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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소유된 백성(1)
*여기의 글은 ‘21세기 신국론’에 들어 있는 글 중에서 뽑아 다시 요약정리를 한 것이다.
이 주제의 글은 한계를 구별하기가 매우 애매한 내용이다. 분명 하나님의 백성이면서도 백성이 아니고‘ 세상 사람처럼 보여도 진실 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 일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사실은 사람이 판단 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명확한 설명이 쉽지 않은 주제다. 쉽지 않은 주제이기 때문에 이 글을 읽는 독자도 이해가 쉽지 않은 글일 수 있다. 쓰기(설명)도 쉽지 않고, 읽어도 이해가 쉽지 않은 글을 왜 써야 하는가? 하지만 이글은 써야하고, 읽어야 할 내용이다. 왜냐하면 이대로는 하나님의 백성 되었던 사람들이 본인도 인식하지 못한 중에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운명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가름되는 일이기 때문에 매우 심각한 주제이지만 지금 교회당교회에 몸담은 분들로서는 처음부터 관심 밖의 이야기로 여겨버릴 수도 있어 더 어려운 것이다. 분명한 것은 지금 이대로는 구원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침묵하고 덮어 둘 수가 없다. 이 글을 쓰기는 해도 사실 하나님의 백성이라 자부심을 가졌던 유대인들을 상대로 말씀하셨던 예수님이나 그분의 제자들의 증거가 어려웠던 것처럼, 이 글이 지금 그런 입장의 글이다.
1.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하나님은 처음인간을 지으심부터 ‘당신의 소유된 백성으로 지으셨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다. 아담을 만드실 때 ‘우리(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창1:28-28)란 말씀은 당신의 소유된 백성임을 처음부터 명시한 말씀이다. 그래서 요즘말로는 하나님의 DNA를 따라 창조된 것이 인간이란 것이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란 주장은 신구약을 막론하고 계속해서 주장하신 주제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말씀을 몇 군데 찾아보자.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19:5-6)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나는 내가 정한 날에 그들을 나의 특별한 소유로 삼을 것이요 또 사람이 자기를 섬기는 아들을 아낌 같이 내가 그들을 아끼리니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을 분별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말3:17-18)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딛2:14)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사43:21) 이상의 말씀에서 당신의 소유된 백성이며, 소유로 삼은 이유는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바울은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고 말한다.(빌3:20) 지금 교회당교회를 다니는 분들은 여기서 말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란 말을 잘못 이해 할 수도 있다. 누구든지 예수 믿고 신앙생활을 하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생각 할 것이기 때문에 오해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 설명이 어려운 것이다.
여기서 예를 하나 들어보자, 탈북한 사람이 대한민국으로 와서 대한민국정부에서 발행하는 주민등록증을 발급받고 대한민국 백성이 되었다. 이 분은 이때부터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대한민국 백성의 권리와 의무를 갖는다. 그런데 이 사람이 하루는 대한민국 법을 따라 살지만 엿 세(6일) 동안은 북한에서 살아왔던 방식으로 북한 법을 따라 산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대한민국백성이라고 해야 할까, 북한 백성이라고 해야 할까? 이와 같은 경우가 지금 크리스천들의 삶이 되어 있다. 그래서 규정하기가 헷갈리는 것이다.
주일 하루는 교회당에 모여서 주여 주여를 찾지만 6일 동안은 세상 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지금 크리스천들의 삶의 형식이다. 이런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 것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세상을 살던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지금의 교회현실은 이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지금의 교회당교회 시스템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스템이 아니란 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틀을 바꿔야 하고(개혁), 그 틀은 예수께서 요구하셨던 예수님의 나라의 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예수님의 부탁이요 요구하심이기 때문이다.(주기도문을 생각해 보라) 그런데, 필자가 이 말을 했더니 어떤 이들이 나라란 말을 썼다고, 나를 악마의 음모를 꾸미는 자요 사탄의 앞잡이라고 몰아 부친 적이 있었다. 예수님이 나라란 말을 쓴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가이사의 반역자로 몰아(요19:12,, 15) 예수를 십자가에 달게 했던 것처럼, 지금 분들도 유대인을 닮은 분들이 많았다.
사실 지금도 크리스천이 된 분들은 일주일이면 최소한 몇 번은 주기도문을 암송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어 이름이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 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이다.’ 입술로는 시인하면서도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 되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나라란 말을 유대인들은 세속나라로 오해를 해서 천추에 씻지 못할 죄를 범했었는데 지금의 크리스천들 중에도 유대인의 죄를 범한 자들이 있다면 이게 심각한 일이다.
예수님은 ‘내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다’고 하셨지만(요18:36-37), 이 말씀의 뜻에는 귀를 기우리지 않고, 나라란 말을 세속 나라처럼 일방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용서받지 못할 죄를 범한 자들이 지금도 있다면 이것이 두려운 것이다. 더구나 이런 죄를 범한 자들이 불신자들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함정에 빠져 있다면 이게 경악할 일이다. 누가 조사했는지는 모르지만 한국의 크리스천 80%가 하나님 나라를 반대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예수께서 나라란 말을 쓰신 것을 꼬투리 잡아 예수를 빌라도에게 넘겨 준 자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 했던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금 크리스천들도 나라란 말을 세속나라처럼 생각하고 반대하는 것이라면 유대인들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는 백성이 된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나라를 반대했던 유대인들을 두고 예수님은 사탄의 회로 규정했다.(계2:9) 하나님나라 도래를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환영해야 할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어야 한다. 그런데 반대하는 세력이 되었다면 이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란 뜻이 되는데, 그럼 이들은 누구라 해야 할까?
가톨릭을 두고 돌을 던진 사람이 있는가? 가톨릭은 이미 오래 전부터 나라시스템으로 되어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가톨릭을 두고 시비 거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가톨릭으로 돌아가지 않는 이유는 나라시스템이어서가 아니라 성경해석의 오류와 함께 철저한 종교라는 것 때문이다. 종교가 되면 안 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이 될 수가 없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 때문이다.(참고: 지금의 개신교 시스템역시 종교시스템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안 되면 구원(새 하늘과 새 땅으로의 진입)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이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2. 왜 소유된 백성의 자격이 상실 될까?
본래 사람을 창조하심부터 하나님의 소유된 자로 창조 하셨는데 아담이 범죄하고 에덴에서 축출되면서 하나님의 DNA에 문제가 된 것이다. 창세기 4장에 이르러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아담이 다시 자기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아들을 낳아 그의 이름을 셋이라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내게 가인이 죽인 아벨 대신에 다른 씨를 주셨다 함이며 셋도 아들을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4:25-26) 하고 5장이 기록 된다.
5장에 들어와서 다시 이 말씀을 반복한다. ‘아담은 백삼십 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창5:3) 이렇게 해서 셋의 자손들이 5장에서 번성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의 자손들이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창6:1-3)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이 말씀을 주목해야 한다.
이들이 다시 육체가 되는 원인이 되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DNA로 태어난 사람들이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것을 취함으로(아내를 삼음으로) 육체가 되었고,(세상 사람이 되었고) 이들을 보신 하나님은 한탄하시면서 노아 홍수 심판을 계획하신다. 그리고 마침내 노아 한 가족을 선택하시고, 코에 생명의 기운의 숨이 있는 것은 모두 다 죽여 버린 사건이 노아홍수 심판이다.(창7:22) 왜 이런 처참한 일을 겪어야 하는가? 아담이 범죄하고 난후에 ‘메시아 언약(은혜언약)이란 걸 하셨는데,(창3:15) 이 언약 때문에 인류역사를 무참하게 끝내실 수 없기 때문에 노아의 가족으로 하나님은 구속사(救贖史)를 다시 시작하신다.
이들이 방주에서 나와 인류의 역사를 다시 시작할 때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된 백성임을 다시 확인을 시키신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너희는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가득하여 그 중에서 번성하라 하셨더라.’(창9:6-7) 그리고 이어서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한 아들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가 내 언약을 너희와 너희 후손과 너희와 함께 한 모든 생물 곧 너희와 함께 한 새와 가축과 땅의 모든 생물에게 세우리니 방주에서 나온 모든 것 곧 땅의 모든 짐승에게 니라.’(창9:8-10) 인류역사를 다시 시작하시면서 당신의 소유된 백성임을 재확인을 하신다.
그리고 노아의 자손들에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 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대대로 영원히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니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9:12-13) 구원을 보장하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런데 노아의 자손들은 10장에 이르면서 땅에 번성하고 번성해 진다. 사람이 많아지고, 정착의 기반들이 만들어 지고, 세력이 엄청나게 커지고, 힘이 생겨지면서 노아의 자손들은 11장에 이르러 바벨탑 운동을 벌리게 된다.
여기서 벌어진 비극,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11:8-9) 바벨탑 운동은 ‘도시건설’(8)이라는 것이고 이것이 바벨탑이라 했다(9) 여기서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지면에 흩으셨다는 표현은 이들을 버렸다. 포기했다는 뜻을 가진 말씀이다.
왜 일까? 땅의 것과 함께 육체가 되어버린 이들이 결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미 이들이 육체(세상)가 되어버린 자들이지만 노아 때처럼 지면에서 쓰러버릴 수 없는 것은 앞 9장에서 무지개 언약 때문에 그리 할 수가 없어 언어를 혼잡하게 해서 흩어버리셨다는 것이다. 언어의 혼잡은 소통을 못하게 했다는 말인데, 이 말은 뒤에 가서 다시 설명을 하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자들이 되었다는 뜻은 사람들과의 소통뿐 아니라 하나님과도 불통이 된다는 말로 이해를 해야 한다. 세상이(육체가) 되어버린 자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 수가 없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사6:10-11)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마13:10-1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 이다.’(마11:25-26) 세상이 되어버리면 하나님과 소통이 안 되기 때문에 들어도 그 소리가 들리지 않고, 보아도 깨달을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돌이켜 고침을 받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침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회개를 못한다는 말이다. 이보다 더 큰 저주는 없다. 어쩌면 이 같은 현상은 지금의 형편이 아닌가 싶다.
3. 다시 시작하는 역사(History)
1) 형상과 모양의 효력
아담으로 시작된 인류역사가, 노아 출현으로 1차 끝나고, 노아의 자손으로 다시 시작된 제2차 인류역사가 시작되었지만, 이 역사(歷史)역시 바벨탑 사건에서 끝이 났는데, 여기서 창세기 9장의 무지개언약의 약속 때문에 노아 때처럼 몽땅 죽일 수가 없어서 육체가 되어버린 사람들도 여전히 이 땅에 존재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여기서 하나님은 부득이 구별된 백성(당신의 소유된 백성)을 따로 구별을 해야 했는데 이것이 선택이란 방식이었다. 아담으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형상과 모양이 가진 효력(意味效力)은 2천년동안 유지 되어 왔었는데, 아브라함의 선택과 함께 그 효력은 끝이 나고 만다.
2) 아브라함의 선택과 할례
그리고 다시 제3차 역사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아브라함의 선택으로 시작을 한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은 당신의 소유된 백상으로의 부르심이었고, 그 표시로 할례를 받게 한다. 이때부터 성경에는 선민(選民)이란 말과 이방인(異邦人)이란 말이 등장된다.(무지개 언약 때문에 만들어진 구별의 표시방식) 창세기 3장 15절부터 시작된 구속사는 이번에는 아브라함으로 승계되어 선민을 중심한 역사가 진행이 되는데, 이것이 바로 구약의 역사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출애굽 전까지는 아브라함의 가족사(家族史)로 진행이 되었고, 출애굽 이후부터 비로소 민족사(民族史)로 바뀌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만들어 진 것이 이스마엘족(하갈에게서 난 자식)과 에서(이삭의 쌍둥이 아들 중 큰 아들)로 인한 에돔 족이 나오고, 이들 중에는 다윗 왕 때 쓰임 받은 사람들도 있었지만,(대상2:17,27:30) 주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들로 이스마엘 족속은 미디안이란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밖에도 아람족들 혹은 수리아족이라 부르기도 하는데 이들은 노아의 손자 아람의 후예들 일거라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아람지역에 살면서 아람어를 사용했던 유대인들 중에도 여기에 포함된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이슬람권 사람들을 통칭해서 아랍인(the Arab Peoples)이란 말을 쓰기도 한다.
한편 이스라엘이 소멸된 것과는 달리 B.C 4백년 경에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중심이 되어 유대교를 창건,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4백년의 유대교 역사를 이끌게 되어왔다. 북조이스라엘의 흩어진 족속 중에는 유다 족에 흡수되어 유대인의 역사가 이어져 온 것인데, 이것이 아브라함부터 시작된 2천년동안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표시로 할례가 그 효력을 가지고 진행되어 왔다. 에스라 법전은 율법이 강화된 법전으로 유대교의 중심 신앙의 틀이 되었다. 2천년이 지나 2차 대전이 끝나고 1947년 이스라엘이라는 국호로 독립국가가 된 것은 12지파의 족속명이 비로소 재사용이 된 셈이다.
3) 그리스도 오심과 세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할례시대는 그 효력이 마감이 되고, 신약교회의 탄생과 함께 세례시대(교회시대)가 열려지게 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표시가 할례에서 세례로 바뀌게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서 다시 반복해보자. 첫 번째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하나님의 소유된 자의 표시였었고, 그 다음이 할례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표시였는데, 예수님이 오시면서 이번에는 세례가 하나님의 소유된 자들에게 부여된 표시가 된다. 이것은 구원의 효력이 이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표시를 거듭거듭 형식을 바꾸면서 진행해 오셨다는 사실을 믿는 다면 네(4)번째 표시도 믿어야 한다. 할례 받지 아니한 자가 히브리 백성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세례 받지 아니한 자가 신약백성이 될 수 없는 것처럼, 마지막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자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지 않고는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진입이 불가능 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지금 세례 받은 것으로 구원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말은 필자의 말이 아니고, 요한계시록의 증거이다. 할례 받은 유대인들이 세례를 받지 않고 신약백성(구원)이 될 수 없었던 것처럼, 지금은 세례 받아 크리스천이 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않고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구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인치심의 사건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는 네(4)번째 표시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 교회당교회에 머물러 있는 분들에게는 충격이 될 것이고, 어떤 이들은 황당한 이야기라고 분노를 하겠지만 계시록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 다면 인침의 사건도 믿어야 한다.
4) 네 번째 표시와 짐승의 표
심각한 것은 네 번째 표시가 남아 있는데, 이마에 하나님의 인(이것은 다음 장면에서 언급함) 맞지 아니한 자들은 자연히 짐승의 표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중간은 없다) 하나님의 인침을 받느냐, 짐승의 표를 받느냐? 어느 쪽 사람이 되느냐 하는 문제는 마지막 운명이 결정이 되는 일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인침 받는 일이 소중한 것이란 것을 알면서도 쉽게 그 부르심에 동의를 못하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이들은 핑계거리(변명의 이유들)를 만들면서 하나님의 인침 받는 것을 기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왜 기피하려 할까? 그 것은 돈과 직접 관계된 일이기 때문이다. 사탄은 돈을 무기로 삼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려는 자들 앞에 덫을 놓고 있어, 하나님의 인침을 거부하거나 주저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 독자는 생각해 봐야한다. 짐승의 표란 돈과 직접관계가 되어 있기 때문에 결단이 쉽지 않은 것이다. 돈은 현실(눈에 보이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이상(영의 일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의 덫인 줄 알면서도 그 덫을 피(포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짐승의 표가 왜 돈인가?
계시록에 명시 된 것은 짐승의 표를 받지 않고는 매매활동을 못하게 되는데(계13:16-18) 매매활동을 못한다는 것은 경제활동을 못한다는 뜻이고, 경제활동을 못한다는 것은 돈을 벌 수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짐승의 표는 곧 돈과 직접관계가 되어 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일지라도 지금 돈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더구나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돈은 권력이다. 돈 앞에서는 부모형제도, 사제지간도, 의리나 믿음이란 것도, 하나님과의 약속도, 심지어 하나님도, 돈보다 더 우월한 것은 없다.
더군다나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된다는 고백으로 하나님의 인침을 받는 것인데, 돈의 권력을 포기하고 인침을 받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당신 같으면 할 수 있겠는가?(배와, 그물과, 아비를 버리고, 사람 낚는 어부 된 자들과, 부자청년을 비교생각해 보라)
돈은 현실이고 믿음은 이상에 속한 것이라 했다.(히11:1-2), 그래서 본래 성서적 신앙이란 지금이 아니고 미래를 추구하는 것이며(히11:8-10), This time(지금)이 아니고, Next time(다음)을 준비한 사람이며(마25:1-13), 실리가 아니고 명분에 가치를 두는 사람이며(창25:27-34), 땅의 일이 아니고 하늘의 일이며(벧전1:3-4, 21), 육체의 일이 아니고 영(靈)의 일이며(갈5:17),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이 같은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 구별이 된다.(히11장 참고)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문제가 되어 있는 것은 지금의 교회당교회 시스템이 이런 구별을 할 수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21세기 크리스천들의 믿음은 현실이 되어 있어 이것이 위기란 것이다. 왜 위기인가? 사람들은 조금도 두려움 없이 아주 자랑스럽게 돈의 권력에 매달려있고, 그 권력을 휘두르며 살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그래도 구원은 보장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되어버린 사람들이 오히려 교회를 지배하는 세상(돈이 지배하는 교회세상)이 되었기 때문에 이게 위기란 것이다.
이런 절박한 상황이지만 세상이 된 사람들은 들어도, 들어도 알아듣지 못하고, 설명을 아무리 해 줘도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되어 있다. 그래서 세상이 되어버린 사람들은 위기감이 없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깨닫지 못하게 하셨기 때문일 것이다.(마13:11-13)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된 사람들만 들을 수 있는 음성이요, 그들만 인침을 받아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된다.(부자와 나사로를 생각해 보라) 내 친구들도 내 가족도 아직도 세상이 된 자리에 남아있기 때문에 필자는 고민을 한다.
이리 말해도 실감을 못하고 비웃는 사람들이 있겠지만 사실 지금까지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의 삶이 아닐지라도, 허용된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지금의 삶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 돌이어 이리 말하는 사람을 조롱의 눈빛으로 바라보겠지만 21세기에 진입해 있는 교회는 더 이상 묵인 될 수 없는 때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란 주제와 함께 하나님의 인침에 대한 계시록의 말씀을 가볍게 생각하지 안 했으면 좋겠다. 이 문제는 구원문제이기 때문이다.
4. 표시는 왜 바뀌게 되는가?
그럼 이제부터는 왜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된 백성의 표시를 바꾸셔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보자. 왜 하나님은 그 표시들을 바꾸면서 구속사를 이끌어 오셨을까? 왜 그랬을까? 이 문제가 이 글을 쓴 중심주제이다. 앞글은 이미 앞에서 발행된 책에도 부분 언급된 말씀들이다. 여기서 이 주제를 언급한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주제란 점에서 절박감을 가지고 이 글을 쓴다. 표시의 이동은 곧 구원의 이동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21세기 교회는 정신을 차리고, 깊이 검토하고 판단해야 한다. 표시가 바뀔 때의 상황부터 검토를 해보자.
*하나님의 소유된 표시가 바뀌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1) 첫 번째, 하와에게서부터 시작이 된다. 화와는 뱀의 유혹을 받게 되는데, 결정적인 것이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 직도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
2) 두 번째는 셋의 자손들에게서 표현된다.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창6:1-3)
3) 세 번째는 노아의 자손에게서 들어난다.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창11:4)
4) 네 번째는 할례 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다. 이들의 결정적 요인은 예루살렘 성전건축으로부터 시작이 된다. 본래 다윗이 성전을 지으려 할 때 하나님이 거절하심을 주목해야 한다. 다윗은 자기는 피를 많이 흘려서 하나님이 거절하신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삼하7: 4-7, 역상22:8, 대상17: 3-5, 참고), 영(靈)의 하나님은 이 장막과 저 성막에 거하시면서 당신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신 분이셨다.
솔로몬의 헌 당사 중에도 ‘캄캄한데 계시겠다.’(왕상8:12)고 하신 말씀을 주목하면 더 분명해 진다.(캄캄한데 란 성막으로 해석해야 한다.) 왜 이게 문제가 되느냐하면 우주를 통치하시는 영의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집에 거하실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행17:24-25) 솔로몬 성전이 곧 가시적인 것에 영의 하나님을 가둬버리는 우를 범한 짓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것을 하지 말라 하신 것으로 봐야 한다.(이방인들의 손을 빌려 성전을 헐고, 또 헐도록 허용하신 것을 주목해 보라)
예수님은 오셔서 이 성전을 헐라 하셨고, 성전을 헐고, 그 대안으로 당신의 몸을 제시하신 것에 주목해 보라.(요2:19-21), 유대인들이 육체(세상)가 된 것은 성전에 모든 신앙이 집중되고, 전통지식을 따른 행위는 회칠한 무덤들(형식들)이 된데 원인이 있다. 그것을 자랑삼는데 서 그들은 영의 하나님을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5) 다섯 번째는 중세 교회들의 모습이다. 중세교회는 일일이 소개를 안 해도 독자들이 너무나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들어난 몇 가지만 생각해도 중세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일반 신들을 섬기는 종교조직을 만들었고,(가톨릭은 지금도 종교국가의 하나), 그들이 한 업적은 사원건립과, 물리적 힘으로 기독교 영토 확장을 꿈꾼 사람들이 된 것에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2백년이 걸린 십자군 전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일들은 하나같이 가시적인 일들로 영의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해온 사람들이었다. 한마디로 중세교회 가치는 유대인들처럼, 가시적(可視的)인 것에 가치를 두었고, 그 절정의 표현이 화상숭배 사상이라 할 수 있다. 영의 하나님은 가시적인 것을 어떤 모습으로든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출20:4), *참고: 화상숭배논쟁은 8세기 초에서부터 시작되어 마침내 1567년 트리엔트 총회에서 결정 된 것이 지금까지 그것을 유지 하고 있다.
6) 지금 우리는 어떤가? 여기서 우리란 말은 한국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다. 지금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여기서 두 가지만 생각해 보자. 하나는 지금 대형교회들의 모습이나 지금의 교회당교회들의 모습을 영의 하나님의 시각에서 보실 때 어떻게 보실까? 그리고, 한국교회의 성직자들이나 성도들의 가치관(價値觀)이다. 실리에 치우쳐 있을까, 명분에 있을까? 다른 말로하면 영의 세계에 관심이 있을까, 눈에 보이는 현실에 관심이 더 클까?
인식이 잘 안 되는가? 돈, 명예, 인끼(명성) 그래서 큰 교회당, 많은 신자, 박사학위, 직함자랑, 영향력을 갖는 것, 고급 주택, 고급승용차, 상류사회에 맴버가 되는 것, 그래서 골프도 치고, 스포츠클럽에도 가입하고, 자기 신분 상승에 매달린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생명력이 활동하고, 뜨거워지고, 부흥되고, 살아 움직이는 교회가 될까? 아니면, 점점 죽어 가는 교회가 될까? 여기서 사도요한의 말씀을 들어 보자.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2:15-17)
하나님의 사람들도 세상이 되어 버린 현실, 오늘의 교회(당신의) 모습은 어떠한가? 사도요한의 말씀에서 당신은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모습에서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시는가? 육체가 되어버린 사람들, 세상이 되어버린 사람들, 짐승의 표를 받은 사람들(돈을 선택한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은 부득이 다음을 준비하실 수밖에 없으신다. 그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구별하고, 네(4)번째 표시가 따로 있음을 말씀한다. 이 말은 세례의 표시로 구원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네 번째 표시는 다음 글에서 언급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