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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으로 오신 예수님
2013. 12. 22(주일낮예배) 요한복음 1:9-16
킬리만자로에는 하이에나와 표범에 대한 전설이 있다. 눈덮인 킬리만자로에서 야생동물들이 먹잇감을 찾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랬기에 하이에나는 자신의 굶주린 배를 채우기 위하여 다른 동물이 사냥한 고기를 빼앗아 먹고, 심지어 썩은 고기도 침을 흘려가며 먹는 것이다. 그런데 같은 환경에 사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달랐다.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아무리 배가 고파도 길에 죽어 있는 고기는 물론이고 다른 동물이 사냥하고 먹고 있는 먹잇감도 빼앗아 먹지 않는다. 그리고 오직 자신이 수고하여 잡은 그 사냥감만을 먹는 것이다. 배가 고플 때는 하이에나와 같이 다른 짐승의 먹잇감을 빼앗아 먹어도 되겠건만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눈덮인 산언덕에 올라가 굶어서 죽는 한이 있어도 남의 먹잇감은 빼앗지 않는 것이다. 만약 표범에게 왜 그렇게 세상을 힘들게 사느냐?고 물으면 표범은 나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표범이 하는 대답이다. 이것이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야기이다.
이 전설을 배경으로 해서 나온 노래가 조용필씨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를 본 일이 있는가
짐승의 썩은 고기만을 찾아다니는 산기슭의 하이에나
나는 하이에나가 아니라 표범이고 싶다.
산장 높이 올라가 굶어서 얼어서 죽는
눈 덮인 킬리만자로의 그 표범이고 싶다.
자고나면 위대해지고 자고나면 초라해지는
나는 지금 지구의 어두운 모퉁이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도시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이 큰 도시의 복판에 이렇듯 철저히 혼자 버려진들 무슨 상관이랴
나보다 더 불행하게 살다간 고호란 사나이도 있었는데
바람처럼/ 왔다가 이슬처럼 갈 순 없잖아/ 내가 산 흔적일랑, 남겨둬야지
한줄기 연기처럼 가뭇없이 사라져도 빛나는 불꽃으로 타올라야지
킬리만자로의 표범이야기는 똑같은 세상을 살아가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의 배고픔을 채우기 위하여 허덕거리며 살지만, 또 어떤 사람은 그러한 환경가운데서도 기풍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가?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예수님을 참빛이다고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이 참이라고 할 때는 거짓의 반대되는 개념인 αληθής(알레데스)를 사용한다. 그런데 요한은 αληθής(알레데스)가 아니라, 완전하다는 의미를 가진 άληθινον(알레디논)을 사용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 예수님은 불완전하지 않고 완전하신 분이시다는 의미로서 요한은 참빛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저는 수요일에 여기까지 설교준비를 하였다. 그때 제가 가진 고민은 참빛을 어떻게 설명하면 될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수요기도회에 참여하여서 열심히 찬송을 부르면서 알게 되었다.
주의 보혈 능력있도다 주의 피 믿으오
주의 보혈 그 어린양에 매우 귀중한 피로다
저는 이 찬송을 부르면서 능력있는 주의 보혈이 무엇일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예수님은 거라사인 지방에 가서 군대귀신 들린 사람을 고쳐서 그를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여 주었다. 또 예수님은 문둥병자를 만나 그를 고쳐서 온전케 하여 주었고, 또 예수님은 여리고의 세리장이요 부자였던 삭개오를 만나 그의 외로운 인생을 변화시켜서 온전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여 주었다.
무슨 말인가? 귀신들려 사람답지 못한 사람을 영적으로 질병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 사람을 고쳐서 온전케 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둥병은 육체적 질고를 가진 연약한 자였는데 예수님은 그도 고쳐서 온전케 하여 주었다. 예수님은 이렇게 병든자 외로운 자를 만나시고 그들의 부족함을 고쳐서 온전케 하는 사역을 통하여 예수님의 온전하심을 나타내 보여 주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므로 죄로 말미암아 죽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서 온전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그 길을 열어주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나온다. 왜냐하면 빛을 어둠이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캄캄한 세상에 빛이 비취고 있는데 어떻게 그 빛을 깨닫지 못하겠는가? 특히 9-10절을 보기 바란다.
(요 1:9-10)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추는 빛이 있었나니 10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참 빛인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에게 비취지 않고 각 사람에게 비취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인격적으로 개별적으로 빛을 비추었는데 알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런가?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오순절 마가요한의 다락방에 성령이 임한 후에 경건한 유대인들에게 설교를 한다. 새술에 취하였다고 조롱하는 그들앞에서 베드로가 설교했을 때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형제여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하며 주께로 돌아왔다. 그런데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스데반 집사님이 설교를 하였다. 그때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이를 갊거늘 이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왜 스데반이 설교할 때 사람들은 이를 갊고 스데반을 성 밖으로 끌고갔겠는가? 어떤 목사님은 스데반이 설교를 길게 해서 사람들이 이를 갊았다고 하는데, 그것은 농담이다. 그런데 베드로가 설교할 때와 스데반이 설교했을 때 나타나는 똑같은 현상이 있다. 그것이 바로 마음에 찔림을 받는 것이었다. 베드로와 스데반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였을 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신의 삶에 잘못과 부족함이 다 드러나서 아픔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참빛되신 예수님이 임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이 드러나는 아픔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어둠이 깨닫지 못했다는 말은 자신의 부족함과 죄악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거절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가? 지난 주에 어느 목사님의 간증을 읽었다. 미국에서 사역하시는 목사님이 저녁에 집으로 오려고 하는데 낯선 사람이 교회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어떻게 오셨는지? 물었더니 교회 근처에 한 회사가 있는데 내일 아침 일찍 회사에 면접을 보기 위하여 왔다는 것이다. 근처에 숙소를 찾아보았지만 잠을 잘 때는 없고, 그래서 교회에서 하룻밤을 보낼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 목사님의 머리는 많이 복잡해졌다. 왜냐하면 목사님이 미국에서 처음 사역을 시작했을 때 미국교회당을 빌려서 목회를 시작하였다. 그런데 주일 새벽에 새벽기도를 인도하는데 교회당에 새벽기도를 드리는 성도외에 누군가가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다음주에도 또 그 다음주에도 새벽기도를 인도하는데 느낌이 이상하여서 교회당을 뒤졌더니 1층 비품실에 노숙자가 있는 것이었다. 노숙자를 발견한 목사님은 경찰에 신고하여 그 노숙자를 데리고 가도록 하였다. 그 일이 있은지 며칠이 지났을 때 미국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은 담임목사님에게 칭찬도 들을 겸 노숙자는 어떻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랬더니 미국목사님은 의논을 하지 않고 경찰을 불렀다고 화를 내었다. 그 노숙자가 교회에 해를 끼친 것도 없고, 또 갈 곳도 없는 사람인데 교회가 쫓아내면 그 사람은 어디로 가겠느냐? 는 것이었다. 목사님은 그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 목사님이 교회당을 건축한 후에 목사님 교회당에서 이와 유사한 일이 생겼다. 목사님은 낯선 사람에게 교회당을 재운다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일일 생각나서 깨끗한 이불까지 주면서 하룻밤 쉬어가라고 하였다. 그리고 집으로 왔을 때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사모님께 그 이야기를 했더니 사모님도 역시 불안해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찍 잠에서 깼지만 혹시 그 사람이 부담스러울까봐 아침 일찍이 교회는 가보지 못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낸 후에 교회당에 가 보았다. 그랬더니 낯선 사람은 방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이미 교회를 떠나고 없었다.
그 깨끗한 방을 보면서 목사님은 낯선 그 사람에게 감사했다. 목사님이 감사한 이유는 아무런 일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더 감사한 것은 그 사람을 통하여 목사님이 자신의 모습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할 수 있게 된 것이었다.
저는 이 글을 읽다가 내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만약 내가 그 목사님이었다면 교회당에 잠을 자라고 허락을 했을까? 제가 선뜻 교회당을 빌려주지 못하는 것은 혹시 그 사람이 교회에 있는 중요한 물건을 훔쳐가면 어쩌나? 또 혹시 교회에 여성도가 기도하러 왔다가 사고라도 당하면 어쩌나? 그러한 불안과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거절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을 보호하기 지키기 위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지않고 거절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을 영접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는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이 함께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의 영광을 보게 된다는 말이다.
이 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구약의 성막을 한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날 때 성막을 중심으로 하여 이동하였다. 그 성막의 겉모양은 작고 초라하였다. 성막은 63㎡(19평)의 크기를 하고 있는 장막이다. 성막 안에 들어가면 직사각형으로 약간 큰 방이 성소이고, 성소를 지나면 지성소가 있는데 그 크기는 성소가 42㎡(12.7평)이고 지성소는 21㎡(6.3평)이다. 그러므로 일반사람들이 사용하는 텐트와 거의 비슷한 규모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장막은 모두 4겹으로 둘러샀는데 제일 바깥쪽 덮개는 해달가죽(돌고래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거친 바람과 태양에 말린 해달의 가죽은 회색의 거친 색상을 띄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겉에서 성막을 볼 때는 아무런 볼품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3번째 덮개로 붉은 물을 들은 수양의 가죽을 사용하였고, 또 두 번째 덮개로는 염소가죽을 사용하였다. 이렇게 하나님은 3겹으로 성막을 덮으면 외부의 빛은 철저하게 차단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다음에 나온다. 캄캄하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성막의 첫 번째 덮개는 하얀색 세마포에 청색, 자색, 홍색실로 날개를 펼친 천사를 수놓으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기구들은 거의 모두가 금과 은으로 칠을 하여서 가장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들었다. 특별히 지성소에 들어가면 거기에는 언약궤가 있는데 그 언약궤는 안팎으로 정금으로 싸고 또 윗가로는 금테를 두르도록 하였다. 그러니 언약궤는 굉장히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화려한 모습을 가진 언약궤이지만, 지성소에는 세상의 모든 빛이 다 차단되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아론에게 일곱등잔에 등불을 켜서 그 빛이 앞으로 비출 수 있게 하라고 사명을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아론이 등불에 불을 켜고 그 빛이 성막안에 비췰 때 회막에서 일하는 제사장들은 천장에 청색 홍색 자색실로 수를 놓은 화려한 날개를 펼친 천사를 보며 또 등잔에서 비추는 빛에 반사되어서 반짝이는 성전안의 여러기구들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덮개를 4겹이나 해서 세상의 빛은 회막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오직 등잔을 통하여 성막의 아름다움을 보게 하였겠는가?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이다. 그러므로 성막안에 있는 화려한 천장과 여러기구를 은금으로 꾸며놓은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통하여 나타나는 영광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영광은 세상의 빛으로는 결코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부요하고, 건강하면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을 것이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그러한 세상의 빛에 대하여서는 모두 단절시키셨다. 그리고 오직 대제사장인 아론을 통하여 등잔에 불을 켜고 그 빛으로만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법이요 방식인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의 그 무엇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보려고 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행동이다.
그런데 요한은 오늘 본문에서 요한은 참빛되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선포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단순하게 배고픈 우리의 삶에 배부름을 주고, 또 병든 우리의 삶에 질병을 고쳐주는 그 정도의 완전함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다. 참빛되신 예수님은 성전 안에 등잔의 불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며, 하나님과 깊이 있게 교제하는 그 자리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완전한 불이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지금 이 말씀이 여러분의 삶에 은혜로 다가오는가?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보았다. 화장실에 돈이 빠졌을 때 나타내는 사자성어가 있다.
10원짜리 동전이 빠지면 수수방관
500원짜리 동전이 빠지면 자포자기
1000원짜리 지폐가 빠지면 우왕좌왕
5000원짜리 지폐가 빠지면 안절부절
10000원짜리 지폐가 빠지면 이판사판
10만원짜리 수표가 빠지면 사생결단
그러면 남편이 빠지면 어떤 사자성어를 쓰겠는가? 내리삔다
사람이 무엇을 소중히 여기느냐?에 따라서 반응은 달라진다. 사실 19평밖에 되지않는 작은 규모에 회색빛깔로 덮여져 있는 그 성막은 볼품없는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참빛되신 예수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게 될 것이다. 그래서 빛되신 예수님이 비추어 주는 그 길을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빛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은 예수님의 빛에 대하여 관심도 없고, 또 영접도 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는가? 광복동에 가면 크리스마스트리축제를 하고 있다. 한 해 예산이 6억 정도가 드는데 부산시가 3억, 중구청이 1억, 그리고 부산기독교연합회가 2억을 투자하여 그 일을 하고 있다. 그 덕분에 중구에는 20-30만명의 사람이 몰려와서 성탄축제의 기쁨을 누린다고 한다. 특히 올해 크리스마스트리 축제 개막식에는 어느때보다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한다. 그런데 목사님들 중에 크리스마스트리축제를 부산시로 이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이 있다.
왜 목사님들이 부기총에서 주최하는 크리스마스트리 축제에 대하여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는가? 그것은 개막식을 할 때 목사님은 2명밖에 올라가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다. 20-30만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이 그 장소에 사진을 찍고 기뻐하는 것은 아주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그곳에 와서 기뻐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탄생을 기뻐하는 것이 아니다. 화려한 불빛 아래에서 맛있는 것을 사먹고, 쇼핑하며 흥청망청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오심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화려한 조명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타락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원래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하는 성탄의 빛이 사람의 향락과 가무를 즐기는 도구로 전락한 것처럼 교회 안에 참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타락되게 하고 있지는 않는가? 내 건강, 내 돈, 내 필요만을 구하며 그것을 채워나가는 신앙은 온전하신 하나님의 영광으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빛을 타락되게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참빛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보며 그 영광 안에서 주를 누리고 찬송하는 그러한 신앙이 회복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주님만을 귀히 여기며 주의 인도하심을 받는 복이 있기를 바란다.
이제 말씀을 맺는다.
고대 아테네의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대낮에 등불을 들고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하고 외치며 다녔다. 디오게네스가 이렇게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은 사람들이 세속적인 욕망에 눈이 어두워 진리를 잃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리가 없는 세상을 디오게네스는 캄캄한 밤이라고 생각하여서 등불을 들고 진리를 아는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 하면서 고함치고 다녔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알렉산더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았을 때 디오게네스는 나무통 안에 들어가서 햇빛을 쐬고 있었다. 그러한 디오게네스에게 알렉산더 대왕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말하였다. 그때 디오게네스가 입을 열어서 한말이 햇볕을 쬘 수 있고 조금만 비켜 주시오였다. 디오게네스는 알렉산더를 통하여 그는 높은 지위도 얻을 수 있었고, 또 자신이 가진 학문으로 많은 사람을 가르치는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디오게네스가 바랬던 것은 햇볕이었다. 지금 당장 자신의 몸을 따뜻하게 하는 그 햇볕이 아니라, 이 세상에 참된 진리를 비춰주는 그 빛을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기에 알렉산더는 디오게네스를 만난 후에 만약 내가 알렉산더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디오게네스가 되기를 바랐을 것이다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지금 우리가 바래야 할 것이 이 진리의 빛이 아니겠는가? 어두운 세상에서 죄악으로 죽어가는 영혼에게 하나님이 온전하신 빛이신 예수님을 보내어 주었다. 그리고 그 빛으로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하여 주신 것이다. 그 주님의 오심을 기뻐하며,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인 줄 알아 찬양하는 성탄을 맞이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