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전예술 6월호 >
전형(全馨)과 대전문학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이유
박 헌 오 <초대 대전문학관장>
전형(全馨)의 본명은 전우한(全佑漢)이며 아호는 춘파(春坡)이다.
대부분 글에는 전형(全馨)으로 써왔고 전우한(全佑漢), 춘파(春坡), 전춘파(全春坡), 춘파학인(春坡學人) 등으로도 사용하였다.
전형(全馨)은 1907년 9월 13일 옥천군 옥천읍 죽향리 64번지에서 태어나 정지용(鄭芝溶, 1903~1950)과 이웃으로 정지용이 납북되기 전까지 영적〔靈, 가톨릭 신앙〕 문학적 형(兄)으로 가까이 지냈으며 전형은 형인 독립운동가 전좌한(全佐漢) 지사와 정지용을 정신적 지주로 삼아 살아왔다.
전형(全馨)은 역사적으로 대전문화권에 속하는 옥천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해방과 동시에 대전인이 되어 1945년 곽철수와《동방신문》을 함께 창설하였고, 그의 올곧은 성격에 1948년 백범 김구의 암살사건이 발발하자 호곡의 시를 발표하고 나서 1949년 어찌 된 연유에서인지 경찰에 입건되는 일이 일어난 뒤 동방신문을 사직하고 광천신문으로 옮긴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 1951년 창간된 대전일보에 글을 연재한 뒤 1952년 대전일보에 입사하고부터 1970년까지 편집국장, 주필, 논설위원을 맡아 언론을 통하여 대전문화 발전을 위해 헌신하였다. 1954년부터는 호서문학회장을 맡아 대전 문학의 터를 다지는 데 크게 기여했음은 물론, 1956년 제3대 대전문화원장을 겸임하면서 대전문화원의 기틀을 다지고 많은 행사를 기획하여 추진함으로써 대전문화 발전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전형을 회고하는 여러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형 선생은 앞으로 해야 할 일 앞에서는 불꽃같이 달려들지만, 자신이 과거에 이룬 일에 대해서는 한 마디 내세우는 법이 없어서 1920년대부터 신춘문예에 당선한 것을 비롯하여 그토록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음에도 함께 근무했던 문인 기자들조차 전형이 기성 문인인 것조차 모르고 지냈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인구 20만의 대전이 150만의 광역시로 발전하기까지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어 이루었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대전발전을 위해 나름대로 역할을 다했기에 자랑스러운 대전이 이룩된 것이다. 묻혀있는 밝은 역사의 빛, 땀 흘려 이룩한 사초(史草)를 찾아내어 구체적으로 조명함으로써 자랑스러운 대전의 문화적 정체성을 튼튼하게 쌓고 바로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전형(全馨)은 훌륭한 문학인으로 대전의 문학사에 있어 장르별로 최초의 작품을 꼽을 수 있다. 또 다른 사적(史籍)이 나온다면 그때는 다시 새로운 역사를 정립해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현재까지 발굴된 문학 장르별 최초의 작품을 전형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지난 5월호에 놀라움을 가지고 1935년 이전의 작품을 몇 편 소개하였는데 원로 문인들이 뜻있는 화두의 제기라고 격려의 전화를 주셨다.
시(詩) 분야로는 1926년《시대일보》에 시 「지친 마음」「봄비」를 발표한 이후 1927년에는 《매일신보》 등에 여러 편의 시를 발표하였고, 1928년에는 《조선시단》등에 시를 발표하였으며, 이후 《동광》《혜성》《동아일보》《신조선》《자오선》《조선중앙일보》 등에도 활발하게 시를 발표하였다.
시조(時調) 작품으로는 1932년 개벽사(開闢社)가 발간한 《혜성(彗星)》 지에 연시조 「춘일점경(春日點景)」을 발표한 이래 《신조선》《조선중앙일보》 등 여러 지면에 작품을 발표하였다. 시조에 있어서는 1926년 육당 최남선의 시조집 『백팔번뇌』가 최초의 현대 시조집이고 1927년부터 본격적으로 현대시조가 등장하며 1932년 가람 이병기의 시조 혁신론이 발표되면서 연시조를 비롯한 현대시조가 본격적으로 등장하는데 이 시기에 민족 시조 부흥 운동에 동참한 것으로 보여 더욱 뜻이 깊게 느껴진다.
산문(散文)으로는 1927년 《사조(思潮)》에 그의 전향적 인생론 「월광 밑에서」를 발표한 이래 1927년 《매일신보》에 희곡 「영순의 사(死)」를 발표하였으며 1931년에는《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동화 「행복의 길」로 당선하였다. 또 1931년에는 《동아일보》에 수필 「인생․고뇌․사」와 「5월의 상화 신록과 신비」를 발표하였다. 신춘문예에 최초로 수상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희곡도 수필도 최초의 발표가 아닐까 생각된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1930년에 6집까지 발간되다가 중단된 《풍림(風林)》지를 1938년에 제7집과 제8집을 속간하는데 함께한 문인들이 정지용, 이원조, 안회남, 유치환, 홍구, 아동수, 이육사 등이며 전형(全馨)이 발행인으로 되어있었다. 전형(全馨)은 여기에 소설 「개와 고양이」를 발표하였는데 일제는 이 작품을 문제로 삼아 풍림지 발간을 강제로 정간시킴으로 8집을 끝으로 더 발간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대전이 광역시로 승격되기 이전에는 충청남도, 대전시였기 때문에 충청남도의 문인으로 확대해서 본다면 생각이 달라질 것이다. 이처럼 전형(全馨)은 문학의 여러 장르에서 활동했다는 측면에서도 선례를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모두 유명을 달리하신 분들이지만 문학작품은 우리 속에 영원히 존재한다.
평론에서는 아직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1952년 호서문학 제2호에「문학과 율의(律義)」를 발표하여 평론가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었으나 호서문학 제2호가 소실되어 전해지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1956년에 발간된 호서문학 제3호에는 「현대문학의 계보」라는 평론이 게재되어 있다.
전형(全馨)은 대전일보에 소설도 여러 편 연재하였는데 1957년 대전일보에 중편소설 「죄와 벌」이 45회에 걸쳐 연재되었고, 1960년에 장편소설「비파 애가」를 105회에 걸쳐 연재하였으며 1961년에는 중편소설 「청등 야화」를 60회에 걸쳐 발표하였다.
특히 전형(全馨)은 아동문학에 특별한 관심이 있어 대전일보의 소년대전란에 아동문학 작품을 함께 심사를 맡기도 한 한상수는 “아동들에게 문학을 공부하도록 계속 노력해야 미래의 우리 문화가 희망이 있다.”라는 소신을 늘 피력했다고 전한다. 대전일보가 타블로이드로 지면이 적을 때부터 어린이 신문란을 계속 할애하도록 노력했으며 윤석중 선생과는 각별한 관계로 손을 잡고 아동문학 발전에 헌신하였음을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다. 전형(全馨)은 스스로 주옥같은 동시, 동시조, 동화 등을 창작하였다.
문학의 역사는 작품에 의해서 써져야 하고 평가되어야 한다. 대 전문학사에 있어서 전형(全馨)의 작품은 중요한데도 조명되지 못해왔다. 반복적으로 전형(全馨)의 문학작품이 대전문학사에 가지는 의의를 명확히 인식시킬 수 있도록 거론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앞으로 전형(全馨)의 작품을 총체적으로 발굴하여 엮는다면 대전의 문학사뿐만 아니라 한국 문학사에서도 새로운 발굴이 될 것이라 확신하면서 전형(全馨)에 관하여 오랫동안 연구해 온 대구 가톨릭대학교 영남 교회사 연구소 한명수 교수님의 여러 발표문을 접하고 감명을 받아 본 연구에 동참하게 되었음을 밝힌다.
<요약 : 박 헌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