나 잡과에만 응시가 가능했다.
서얼차대법은 조선사대부들이 여자들은 많이 취하고 싶고 그러나 한정 된 벼슬자리는 자신들 자녀들 하고도 나누고 싶어 하지 않는 조선사대부들의 가장 쩨쩨하고 이기적인 악법 중에 하나이다.
이런 시대 서얼로 태어난 유자광은 자신이 서얼 출신임을 너무 잘 인지하고 있었다.
조선시대 서얼출신이 살아내는 인생 방향은 두 가지 였다. 허균이 쓴 홍길동전에 나오는 것처럼 나라를 뒤 엎으려 하는 도적이 되거나, 그냥 당시 제도에 순응하며 그럭저럭 놈팽이 짓을 하며 화려한 백수로 살던가 하는 것이였다.
유자광은 당시 사회에 순응하고 살기로 하면서도 서얼차대법의 한계를 뛰어 넘으려 꾸준히 노력했다. 당시 조선사회에서 그럴 수 있는 방법은 딱 한 가지 뿐이었다. 왕실에 공을 세워 공신이 되는 것이었다.
공신이 되기위해서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역모를 고변하여 사전에 진압하도록 하는 것, 그리고 태종이나 세조처럼 아예 역모를 성공시켜 새로운 왕을 만들어 내는 것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유자광은 이시애 난 때 자진 출병을 원하여 뛰어난 무예로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러나 고속승진은 했지만 공신까지 되지는 못했다. 유자광보다 나이가 한 살 어렸지만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던 남이는 이시애 난을 평정한 공을 인정 받아 공신도 되고 병조판서 자리까지 오른다.
유자광은 그런 남이를 시기와 질투의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남이를 자기 출세 발판의 목표로 삼기로 결심한다.유자광은 이 때부터 타고 난 비범한 능력(?)을 발휘한다.
유자광은 서얼출신으로는 보기드물게 학문과 무예 두 쪽 다 출중한 재능을 과시했다.
서얼출신인 유자광이 당시 조선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 출중한 재능으로 남을 짓 밟아야만 했고 야비하고 비열한 짓도 서슴치 않고 해야만 살아 남을 수 있었다.
유자광의 그 첫 번째 작업은 1468년 예종이 즉위하자마자 남이·강순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남이역모사건)해 그들을 제거한 일이었다.
유자광은 그 공으로 익대공신 1등에 무령군으로 봉해졌다.유자광은 끝내 남이를 역모로 몰아 죽이고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공신이 되었다.
그 뒤로도 유자광은 승승장구를 하며 1477년(성종 8) 도총관에 임명됐으나 이듬해 임사홍·박효원 등과 함께 파당을 만들고 횡포를 부린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됐고 공신적을 삭탈당한 뒤 동래에 유배되는 인생 최대 위기를 겪는다.
그러다 성종대 이래 신진 사림파가 중앙정계에서 정치세력을 형성하면서 집권 훈구세력의 비리를 비판하게 되자 훈구세력은 연산군 즉위를 계기로 사림파의 제거를 꾀하게 됐다.
유자광은 타고난 동물적 김각으로 이 틈을 이용해서 연산군을 꼬드겨 무오사화를 일으키고 화려하게 정계에 복귀한다.유자광은 무오사화로 종1품인 숭록대부(崇祿大夫)에 오르게 됐다.
그 뒤 이어지는 연산군의 갑자사회 때는 유자광도 피해자가 된다.
다시 또 야인같은 생활을 하던 유자광은 놀랍게도 1506년 성희안·박원종·유순정 등이 연산군을 쫓아내고 중종을 왕으로 추대할 때 성희안과의 인연으로 중종반정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한다. 유자광은 반정의 성공으로 정국공신 1등으로 무령부원군에 봉해졌다.
유자광은 조선시대 공신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전쟁터에서 공을 세우고, 역모를 고변하고, 쿠데타 주축세력이되어 쿠테타를 성공시키는 이 세가지 일에 다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공신이 되는 조선 500년동안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운다.
유자광 행위의 옳고 그름을 떠나 정말 대단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유자광은 서얼출신이라는 조선시대 신분상의 한계를 나름 비범한 능력(?)으로 뛰어넘는 출세가도를 달렸다. 유자광은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5대에 걸쳐 권력에 빌 붙어서 저지른 해악은 피비린 내 나는 역모와 사화라는 씻지 못할 참극의 원인 제공자로 조선 3대 간신의 한 명으로 오늘 날 까지 남아 있다.
하지만 유자광은 조선사대부들이 만든 잘못 된 사회제도의 피해자이기도 했다.
유자광은 실록에도 ' 원숭이 처럼 나무를 잘타고 몸이 재빨라 세조의 눈에 들었다.' 라고 실려있을 만큼 무예가 출중했다. 야사에는 '유자광이 당시 유명한 도적 홍길동을 무예로 제압하고 잡았다.'라고 나오기도 한다.
홍길동은 실록에도 나올 만큼 전남 장성출신의 연산군 시대의 실존인물이었다. 후에 허균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국문소설 홍길동전으로 다시 태어나 지금처럼 의적으로서 유명 인물이 된다.
그러나 당시 도적이었던 홍길동을 잡은 유자광은 역사상 둘도 없는 희대의 간신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 홍길동은 대의적이 되어 역사에 이름을 남기니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또 남이 역모사건에서 보듯이 남이가 백두산에서 썼다는 시를 역모형으로 조작 해석 할 정도로 학문에도 뛰어난 재주가 있었다.
유자광에 대해 실록에 나온 내용을 보면 거의 비판하는 글이 대부분이지만 그런 글 속에서 지금의 눈으로 보면 천민과 서민의 고통을 살펴주고 고충을 개선하려는 노력한 글들이 나온다.
유자광은 정신분열증 연산군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궁중하녀 들이 거대한 음식상 들기가 힘겨워 하니 큰 상을 두개로 나누어 올리자'는 개선을 건의한다.
조선은 계급에따라 그릇과 음식상까지 규모 종류가 다르다. 왕의 품위로 규정된 수라상을 두 개로 나누자는 이야기는 연산군 품위를 낮추자는 말이나 다름 없다. 그럼에도 유자광은 수라상을 올리는 하인을 위하여 직언을 한 죄로 형틀에 묶여서 죄인으로 고문과 문초를 받는다.
또한 유자광은 언문 즉 한글을 우대하고 자주 사용하자는 건의를 했다가 조선사대부 성리학자들에게 호된 비난을 받고 자리에서 물러나기도 한다.
이 이야기들은 조선사대부들이 엉뚱한 행위를 하는 유자광을 비난하기 위해 쓴 조선실록에 나온 이야기이다.이처럼 실록에 나올 만큼 천민과 한글을 생각한 벼슬아치가 조선역사상 없었다.
당시 천민, 도공, 악공등은 유자광의 곁에 있기를 원했다. 그래야 생존에 안전했고 유자광이 잘 대해주었기 때문이다. 유자광 고향 남원지역이 조선백자 도요지가 많은 이유이기도 했다.
유자광이 조선사대부들을 고변과 모함으로 많이 죽게했기도 했지만 이처럼 천민과 백성들을 위해서는 나름 좋은 일을 했다.
유몽인이 쓴 '어유야담' 이라는 야사에서는 유자광이 조선시대 신분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능력을 꾸준히 계발하여 자기 꿈을 마음껏 펼친 건강한 인물로 그려진다.
또 유자광은 남원 출신인데 남원지역과 호남일부에서는 유자광이 남원의 정기를 타고 태어난 민중적 영웅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지금도 그 지역에서는 유자광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온다.어쩌든 유자광은 뛰어난 머리와 재능을 가진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뛰어난 머리와 재능을 어떻게 사용했느냐가 문제였다.
요즘도 마찬가지이지만 우리나라는 역사적으로 뛰어난 머리와 재능을 가진 인물들은 많은데 그런 재능을 엉뚱하게 쓴 경우가 많다. 유자광처럼 사회현실이 그렇게 만들기도 했다.
조선사대부들에게 유자광은 눈에 가시같은 존재다. 조선역사는 조선사대부 그들이 쓰는 역사다. 그런만큼 유자광에 대한 역사왜곡도 상당할 것이다.
당시 도저히 타고 넘을 수 없는 신분적 한계를 비범한 자기만의 능력으로 타고 넘은 조선 오백년 동안 유일한 사나이 유자광!
그러나 희대의 간신이 되어 버린 사나이 유자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