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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안에 있는 행복을 누려라 / 마 19:1-15
불행한 결혼 생활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이혼하기로 결심한 여인이 마지막으로 한 사람을 찾아갔습니다. 그에게 남편을 정말 아프게 할 수 있는 조언을 구했습니다. 그는 남편을 두 달간 온 몸과 정성을 다해 사랑해서 남편의 마음을 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편이 사랑과 만족을 느낄 때, 이혼 서류를 내밀라고 했습니다. ‘그럼 부군의 마음이 찢어질 것입니다.’ 몇 달 뒤, 그녀가 그 현인을 찾아와서 말했습니다. ‘더 이상 이혼 서류가 필요 없어요. 우리는 지금 두 번째 신혼여행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토마스 제퍼슨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행복한 가정은 천국의 지점이다.” 이 세상에서 천국과 가장 흡사한 곳은 가정입니다. 남편과 아내, 그리고 부모와 자녀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오순도순 살아가는 가정이야말로, 천국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옥과 가장 흡사한 곳, 역시 가정입니다. 부모들이 싸우고 말다툼하며, 자녀들을 악과 악한 세력에 내버려 두는 경건하지 못한 가정은, 지옥 지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은 어떤가요? 천국입니까, 아니면 지옥입니까?
결혼 생활이 파국으로 치닫던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었습니다. 남편은 좀 더 상냥하고 부드러운 여성을 만나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습니다. 한편 아내는 좀 더 책임감이 강하고 활동적인 남자를 만나지 못한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두 사람의 얼굴에 밝은 미소가 피어올랐습니다. 이웃 주민이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금실이 좋아진 특별한 비결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이들 부부가 말했습니다. “우리 부부는 서로를 향해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합니다. ‘그래서 당신을 사랑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 고백을 한 후부터 서로에게 완벽한 기대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게 됐습니다. 오히려 서로를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한답니다.”
결혼은 사랑의 언약입니다. 그 사랑은 곧 희생입니다. 배우자를 위해 나를 희생하면,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두 배의 사랑이 되돌아옵니다. 결혼 생활의 비극은 대부분 이기심에서 비롯됩니다. 가정은 남편이나 아내, 어느 한 사람의 일방적인 노력과 희생만으로는 지탱되지 않습니다. 가정은 남편과 아내, 더 나아가 자녀들이 함께 일구어 나가는 삶의 터전인 것입니다. 행복을 멀리서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은 가정 안에 있습니다. 행복의 파랑새를 집 밖에서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남편에게 아내가, 아내에게 남편이 행복의 파랑새입니다. 자식에게 부모가, 부모에게 자식이 행복의 파랑새입니다.
예수님이 용서에 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특히 형제 용서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그걸 묻는 베드로는 넉넉잡아 일곱 번이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이렇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누가복음에는 이 부분에 살이 더 붙어 있습니다. 눅 17:3-4절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만일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그 살은 회개입니다. 용서의 전제 조건으로 회개를 말씀하셨습니다. 회개가 먼저냐, 용서가 먼저냐를 따지는 건, 어쩌면 무의미할지도 모릅니다. 용서할 마음이 없으면, 회개해도 용서가 안 됩니다. 이미 용서했는데 회개를 하면 화해가 되는 것입니다. 화해란 관계의 회복을 말합니다. 용서 후 화해가 됩니다. 진정한 화해는 용서를 해야 가능합니다. 남이 보는 데서 손잡고 사진 한 번 찍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관계에서 회개가 필요하고, 용서가 필요하고, 화해가 필요한데, 예외가 있습니다. 가족입니다. 가족에겐 용서가 필요 없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입니다. 탕자의 비유에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회개가 먼저가 아니라 용서가 먼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와 회개하기 전에 이미 용서했었습니다. 다 용서해 놓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돌아오니 반가웠고 고마웠습니다. “너 빨리 회개해라. 어서 잘못했다고 해라.” 그런 거 없습니다. 이미 용서를 했기 때문입니다.
1-2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요단 강 건너 유대 지경에 이르시니, 큰 무리가 따르거늘, 예수께서 거기서 그들의 병을 고치시더라.’
예수님이 사역 장소를 옮기셨습니다. 형제 용서에 대한 말씀을 마치시고, 갈릴리를 떠나 유대 지경으로 가셨습니다. 예수님의 동선은 비밀이 아니었기에, 금방 사람들에게 노출되었고, 자기 필요를 따라 큰 무리가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들의 필요는 대부분 병 고침이었습니다. 몸이 아픈 사람의 소원은 한 가지입니다. 병이 낫는 것입니다. 병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그걸 위해서 못 할 게 없습니다. 용한 사람이 있다면 가리지 않습니다. 그게 병든 사람의 속마음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아픈 속마음을 헤아리셨습니다. 그래서 자기를 따라온 사람들을, 한 사람 한 사람 고쳐주셨습니다. 여기에 아픈 이들을 향한 주님의 긍휼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평생 달고 살아야 할 친구같은 병이 있습니다. 그런데 누구에게도 아프다는 말을 하는 게 조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은 다릅니다. 주님은 아픈 우리를 받아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아픈 소리를 내야 합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야 하고, 아픈 부위를 드러내야 합니다. 주님은 오늘도 믿음으로 나아오는 자들에게, 치유의 은혜를 주고 싶어 하십니다. 치유의 은혜는 개인적으로 뿐만 아니라 가정에도 임해야 합니다. 보면 아픈 가정들이 많습니다. 깨지지는 않았지만, 실금이 가 있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깁스는 하지 않았지만, 파스를 더덕더덕 부친 가정들이 있습니다. 한 집에 살기는 하지만, 남과 다를 바 없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라고 모든 가정이 건강했던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날처럼은 아니라도, 사람 사는 건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3절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이르되,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한테 가정 상담 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종교지도자쯤 되는 사람들이 참 못 됐습니다. 누구보다 경건을 부르짖으면서, 다른 사람 곤경에 빠뜨리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번에 갖고 온 시험 문제는, ‘남편이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은가’입니다. 당시도 이혼은 합법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도 예수님도, 그것을 모르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게 옳으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합법이라고 꼭 옳은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사실 부부로 만나서 평생을 함께 사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기적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가정엔 매일 기적이 일어나고 있는 셈입니다. 부부가 늘 좋을 때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부부관계를 이쯤 끝냈으면 하는 마음이 들 때도 있습니다.
‘남편을 텔레비전에 딸려서 팝니다.’라는 신문광고를 낸 부인이 있었습니다. 미국 테네시주에 사는 스니드 부인인데, 그 이유는 남편이 지독한 축구광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작 남편을 사겠다는 전화가 수십 통 왔을 때, 그 부인은 마음이 변하여 텔레비전만 팔겠다고 했습니다. 만일 전주에 사는 어떤 부인이, 남편이 핸썸하고, 재산도 있고, 지독한 축구광이라서, 남편을 텔레비전에 딸려서 판다고 내놓으면, 시장 반응이 어떨지, 또한 산다는 사람이 수십 명 있을 때, 텔레비전만 팔지, 그래도 함께 딸려서 팔지 모르겠습니다. 흔히들 부부는 가깝고도 먼 사이라고 합니다. 마주보고 누웠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이지만, 서로 등을 돌리면 부부사이는 10만리나 됩니다. 지구를 한 바퀴(40,192km) 돌아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년간 미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의사가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있으면서도, 아내만은 전형적인 한국 여인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고, 한국에 돌아와 소원대로 비교적 이상에 맞는, 신붓감을 골라서 결혼을 했는데, 6개월도 채 못 되어 서로 후회하고 말았다고 합니다. 아침에 자기보다 늦게 일어나고, 음식 솜씨는 엉망이며, 전혀 여자다운 데가 없다는 것입니다. 미국 여자가 싫어서 한국 여자와 결혼했는데, 미국 여자보다 더 서구식만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인 이야기는 또 다릅니다. 미국에서 13년이나 살았다고 해서, 많은 것을 기대했는데 실망했다는 것입니다. 음식도 된장찌개나 총각김치를 찾고, 레이디 퍼스트 같은 기사도 정신도 없습니다. 도대체 서구적인 세련된 맛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다 일리가 있습니다. 문제는 서로가 상대방을 이해할 줄 모르고,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기대한 것입니다. 그 부부가 계속 같이 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마음으로는 계속 살아도 행복할 수 없습니다.
4-5절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예수님은 자신을 시험하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기분이 나쁠 법도 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본래부터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습니다. 처음부터 성별을 다르게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남자가 여자가 될 수 없고, 여자가 남자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성전환수술을 하기도 합니다. 동성 간의 결혼이 합법화된 나라도 있습니다. 남자와 남자가 결혼하고, 여자가 여자와 결혼하는 것입니다. 심지어 동물과 결혼식을 올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쯤 되면 막 가자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들도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죄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사함을 받아 구원받아야 할 죄인입니다. 차별을 해서는 안됩니다. 이들도 예수 안에서 구원받을 자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가정 행복, 부부 행복은 남자와 여자를 아는데서 시작합니다. 사실 남자와 여자는 근본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현상적으로도 다릅니다. 남자는 단순하고, 여자는 복잡합니다. 남자는 한 가지에 집중하면, 다른 것에 집중하기 어려워 하지만, 여자는 텔레비전을 보면서도 다른 일을 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때, 옆에서 아내가 이야기를 꺼내면, 그 이야기를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대답은 “응” 해도, 나중에 “내가 언제?” 그럴 수 있습니다. 그것을 두고 여자는 자기를 무시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남자는 물건을 잘 못찾습니다. “여보, 어디에 뭐가 있으니까 좀 찾아와요” 하면, 열에 아홉은 잘 찾지 못합니다. 정확히 그 자리에 있으면 몰라도, 조금만 벗어난 자리에 있어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심지어 냉장고 안에 있는 것도, 잘 못찾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대한 한국가정상담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남자가 물건을 잘 찾지 못하는 데는, 정성이나 사랑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우선 여자들은 태초에 둥지를 지키는 사명을 가지고 창조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자들은 시야가 아주 넓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넓은가 하면, 코를 중심으로 해서 좌로 45도, 우로 45도, 위로 45도, 아래로 45도 정도는, 그냥 한 눈에 다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냉장고 문을 열게 되면, 무슨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금방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는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부터 남자는 시야가 좁습니다. 남자는 원래 창조 시부터 눈동자가 여자보다 훨씬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먼 거리를 쳐다 볼 수 있는 터널 시야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멀리 있는 것을 보는데 훨씬 적합합니다. 꼭 망원경과 비슷합니다. 망원경은 멀리 있는 것은 잘 볼 수 있지만, 대신 주변 근처는 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직선으로 코앞에 보이는 것만 잘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내들은 물건을 잘 찾지 못하는, 남자들의 답답함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바로 앞에 있는 물건도 그렇게 못 찾아요? 당신 두 눈을 어디다 두고 사는 거예요?”
남자가 여자에게 다 맞출 수 없듯이, 여자 또한 남자에게 다 맞출 수 없습니다. 맞추려고 하지 말고, 보완하려고 해야 합니다. 대개 부부가 다릅니다. 예로 변호사 출신 문재인 전 대통령은 차분하고 예의바른 딱 신사입니다. 그런데 성악을 전공한 영부인은 유쾌한 정숙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부부는 바라는 배필이 아닌 돕는 배필입니다. 바라는 배필에게는 끝없는 목마름만 있지 만족이 없습니다. 감사도 행복도 없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돕는 배필로 이해할 때, 행복한 가정 행복한 부부가 될 수 있습니다. 살아갈수록 부부가 한 몸이 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낍니다. 한 때 사랑의 감정이 불탈 때는 한 몸이었습니다. 떨어뜨려 놓으면 병이 날 거 같았습니다. 부부를 일심동체라고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일심이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쩌면 일심이체만 돼도 괜찮은 부부입니다. 이심이체인 부부가 다수이기 때문입니다.
한 몸은 육체적인 결합을 내포합니다. 부부가 영혼의 결합, 정신적인 결합만을 뜻하지 않고, 육체적인 결합이 포함되어야 합니다. 법적으로는 부부지만, 따로 떨어져 별거하고 있다면, 진정한 의미의 부부가 아닌 것입니다. 별거하다가 재결합하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TV프로 중 ‘우리 이혼했어요’가 있습니다. 이혼한 부부였던 배우 나한일과 모델 유헤영이 같이 살아보다가 다시 합치는 모습을 방송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합친다고 하면, 축하해 주는 분들도 있지만, “잘했다”는 말보다는, “뭐 하러 합치려고 하느냐”는 말을 한다고 합니다. 성경은 재결합을 말합니다. 이혼한 사람에게 혼자 살든지 아님 재결합하든지를 말합니다. 하물며 별거했던 사람에게는 당연히 재결합입니다. 하지만 사탄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나누도록 미혹합니다.
6절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니’
이솝 우화 중에 아주 친한 네 마리의 황소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어디로 가도 함께 갔으며, 함께 풀을 뜯고, 함께 누워 쉬었습니다. 그렇게 항상 서로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어떤 위험이 다가오면 그들은 서로 힘을 합해 대처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잡아먹으려는 사자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자는 그들을 한 번에 다 잡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사자는 어느 누구와도 일대일 대결은 자신이 있었지만, 한 번에 네 마리는 힘에 겨웠습니다. 사자는 꾀를 부렸습니다. 소들이 풀을 뜯고 있을 때, 그 중에 약간 뒤쳐진 황소에게 살금살금 다가가, 귀엣말로 다른 소들이 그의 흉을 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또 다른 소에게도 속삭이고, 사자가 이런 식으로 자꾸 접근하자, 마침내 네 친구들은 서로를 불신하게 되었습니다. 각자는 다른 세 마리가 자기를 모략하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마침내 그들 사이는 깨어져 각자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이것이 사자가 노리던 바였습니다. 사자는 하나씩 하나씩 잡아먹었고, 그래서 네 번의 훌륭한 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서로 갈라지고 나눠지게 하는 것이, 사탄의 역사입니다. 사탄이 우리 가정에 들어와, 부부가 서로 불신하게 하고, 끝내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사탄은 분리의 영입니다. 부부가 한 몸이 되는 원리가 연합입니다. 연합은 둘을 아교풀로 붙이는 것입니다. 이혼은 하나로 붙은 것을 떼어 둘이 되는 것입니다. 이혼 서류 작성하여 도장 찍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딱풀로 붙인 것을 떼어도, 자국이 남고 상처가 남습니다. 처음에 잘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후에는 이인삼각으로 맞춰서 끝까지 달려가야 합니다. 이혼이 합법이냐, 불법이냐를 따지자는 것이 아닙니다.
7절 ‘여짜오되 그러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버리라 명하였나이까?’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적용하여, 이혼을 합법화 시켰습니다. 남자가 여자한테 이혼 증서 한 장 써주면, 이혼이 성립되었습니다. 법이라는 게 해석이 중요합니다. 법정신이 있습니다. 그 법을 제정할 때의 취지가 있습니다. 그런데 법정신을 망각하고, 그 법을 제정할 때의 취지를 무시하고, 자구적으로 해석하고, 가진 자 편에서 해석할 때, 멀쩡한 법이 악용될 수 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이 모세법을 들고 나와서,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처음에 시험하여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 물었고, 예수님이 본래의 법정신과 법 취지에 맞게 대답하셨지만, 그들은 수긍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물은 게 대답을 듣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모세의 율법으로 되치기 질문을 했습니다. 어떤 기술보다 되치기가 무섭습니다. 되치기가 상대의 들어오는 공격을 순간적으로 역이용하여 공격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
예수님은 그 기술에 걸렸지만, 차분하게 대응하셨습니다. 율법의 본래의 뜻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건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당시 여성이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이혼증서를 써주라는 것은, 살다가 맘에 안 들면 이혼해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여성의 권익을 보호할 목적이었습니다. 이혼증서를 가지고 있으면 ‘돌싱’이라는 증거가 되어, 다른 남자를 만날 수 있고 재혼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한 번 결혼하면 헤어져서는 안 되지만, 여러 복잡한 현실을 감안하여, 약자인 여성에게 재출발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그 법을 제정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법을 악용했습니다. 그 마음이 완악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단호했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 예외 조항만은 인정하셨습니다. 바로 배우자의 음행이었습니다.
9절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배우자가 부정을 저질렀을 때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큰 지를 주님도 인정하신 것입니다. 결혼생활에서 이보다 더 큰 고통은 없습니다. 사별의 고통도 크고, 이혼의 고통도 크지만, 배우자의 외도로 인한 고통은 그에 못지않습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도 권태기가 찾아옵니다. 그 땐 함께 사는 것이 싫증이 나고, 함께 있는 것이 짜증이 납니다. 그럴 즈음 마귀가 보낸 이성이 나타납니다. 그 타이밍이 절묘합니다. 그래서 함께 낭떠러지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정리를 해도, 완전히 정상화되는 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그게 감정의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그 어떤 상처보다 감정의 상처는 아무는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예전엔 한 쪽이 바람을 피울 때, 다른 쪽은 기다려줬습니다. 하지만 요즘은 맞바람을 피웁니다. 그럼 가정은 깨지고 맙니다. 두 사람의 감정싸움에, 괜한 자녀들만 불행해집니다. 아무리 합의이혼을 해도, 자녀들에게는 깊은 상처가 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제자들이, 그럴 바엔 차라리 결혼 안 하는 게 낫겠다고 했습니다.
10절 ‘제자들이 이르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겠나이다.’
오늘날 청년들의 주장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들은 결혼을 더 이상 필수가 아닌 선택으로 여깁니다. 꼭 결혼해야 행복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실제로 결혼해서 불행한 사람이 꽤 될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이런 말을 했다지 않습니까? “결혼은 해도 후회하고 안 해도 후회한다.” 공자도 이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분명 부부관계는 쉽지 않습니다. 화성남자와 금성여자가 지구에서 만나, 함께 살아가는 것이 쉬울 리가 있겠습니까?
11-12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머니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결혼을 선택으로 여겨도 되는 사람들의 예를 들고 있습니다. 고자 곧 결혼을 해도 아이를 둘 수 없는 경우입니다. 결혼의 목적이 사랑하는 사람의 소유가 아닌, 생육하고 번성하는데 둔 것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축복이요, 명령입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최선의 방법이 무엇입니까? 결혼입니다. 독신이 죄는 아닙니다. 결혼해야 꼭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결혼은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결혼을 통해 자녀를 낳아 믿음의 가문을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변함없는 뜻입니다.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힘들다고, 자녀 갖는 것을 포기하는 가정들이 있습니다. 정부에서 출산장녀를 위해 여러 정책을 세우고 있지만, 내 애를 국가에서 다 키워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은, 결혼하여 자녀를 키우는 사람이라야 이해할 수 있습니다.
13-15절 ‘그 때에 사람들이,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 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 하시고, 그들에게 안수하시고, 거기를 떠나시니라.’
부부관계도 쉽지 않지만, 부모자녀관계도 쉽지 않습니다. 부부는 피가 섞이지 않아서 힘들다고 하지만, 자녀는 내 피가 섞였는데도 힘듭니다. 자녀 양육을 포기한 가정들이 늘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하고 싸우다 싸우다, 결국은 포기하고 맙니다. 가정에서 양육을 포기한 애를, 학교에서 교육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착각입니다. 양육에는 당근과 채찍이 같이 가야 합니다. 부모의 손에 사랑의 매가 들려야, 자녀가 사람이 됩니다.
한 부부가 쉰 살이 넘어 아들 하나를 낳았습니다. 부부는 늦둥이를 얻은 기쁨에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아버지는 재롱을 부리는 아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야, 가서 어머니를 한 대 때리고 오렴.” 아들은 막대기로 어머니를 때렸습니다. 아들에게 매맞는 어머니는 웃으면서 “아버지도 한 대 때리렴” 하고 말했습니다. 부모는 재롱둥이 아들에게 매를 맞는 것이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아들에겐 부모를 때리는 것이 흥미로운 오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점점 나이가 들면서 손이 매워졌습니다. 부모는 장성한 아들에게 종종 손찌검을 당했습니다. 아들은 걸핏하면 부모를 때리는 패륜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어느 날 노부부는 자녀를 불러놓고 부모를 때리는 것은 옳지 않다고 훈계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습관으로 굳어버린 아들의 행동을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부모는 아들이 무서워 벌벌 떨었습니다.
성경은 매와 사랑의 관계를 이렇게 말합니다.잠 13:24절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그렇다고 매번 매로 다스리면 안 됩니다. 100번 안아주고 1번 정도 매를 들면 됩니다. 특히 자녀를 축복해야 합니다. 자녀에게 부모의 축복기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부모의 축복기도를 받고 자란 아이가 잘못될 수 없습니다. 잠깐 곁길로 가다가도 결국은 다시 돌아올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이렇게 해 봅시다. 두 손의 손가락을 쫙 편 다음 서로 마주쳐 봅시다. 그리고 중지들을 가운데로 구부려 넣고 나머지 손가락은 서로 맞댑니다. 그리고 엄지를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따라합니다. “부모님 없이도 살 수는 있고.” 부모님이 우리 곁을 떠나가도 우리는 세상 사는 이치를 터득해 잘들 살아갑니다. 다음은 집게손가락을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친구 없이도 살 수 있고.” 새끼손가락을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자식 없이도 살 순 있어도.” 우리는 친구와 자식 없이도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약지를 떼었다, 붙였다 해보세요. 약지는 죽어도 안 떨어집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 없이는(당신과 떨어져서는) 절대로 못살아.”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도 내 속을 썩이는 남편, 내 속을 썩이는 아내라 하더라도 사랑하며 살기 바랍니다. 부족한 것이 있으면 탓하거나 불평하지 말고, 그 부족한 것을 내가 채워가며 살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를 부부로 만나게 하신 것입니다. 콩 한 쪽을 나눠서 먹는 한이 있더라도,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며 사는 것이 행복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갈보리교회 성도들의 가정에 이런 행복과 기쁨이 가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에덴동산에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라고 하셨지만,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주신 행복한 가정을 잃어버렸는데, 이제 그 행복한 가정을 회복할 수 있도록 믿음을 주옵소서. 불평하거나 남의 탓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배려하고 도와주며 사랑하므로, 부족한 것은 서로 채워가며, 믿음의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서로 돕는 배필로 살아가도록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재물의 종이 아니라 청지기로 / 마 19:16-30
외교관의 직업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늘 일에 쫒겨 바쁘게 지내며, 외국도 자주 다니고, 가정생활에 좀 소홀히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모처럼 쉬는 주말이라 그냥 낮잠을 잘까 했는데, 마누라 눈치가 보이고, 아이들 눈치가 보여 안 되겠다 싶어, 아이들과 같이 낚시나 갔다 오겠다며 집을 나섰습니다. 아이들은 기뻐 뛰며 놀았고, 저녁 늦게 집에 온 외교관은 일기를 썼습니다. ‘오늘 나는 아이들과 함께 낚시를 다녀왔다. 그러나 소중한 하루를 잊어버린 느낌이다.’ 그런데 아이들 가운데 일기를 쓰는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의 일기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오늘 아버지와 나는 함께 낚시를 갔다 왔다, 오늘은 나에게 있어 가장 소중하고 기쁜 날이었다.’ 여러분은 하루하루의 삶을 어떻게 보내고 있습니까?
어떤 여자가 아들 셋을 두고 늘그막에 자녀들과 따로 살게 되었습니다. 어릴 때는 그토록 착하고 효성스럽기 짝이 없던 아들들이, 이제는 며느리한테 꼭 쥐여 분가할 것을 주장하자, 건강이 허락될 때까지 서로 따로 사는 게 편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식들은 처음에는 1주일이 멀다 하고, 우르르 손자들을 데리고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녀를 찾는 일이 줄어들었습니다. 이제는 손자들이 보고 싶어 잠깐 들르라는 전화를 해도, 바쁘다는 핑계를 대는 일이 잦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노년의 외로움을 달래려는 듯, 보석이나 장신구 따위의 패물을 사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그런 그녀를 몹시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돈 달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서도, 그런 값비싼 보석들을 사 모으는 데에야, 뭐 달리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녀는 집안에 무슨 일이 있어 며느리들이 다 모이면, 으레 그 패물들을 며느리들이 보는 앞에 꺼내 놓고 손질을 하곤 했습니다. 자호박이니 비취니 루비니 하는 따위의 보석들을, 호호 입김까지 불어 가며 닦기도 하고, 몸에 한번 걸쳐 보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들의 태도가 눈에 띄게 달라졌습니다. 그녀를 찾는 횟수도 잦아졌을 뿐만 아니라, 서로 돈을 각출해서 보약을 지어 오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며느리들에게 이런저런 작은 패물들을 하나씩 나눠주기도 했습니다. 크게 특별한 일도 없이, 갑자기 그녀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누구보다도 며느리들이 슬피 울었습니다. 문상 온 사람들이 ‘이 집엔 다들 효부를 두었다’는 말들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녀의 남편은 장례를 치르고 나서, 이것저것 아내의 유품을 정리했습니다. 결국 아내가 사 모은 패물을 어떻게 처리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습니다. 그는 생전 아내가 자기 분신처럼 아끼던 물건들을, 며느리들이 잘 간직해 주기를 바랐으나, 어떻게 나누어주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패물의 종류와 값이 다 달라, 세 며느리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기 어려웠습니다. 세 며느리 또한 서로 비싼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눈치여서,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 며느리를 불러 앉혀 놓고 말했습니다. “내가 이것 갖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며느리인 너희들에게 주고 싶다. 그런데 이 걸 어떻게 나누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너희들 셋이서 잘 의논해서 정해 보아라.” 며느리들이 곧 의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큰며느리가 며느리들을 대표해서 입을 열었습니다. “아버님, 패물을 다 팔아서, 그걸 현금으로 똑같이 셋으로 나누어 주세요.” “허허, 그게 진정으로 하는 말이냐?” “네.” 그것은 그가 가장 바라지 않았던 결론이었습니다. ‘고얀 것들, 시어미 패물을 그저 돈으로밖에 안 보는구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언짢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시아버지로서 며느리들에게 한 말을 지키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그 길로 보석상을 찾았습니다. 중년의 보석상 주인이 이리저리 그 패물들을 살펴보더니,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습니다. ‘할아버지, 이거 어디에서 사신 겁니까?’ “음, 내가 산 게 아니네. 죽은 내 마누라가 산걸세.” ‘할아버지, 이 물건들은 다 가짭니다. 저는 혹시 할아버지가 속아서 사셨나 했습니다.’ 순간, 그는 심한 현기증을 느꼈습니다. 울컥, 어떤 서러움 같은 것이 치솟아 올랐습니다. 죽은 아내가 왜 그토록 패물을 사 모았는지, 그제서야 그 이유를 알 것 같아서였습니다.
클린트 W. 머치슨은 돈에 대한 이런 명언을 남겼습니다. “돈은 비료와 같아서 뿌리면 도움이 되지만, 한 군데 쌓아 두면 지독한 냄새가 난다.”
아랍의 억만장자이면서 생전에 남에게 구제를 한 푼도 못해 본, 어느 부자가 죽을 때에야 깨닫고 유언을 남기기를, “내가 죽거든 묘를 쓰지 말고, 알몸으로 넓은 사막에 묻고, 두 손만 내어 보이라. 그리고 이 유서는 장례식날 무덤 앞에서 뜯어보라.”고 했습니다. 장례식날 수많은 인파가 몰려왔습니다. 그리고 유서가 낭독되었는데, 거기에 이렇게 씌어 있었습니다. “사람은 본래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것, 영원한 내 것은 없다. 나는 이 많은 재산을 모으기까지 온갖 고생을 다 했지만, 단 한 푼도 가지고 갈 수가 없구나. 남으로부터 얻어진 것은, 그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내 전 재산은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 내 가족이라도 놀고먹을 수 없다. 한 푼도 남기지 말고 나누어주되, 내가 죽는 날로부터 일주일 이내 시행하라.” 그 부자는 죽기 직전에라도 그걸 깨달았으니 다행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걸 깨닫지 못하고 죽는데 말입니다. 돈을 버는 데 관심을 갖는 것에 비하면, 돈을 쓰는 데는 관심이 적습니다.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땐,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가 아닌, 돈을 어디에, 얼마나, 어떻게 썼느냐를 계산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신앙은 돈과 직결됩니다. 돈 씀씀이가 그 사람의 신앙을 말해줍니다. 돈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가 그 사람의 믿음입니다.
버마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던 메이슨 의사는, 언젠가 호전적인 부족들 사이에서 가르치고 일할 교사 한 사람을 구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회심한 뱃사공이 있어서, 그에게 가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선생 자격으로 가면 매달 4루피를 지급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그때 뱃사공으로 15루피를 받고 있었습니다. 선생 수입보다 뱃사공 수입이 거의 4배나 많았던 것입니다. 며칠간 그 문제에 대하여 기도한 후에, 그 뱃사공이 의사에게 돌아왔습니다. 의사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그래, 어떻게 결정을 했는가? 한 달에 4루피씩 받고 그대는 가겠는가?’ 그때 뱃사공의 대답은 이랬습니다. ‘아닙니다. 선생님, 저는 한 달에 4루피를 위해서는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가겠습니다.’ 뱃사공은 회심한 게 맞습니다. ‘돈지갑이 회개해야 진짜 회개’라는 말이 있습니다. 뱃사공은 돈을 따라가지 않고 사명을 따라간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모시는 회심이 없었다면, 그는 당연히 돈을 따라갔을 것입니다. 내가 무엇을 따라간다면, 사실상 그게 내 주인입니다. 그러니까 회심 없이 교회를 다니는 것은 피곤한 일입니다. 사실상의 내 주인은 따로 있는데, 교회 나와서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불러야하기 때문입니다.
16절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루는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가 예수님더러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우리에게는 주님이지만 그에게는 선생으로 비춰졌던 모양입니다. 상대를 어떻게 호칭하느냐가, 그 사람과의 관계를 말해줍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그 사람은 예수님을 선생으로 여겼기에 궁금했던 것을 물었습니다. 궁금한 것이 있을 때 물어볼 사람이 있는 게 복이긴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구에게 물어야 정확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를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는 정보 홍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웬만한 것은 네이버 박사에게 물어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가 붕어 열 마리를 주었습니다. 매운탕이나 붕어찜을 해서 먹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조리는 해보질 않았습니다.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긴 합니다. 바로 네이버 박사입니다. 네 박사에게 물어 붕어찜에 도전하여 한 끼는 잘 먹을 수 있습니다. 요즘 음식 레시피들이 인터넷에 많이 있습니다. TV ‘고딩엄빠’라는 프로에서도 레시피를 보면서 요리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궁금한 걸 인터넷 검색 기능에 의존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멘토, 곧 자문을 구할만한 사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요즘에는 무슨 문제가 있으면 모임 단톡방에 올립니다. 그래서 각 자의 의견을 활발하게 개진합니다.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면 커피 타임을 갖고 해결을 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은, 제법 고상한 질문을 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에 묻혀서 살아갑니다. 현실이 전부인양 현실을 위해 죽기 살기로 살아갑니다. 예부터도 불로장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지만, 영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차원이 달랐습니다. 일찍이 영생의 문제에 눈을 떴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예수님을 찾아와 묻게 되었습니다. 그는 물어서 답할 수 있는 사람을 제대로 찾았습니다. 그는 영생에 대한 관심이, 오늘 처음으로 든 건 아니었을 것입니다. 또 다른 누구가를 찾아가 물어봤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반드시 답을 듣고자, 예수님을 찾아와 질문을 했던 것입니다. 예수를 잘 믿기 위해서도, 교회를 잘 다니기 위해서도, 질문이 필요합니다. 운동을 할 때도, 처음부터 알아서 하면 잘못된 폼이 생깁니다. 그럼 폼을 교정하는 데, 시간도 걸리고, 힘도 듭니다. 뭐든지 처음에 잘 배우고 제대로 익혀야 합니다. 그 사람이 한 질문이 100점은 아닙니다. 그는 이렇게 물었어야 했습니다.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영생을 얻는 길이 있습니까?” 그런데 그는 선행과 영생을 연결시켜서 생각했고 그렇게 물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자기가 주체가 되어 영생을 얻는 것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1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하냐고 물으니, 계명을 지키라고 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가 질문한대로 대답을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을 듣고 이렇게 답을 해야 말이 통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계명을 다 지킬 수 있습니까?” “계명을 다 지킬 수 있다면 예수님을 찾아오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계명을 말씀하실는지 궁금해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계명을 613가지로 봅니다. 613 계명 중에 248개는 ‘하라’는 적극적인 계명이고, 365개는 ‘하지 말라’는 소극적 계명으로 여겼습니다. 그 많은 계명 중에 어떤 계명을 지켜야 영생을 얻는지 궁금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18-19절 ‘이르되, 어느 계명이오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니라.’
예수님은 그에게 거침없이 답하셨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제6계명입니다. “간음하지 말라.” 제7계명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 제8계명입니다. “거짓 증언하지 말라.” 제9계명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제5계명입니다.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레 19:18절로 모든 계명의 종합입니다. 순서는 달랐지만, 계명 중에 계명인 십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이 계명을 지켜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면, 저는 어렵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영생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계명을 지켜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굳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필요도,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실 필요도 없었습니다.
20절 ‘그 청년이 이르되,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그런데 그는 당당했습니다. 참 좋은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나, 좋은 신앙교육을 받고 자라서였는지,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더구나 그는 청년입니다. 사실 청년이 그렇게 계명을 지키며 사는 게 힘듭니다. 청년이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마귀가, 세상이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그는 아무리 봐도 대견합니다. 그런데 자기 의를 드러내고자 하는 게 엿보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대” 이렇게 말하는 것도 사실 조심스러워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말은 듣기에 따라서는 도발적이기까지 합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좀 거만스럽게 비춰집니다. 예수님이 순간적으로 어떤 생각이 드셨을까 궁금해지긴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이라면 어떤 생각을 하셨을 거 같습니까? 마가복음에 보면, 그 청년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나와 있습니다. 막 10:21절에 보면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라고 했습니다. 역시 예수님이십니다. 청년으로서 영생에 관심을 가진 것도 사랑스럽고, 청년으로서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지켜온 것도 사랑스럽고, 아직도 무엇이 부족한지를 묻는 것도 사랑스럽게 보신 것입니다. 이런 넉넉한 마음이 부럽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넉넉한 마음을 본받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영생에 관심을 보이는, 그의 속마음을 보셨습니다. 비록 거들먹거리기는 하지만, 그래도 영생에 무관심한 사람보다 나았습니다. 그래서 그도 영생을 이끌고 싶어서 사랑으로 대하셨던 것입니다. 잘난체하는 것을 밥맛없는 인간으로 취급하셨다면, 그 다음 말이 필요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21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마태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를, 마가와 누가는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로 바꿔서 표현했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 하고 물을 때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그만하면 스스로를 온전한 신앙, 곧 100점짜리 신앙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에 그는 당황하며 속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아니, 내가 무엇이 부족하지?’ ‘나한테 아직도 부족한 것이 있단 말이야?’ 그가 채 답을 찾기도 전에, 그의 귀에 예수님의 말씀이 들려왔습니다.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이건 그에게 비수였습니다. 그에게는 그것만은 포기할 수 없는 영역이었습니다. 그는 모든 계명을 지켜왔습니다. 대신 재물의 영역을 침범 받지 않는 한도 내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이 그 불가침의 영역을 건드리신 것입니다.
어느 부자 노인이 있었습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모았습니다. 그에게는 장성한 자녀들이 있었지만, 자녀들에게는 한 푼의 재산도 물려주지 않은 채, 홀로 외로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은행에 많은 돈이 예금되어 있었지만, 정작 자신은 겨우 일용할 것만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노인의 일과 중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아침 일찍 은행 문이 열리기가 무섭게 달려가, 통장을 창구에 내밀고 잔액을 조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통장에 찍혀 있는 수십 억대의 잔고를 바라보면서, 얼굴에 만족한 미소를 떠올리곤 했습니다. ‘밤새 내 돈이 잘 있었구나. 이게 얼마지?’ 돈이 그 노인에게 기쁨이요 힘이었던 것입니다. 노인이냐, 청년이냐? 세대 차이는 있지만, 돈을 의지하는 것은 같습니다. 사람은 자기가 의지하는 것을 내려놓는 걸 힘들어합니다. 자기는 그게 전부인양 붙들고 살아왔는데, 그걸 내려놓는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결단입니다.
그 청년은 영생을 얻고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생과 재물을 맞바꿀 수 있는지를 확인하셨습니다. 영생과 재물 중, 어떤 것에 더 가치를 두는지를 확인하고자 하셨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에 그가 반응해야 할 차례였습니다. 그 청년은 순간 흔들렸습니다. 속마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써 태연한 척 했지만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 동안 많은 선생을 만났으나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예수님을 만나 영생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나, 더 큰 고민의 짐을 떠안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제 결단해야 했습니다. ‘재물을 포기하고 영생을 얻을 것인가, 아니면 영생을 포기하고 재물을 지킬 것인가?’ 그런데 그 청년은 불행하게도 후자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22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 청년이 재물이 많아서 포기하기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럼 재물이 많지 않으면 포기하기 쉬울 거라고 생각합니까? 재물에 대한 애착은 부한 자나 가난한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재물은 많고 적음의 문제로 볼 일이 아닙니다. 가치문제입니다. 영생이 재물보다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면, 재물을 포기할 수 있습니다. 영생이 그 정도로까지 가치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절대로 재물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 청년에게 근심만 가득 안겨줬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의 갈급함도, 예수님께 말씀드릴 때의 자신감은 사라지고, 근심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는 지금도 어디서 고민하고 있는지, 아직까지도 예수님께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여러분의 재물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재물의 종노릇은 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나는 십일조를 “나는 재물의 종이 아니다”는 선언으로 봅니다. “내 주인은 오직 하나님이시고, 내가 가진 모든 것에 나는 청지기다”는 고백으로 봅니다. 재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재물의 청지기입니다. 이것을 확고하게 믿을 때, 기쁨으로 십일조를 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는 축복받는 비결 이전에 자기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라는 고백입니다. 나는 온전한 십일조를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믿지만, 그렇다고 복 받기 위해 십일조하지는 않습니다. 십일조하면 복을 받지만, 그 복은 결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펌프질하기에 앞서 붓는 마중물 같은 것입니다. 물은 마중물을 붓고 열심히 펌프질을 할 때 나오는 것이지, 마중물을 펌프에 부었다고 물이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은 재물로 사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은 자는 재물을 제 맘대로 쓰지 않습니다. 자신이 재물의 주인이 아니란 걸 알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주인이 맡긴 재물을 관리하는 청지기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는 자기에게 맡겼던 재물에 대해, 주인과 결산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23-24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예수님은 청년과의 대화를 지켜본 제자들에게, 충격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게 대체로 어렵다는 말이 아닙니다. 불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어디 가능한 일입니까?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습니까?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충격을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25절 ‘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제자들은 몹시 놀랐습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부자들이 천국에 못 간다면, 그럼 누가 가겠느냐는 질문입니다. 제자들은 부자는 하나님께 복 받은 사람이니까, 당연히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호하게,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시니, 제자들이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렇게 나올 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설명을 하셨습니다.
26절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구원을 사야 한다면,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의 노력으로 구원을 따야 한다면, 나는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구원은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하여 우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집니다. 우리는 가족 구원을 위해, 이웃 구원을 위해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내가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다 믿어도 그 사람은 안 믿을 거 같았는데, 그 사람이 믿고 후에 목회자나 선교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김익두는 6살에 서당을 다닐 정도로 무척 총명했는데, 과거에 낙방했고 그 충격으로 아버지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친구에게 보증을 섰다가, 전 재산을 날리고 매일 술타령을 하다가, 결국 유명한 깡패가 되었습니다. 당시 “오늘 김익두를 만나지 않게 해주세요”가 기도제목이었다고 하면 말 다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선교사님에게 전도지를 받고 교회에 나갔고, 회심하여 후에 유명한 부흥사 목사가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다 믿어도, 김익두는 안 믿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선교사가 건넨 전도지가, 깡패 김익두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입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의 문제는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나는 그저 복음을 전하기만 하면 됩니다.
27절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의 굳었던 얼굴 표정이 펴졌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희망을 보았습니다. 자신들은 지금 가진 게 없어서였습니다. 제자들은 그 부자 청년이 움켜진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른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를 따랐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부친과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주를 따랐습니다. 마태는 세관이라는 직장을 버리고 주를 따랐습니다. 모든 제자들이 그렇게 주를 따랐습니다. 그럼 자기들은 무엇을 얻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빙그레 웃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29절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영생을 상속하시겠다고 했습니다. 가난하다고 영생을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가진 것을 버렸다고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 때문입니다.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나를 따르는 너희도” 우리가 믿음을 지적 동의로 잘못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에게는, 영생 외에도 약속하신 것이 있습니다. 현세에서 여러 배를 받는 것입니다. 마가복음에 보면, 여러 배를 현세에서 받는 것임을 알려줍니다. 막 10:29-3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예수를 따르면 영생을 상속받습니다. 주를 위해 버린 것의 여러 배를 현세에서 받습니다. 그 외에도 사역자들이 받는 특별한 보상이 있습니다.
28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구원에는 동등성의 원리를, 상급에는 차별성의 원리를 적용하십니다. 구원은 은혜로 받는다는 면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등합니다. 상급은 충성한대로 받는다는 면에서, 모두에게 동등할 수 없습니다. 제자들이 속으로 ‘그러면 그렇지’ 하고 쾌재를 부를 때, 예수님이 불쑥 한 마디를 던지셨습니다.
30절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왠지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예수 믿으라는 말로 들립니다. 먼저 믿는 자들에게는 긴장하라는 말이고, 나중 믿은 자들에게는 분투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된 자는 끝까지 먼저 되기를 위해 힘써야 합니다. 나중 된 자는 끝까지 나중 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생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그분을 안다는 것은 그분과 교제를 나누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려면, 그분의 말씀을 알고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믿는다고 입으로는 고백하지만 말씀대로 살지 않으면, 그의 믿음은 거짓 믿음이요, 죽은 믿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할 것처럼 보였으나,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요구를 듣고 나서, 망설이다가 결국 주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재물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도구가 되어야지,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재물로부터 자유하지 못하면, 재물의 노예가 됩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합니까? 그렇지 않다면 언젠가는 주님 곁을 떠나게 됩니다. 참된 신앙은 예수님을 삶의 우선순위로 삼는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은 우선순위가 어디에 있습니까? 주님입니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제라도 그 자리에 주님을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온 땅을 두루 감찰하시면서, 주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을 찾으십니다. 새에게 날개는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날 수 있고, 배는 그 돛이 무거우나, 그것 때문에 항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는 짐이 되나,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천국으로 향하게 만듭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며,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을 받으며, 상급을 받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 기 도 >
하나님 아버지, 이 세상이 아무리 좋아보여도, 하나님 나라와는 비교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썩지 아니할 영원한 것을 위해, 썩어질 것을 버릴 줄 아는 지혜로운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주님의 가르침을 날마다 순종하고, 경험하고 체험하는 중에, 청지기로서 사명을 잘 감당하므로, 더 큰 복을 받아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남은 삶의 모든 것을 주님을 위해 드릴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는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