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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사진(출처) | 출처 |
작품명(제작년도, 작품크기, 표현재료 및 방법) | 석굴암 본존불(751~774, 너비는 좌우 약 6.7미터 전후 약 6.6미터, 입구의 넓이 3.35미터, 신라의 건축과 조형미술) |
작가이름(출생년도~사망년도(생존시 생략)) | 김대성(700~774) |
작가의 생애 |
두 번 태어난 대성은 이로써 ‘하나를 시주하면 받는 것은 만 배’의 징험을 보았는가. 아직 아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더욱 극적으로 달린다. 대성은 사냥을 좋아했다. 하루는 토함산에 올라 곰 한 마리를 잡았다. 사냥을 마치고 산 아래 마을에서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나타났다. 깨어나서 보니 땀이 흘러 이불이 온통 젖어 있었다고 하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사나운 꿈이었던 모양이다. 곰 귀신은 대성에게 까닭을 따졌다. 그러나 까닭이 따로 있겠는가. 사냥을 했으면 그뿐이지. 대성은 그저 용서를 빌 따름이었다. 그러자 귀신은 ‘나를 위해 절을 지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흠칫, 대성은 이제 살 길이 보이는구나 싶었다. 당연히 맹서하였다. 잠에서 깬 대성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을 것이다. 절에 시주한 덕분에 잘살게 된 자신이건만 살생을 일삼은 일이 후회스러웠을 것이다. 사냥부터 그만두었다. 그리고 곰을 잡았던 땅에다 장수사 대성은 본격적인 불사(佛事)를 시작하였다. 지금의 부모 두 분을 위해 불국사를 짓고,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를 지은 것이다. 석불사는 지금의 석굴암이다. 여기에는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이라는 당대 최고의 승려를 모셨다. 불상을 세우는 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하였다. 석불사를 만들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큰 돌 하나를 다듬어 탑의 지붕으로 올리려 하는데, 갑자기 셋으로 쪼개져 버렸다. 대성은 분하고 화가 났다. 그러다 설핏 잠에 들었다. 그러는 사이 밤 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다 끝내고 돌아갔다. 아침에 일어나서야 대성은 그것을 발견하였다. 감탄하는 마음으로 그는 당장 남령(南嶺)으로 달려나가서, 향나무를 태워 천신에게 공양을 드렸다. 이로부터 남령은 향령(香嶺)이라 불렀다. 여기서 천신의 존재가 누구인지 자세하지 않다. 불사를 하는 도중이니 불교와 관계된 신이라 보면 간단하겠으나, 남령으로 달려가 천신에게 감사를 표했다는 것은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남령은 지금의 남산인지 토함산의 남쪽 고개인지도 자세하지 않다. [네이버 지식백과] 김대성 |
작품 주제 및 설명 (작품의 정보, 의미, 의도) | 석굴암에 관한 가장 오래된 문헌으로는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권5 「대성효이세부모신문왕대(大城孝二世父母神文王代)」를 들 수 있다. 그 중에서 석굴암의 창건에 관한 기록을 보면, 김대성은 현세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를 세우고 전생의 부모를 위하여는 석불사를 세워서 신림(神琳)과 표훈(表訓)을 청하여 각각 머무르게 하였다. 그리고 석불을 조각하려고 큰 돌 한 개를 다듬어 감개(龕蓋: 감실을 덮는 천장돌)를 만드는데 돌이 문득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이에 분노하다가 그 자리에서 잠들었는데, 밤중에 천신(天神)이 내려와 제 모습대로 만들어 놓고 돌아갔으므로 일어나 남쪽 고개에 급히 올라가 향나무를 태워 천신을 공양(供養)하였다고 한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믿음과 슬기로 만들어진 찬란한 문화의 금자탑(金字塔)이다. 그것은 비단 미학적인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그러한 걸작을 이룩하게 된 신라인의 민족혼이 내재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관심을 모은다. 석굴암은 신라인의 신앙의 소산이며, 치정자와 백성이 혼연일치된 민족정신의 응결체이다. 석굴암은 단지 김대성의 개인적인 발원(發願)에 의해서 창건되었다기보다는 거족적인 민족의 발원이었다는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석굴암의 사상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 몇 가지 사실에 유의해야 한다. 첫째, 왜 석굴암이 토함산에 자리잡게 되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토함산은 신라오악(新羅五岳)의 하나로서 신라인들에게는 영악(靈岳)으로 존숭받았던 산이다. 토함산은 동악(東岳)으로서, 그 이름과 방위로 보아 일찍부터 용(龍)의 신앙과 결부된 영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그러한 영악에 석굴암이 건립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특히, 토함산은 군사적으로도 중요한 요충을 이루고 있었다. 죽어서라도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왜구의 침입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겠다는 서원(誓願)을 세운 문무왕의 넋이 담긴 대왕암(大王巖)이 토함산 밑 동해변에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석탈해(昔脫解)가 동해에 상륙하여 토함산정에 오른다는 고사가 있다. 이 고사는 곧 동해로부터 서라벌에 이르는 최단통로가 바로 토함산을 통과해야 하며, 또 이 동악의 준령이 신라건국 이래 동방으로부터의 위협을 막아주는 중요한 군사적인 요새이었음을 시사하기도 한다. 천하무적 역사(力士)였던 석탈해는 뒤에 동악의 산신이 되었고, 동해로부터 조국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신라의 국토방위상 중요한 역할을 하는 지리적 요충이었으며, 빈번한 왜구의 침입을 막는 제일의 관문이었던 토함산에는 많은 사찰이 건립되었다. 감은사(感恩寺)·무장사(鍪藏寺)·원원사(遠願寺) 등이 한 집안의 명복, 나아가서는 국가수호를 위한 이념으로 세워졌던 것처럼 불국사와 석불사도 역시 같은 뜻으로 창건되었던 것이다. 동악의 수호신이 된 석탈해, 그리고 동해의 호국대룡이 된 문무대왕, 이들 두 왕에 대한 숭앙의 정은 석굴암을 창건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져 본 일이 없는 심정이었다. 둘째, 석굴암이 창건된 경덕왕대의 내외정세와 경덕왕이라는 인물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석굴암 창건의 사상적 배경을 살펴볼 수 있다. 경덕왕대는 정치·문화의 각 방면에 걸쳐 신라 역사상 유례를 찾기 어려운 최고의 융성기를 이룩하였던 시기였다. 당시의 신라는 통일 초기의 수습과정을 벗어나 안정과 내적인 충실을 얻은 시기였다. 이러한 안정은 신라에 국한된 일은 아니었다. 중국을 비롯한 동양의 여러 나라가 불교문화를 바탕으로 하여 일찍이 찾아볼 수 없었던 평화를 누리던 시기이다. 특히, 신라의 경우 불교문화는 국민총화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화엄(華嚴)의 도리를 바탕으로 이룩되었고, 그 정신은 조형예술에 있어서도 독특한 성과를 이루게 하였다. 경덕왕은 단순한 지배자가 아니라 진리의 성자이고자 했고, 이러한 정치이념은 조형을 통하여 더욱 구체화되었다. 막대한 물량과 인원을 동원하여 구축한 석굴암도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 의하여 시작되기는 하였으나, 사실은 탁월한 예술적 안목과 신심을 지닌 경덕왕의 뜻에 크게 힘입었음을 간과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히려 김대성 개인의 발원에서라기보다 경덕왕의 원찰(願刹)로서, 또는 나라를 수호하려는 국찰(國刹)로서 경영되었다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할 것이다. 김대성의 발원은 신라 국민의 염원이었고, 인공적인 석굴의 경영은 온 국민의 정성이 모임으로써 가능하였고, 또 그 찬연한 예술적 기품은 이러한 거족적인 호흡의 일치에 의해서만 가능하였다고 할 것이다. 석굴의 건축적 구조가 신라인의 창의와 전통에서 이루어졌고, 수려하고 품위 있는 불상은 그들이 연마한 정성에서 이룩되었다. 그것은 승화된 생활미학의 결정이며, 조국을 지키려는 강인한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석굴암 석굴 [慶州石窟庵石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
작품 평가하기 (자신의 생각, 현재 이 작품의 의미 작성) | 석굴암 본존불은 의미가 2가지가 있습니다.우견편단(右肩偏袒),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이 있습니다. 우견편단(右肩偏袒)은 오른쪽 어깨가 벗어져 있어서, 법복이 상체의 왼쪽만을 덮고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은 손의 모양을 말합니다. 결가부좌를 튼 본존불은 오른쪽 팔을 오른쪽 무릎 위에 얹고 손가락 끝을 가볍게 땅에 대고 있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해서 배꼽 앞에 놓은 채 그대로 있습니다. 이러한 손모양, 즉 수인(手印)은 모든 악마를 굴복시켜 없애버린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
다른 작품과 비교 (영향을 받은 작품, 대비되는 작품, 영향을 준 작품, 같은 작가의 다른 작품, 같은 양식의 작품 중 택 1) | 김대성의 석굴암 본존불과 마애 삼존 석불을 비교하자면 공통점은 둘 다 나라에서 지정된 국보와 보물이다. 하지만 석굴암 본존불은 신라인들의 신앙과 염원, 뛰어난 건축미, 성숙한 조각기법 등을 보여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