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穡, <答問>(답문), <<牧隱文藁>> 권12
이색, <물음에 답한다>
“答問”(답문)은 “물음에 답한다”이다.
원문:
問爲文 先生曰 必言必言 必用必用 止矣 問其次 言 遠矣 或補於近 用迂矣 或類於正 又問其次 言 不必言 用不必用 不亦傎乎 又問宜何師 曰 師 不在人也 不在書也 自得而已矣 自得也者 堯舜以來 未之或改也
旣十餘年矣 問者謝曰 先生前言是矣 請終身行之 童子在傍問其由 錄之 曰答問
읽기:
問爲文(문위문)하니 先生曰(선생왈)하되, 必言必言(필언필언)하고, 必用必用(필용필용)하고 止矣(지의)이니라. 問其次(문기차)하니 言(언)하되, 遠矣(원의)면 或補於近(혹보어근)하고, 用迂矣(용우의)면 或類於正(혹유어정)이니라. 又問其次(우문기차)하니, 言不必言(언불필언)하고 用不必用(용불필용)하도록 不亦傎乎(불역신호)일 것인가. 又問(우문)하니 宜何師(의하사)하니, 曰(왈)하되 師(사)는 不在人也(부재인야)하고 不在書也(부재서야)하며 自得而已矣(자득이이의)니라. 自得也者(자득야자)는 堯舜以來(요순이래)로 未之或改也(미지혹개야)니라.
旣十餘年矣(기십여년의)에 問者謝曰(문자사왈)하되, 先生前言是矣(선생전언시의)라. 請終身行之(청종신행지)하리라. 童子在傍(동자재방)하다가 問其由(문기유)하고 錄之(녹지)하여, 曰答問(왈답문)이라고 하니라.
풀이:
“問爲文”(문위문)은 “글짓기를 묻다”이다. "先生曰"(선생왈)은 “선생이 말하다”이다. “必言必言”(필언필언)은 “반드시 말해야 할 것은 반드시 말하다”이다. “必用必用”(필용필용)은 “반드시 사용하다”이다. “止矣”(지의)는 “그만두다”이다. “問其次”(문기차)는 “그 다음을 묻다”이다. “言”(언)은 “말하다”이다. “遠矣”(원의)는 “멀다”이다. 말하는 내용이 멀리 있다는 것이다. “或補於近”(혹보어근)은 “가까운 것으로 보충할 수 있다”이다. “用迂矣”(용우의)는 “돌아가는 방법을 쓰다”이다. 우회적인 언술 방법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類於正”(유어정)은 “바른 말에서 비슷한 것을 든다”이다. 우회적인 언술 방법이 효력을 잃으면 바로 하는 말로 비유를 삼는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는 말이다. “又問其次”(우문기차)는 “또한 그 다음을 묻다”이다. “言不必言”(언불필언)은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다"이다. “用不必用”(용불필용)은 “사용할 필요가 없는 것을 사용하다”이다. “不亦傎乎”(불역신호)는 “또한 삼가지 않을 것인가”이다. “宜何師”(의하사)는 “어떤 스승이 마땅한가”이다. “不在人也”(부재인야)는 “사람에 있지 않다”이다. “不在書也”(부재서야)는 “글에 있지 않다”이다. “自得而已矣”(자득이이의)는 “스스로 얻을 따름이다”이다. “堯舜以來”(요순이래)는 “요순 이래로”이다. “未之或改也”(미지혹개야)는 “바뀌었다고 하지 않다”이다.
“旣十餘年矣”(기십여년의)는 “이미 십여 년이 지나다”이다 “問者謝曰”(문자사왈)은 “물은 사람이 감사하다고 말하다”이다. “先生前言是矣”(선생전언시의)는 “선생이 전에 한 말이 옳다”이다. “請終身行之”(청종신행지)는 “바라건대 평생 이것을 실행하리라”이다. “童子在傍”(동자재방)은 “동자가 곁에 있다”이다. “問其由”(문기유)는 “그 사유를 묻다”이다. “錄之”(녹지)는 “이를 기록하다”이다. “曰答問”(왈답문)은 “답문(答問)이라고 하다”이다.
번역:
글짓기에 관해 물으니, 선생이 말했다. “반드시 말할 것을 반드시 말하고, 반드시 사용할 것을 반드시 사용하고 그만둔다.” 그 다음을 물으니, 말했다. “말하는 내용이 멀면 가까운 것으로 보충할 수 있다. 돌아가는 방법을 쓰다가 바로 하는 말에서 비슷한 것을 들 수 있다.” 또한 그 다음을 물으니, 말했다.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을 말하거나, 사용하지 않을 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또한 삼가지 않을 것인가?” 또한 어떤 스승이 마땅한가 물으니, 말했다. “스승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글에도 있지 않으며, 스스로 얻을 따름이다. 요순 이래로 이 말을 바뀌었다고 하지 않다.”
십여 년이 지나서 묻던 사람이 감사하다고 말했다. “선생님이 전에 하신 말씀이 옳습니다. “바라노니, 평생 실행하려고 합니다.” 동자가 곁에 있다가 그 까닭을 물어 기록하고 <답문>(答問)이라고 한다.
논의:
물음에 대답하면서 글을 잘 쓰는 원칙을 알려주었다. 첫째는 선택의 원칙이다. 반드시 필요한 내용과 방법만 갖춘다. 둘째는 표현의 원칙이다. 원(遠)은 근(近)으로 나타내고, 우(迂)에서 생기는 혼란은 정(正)에서 바로잡아야 한다. 셋째는 배제의 원칙이다. 불필요한 내용과 방법은 배제한다. 넷째는 주체의 원칙이다.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고 스스로 판단해 자기 글을 써야 한다.
첫째로 든 필요한 내용과 방법만 선택해야 한다는 원칙이 워낙 중요해 셋째에서 뒤집어 배제의 원칙으로 다시 말했다. 배제의 원칙을 다시 말하는 것은 불필요하지 않고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겼다. 첫째와 셋째 원칙은 의문의 여지가 없이 명확하지만, 둘째 것은 글을 잘 쓰려고 고민한 경험이 많아야 알아차릴 수 있는 비방이다. 너무 멀다고 여겨 이해되지 않는 내용은 비근한 본보기를 들어 말해야 한다. 비유가 지나쳐 말이 꼬이고 혼란이 생기면, 직설법을 비슷한 것이라도 들어 논의를 정리해야 한다.
넷째 주체성의 원칙에서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으라고 하고, “요순 이래로 이 말을 바뀌었다고 하지 않다”고 한 것은 깊이 새겨 이해해야 할 말이다. 앞의 말이 불변임을 강조하면서 요순에 대한 견해를 바로잡기도 했다. 요순은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고 스스로 노력해 훌륭하게 되었다. 요순을 따르려면 요순이 그랬듯이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 선생이 하는 말을 듣고 즉석에서 무어라고 하지 않고, 십여 년이 지나서 찾아와 감사하다고 했다. 자기 자신이 스승임을 체득하는 데 십여 년의 세월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글을 잘 쓰는 원칙은 실행해야 이해할 수 있고 효력을 발휘한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이상의 말로 글을 끝낼 수 있는데, “동자가 곁에 있다가 그 까닭을 물어 기록을 하고 <답문>이라고 한다”는 말이 더 있다. 동자는 신참자이고 초심자이다. 신참자나 초심자가 세상에 허다하므로 안내가 필요하다. 글을 읽으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길을 가려는 사람에게 지도가 필요하다.
이 글을 읽고 가르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한다. 선생은 이미 알고 있다면서 앞질러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제자가 물으면 대체적인 방향만 간략하게 제시하고, 과연 그런지 자기 자신을 스승으로 삼고 탐구하도록 하는 것이 최상의 가르침이다. 실행을 하고 아는 것을 체험해야 한다. 이런 내용을 글로 쓰는 것은 초심자를 위한 초보적인 안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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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금산(古散今散)>

*<형산기산(形散氣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