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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의 세계 ㉙-2
제6장 대승불교와 굽타기 이후의 불교 – 인도 불교의 성숙과 쇠퇴
제1절 대승불교의 흥기와 원류 – 그 특질과 여러 가지 조류
▶고유명사와 그밖의 용어는 산스크리트어로 표기
6. 여러 부처와 보살들의 출현
그러나 대승불교에 이르러 시방 세계에 많은 부처들이 동시에 존재하게 되자, 이에 따라서 삼신불(三身佛)로 대표되는 불신관이 발전하게 되었다. 대승경전에도 그 초기부터 갖가지 불∙보살이 출현하여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의 성격과 기능, 의례 등은 매우 복잡다단하여 대승불교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특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 미래불 – 마이트레야
미륵(마이트레야)불은 부파불교시대부터 존재하고 있던 부처로서 원래는 보살이었다. 즉 미륵은 미래에 이 세상에 부처로 출현하기 위하여 현재 도솔천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는 보살인 것이다. 그런데 이 보살은 대승불교에 이르러 구제불(救濟佛)로서의 새로운 기능과 성격을 띠게 된다. 그리하여 서부 아시아의 메시아(구세주) 신앙이나 조로아스터교의 미스라 신앙이 영향이 지적되기도 한다.
그리고 서기 400년경부터 일련의 미륵 경전들이 제작되어 미륵불에 의한 인간 구제가 크게 강조된 결과, 후대의 중국∙한국∙일본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다. 또 남방불교권에서도 미래불로서의 성격과 메시아적 성격을 동시에 갖는 형태로 신봉이 계속되고 있다.
이 부처가 북서인도에서 새로운 성격이 부여되었다는 증거로서는 간다라에서 출토된 미륵상이 매우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밖에 쿠샨 시대의 북부인도에 위치한 아히차트라나 산치의 제2탑, 마투라의 기르나푸르 등지에서도 출토되었다.
2) 아미타불과 서방 극락정토
미륵불에 대하여 아미타불은 정토 신앙의 주인공으로서 대승불교 운동의 일익을 담당한 부처이다. 아득한 과거세에서 이타(利他)의 서원을 발한 다르마카라(법장) 보살은, 현재 그 서원이 이루어져서 서방의 극락정토에 아미타불로 존재하고 있다고 한다. 불교의 전반적인 흐름으로 볼 때, 아미타불은 매우 독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우선 아미타불은 인간이 사는 이 세상을 말세로 인식하고 있다. 말세이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수행을 거듭한다고 해서 이 세상에서는 결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어지럽고 더러운 오탁(五濁)의 말세인 현세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곧 불타의 가르침이 이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역사적 파악인 것이다. 동시에 번뇌와 속박에 시달리고 있는 인간의 실상과 자신의 존재를 살펴본다면 자신이 아무런 힘도 가지지 못한 존재임을 실존적으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사람들은 자아의식에서 비롯하는 모든 계획을 포기한 채, 오로지 아미타불의 서원에만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아미타불 신앙의 발생과 발맞추어 일련의 정토경전들도 성립되었다. 아미타불의 조각은 북서인도의 간다라 지방이나 아프가니스탄의 나가라하라 등지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의 부조 조각품으로 출토되었다.
절대적 존재자의 힘에 의하여 구제된다는 타력 사상은 이미 「밀린다 판하」에도 나와 있다. 밀린다왕은 악인이라도 임종시에 부처님께 염불을 하면 하늘에 태어난다는 말이 믿을 수 없다고 묻는다. 이에 대하여 나가세나 비구는 돌이 물에 가라앉는 것은 사실이지만 만일, 돌을 배에 싣는다면 백 개라도 물에 뜰 수 있다고 대답한다. 따라서 아미타 사상이 부파 시대에도 알려져 있었던 사상인 것은 분명하지만, 부파 계통의 전통적 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업의 이론으로 말한다면 인간은 자업자득(自業自得 : 행위대로 얻는 과보)의 법에 따르기 때문에 악업을 지은 악인은 반드시 지옥이나 그 밖의 나쁜 세계에 태어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보시를 비롯한 선행을 해야 한다고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같은 악인도 임종 시(時의) 염불로 구제된다는 것은 엄청난 사상의 전환인 셈이다. 이 사상이 순수하게 인도 불교의 내부에서 결실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밀린다 판하」 자체도 그 무대가 북서인도에 가까운 펀잡 지방이며, 청취자도 그리이스의 왕인 메난드로스이다. 기원전 2~1세기경부터 이 지방에는 그리이스인이나 서부 아시아인들이 이주해 왔다. 그리하여 그들의 정착과 함께 갖가지 종교사상이 유입되어 정착하면서 인도 고유의 신앙과 융합되었음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아미타불의 서원에 매달려 구제받는다는 사상도 그와 같은 서부아시아의 종교 사상에도 영향을 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리고 이 시대는 ‘자아를 비우고 신에게 귀의하는’ 힌두교의 바크티 사상이 번져 있던 때이기도 하다. 물론 바크티 신앙이 아미타 신앙에 그대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의 한 형태로서 그 영향의 궤적은 추적해 볼 만한 것이다.
문헌상으로 볼 때 아미타불은 ‘아미타유스(무량수, 無量壽)’와 ‘아미타바(무량광, 無量光)’라는 두 가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전자는 인도 불교의 내부에서 발전한 영원의 부처, 즉 무량의 수명을 갖는 부처라는 관념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후자는 인도 불교 내부로부터의 발달한 것이라는 설과 조로아스터교의 태양신 신앙으로부터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설이 있다. 당시의 북서인도에 이란의 광명 사상이 정착되어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쿠샨왕의 황금 주화에 원광을 가진 왕의 조각이 들어 있는 것이나 간달 조각이 불상에 광배를 붙이게 된 것이 모두 그 사상의 영향이라고 한다. ‘무량의 빛을 가진 부처’도 그러한 광명 사상의 불교적 발전이 아닌가 하는 주장도 있지만, 무량광불의 유래에 대해서는 더욱 많은 검토의 여지가 남아 있다.
또 한역으로 아미타(阿彌陀)라 하는 것은 무량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 ‘아미타(amita)를 바로 한자로 옮긴 것이 아니다. amita는 간다리어 amida를 음사한 것이라 하는데 이점에서도 아미타 신앙과 북서인도와의 깊은 관련성이 엿보인다.
아미타불이 사는 ‘극락(수카바티 : 안락한 국토라는 뜻)’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이다. 초기의 한역 정토경전들에 나타나는 극락이란 음사어는 모두 ‘수하마디(suhamadi)’를 상기시킨다. 그런데 이것은 산스크리트어인 ‘Sukhāvattī’의 간다리어 음형으로서, 극락정토 사상도 역시 북서인도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극락정토라는 관념이 어디서 발생하고 발전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설이 분분하다. 한편으로는,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사후의 천계가 불교적으로 순화되어 불세계와 불국토가 된다는 출세간적 차원의 사상이 존재한다. 이와 동시에 극락정토가 서방에 자리잡고 있다는 독특한 방위관이나, 또 그것이 오아시스적인 시원한 낙토라는 점에서 유대교의 에댄 동산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다는 논의도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집트에 존재하는 사후에 태어난다는 서방 낙토인 아멘데 사상의 영향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그러나 정토경전류에 기재된 극락세계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는 당시 인도에서 성행되었던 불탑의 구조를 그 모델로 삼고 있는데,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극락정토는 이것이 이상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많은 의문점들을 남긴 채, 극락 신앙과 아미타 신앙은 1~2세경, 북서인도에 위치한 쿠샨 왕조의 문화권 내에서 성립되었던 것이다.
3) 아촉불과 동방 묘희(妙喜) 세계
방위관을 가진 부처는 아미타불 하나만이 아니다. 초기의 대승경전 중에는 아촉(아크쇼뱌)불에 관한 일련의 경전들이 있다. 아촉불은 동방 아비라티(묘희) 세계에 사는 부처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이 부처의 기원은 분명치 않다. 아마도 모종의 민간신앙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아촉불은 아미타불의 정토경전류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반야 계통의 경전이나 「수능엄삼매경」(首楞嚴三昧經)∙「유마경」(維摩經) 등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모두 방위관에 입각해 있으면서도 아미타불과는 그 계통을 달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4) 문수보살
이에 대하여 순전히 불교의 내부에서만 발전된 부처로 추정되는 문수보살이 있다. 원명은 ‘만주쉬리’라 하는데, 후에 석가불의 왼쪽 협시보살이 되었으며 지혜를 관장한다고 한다. 흔히 ‘쿠마라부타’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소년 상태에 있다.’는 뜻이기 때문에, 한역으로는 ‘(법) 왕자’∙‘동진(童眞)’등으로도 불렀다. 그러나 「화엄경」에 의하면, 쿠마라부타란 동자나 소년이라는 뜻이 아니라, 출가하여 정절과 결백을 지키는 수행의 단계라고 한다. 이 보살은 「수능엄삼매경」(2세기 중엽 지루가참 번역)에 비교적 분명한 모습으로 설명되어 있는데, 이로 미루어 「수능엄삼매」라는 선정과 특별한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보살은 아마도 선정에 의하여 얻어지는 지혜의 실천을 인격화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보살은 부파 계통의 문헌에 나타나는 일이 전혀 없기 때문에 순전히 대승불교 안에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5) 관음보살
관음보살은 민간신앙적인 현세 기복의 기능을 끌어들인 보살이다. 이 보살이 나타나는 최초의 경전은 「법화경」이다. 이 경전의 제24장(한역 「묘법연화경」에서는 제25품)이 곧 「관세음보살 보문품」, 즉 통칭 「관음경」이다. 이 경전에서는 마음속으로 관음보살을 염원함에 따라서 불구덩이가 연못으로 변하고, 해난이 잠잠해지며, 또 높은 산에서 밀려 떨어져도 공중에 멈추게 된다. 참수형을 받게 되었을 때에도 목을 치는 칼이 부러지는 등, 갖가지 재앙으로부터 구원을 받는다는 현세이익적인 공덕이 강조되고 있다. 후대에 오게 되면 아잔타 제26굴과 오랑가바드, 그리고 카넬리에는 각각 ‘관음 6난 구제도’, ‘8난 구제도’, ‘10난 구제도’가 새겨지게 되는데, 이들은 모두 관음이 현세 이익적 보살로서 널리 신봉되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법화경」의 성립은 북서인도이며, 그 가운데서 제24장의 시대는 2세기 후반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관음은 이미 「대아미타경」 같은 초기 대승경전에도 등장하고 있다. 그리고 고고학적으로 볼 때는 다소 말기적인 작품을 간직하고 있지만 최초기에 속하는 관음상 2위가 간다라에서 발견되었다. 마투라에서도 쿠샨 시대의 관음상으로 보이는 불상 2위가 출토되었다.
관음은 보통 머리 위에 화불(化佛)을 가지고 있거나 때로는 천관(天冠)을 쓴 모습인데, 이것은 이란의 영향인 것으로 보인다. 「대지도론」(大智度論)에서도 관세음보살이 다른 국토에서 왔다고 했으니, 아마도 이 보살은 이란의 종교 문화적 영향을 받아 북서 인도에서 성립된 것 같다. 이와모또(岩本裕) 교수에 의하면 이란의 수신(水神)인 동시에 풍요의 여신 아나히타가 당시 간다라 지방에서 나나이야 여신 및 아르드후쇼 여신으로 정착되어 있으므로, 그것이 불교화된 보살이 곧 관음이라고 한다. 덧붙여 말하면 타키브스탄에서 출토된 아나히타상은 물병을 들고 있는데, 왼손에 지니고 있는 항아리에서는 물이 흘러내리고 있다. 여기서 흥미 있는 사실은 손에 물바가지를 든 관음상과 여신상과의 관계인데, 한편으로는 돈황(敦煌)에서 출토된 수월(水月)관음이나 양류(楊柳)관음 등의 오른손에 들린 버들가지도 역시 아나히타 여신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관음보살은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한국∙일본 등지에서도 대단한 신앙을 얻고 있다. 관음은 문화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보살로서 갖가지 종류와 신앙의 내용을 발전시켰다. 관음 신앙이 확대되어 감에 따라 각지의 민간신앙은 관음을 예배 대상으로 섭취하게 되었다. 즉 관음은 각 고장의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불교화시켜 갔는데, 기묘하게도 남성으로 취급된 예도 많이 있다. 그리하여 관음은 초기 대승경전인 「법화경」∙「대아미타경」 등에서도 남성 명사로 나타나며, 그 이후의 그림과 조각에도 흔히 남성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풍만한 가슴을 가진 여성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 특히 자모(慈母)관음 등은 당연히 여성이다. - 한마디로 말해서 남성인지 여성인지 분간하기가 힘든 보살인데, 기원적으로 볼 때 여성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은 불교에서 발전한 ‘변성 남자’, 즉 여자가 성불할 때는 일단 남성으로 전환하여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정토경전류의 사상과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변성 남자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설명이 가해져 있지만 충분한 설득력은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은 당시의 인도에 널리 퍼져 있던 여성 경시 관념을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남녀가 평등하게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는 사상을 절충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관음이 여성신에서 남성신으로 변화되어 온 것도 그와 같은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7. 대승불교의 유신론적 경향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불교는 법(진실)의 인도 하에 스스로 노력하여 충실한 현실 생활을 영위해 나갈 것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불교는 예배 대상이나 예배 의례를 설하지 않는다. 또한 현세 이익적인 기복 의례에 대해서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세간적이며 현세 이익적인 차원에서 스투파나 야크샤, 그 밖의 귀령들을 신앙하여 기복 의례를 행하였다. 그리고 출세간적인 차원에서도 예배의 대상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스투파 숭배가 이에 대신하는 기능은 수행하고 있었음을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에서 대승불교에서는 초창기 때부터 여러 부처와 보살들을 발전시켜 유신론적 경향을 짙게 나타냈다. 해탈과 관련된 출세간적 차원에 있어서는 아미타불이나 문수보살 등이 예배의 대상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그 수행 체계 속에 예배 의례를 성립시킬 수 있다.
한편 세간적 차원에서는 지방적인 신격이 흡수되었는데, 이들은 부처∙보살∙명왕(明王)∙천(天) 등의 형태로 자리를 잡아가면서 불교 판테온을 형성해 나갔다. 관음보살은 대승불교의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 하나인 것이며, 뒤이어 등장하는 지장(地藏)보살과 약사(藥師)여래 등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이 같은 다채로운 판테온은 북전 대승불교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음이나 지장보살이 항상 현세이익적인 기능만을 수행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일단 불교에 섭취된 다음에는 열반으로 이어지는 행법이나 마음의 정화에 관련된 의례 속에 편입되어 출세간적 차원으로 승화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한층 높은 차원에서 현세 이익이 갖고 있는 의의에 대한 재해석 작업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은 한편으로 출세간적 차원의 부처와 보살들이 현실적인 기원의 대상으로 예배를 받게 되었다는 사실과 방향은 반대이지만 두 차원의 기능을 결합시킴으로써 대승불교 판테온의 일면을 보여 주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세간∙출세간 양차원에 있어서의 부처와 보살의 대두, 그리고 예배 의식의 확립은 대승불교의 특징을 이루면서, 당시의 힌두교 신앙형태에 접근해 갔다. 뒤에서 말하게 되겠지만 불교는 점차적으로 힌두화의 길을 걸어서 급기야는 힌두교 세계로 흡수되어 가는데, 실로 이 같은 내력은 대승불교의 초창기 때부터 잉태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경향은 밀교에서 더욱 현저하게 드러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정리해 보기로 한다.
8. 초기 대승 교단의 실태
1) 초기 대승불교에서 ‘율’의 부재
이와 같이 대승불교에는 갖가지 사상과 실천적 조류가 존재하고 있었다. 다채로운 부처와 보살들은 후에 대승불교 공통의 판테온 속에 자리를 잡게 되어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신봉되었다. 그러나 아미타불의 신앙자와 「법화경」에 나오는 영원한 불타의 숭배자가 동일한 집단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공’을 꿰뚫어 보는 명상의 행법과 염불의 행법이 같은 전승에 속할 수는 결코 없는 일이다. 또한 불탑 숭배와는 별도로 경전의 수지(受持)∙독송∙서사(書寫 : 경전을 베껴 쓰는 것)의 공덕을 설하는 경전이 많이 있다. 물론 동일한 신앙자 집단이 이 두 가지를 아울러 행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기본적으로 이 양자는 별개의 신앙 형태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갖가지 형태의 신앙자 집단들이 모여서 전체적인 ‘대승 교단’이라는 통합적 교단을 구성했다는 사실에는 많은 의문점들이 도사리고 있다. 이 교단은 아마도 응집력이 강한 단체는 아니었던 것 같다. 이것은 대승의 ‘율장’이 없다는 사실로도 추측이 가능하다. 각 부파끼리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부파불교에서는 공통된 기원을 가진 동질적인 내용의 율장을 전승하고 있다. 그리고 이 율의 준수야말로 교단의 통제와 교법 전승의 근거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는 독자적인 율전이 존재했던 흔적이 없는 것이다. 대승의 출가 보살들이 지킨 것은 10선계이며, 다시 기본적으로는 3귀의∙5계∙8재계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일반적인 윤리 행위에 대한 규범으로서, 이를 위반했을 때 가해지는 벌칙 조항도 없다. 결국 대승불교에서는 교단을 통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율이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2) 보살 가나(菩薩衆와) 대승불교의 상가
게다가 대승불교도의 상가라는 것도 사실상 그 성격이 지극히 불투명하다. 서기 506년에 제작된 구나이가르 동판 비문에는 “불퇴전의 대승불교도 비구 상가”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은 대승과 소승 양파의 생활양식이 동질화되어 서로 공존할 수 있게 된 다음의 일로 생각된다.
초기의 대승경전에는 분명히 ‘보디삿트바 가나’(보살 가나)라는 명칭이 존재한다. 예컨대 「아미타경」∙「무량수경」에는 보디삿트바 가나가 ‘쉬라바카(성문, 聲聞) 상가’ 및 ‘비구 상가’와 나란히 일컬어져 있다. 2~3세기에 성립된 「십주비바사론」(十住毘婆沙論)에도 ‘보살중(菩薩衆 : 원어는 보디삿트바 가나임이 분명하다)’은 성문 승가와 다른 것이라 쓰여져 있다. 그러나 이 문헌은 보살중을 설명함에 있어서 “보살이란 무상도를 위하여 발심함을 말한다.”고 한 다음, “중이라 함은 금강무애해탈도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초발심과 그 중간 단계들에 있어서의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보살을 이름이라”고 하여 매우 추상적인 설명만을 가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당시의 보살 가나란 결국 응집력 있는 현실적인 교단이라기보다는 기껏해야 신앙자 집단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3) 출가와 재가
보시삿트바 가나이 중심이 출가 보살들이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한편으로는 재가자들도 보살로 불리고 있었다. 「십주비바사론」에는 “재가의 보살은 마땅히 재물 보시를 행하고, 출가자는 마땅히 법 보시를 행할지니라. 어째서 그러한가. 재가자의 법 보시는 출가자의 법 보시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는 대목이 담겨 있어서, 출가와 재가 사이에 법 보시와 재물 보시의 교환이 있었음을 알려 주고 있다.
그러나 재가 보살로 법을 설하는 일이 있었음은, 중생에게 법을 가르쳐 교화시키는 일이 중요하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도 충분히 짐작이 간다. 이는 비구만이 일방적으로 재가신자에게 법을 설하는 전통적 부파불교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오히려 초기의 대승불교 경전에는 재가자가 비구에 대하여 설법을 하는 장면까지도 나오고 있다. 예컨대 「화엄경」의 주인공인 선재동자(善財童子)는 구법의 여행을 계속해 나가는 도중에 출가자뿐만 아니라 거리의 상인∙창녀∙어부 등의 재가자들로부터도 법의 가르침을 듣는다. 「욱가장자경」의 주인공인 욱가 장자나 「승만경」의 주인공인 승만부인(勝鬘夫人) 등도 재가의 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심원한 대승의 법을 설하고 있다. 「소품반야경」의 다르모드가타(담무갈, 曇無竭)도 칠보로 장식된 궁전 속에서 여인들에게 둘러싸여 오욕의 온갖 즐거움을 만끽하면서도 법을 설한다.
「유마경」으로 유명한 유마거사는 바이샬리의 장자이면서, ‘공’의 철리를 높이 창도하였다. 이러한 사례들은 대승불교에 재가적 성격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9. 대승불교와 부파 교단
대승불교는 원래 원시불교에 반발하여 일어났던 만큼 부파불교의 존립 및 교지에 대하여 많은 비판을 가했다. 그러나 초창기에 있어서는 그 표현방법이 그다지 격렬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다가 대승경전을 통한 부파에 대한 비판의 논조는 이내 높아져 갔다. 대승불교도들은 스스로의 교리를 뛰어난 큰 수레라고 자칭하여 ‘마하야나(대승)’라 부르고, 이에 대하여 전통적 부파 교단의 교리는 작고 보잘 것 없는 수레에 불과하다고 하여 ‘히나야나(소승)’라 불렀다. 대승불교 측에서는 이러한 용어를 사용할 정도로 부파 교단에 대한 우월감과 대항 의식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도행반야경」은 반야바라밀을 비방한ㄴ 사문을 가리켜 중죄자라 하고, 또 「화엄경」은 성문이나 연각 따위의 경지를 초월하라고 가르친다. 부파에서 최고의 경지로 간주되는 성문∙연각에 대하여 「반야경」에서도 “타락하지 말라”고 설하며, 「보적경」은 부파의 비구승을 천치로 몰아붙이고, 그들이 독경과 선정, 지혜를 외면한 채 ‘사리를 공양함으로써 이를 생활의 도구로 삼는’ 재가자와의 매개체 역할을 비난하고 있다. 「법화경」에서는 성문과를 구하는 비구와 비구니, 그리고 우바새∙우바이에게 접근하지 말 것과 인사하지 말 것, 그리고 함께 거주하지 말 것 등을 가르치고 이어서 ‘수기품’에서는 부파불교의 전승으로는 깨달음을 얻은 아라한이어야 했을 아난다 등의 10대 제자들이 스스로의 지혜가 얕았음을 고백하고 대승의 가르침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면서 장래에 불타가 될 것이라는 수기를 받았다는 사실을 감격에 넘친 어조로 말하고 있다. 「욱가장자경」에서는 소승의 비구에 접근하는 것이 오로지 대승으로 개종시키기 위한 방편이라고 한다. 「아미타경」처럼 소승불교에 대한 공격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경전도 있지만, 초기 대승경전에서는 부파에 대항하여 스스로의 우위를 주장하는 자세가 지극히 강하다.
이에 대하여 부파 교단 측은 적어도 문헌상으로 볼 때, 거의 완전하리라 만큼 침묵을 지키고 있다. 먼 후대에 이르러 벌어진 대승계와 부파계 사이의 철학적 논쟁을 접어 둔다면, 대체로 서력 기원 후의 수 세기 동안에 만들어진 경전과 논서에서는 대승에 대한 언급을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유부의 논서인 「구사론」(4세기)이나 분별설부의 팔리어 고전인 「비숫디막가」(청정도론, 淸淨道論, 5세기)에도 대승에 관한 언급은 없다. 「카타밧투」(논사)에 ‘대공종(大空宗, 마하슈냐타 바딘)이라는 이름으로 나와 있는 방광부(方廣部, 베투르야카)가 「반야경」의 신도를 지칭하는 것 같으며, 「대비바사론」(2~3세기, 캐시미르에서 성립됨)에서도 “반야의 신도를 방광이라 부른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대승에 대한 언급은 이 정도가 거의 전부인 것으로 보인다. 이 문헌은 보살이나 공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대승 사상을 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대승경전이나 대승불교도를 특별히 밝힌 부분은 없다. 어떠면 대승을 ’삼장‘ 이외의 다른 것으로 보았는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부파 교단에서는 새로운 불교의 개혁 운동을 완전히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문헌상으로만 살펴본 것일 뿐, 사회적으로는 대승과 소승 사이에서 많은 알력이 존재했었음을 쉽사리 추측할 수 있다. 예컨대 3세기 경, 스리랑카에는 방광부(方廣部, Vetullavāda)라 하여 ‘공’ 사상을 강조하는 대승의 무리가 건너왔는데, 그 때문에 그들이 거점으로 삼았던 ‘무외산사’와 상좌부 불교의 본산이었던 ‘대사’와의 사이에 분쟁이 발생한 적도 있었다는 것은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이다. 대승경전 속에도 부파 비구들이 대승의 교지를 욕한 데 대하여 심하게 반발한 표현이 보인다.
「법화경」에 이르러서는 「법화경」이나 그 신봉자를 비난하거나 박해하는 자에게 몹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이 같은 표현은 「법화경」을 믿는 신도들이 사회적으로 백안시되었거나, 실제로 모종의 박해가 있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는 학자도 있다. 사실상 「법화경」 사상은 대승불교 운동 가운데서도 특이한 조류에 속하여 교리에 대한 열광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따라서 대승불교의 다른 집단들도 마찬가지로 무시당했는가는 별개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종교 운동에도 관용을 베푼 인도의 풍토성을 고려해 볼 때, 「법화경」을 비롯한 모든 대승 운동들이 특별한 박해 없이 순조로운 발전을 해나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설령 대립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불교의 내부적인 문제에 그쳤을 것이며, 따라서 불교까지 영입하여 성립된 힌두 사회 전체적으로 볼 때 대승불교 운동이란 사실상 그다지 충격적인 사건은 아니었을 것이다. “모든 중생들 가운데서 소승을 구하는 자 없고 모두 외도(불교 이외의 종교)의 가르침을 따른다. 연각의 도를 구하는 자도 적고 대승을 구하는 자는 더욱 적다.”고 한 「화엄경」의 표현은 힌두 세계를 그 배경으로 삼고 있던 당시의 불교가 처했던 상황을 여실히 알려주고 있다.
10. 대승불교의 기원
대승불교가 언제 어디서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해답은 분명치 않다. 즉 대승불교 운동은 한 사람의 종교인에 의하여 창시된 개혁이 아니라 재가신앙자들을 중심으로 여러 집단의 운동이 합쳐져서 자연발생적으로 이루어져 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때를 그 시발점으로 보아야 할는지는 쉽사리 결정하기 힘들다. 문헌상으로 볼 때 ‘대승(마하야나)’이란 말이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1세기 경의 「소품반야경」에서부터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승불교의 시발점이 1세기란 것은 아니다. 기원전부터도 여러 가지 기운이 움트고 있었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연대 추정이 비교적 정확한 한역 경전을 근거로 하여 계산해 본다면 1세기 경에는 이미 「반야경」을 비롯한 대승경전들이 성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1세기부터는 대승불교 운동이 확실한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이러한 추정은 「법화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들의 편찬사나 발전사와도 전혀 모순되지 않는다.
대승불교가 성립한 지역에 대해서도 불확실한 점이 많이 있지만, 대체로 「반야경」은 남인도에서 처음으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이 경전은 스스로 “남부에서 일어나 서부를 거쳐 북부로 옮아 갔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로 미루어 볼 때 대승불교는 남인도(안드라 지방인 듯함)에서 서부 데칸을 거쳐 북인도와 북서인도에 유포된 것 같다. 안드라 지방은 대승불교가 번성했던 곳이며, 또한 대승의 교리와 불신관이 대중부의 체계와 유사한 점으로 미루어 막연하게나마 남인도 지역이 대승불교의 발생지로 판단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사점은 어디까지나 정도의 문제일 뿐, 대승불교에는 다른 부파의 영향도 상당히 섞여 있음은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이다. 대중부의 활동이 그대로 대승불교 운동으로 이어졌다고 하는 과거의 통설은 마땅히 부정되어야만 할 것이다.
한편 이와모또 유따까(岩本裕) 교수눈 「법화경」의 성립을 4기로 나우어, 제1기는 동인도에서 기원전 1세기경, 제2기는 북인도에서 1세기경, 그리고 3기와 4기는 북서인도에서였다고 한다. 「화엄경」도 북서인도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시기적으로 약간 후대에 속하는 「유마경」의 무대는 동인도와 바이샬리 지방인데, 이 같은 여건들로 짐작컨대 이 경전의 배경을 이루는 사상∙활동과 동인도와는 깊은 연관성을 맺고 있었을 것이다. 정토경전 역시 아미타불과 구제 사상, 그리고 극락정토라는 관념으로 보아 북서인도에서 성립되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대승경전에 자주 등장하는 관음보살도 서아시아의 종교적 영향과 자극 하에서 성립된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대승불교의 활동무대를 어떤 특정한 지역으로 한정하기란 매우 힘들다.
그러나 비문류를 살펴보면 기원전 1세기에서 서기 5세기에 걸쳐 “모든 보살들의 공양을 위하여”라는 문장이 발견되는데, 가장 오래된 것은 간다라 서쪽에 위치한 아프가니스탄에서 마투라에 이르는 지역 일대에서 출토되고 있다. “모든 중생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라는 이타의 정신이 담긴 명문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1세기경의 비문으로 북서인도에서 출토되었다. 물론 해석상으로는 많은 문제점들을 안고 있지만 여러 가지 경전이나 대승의 교리, 혹은 비문에 나타난 대승적 실천 자세 등을 종합해 볼 때, 대승불교의 성립에는 특히 마투라에서 북서인도에 걸친 지역이 깊이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반야경류와 남인도와의 관계도 무시할 수 없으므로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는 무척 힘들다. 대승불교는 기원전으로 소급되는 얼마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대체로 서기 1세기경부터 몇몇 지역, 특히 안드라와 갠지스 강의 중류지역에서 북서인도에 걸쳐서 발생한 불교 운동들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발전해 나간 것으로 보는 편이 무난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특정 사상과 실천 자세가 제창이 되어, 그 영향 하에서 각종의 사상적 조류에 자극받아서 발전해 나간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하튼 그 조류를 달리하는 갖가지 신앙자 집단과 신앙의 형태, 그리고 교리적 내용들이 어떤 방식으로 관련을 맺어서 대승불교라는 하나의 운동 속에 통합되었는가 하는 문제, 다시 말해서 본질적으로 다양한 여러 조류들이 어떻게 하나의 대승불교 속에 통합되어 왔는가 하는 통합의 원리와 구체적 상황 등은 앞으로의 연구 과제로 남아 있다.
(출처 : 佛陀의 世界 / 中村元 著, 金知見 譯)
원불사근본불교대학源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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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평온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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