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순애가 〈오빠생각〉으로 이원수보다 6개월 먼저 등단
⊙ 〈고향의 봄〉에 나오는 ‘꽃대궐’ 배경은 조각가 김종영 고택(창원 소답리)
⊙ 〈오빠생각〉의 주인공은 최순애의 친오빠 영주… 이원수·최순애의 결혼 도와
⊙ 이원수는 평소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즐겨 불러
⊙ 〈고향의 봄〉에 나오는 ‘꽃대궐’ 배경은 조각가 김종영 고택(창원 소답리)
⊙ 〈오빠생각〉의 주인공은 최순애의 친오빠 영주… 이원수·최순애의 결혼 도와
⊙ 이원수는 평소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 즐겨 불러
어른들의 세상에서 아동문학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아동문학은 한국문단에서도 따돌림 받기 일쑤다. 하지만 동요와 동시, 동화는 순수한 어린 마음을 담은 문학장르다. 일제 강점기, 아동문학만큼 착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을 꿈꾼 장르가 또 있었을까.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과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되는 〈오빠생각〉은 지금도 가장 많이 불리는 동요다. 〈고향의 봄〉은 이원수(李元壽·1911~1981), 〈오빠생각〉은 최순애(崔順愛·1914~1998)가 소년·소녀 시절 지은 동요다. 마산과 수원에 살던 10대 두 사람은 편지로 사연을 주고받다가 훗날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원수·최순애는 아동문학을 떠나 한국문학사에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잊어선 안 되는 인물이다. 〈고향의 봄〉과 〈오빠생각〉은 가시밭길 같았던 식민지 한국인의, 어린이의 착한 노랫말이 담겨 있다. 이 동요를 부르면 무슨 마력처럼 누구나 선한 마음을 갖게 된다. 아동을 천사로 바라보는 ‘천사주의 문학’이 아동문학이라면 〈고향의 봄〉과 〈오빠생각〉은 한국인에게 천사의 노래와 다름없다.
이원수·최순애는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현재 장남 경화(李京樺· 1937~)와 장녀 영옥(李瑛玉·1941~), 차녀 정옥(李貞玉·1945~)은 생존해 있다. 장남은 미국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 거주하고 있고 두 딸은 경기도 오산과 군포에 살고 있다. 영옥·정옥을 지난 6월 4일 만났다.
차녀 정옥은 부모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버지(이원수)는 어머니(최순애)를 만나 큰 덕을 봤죠.(웃음) 안 그랬으면 작가 생활을 제대로 하셨을까요? 모든 면에서 참고 이해하며 지원을 하셨으니까요.”
—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 그런 말씀은 안 하셨지만 미당(未堂 徐廷柱·1915~2000) 선생이 만날 그러셨어요. 우리집이 미당 댁과 마주보고 있었거든요. ‘우리 두 사람은 마나님을 잘 만나, 마나님 덕에 산다’고요. 보통 아내 같으면 다 도망갔죠. 바가지 긁다가, 긁다가….”
이정옥은 부모 이름에다 ‘씨’를 애교 있게 덧붙였다.
“이원수씨는 최순애씨 때문에 살았고, 당신이 쓰신 문학작품도 어머니가 만날 읽어 주고 ‘잘 쓴다, 잘 쓴다’고 격려하고 이해해 주셨으니까 (작가노릇을) 할 수 있었지….”
— 이원수 작품을 최순애가 ‘퇴고’해 주셨군요.
“다 쓰시면 늘 어머니께 (원고뭉치를) 읽어 보라고 던지셔요. 그러면 어머니는 (읽고) 몇 마디 하셨겠죠.”
“문필업이라고 하면 어떨까?”
— 그 시절, 문인은 가난했으니까요.
(정옥) “힘들어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어요. 학창시절,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버지 직업을 써 넣어야 했는데 그게 골치 아팠어요. 출판사에 다니시면 회사원이라 쓰면 되는데, 출판사가 불이 나거나 망해 백수가 될 수밖에 없으셨죠. 그렇다고 무직이라 쓸 수 없고 작가라 쓰기도 뭣하니까 아버지가 한번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문필업이라고 하면 어떨까?’”
— 하지만 한국의 어린이들이 모두 두 분이 지은 곡을 불렀잖아요. 자부심이 있으셨죠?
(영옥) “어린 시절, 부모님이 유명한 작가인지 알았나요? 만날 월사금 못 내서 수업시간에 교실 뒤에서 벌을 서야 했어요. 중학교 졸업식 때 학비 못 냈다고 졸업장마저 뺏겼어요. 하지만 자식들 대학까지 다 시켜 주셨어요. 가난이 창피하진 않았습니다. 그건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셔서 그런 것 같아요.”
차녀 정옥은 “부모님이 아들·딸 구별을 안 하셨다. ‘여자니까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는 유교사상이 없으셨다”고 했다.
“그 덕에 제가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랐어요. 몇날 며칠 국수 한 상자로 끼니를 때웠지만 한탄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조그만 마당에 온가족이 둘러앉아 하모니카를 불고 아버지가 지으신 노래를 불렀으니까요.”
곁에 있던 장녀 영옥이 말을 더했다.
“설날에 쌀이 떨어졌을 때가 생각나요. ‘설날 아침 흰 눈이 펑펑 내렸네~’로 시작되는 동요가 있었는데, ‘설날 아침 쌀독이 텅텅 비었네~’로 개사해 불렀어요. 그런 점이 다른 집과 달랐습니다. 속내를 모르던 친구는 우리집이 아무 걱정 없던 집으로 비쳤대요. 얼마나 힘들었는데…. 아이에서 어른까지 철없던 가족… 저희는 독특한 부모님을 두었어요.”
이원수 선생은 겉보기에 바짝 마르고 기운 하나 없이 보였지만 고집만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 고집을 살려 주는 것이 아내 최순애의 몫이었다. 차녀 정옥의 말이다.
“아버지는 정부에서 쓰라는 글은 한 편도 안 썼어요. 이승만 대통령의 전기를 누가 쓰라고 권했지만 거절하셨죠. 언젠가 육영재단이 어린이 잡지인 《어깨동무》를 창간했을 때 편집장을 맡겼으나 또 마다하셨어요. 그 자리에 가셨으면 생활이 안정됐을 텐데, 어머니도 안 권하셨죠. 이모들이 공무원 연금매장 내 자리를 알아봤지만 아버지가 절대 못하게 하셨어요. 이모들이 우리집에 ‘쌀이 있는지, 연탄은 있는지’ 항상 걱정이셨어요.
아버지의 말년도 풍족하지 않으셨어요. 암에 걸리셨는데 의료보험 혜택도 못 받았죠. 문학상금을 타서 (빚을) 메우고… 돌아가실 때 걱정이 되셨던지 자식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한다’고 하셨죠. 집 한 채밖에 없었으니까…. 놀랍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웅진출판사에서 30권짜리 전집이 발간됐어요. 그 덕에 어머니 노후는 걱정이 없었어요. 제가 어머니께 그랬죠. ‘이원수씨가 다 엄마한테 갚고 있는 거야. 걱정하시지 말라’고요.”
〈오빠생각〉의 비밀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1899~ 1931) 선생이 펴낸 《어린이》(1923년 창간)라는 잡지가 있었다. 마산에 살던 16살(1926년) 소년 이원수는 이 잡지 4월호에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을 투고했다. 이 동시가 그의 첫 작품이자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국민동요다. 훗날 홍난파 선생이 곡을 붙여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한 해 전인 1925년 《어린이》 11월호에 최순애의 〈오빠생각〉이 당선됐다. 이 동시는 박태준이 곡을 붙여 유명해졌다. 이원수보다 최순애가 문단 6개월 선배인 셈이다.
이원수는 〈오빠생각〉이란 동시가 마음에 들었다. 같은 잡지에 글이 실렸다는 핑계로 최순애에게 편지를 썼더니 이내 답장이 왔다. 7~8년 동안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았고 두 사람은 혼인할 뜻을 키웠다.
1935년 어느 날 이원수는 최순애가 사는 수원으로 가기 위해 기차표를 끊었지만 어이없게도 만나기로 한 그날 일제 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 이원수가 ‘사상범’으로 검거됐다는 소식이 최순애 집에 전해지자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차녀 정옥의 말이다.
“아버지랑 만나기로 한 그날, 이모 말로는 (어머니가) 숄을 두르고 윗옷에 꽃을 달았다고 해요. 서로 표시를 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아버지가) 못 오셨잖아요.
두 분이 결혼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외삼촌 최영주(崔泳柱·본명 최신복)가 많이 도움을 줬어요.”
최순애보다 8살이 많은 오빠 최영주(1906~1945)는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에서 수학했다. 소파가 중심이 된 어린이 단체인 색동회 동인으로 활동했다. 최순애의 〈오빠생각〉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바로 최영주다. 최순애가 쓴 동시를 《어린이》에다 투고하도록 도운 이 역시 최영주다. 그는 이원수라는 문학 소년의 재주를 일찌감치 알아보았고 집안의 반대를 설득, 여동생과 결혼하도록 도왔다고 한다.
장녀 영옥의 말이다.
“외갓집은 기독교 가정이었고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뒀는데 딸 다섯 모두를 당시 이화·배화·동덕에 유학시킬 정도로 개화됐어요. 수원에서 큰 과수원을 했어요. 외삼촌(최영주)은 《어린이》에서 방정환 선생을 모시고 함께 일을 하셨죠.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병약하셔서 배화학당(배화여고)을 다니다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학교엘 못 가니 다락방에서 오빠(최영주)가 읽던 문학전집을 다 읽었다고 해요.”
— 〈오빠생각〉 창작의 뒷얘기가 궁금합니다.
차녀 정옥의 말이다.
“오빠 최영주는 서울에서 지내는데 주말이면 수원 본가로 내려왔어요. 하지만 점점 내려오는 횟수가 줄었다고 합니다. 서울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럼, 온 가족이 오빠를 그렇게 기다렸다고 합니다. 1남5녀의 외동이니 집안의 기대나 바람도 컸겠죠.
과수원을 하시던 외할머니는 아들(최영주)에게 주려고 잘 익은 수박이나 참외를 이파리 밑에다 숨겨 뒀는데 아들이 안 오면 시든 잎이 금방 눈에 띄었대요. 그러면 이모들이 ‘요것은 내 거야’ 하며 따 갔대요. 그렇게 아들을 몹시 기다렸나 봐요. 그 기다림이 〈오빠생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최영주(최순애 오빠)는 《어린이》 잡지에서 방정환과 함께 일해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 〈오빠생각〉 전문
차녀 정옥은 〈오빠생각〉에 얽힌 비밀을 한 가지 더 들려주었다.
“원래 어머니는 처음엔 ‘비단 구두’ 대신 ‘비단 댕기’로 썼대요. 외삼촌(최영주)이 나중 ‘비단 구두’로 고쳤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비단 구두가 어디 있느냐’고 하는데 전쟁 때는 가죽이 귀해서 비단으로 신(구두)을 만들었다고 해요. 하지만 비단 구두는 잘 터졌대요.”
—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라 천진난만이셨죠. 몸은 굉장히 약하셨지만 (정신이) 강인한 데가 있으셨어요. 이모 말씀이 ‘애도 못 낳고 일찍 죽을 것 같았다’고 해요. 그런데 6남매를 낳고 모유로 키웠잖아요. 어머니 말씀이 ‘고생을 하니 그럴 수밖에 없더라’고 하셨죠.(웃음)”
이원수·최순애는 1936년 6월 결혼,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합포초등학교 근처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장녀 영옥은 어머니에 대한 이런 기억을 들려주었다.
“불쌍한 이웃을 무턱대고 도우시고 분수없이 일을 잘 저질렀어요. (웃음) 시골서 고생하는 친척이 있으면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서울로 불러들여요. 그러곤 다 퍼주는 거예요.
시장에서 물건을 사도 성한 것은 안 사셨어요. 채소는 시든 것, 생선은 꼬리가 뜯긴 것, 과일은 흠이 난 것만 사셨어요. 시골서 상경한 듯 어수룩해 보이는 상인들 것만 사셨죠.”
〈고향의 봄〉 창작의 비밀
이원수 역시 딸 많은 집의 외동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넷, 밑으로 여동생이 둘이었다. 목수인 아버지(李文術)를 따라 경남 양산, 창원, 김해, 마산 등지로 이사를 다녔다.
〈고향의 봄〉 배경이 되는 곳은 창원 소답동이다. 이원수의 어린 시절, 그곳은 꽃이 많아 ‘꽃동네’로 유명했는데 조각가 김종영의 생가를 배경으로 동시를 썼다고 한다. 김종영 생가는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 200호로 지정돼 있다.
장녀 영옥의 말이다.
“아버지는 경남 양산읍 북정리 660번지에서 태어나셨어요. 지금 생가는 사라지고 터만 남았죠. 양산유물박물관 바로 아래에요. 생가 터를 구입하려 했는데 땅 주인이 안 판대요.
아버지는 창원 소답리에서 자라셨는데 〈고향의 봄〉에 나오는 ‘꽃대궐’ 배경이 김종영 고택입니다. 그 일대에 복숭아꽃, 살구꽃 가득했고 ‘새터’라고 불렀대요. 요즘 말로 ‘새동네’인 셈이죠.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고택 앞길을 ‘이원수길’이라 부릅니다.”
이원수가 1980년 한 잡지에 ‘고향의 봄’을 쓰게 된 얘기를 털어놨다.
〈…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이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서당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
—이원수는 추측건대 봄을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차녀 정옥이 말했다.
“글쎄요. 봄이겠죠. 생전 꽃 가꾸시는 것도 좋아하셨어요. 장미도 키우시고 겨울이면 어디서 볏짚을 구해 와 꽃들을 감싸던 기억이 납니다.”
정옥은 〈고향의 봄〉과 관련한 이런 이야기를 보탰다.
“아버지의 은사셨던 이일래(李一來·1903~1979) 선생이 계셨어요. 아버지가 《어린이》 잡지에 응모할 때 이 선생이 제목을 ‘고향’으로 고쳤다가 나중에 지금의 제목으로 바로잡았다고 합니다. 또 홍난파 선생이 곡을 만들기 전에 이 선생이 먼저 곡을 붙여 마산 창원 지역을 중심으로 인기가 많았다고 해요.
참!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노랫말 중 ‘아기 진달래’라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원래 ‘아기 진달래’라는 표현을 아버지가 안 썼는데 동요 심사를 하면서 마해송 선생이 그렇게 고쳤다고 해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고향의 봄〉 전문
— 아버지 성격은 어떠셨나요.
정옥의 말이다.
“집에선 유쾌하셨어요. 약주를 잡수시면 노래도, 농담도 잘하시고 유머가 있으셨어요. 혜은이의 〈제3한강교〉, 패티김의 〈4월이 가면〉을 곧잘 부르셨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시 유행가를 잘 아셨어요. 6·25 전쟁 통에 불렀던 조슬랭의 〈자장가〉도 기억나요. ‘잘 자거라 내 사랑아, 꿈길도 편안할지어다. 은혜와 사랑 속에서 고요히 자거라 내 사랑아. 새벽은 아직 멀었다~’고 노래하셨죠.”
가난한 누나를 그리워하는 동시 남겨
— 딸 많은 집의 외동이어서 외로움이나 수줍음이 많았을 것 같아요.
“아버지와 동갑인 윤석중 선생이 마산에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둘 다 열일곱 동갑이었는데 윤 선생이 남기신 글에 아버지 얘기가 나와요. 아버지는 ‘통 말없는 소년’이었대요. ‘집안에 무슨 큰 걱정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처음 만나 집안 형편을 물어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주고받는 말도 별로 없이 싱겁게 하룻밤을 보내고선 ‘울산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아버지는 ‘나는 못 간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셨대요.
윤 선생을 만날 당시 아버지는 당신의 큰누나댁에 기거했던 모양입니다. 큰누나가 소실이어서 얼굴이 밝을 수 없었을 거예요. ….
집이 가난해 딸들이 모두 돈을 벌어야 했어요. 아버지가 쓰신 시들 중에 배고픈 어린이 이야기가 많고 일하러 간 누나를 그리워하는 시도 많아요.”
일본으로 돈 벌러 떠나는 소년과 누나를 설워하는 〈가시는 누나〉(1929), 도시 공장으로 돈 벌러 떠난 언니와 누나가 보고 싶어 기다리는 〈기차〉(1928), 서울 방직공장에 취직한 언니를 그리워하는 〈그림자〉(1930), 고향을 등지고 북간도로 떠나는 수남이와 순아 식구를 배웅하는 〈잘 가거라〉(1930), 광산에서 일하는 누나와 형을 그린 〈찔레꽃〉 (1930) 등이 있다. (참고 《이원수 동요 동시 연구》)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남 모르게 가만히 먹어 봤다오.//
광산에서 돌 깨는 누나 맞으러
저무는 산길에 나왔다가//
하얀 찔레꽃 따 먹었다오.
우리 누나 기다리며 따 먹었다오.
- 〈찔레꽃〉 전문
차녀 정옥의 말이다.
“아버지는 고모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많으셨어요. 언젠가 마산 사시던 큰고모님을 서울로 불러 한동안 같이 지냈는데 조카를 취직은 시켰지만 ‘뽄때(본대)’ 있게 도와주고 싶어도 그게 안 됐어요.”
‘소’가 ‘말’을 이기는 날이 꼭 올 것
— 아버지 이원수는 당신 작품 중 어떤 동시를 좋아하셨나요.
영옥의 말이다.
“사람들이 아버지께 노래를 권하면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로 시작하는 〈겨울나무〉를 즐겨 불렀어요. 저도 〈겨울나무〉를 좋아해요. 〈불어라 봄바람〉, 〈세우자 새 나라〉도 기억납니다.”
정옥은 이렇게 말했다.
“그땐 라디오에서 동요가 나오면 다 따라 불렀어요. 지금은 그런 게 없죠. 너무 넘쳐나서 아이들이 부를 게 없어요. 게임하느라고 다들 바쁘죠.”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원수의 이름이 4776명의 명단에 올라와 있다. 명단에는 작곡가 홍난파, 무용가 최승희 등 문화계 인사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차녀 정옥의 말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의 이름이 올랐다기에 그쪽에다 이의 신청을 했어요. 아무 것도 없던 사람이 결혼해 직장까지 잘려 막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약방 서기 노릇을 하며 사는데 직장을 마련해 준 사람이 기관지에다 글을 쓰라 권하니 안 쓸 수가 있나요? 막막하던 그 시절을 어떻게 객관적 자료로 증명합니까. 참….”
이원수는 마산공업상업학교(현 마산 용마고)를 졸업(1931년)하고 경남 함안금융조합 본점 서기로 취직했다. 그러나 몇 해 뒤 ‘독서회 사건’으로 징역형을 받고 말았다. 최순애와 결혼은 했으나 살길이 막막했다. 처가에서 집을 사라고 큰돈을 보탰지만 야금야금 생활비로 다 써 버리고 말았다.
한약방 회계로 일했으나 여전히 생활은 어려웠다. 1937년에 함안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됐다. 그곳 이사(理事)가 ‘임시직원으로라도 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제야 생활에 안정을 찾았고 함안에서 장남을 낳았다고 한다.
차녀 정옥의 회고다.
“‘독서회 사건’이 끝나고 해방이 가까워 오면서 어머니가 무척 불안해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밤이면 으슥한 저수지 같은 곳에서 매일 사람들을 만나곤 했던 거예요. 아버지는 ‘일본이 곧 망한다’는 말씀을 하셨대요. 어디서 그런 뉴스를 들었던가 봐요.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항상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셨죠. 또 잡혀갈까 봐….
일본 형사가 자주 찾아왔대요. 지나가다 들렀다는데 늘 감시를 하고 있었어요. 평생 욕을 입에도 안 담으시던 어머니는 ‘일본사람’이라 하지 않고 ‘일본놈’이라 불렀어요. 지능적으로 괴롭혔다고 합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장남 경화는 아버지 이원수에 대한 이런 글을 보내 왔다.
이경화는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와 미국 뉴멕시코대 대학원(공학박사)을 나왔다. 체신부 전기통신훈련소 전임강사를 하다 도미(渡美), 벨연구소와 항공사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아리랑 2호 등 인공위성과 항공장비의 전자회로 설계를 자문받았다고 한다.
〈… 아버지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해방되기 전 어렸을 때의 일이다. 내가 가야국민학교에 다닌 1~3학년(1943~1945) 때의 일이다. 집에서 우리말만 했던 나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일본어로 가르치는 선생님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중략) 아버지는 어머니가 일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하셨고 ‘얼마 안 가 일본은 망할 텐데 일본말은 몰라도 된다’고 하셨다. 제일 처음 가르쳐 주신 단어가 ‘소’, ‘말’이었다. 이어서 ‘아버지’, ‘누나’ 등이었다.
‘소’란 단어를 가르치시면서 ‘소’는 느리지만 힘이 세고 인내력도 있고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준다고 하셨다. ‘소’는 사람에 비교하면 조선 사람이고 ‘말’은 빠르게 뛰는 동물이지만 인내력이 없고 힘도 별로 없으며 죽어서는 별 볼 것이 못 되는데(말고기는 우리가 먹지 않으니까) ‘말’은 나라로 비교하면 일본과 같다고 하셨다. 우리 조선 사람은 ‘소’와 같아서 어려움이 있어도 잘 참고 견뎌 느린 거북이가 빠른 토끼와의 경주에서 이기듯이 ‘소’가 ‘말’을 이기는 날이 꼭 올 것이라고 하셨다. …〉⊙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로 시작되는 〈고향의 봄〉과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로 시작되는 〈오빠생각〉은 지금도 가장 많이 불리는 동요다. 〈고향의 봄〉은 이원수(李元壽·1911~1981), 〈오빠생각〉은 최순애(崔順愛·1914~1998)가 소년·소녀 시절 지은 동요다. 마산과 수원에 살던 10대 두 사람은 편지로 사연을 주고받다가 훗날 부부의 연을 맺었다. 이원수·최순애는 아동문학을 떠나 한국문학사에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잊어선 안 되는 인물이다. 〈고향의 봄〉과 〈오빠생각〉은 가시밭길 같았던 식민지 한국인의, 어린이의 착한 노랫말이 담겨 있다. 이 동요를 부르면 무슨 마력처럼 누구나 선한 마음을 갖게 된다. 아동을 천사로 바라보는 ‘천사주의 문학’이 아동문학이라면 〈고향의 봄〉과 〈오빠생각〉은 한국인에게 천사의 노래와 다름없다.
이원수·최순애는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현재 장남 경화(李京樺· 1937~)와 장녀 영옥(李瑛玉·1941~), 차녀 정옥(李貞玉·1945~)은 생존해 있다. 장남은 미국 뉴멕시코 주 앨버커키에 거주하고 있고 두 딸은 경기도 오산과 군포에 살고 있다. 영옥·정옥을 지난 6월 4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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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버지도 그렇게 말씀하시던가요.
“… 그런 말씀은 안 하셨지만 미당(未堂 徐廷柱·1915~2000) 선생이 만날 그러셨어요. 우리집이 미당 댁과 마주보고 있었거든요. ‘우리 두 사람은 마나님을 잘 만나, 마나님 덕에 산다’고요. 보통 아내 같으면 다 도망갔죠. 바가지 긁다가, 긁다가….”
이정옥은 부모 이름에다 ‘씨’를 애교 있게 덧붙였다.
“이원수씨는 최순애씨 때문에 살았고, 당신이 쓰신 문학작품도 어머니가 만날 읽어 주고 ‘잘 쓴다, 잘 쓴다’고 격려하고 이해해 주셨으니까 (작가노릇을) 할 수 있었지….”
— 이원수 작품을 최순애가 ‘퇴고’해 주셨군요.
“다 쓰시면 늘 어머니께 (원고뭉치를) 읽어 보라고 던지셔요. 그러면 어머니는 (읽고) 몇 마디 하셨겠죠.”
“문필업이라고 하면 어떨까?”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와 〈오빠생각〉을 쓴 최순애. 두 사람은 가시밭길 같았던 식민지 어린이의 착한 마음을 노래하는 동시 동요를 지었다. |
(정옥) “힘들어도 보통 힘든 게 아니었어요. 학창시절, 가정환경조사서에 아버지 직업을 써 넣어야 했는데 그게 골치 아팠어요. 출판사에 다니시면 회사원이라 쓰면 되는데, 출판사가 불이 나거나 망해 백수가 될 수밖에 없으셨죠. 그렇다고 무직이라 쓸 수 없고 작가라 쓰기도 뭣하니까 아버지가 한번은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문필업이라고 하면 어떨까?’”
— 하지만 한국의 어린이들이 모두 두 분이 지은 곡을 불렀잖아요. 자부심이 있으셨죠?
(영옥) “어린 시절, 부모님이 유명한 작가인지 알았나요? 만날 월사금 못 내서 수업시간에 교실 뒤에서 벌을 서야 했어요. 중학교 졸업식 때 학비 못 냈다고 졸업장마저 뺏겼어요. 하지만 자식들 대학까지 다 시켜 주셨어요. 가난이 창피하진 않았습니다. 그건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셔서 그런 것 같아요.”
차녀 정옥은 “부모님이 아들·딸 구별을 안 하셨다. ‘여자니까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는 유교사상이 없으셨다”고 했다.
“그 덕에 제가 세상 물정 모르고 자랐어요. 몇날 며칠 국수 한 상자로 끼니를 때웠지만 한탄하고 그러지 않았어요. 조그만 마당에 온가족이 둘러앉아 하모니카를 불고 아버지가 지으신 노래를 불렀으니까요.”
곁에 있던 장녀 영옥이 말을 더했다.
“설날에 쌀이 떨어졌을 때가 생각나요. ‘설날 아침 흰 눈이 펑펑 내렸네~’로 시작되는 동요가 있었는데, ‘설날 아침 쌀독이 텅텅 비었네~’로 개사해 불렀어요. 그런 점이 다른 집과 달랐습니다. 속내를 모르던 친구는 우리집이 아무 걱정 없던 집으로 비쳤대요. 얼마나 힘들었는데…. 아이에서 어른까지 철없던 가족… 저희는 독특한 부모님을 두었어요.”
이원수 선생은 겉보기에 바짝 마르고 기운 하나 없이 보였지만 고집만은 대단했다고 한다. 그 고집을 살려 주는 것이 아내 최순애의 몫이었다. 차녀 정옥의 말이다.
“아버지는 정부에서 쓰라는 글은 한 편도 안 썼어요. 이승만 대통령의 전기를 누가 쓰라고 권했지만 거절하셨죠. 언젠가 육영재단이 어린이 잡지인 《어깨동무》를 창간했을 때 편집장을 맡겼으나 또 마다하셨어요. 그 자리에 가셨으면 생활이 안정됐을 텐데, 어머니도 안 권하셨죠. 이모들이 공무원 연금매장 내 자리를 알아봤지만 아버지가 절대 못하게 하셨어요. 이모들이 우리집에 ‘쌀이 있는지, 연탄은 있는지’ 항상 걱정이셨어요.
아버지의 말년도 풍족하지 않으셨어요. 암에 걸리셨는데 의료보험 혜택도 못 받았죠. 문학상금을 타서 (빚을) 메우고… 돌아가실 때 걱정이 되셨던지 자식들에게 ‘어머니를 부탁한다’고 하셨죠. 집 한 채밖에 없었으니까…. 놀랍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웅진출판사에서 30권짜리 전집이 발간됐어요. 그 덕에 어머니 노후는 걱정이 없었어요. 제가 어머니께 그랬죠. ‘이원수씨가 다 엄마한테 갚고 있는 거야. 걱정하시지 말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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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애의 오빠 최영주 가족. 최순애의 〈오빠생각〉에 등장하는 오빠가 바로 최영주다. |
그런데 한 해 전인 1925년 《어린이》 11월호에 최순애의 〈오빠생각〉이 당선됐다. 이 동시는 박태준이 곡을 붙여 유명해졌다. 이원수보다 최순애가 문단 6개월 선배인 셈이다.
이원수는 〈오빠생각〉이란 동시가 마음에 들었다. 같은 잡지에 글이 실렸다는 핑계로 최순애에게 편지를 썼더니 이내 답장이 왔다. 7~8년 동안 편지와 사진을 주고받았고 두 사람은 혼인할 뜻을 키웠다.
1935년 어느 날 이원수는 최순애가 사는 수원으로 가기 위해 기차표를 끊었지만 어이없게도 만나기로 한 그날 일제 경찰에 검거되고 말았다. 이원수가 ‘사상범’으로 검거됐다는 소식이 최순애 집에 전해지자 집안이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차녀 정옥의 말이다.
“아버지랑 만나기로 한 그날, 이모 말로는 (어머니가) 숄을 두르고 윗옷에 꽃을 달았다고 해요. 서로 표시를 해야 되니까요. 그런데 (아버지가) 못 오셨잖아요.
두 분이 결혼하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외삼촌 최영주(崔泳柱·본명 최신복)가 많이 도움을 줬어요.”
이원수·최순애 내외. |
장녀 영옥의 말이다.
“외갓집은 기독교 가정이었고 딸 다섯에 아들 하나를 뒀는데 딸 다섯 모두를 당시 이화·배화·동덕에 유학시킬 정도로 개화됐어요. 수원에서 큰 과수원을 했어요. 외삼촌(최영주)은 《어린이》에서 방정환 선생을 모시고 함께 일을 하셨죠.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병약하셔서 배화학당(배화여고)을 다니다 중퇴하고 말았습니다. 학교엘 못 가니 다락방에서 오빠(최영주)가 읽던 문학전집을 다 읽었다고 해요.”
유년 시절, 이원수의 장녀인 영옥(왼쪽)과 차녀 정옥. |
차녀 정옥의 말이다.
“오빠 최영주는 서울에서 지내는데 주말이면 수원 본가로 내려왔어요. 하지만 점점 내려오는 횟수가 줄었다고 합니다. 서울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럼, 온 가족이 오빠를 그렇게 기다렸다고 합니다. 1남5녀의 외동이니 집안의 기대나 바람도 컸겠죠.
과수원을 하시던 외할머니는 아들(최영주)에게 주려고 잘 익은 수박이나 참외를 이파리 밑에다 숨겨 뒀는데 아들이 안 오면 시든 잎이 금방 눈에 띄었대요. 그러면 이모들이 ‘요것은 내 거야’ 하며 따 갔대요. 그렇게 아들을 몹시 기다렸나 봐요. 그 기다림이 〈오빠생각〉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최영주(최순애 오빠)는 《어린이》 잡지에서 방정환과 함께 일해
뜸북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며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기럭 기럭 기러기/ 북에서 오고
귀뚤 귀뚤 귀뚜라미/ 슬피 울건만
서울 가신 오빠는/ 소식도 없고
나뭇잎만 우수수/ 떨어집니다.
- 〈오빠생각〉 전문
차녀 정옥은 〈오빠생각〉에 얽힌 비밀을 한 가지 더 들려주었다.
“원래 어머니는 처음엔 ‘비단 구두’ 대신 ‘비단 댕기’로 썼대요. 외삼촌(최영주)이 나중 ‘비단 구두’로 고쳤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비단 구두가 어디 있느냐’고 하는데 전쟁 때는 가죽이 귀해서 비단으로 신(구두)을 만들었다고 해요. 하지만 비단 구두는 잘 터졌대요.”
—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부잣집에서 귀하게 자라 천진난만이셨죠. 몸은 굉장히 약하셨지만 (정신이) 강인한 데가 있으셨어요. 이모 말씀이 ‘애도 못 낳고 일찍 죽을 것 같았다’고 해요. 그런데 6남매를 낳고 모유로 키웠잖아요. 어머니 말씀이 ‘고생을 하니 그럴 수밖에 없더라’고 하셨죠.(웃음)”
이원수·최순애는 1936년 6월 결혼, 창원시 마산합포구 산호동 합포초등학교 근처에서 신접살림을 차렸다.
장녀 영옥은 어머니에 대한 이런 기억을 들려주었다.
“불쌍한 이웃을 무턱대고 도우시고 분수없이 일을 잘 저질렀어요. (웃음) 시골서 고생하는 친척이 있으면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든데 서울로 불러들여요. 그러곤 다 퍼주는 거예요.
시장에서 물건을 사도 성한 것은 안 사셨어요. 채소는 시든 것, 생선은 꼬리가 뜯긴 것, 과일은 흠이 난 것만 사셨어요. 시골서 상경한 듯 어수룩해 보이는 상인들 것만 사셨죠.”
〈고향의 봄〉 창작의 비밀
아동문학가 이원수. |
〈고향의 봄〉 배경이 되는 곳은 창원 소답동이다. 이원수의 어린 시절, 그곳은 꽃이 많아 ‘꽃동네’로 유명했는데 조각가 김종영의 생가를 배경으로 동시를 썼다고 한다. 김종영 생가는 문화재청 근대문화유산 200호로 지정돼 있다.
장녀 영옥의 말이다.
“아버지는 경남 양산읍 북정리 660번지에서 태어나셨어요. 지금 생가는 사라지고 터만 남았죠. 양산유물박물관 바로 아래에요. 생가 터를 구입하려 했는데 땅 주인이 안 판대요.
아버지는 창원 소답리에서 자라셨는데 〈고향의 봄〉에 나오는 ‘꽃대궐’ 배경이 김종영 고택입니다. 그 일대에 복숭아꽃, 살구꽃 가득했고 ‘새터’라고 불렀대요. 요즘 말로 ‘새동네’인 셈이죠.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고택 앞길을 ‘이원수길’이라 부릅니다.”
이원수가 1980년 한 잡지에 ‘고향의 봄’을 쓰게 된 얘기를 털어놨다.
〈… 창원읍에서 자라며 나는 동문 밖에서 좀 떨어져 있는 소답이라는 마을의 서당엘 다녔다. 소답리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읍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오래되고 큰 기와집의 부잣집들이 있었다. 큰 고목의 정자나무와 봄이면 뒷산의 진달래와 철쭉꽃이 어우러져 피고 마을 집 돌담 너머로 보이는 복숭아꽃 살구꽃도 아름다웠다. 서당마을의 꽃들이며 냇가의 수양버들 남쪽 들판의 푸른 보리…. 그런 것들이 그립고 거기서 놀던 때가 한없이 즐거웠던 것 같았다. …〉
—이원수는 추측건대 봄을 좋아하셨을 것 같아요.
차녀 정옥이 말했다.
“글쎄요. 봄이겠죠. 생전 꽃 가꾸시는 것도 좋아하셨어요. 장미도 키우시고 겨울이면 어디서 볏짚을 구해 와 꽃들을 감싸던 기억이 납니다.”
정옥은 〈고향의 봄〉과 관련한 이런 이야기를 보탰다.
“아버지의 은사셨던 이일래(李一來·1903~1979) 선생이 계셨어요. 아버지가 《어린이》 잡지에 응모할 때 이 선생이 제목을 ‘고향’으로 고쳤다가 나중에 지금의 제목으로 바로잡았다고 합니다. 또 홍난파 선생이 곡을 만들기 전에 이 선생이 먼저 곡을 붙여 마산 창원 지역을 중심으로 인기가 많았다고 해요.
참!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노랫말 중 ‘아기 진달래’라는 표현이 나오잖아요. 원래 ‘아기 진달래’라는 표현을 아버지가 안 썼는데 동요 심사를 하면서 마해송 선생이 그렇게 고쳤다고 해요.”
나의 살던 고향은 꽃 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 〈고향의 봄〉 전문
— 아버지 성격은 어떠셨나요.
정옥의 말이다.
“집에선 유쾌하셨어요. 약주를 잡수시면 노래도, 농담도 잘하시고 유머가 있으셨어요. 혜은이의 〈제3한강교〉, 패티김의 〈4월이 가면〉을 곧잘 부르셨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당시 유행가를 잘 아셨어요. 6·25 전쟁 통에 불렀던 조슬랭의 〈자장가〉도 기억나요. ‘잘 자거라 내 사랑아, 꿈길도 편안할지어다. 은혜와 사랑 속에서 고요히 자거라 내 사랑아. 새벽은 아직 멀었다~’고 노래하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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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최순애는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사진 가운데가 장남 경화, 오른쪽이 차남 창화, 최순애에게 안긴 이는 장녀 영옥. |
“아버지와 동갑인 윤석중 선생이 마산에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둘 다 열일곱 동갑이었는데 윤 선생이 남기신 글에 아버지 얘기가 나와요. 아버지는 ‘통 말없는 소년’이었대요. ‘집안에 무슨 큰 걱정거리가 있어 보였지만 처음 만나 집안 형편을 물어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주고받는 말도 별로 없이 싱겁게 하룻밤을 보내고선 ‘울산에 같이 가자’고 했는데 아버지는 ‘나는 못 간다’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셨대요.
윤 선생을 만날 당시 아버지는 당신의 큰누나댁에 기거했던 모양입니다. 큰누나가 소실이어서 얼굴이 밝을 수 없었을 거예요. ….
집이 가난해 딸들이 모두 돈을 벌어야 했어요. 아버지가 쓰신 시들 중에 배고픈 어린이 이야기가 많고 일하러 간 누나를 그리워하는 시도 많아요.”
일본으로 돈 벌러 떠나는 소년과 누나를 설워하는 〈가시는 누나〉(1929), 도시 공장으로 돈 벌러 떠난 언니와 누나가 보고 싶어 기다리는 〈기차〉(1928), 서울 방직공장에 취직한 언니를 그리워하는 〈그림자〉(1930), 고향을 등지고 북간도로 떠나는 수남이와 순아 식구를 배웅하는 〈잘 가거라〉(1930), 광산에서 일하는 누나와 형을 그린 〈찔레꽃〉 (1930) 등이 있다. (참고 《이원수 동요 동시 연구》)
찔레꽃이 하얗게 피었다오.
누나 일 가는 광산 길에 피었다오//
찔레꽃 이파리는 맛도 있지.
남 모르게 가만히 먹어 봤다오.//
광산에서 돌 깨는 누나 맞으러
저무는 산길에 나왔다가//
하얀 찔레꽃 따 먹었다오.
우리 누나 기다리며 따 먹었다오.
- 〈찔레꽃〉 전문
차녀 정옥의 말이다.
“아버지는 고모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많으셨어요. 언젠가 마산 사시던 큰고모님을 서울로 불러 한동안 같이 지냈는데 조카를 취직은 시켰지만 ‘뽄때(본대)’ 있게 도와주고 싶어도 그게 안 됐어요.”
‘소’가 ‘말’을 이기는 날이 꼭 올 것
동요 〈오빠생각〉을 지은 최순애 여사. |
영옥의 말이다.
“사람들이 아버지께 노래를 권하면 ‘나무야 나무야 겨울나무야~’로 시작하는 〈겨울나무〉를 즐겨 불렀어요. 저도 〈겨울나무〉를 좋아해요. 〈불어라 봄바람〉, 〈세우자 새 나라〉도 기억납니다.”
정옥은 이렇게 말했다.
“그땐 라디오에서 동요가 나오면 다 따라 불렀어요. 지금은 그런 게 없죠. 너무 넘쳐나서 아이들이 부를 게 없어요. 게임하느라고 다들 바쁘죠.”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이원수의 이름이 4776명의 명단에 올라와 있다. 명단에는 작곡가 홍난파, 무용가 최승희 등 문화계 인사들이 많이 포함돼 있다.
차녀 정옥의 말이다.
“《친일인명사전》에 아버지의 이름이 올랐다기에 그쪽에다 이의 신청을 했어요. 아무 것도 없던 사람이 결혼해 직장까지 잘려 막막하던 시절이었습니다. 한약방 서기 노릇을 하며 사는데 직장을 마련해 준 사람이 기관지에다 글을 쓰라 권하니 안 쓸 수가 있나요? 막막하던 그 시절을 어떻게 객관적 자료로 증명합니까. 참….”
이원수는 마산공업상업학교(현 마산 용마고)를 졸업(1931년)하고 경남 함안금융조합 본점 서기로 취직했다. 그러나 몇 해 뒤 ‘독서회 사건’으로 징역형을 받고 말았다. 최순애와 결혼은 했으나 살길이 막막했다. 처가에서 집을 사라고 큰돈을 보탰지만 야금야금 생활비로 다 써 버리고 말았다.
한약방 회계로 일했으나 여전히 생활은 어려웠다. 1937년에 함안금융조합에 다시 가게 됐다. 그곳 이사(理事)가 ‘임시직원으로라도 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제야 생활에 안정을 찾았고 함안에서 장남을 낳았다고 한다.
차녀 정옥의 회고다.
“‘독서회 사건’이 끝나고 해방이 가까워 오면서 어머니가 무척 불안해하셨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밤이면 으슥한 저수지 같은 곳에서 매일 사람들을 만나곤 했던 거예요. 아버지는 ‘일본이 곧 망한다’는 말씀을 하셨대요. 어디서 그런 뉴스를 들었던가 봐요. 그런 아버지를 어머니는 항상 불안한 눈길로 바라보셨죠. 또 잡혀갈까 봐….
일본 형사가 자주 찾아왔대요. 지나가다 들렀다는데 늘 감시를 하고 있었어요. 평생 욕을 입에도 안 담으시던 어머니는 ‘일본사람’이라 하지 않고 ‘일본놈’이라 불렀어요. 지능적으로 괴롭혔다고 합니다.”
미국에 거주하는 장남 경화는 아버지 이원수에 대한 이런 글을 보내 왔다.
이경화는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와 미국 뉴멕시코대 대학원(공학박사)을 나왔다. 체신부 전기통신훈련소 전임강사를 하다 도미(渡美), 벨연구소와 항공사 엔지니어로 근무했다. 아리랑 2호 등 인공위성과 항공장비의 전자회로 설계를 자문받았다고 한다.
〈… 아버지를 생각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해방되기 전 어렸을 때의 일이다. 내가 가야국민학교에 다닌 1~3학년(1943~1945) 때의 일이다. 집에서 우리말만 했던 나는 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일본어로 가르치는 선생님의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중략) 아버지는 어머니가 일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못하게 하셨고 ‘얼마 안 가 일본은 망할 텐데 일본말은 몰라도 된다’고 하셨다. 제일 처음 가르쳐 주신 단어가 ‘소’, ‘말’이었다. 이어서 ‘아버지’, ‘누나’ 등이었다.
‘소’란 단어를 가르치시면서 ‘소’는 느리지만 힘이 세고 인내력도 있고 사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준다고 하셨다. ‘소’는 사람에 비교하면 조선 사람이고 ‘말’은 빠르게 뛰는 동물이지만 인내력이 없고 힘도 별로 없으며 죽어서는 별 볼 것이 못 되는데(말고기는 우리가 먹지 않으니까) ‘말’은 나라로 비교하면 일본과 같다고 하셨다. 우리 조선 사람은 ‘소’와 같아서 어려움이 있어도 잘 참고 견뎌 느린 거북이가 빠른 토끼와의 경주에서 이기듯이 ‘소’가 ‘말’을 이기는 날이 꼭 올 것이라고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