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국영은 1748년(영조 24년)에 서울에서 판돈령부사 홍낙춘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명은 덕로(德老), 본관은 풍산(豊山)이다. 그는 선조와 인목대비의 딸 정명공주와 혼인한 영안위 홍주원의 6대손으로 당대 경화사족의 일원이었다. 당시 권력의 중추에 있던 홍봉한, 홍인한과는 10촌, 혜경궁 홍씨와는 11촌이었고, 경주 김씨인 김민주의 어머니가 홍국영의 5촌 종고모였다. 김민주는 정순왕후와 8촌, 순조 초기 노론 벽파의 권력자 김관주와 4촌지간이다. 이렇게 다양한 가문의 배경을 정리하면 홍국영은 영조나 혜경궁 홍씨, 정순왕후 김씨 등과 모두 인척관계였고, 정조와도 12촌지간이 된다.
한편, 그의 할아버지 홍창한은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고, 백부 홍낙순은 대과에 급제했으며, 숙부 홍낙빈도 진사였지만 아버지 홍낙춘은 등과조차 하지 못했으므로 잘난 친척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신세였다. 성격이 호방했던 홍국영은 이런 현실에 연연하지 않고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과 친분을 쌓았다. 이런 홍국영의 기질은 장차 그가 보위하던 세손에게 백성들의 참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개혁의 정당성을 확립하는 데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당대에 왕실이나 일가붙이들은 그를 놀기 좋아하는 무식한 떠버리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 중에 대표적인 독설은 홍인한에게서 나왔다.
영안위 자손 중에 어찌 저런 요망한 물건이 나왔을까. 저놈이 반드시 집안을 망칠 것이다.
혜경궁 홍씨 역시 《한중록》에서 홍낙춘을 ‘광증이 있다.’라고 표현함으로써 홍낙춘의 아들 홍국영을 간접적으로 폄하했다. 이런 친족들의 괄시가 그로 하여금 노론 벽파로부터 죄인의 자식 취급을 받고 있던 세손과 손잡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홍국영은 그렇듯 독자적으로 다양한 집단과 교류하면서 당대 최고의 배당률을 갖춘 세손이라는 패를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이런 그의 야심을 어느 누가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노론의 시각에서 보자면 홍국영은 태생부터 그들과 동류여야만 했다. 하지만 그 독점적인 카르텔을 박차고 나가 잡학을 즐기며 한량들과 음풍농월하는 그는 조직의 이단아임에 분명했다.
홍국영이 조정에 들어갔을 때 정국은 몹시 혼미한 상태였다. 권력을 다투던 홍인한과 정후겸, 김귀주 등은 각자 세손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조정을 장악하려 했다. 이때 홍국영은 그들로부터 철저히 외면당했고, 탕평당의 일파인 홍상간과 민항열 같은 인재들조차 홍국영을 따돌렸다.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홍국영에게 손을 뻗은 사람이 바로 세손이었다. 영악했던 그는 비로소 자신에게 기회가 왔음을 직감하고 세손의 손을 굳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세간에 곧 두 사람이 기방 출입을 한다든지 금서를 읽는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퍼졌다. 이는 세손의 왕위계승권을 흔들기 위한 노론의 음모임이 분명했다. 당시 대궐 안팎의 은밀한 눈과 귀는 온통 두 사람의 행보에 집중되어 있었다.
노론 벽파는 세손의 흠결을 잡아내기 위해 무진 애를 썼고 홍국영은 그런 세손을 보호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기울였다. 그 와중에 공부벌레였던 세손은 한량 홍국영의 입을 통해 여항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고, 백성들의 세계에 눈을 떴다. 조선을 이끌어가는 진정한 힘은 양반들의 헛기침이 아니라 척박한 땅을 일구고 씨앗 뿌리는 사람들의 거친 손마디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776년(정조 원년) 3월, 우여곡절 끝에 권좌에 오른 정조는 홍국영을 도승지에 제수한 다음 자신의 충실한 대변자이자 돌격대장으로서의 임무를 맡겼다. 이에 화답하듯 홍국영은 김종수와 정이환 등 노론 청명당 계열 지도자들을 움직여 탕평당 계열의 홍인한, 정후겸, 윤양후, 홍계능 세력을 모조리 제거했다. 그러자 정조는 당론서인 《명의록》을 통해 홍인한, 정후겸의 공식 죄명이 세손의 대리청정을 막은 것과, 자신의 의리주인 홍국영을 제거하려 했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듬해에는 홍상간, 홍계능 등이 경희궁에 자객을 침투시켰다가 실패하고 체포되자 《속명의록》을 펴내고, 그들이 홍국영을 주된 공격대상으로 삼았다는 내용을 실었다.
정조는 그 동안 홍국영을 방패막이로 삼으면서 규장각과 초계문신 제도를 통해 착실히 차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규장각 설립 후 홍국영을 첫 직제학으로 임명하여 초창기 일을 맡기기도 했다. 그를 통해 외척세력인 경주 김씨와 풍산 홍씨 일문을 제거했지만, 누이인 원빈을 통해 새로운 척신정치를 시도하려 하자 정조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쑤시개가 어느 결에 눈엣가시가 된 셈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권력에 도취한 홍국영은 주군의 내심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거침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고 있었다.
드디어 홍국영의 행각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 정조가 칼을 뽑았다. 1779년(정조 3년) 9월 26일, 정조는 홍국영을 편전으로 불러들여 정계은퇴를 종용했다. 홍국영으로서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거침없이 앞으로 치닫던 그의 권세가 1인자의 손가락 하나로 끝장나는 순간이었다. 정조는 격동하는 그의 심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렇게 말했다.
“이전과 이후 천 년에 걸쳐 이와 같은 군주와 신하의 만남이 언제 있었고, 언제 또 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정조를 배알하고 집에 돌아온 홍국영은 떨리는 손길로 사직상소를 썼다. 이것은 자진사퇴 형식이었지만 분명 왕명에 의한 추방이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사직상소를 허락한 다음 봉조하 직함을 수여하면서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옛날부터 흑발의 재상은 있었지만 흑발의 봉조하는 없었는데, 드디어 오늘 있게 되었구나.”
봉조하(奉朝賀)란 종2품 이상의 관원이 퇴직했을 때 내리는 일종의 명예직이다. 사탕발림이란 본래 쓴 맛을 감추려는 것, 그걸 알면서도 홍국영은 정조에게 머리를 들이댈 수 없었다. 감투를 썼을 때는 아첨꾼이 들썩이더니 감투가 벗겨지자마자 흉흉한 눈길이 사방에서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부터 도깨비감투라 했던가.
얼마 후 홍국영은 도성 안에 들어오지 못하는 방귀전리(放歸田里)의 형을 받았고 재산까지 몰수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방귀전리는 죄를 지어 관직에 나갈 수 없는 자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형벌이다. 하루아침에 최고 권력자에서 버림받은 죄인으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낙담한 홍국영은 방황하며 술에 취해 지내다가 1781년 4월 강릉에서 병을 얻어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