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왕조실록(87) 고종 2 - 전운이 감도는 정국
고려에서 반응이 없자 1216년 8월 을축일에 거란의 장수 아아걸노가 군사 수만 명을 이끌고 고려를 공격합니다. 거란병이 영덕성을 무너뜨리면서 계속 남하해 내려오자 고려 조정은 군대를 총동원하여 이를 막아내려 하지만 거센 물결과도 같이 밀려오는 거란군의 기세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게다가 거란군은 유족들이라 모두 처자를 데리고 왔으며 이들은 산과 들을 누비고 다니면서 알곡을 거두고 소와 말을 마음대로 잡아먹는 등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초토화가 되곤 하였습니다. 병력을 보충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고려군은 처음에는 승리를 하는 듯 하였으나 수만 명의 거란군을 물리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거란군은 야밤을 이용하여 청천강을 건너 서경으로 몰려왔습니다. 관군은 위주성 밖에서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천여 명의 전사자만을 남기고 패퇴하게 되었고 서경 성 밖까지 전진한 거란군은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죽이고 얼음을 이용하여 대동강을 건너서 서해도까지 쳐들어가더니 결국 황주마저 도륙하게 됩니다. 거란군은 안양도호부를 함락하고 원주에 이르러 고을 사람들의 저항에 막혀 잠시 주춤하게 되지만 이내 성을 함락 시키고 맙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은 고려군이 양근 지평에서 승리를 거두고, 맥곡의 박달고개에서 대승을 거두자 거란군은 궁지에 몰리게 되고 관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계속 밀어 붙여 거란군을 강동성으로 몰아넣었습니다. 때맞추어 몽고의 합진과 찰라 두 원수가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와 동진의 만노가 보낸 2만명의 군사와 함께 거란을 토벌하기위해 강동성으로 진군하여 드디어 1219년 정월 총공격으로 거란군을 멸망시켜버리니 2년여에 걸친 거란과의 전쟁이 드디어 끝이 나게 되었습니다.
거란과의 전쟁이 끝나자 몽고에서는 10여명의 사신 일행을 보내 강화를 요구합니다. 말이 강화이지 사실은 몽고의 속국으로 만들겠다는 저의가 내포된 행동이었습니다. 고종은 시어사 박시윤을 보내 그들을 맞이하게 하는데, 몽고의 사신들이 관아 밖에서 머뭇거리며 들어오지를 않고 고려왕이 직접 나와서 자신들을 맞아야한다고 버팁니다. 우여곡절 끝에 사신들은 안으로 들어 왔으나 고종이 그들을 접견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맙니다.
몽고의 사신들은 털옥과 털관에 활과 화살을 메고 왔는데 그들은 올 때 복장 그대로 고종의 손을 잡으면서 품에서 꺼낸 편지를 건넨 것입니다. 고종은 사색이 되었고 이를 보다 못한 최첨단이 울면서 “어찌하여 이 더러운 오랑캐를 왕에게 접근시키겠는가? 왕의 신변에 불측지변이 생긴다하더라도 손을 쓸 수가 없을 것이다” 하고 항의를 해보았지만 몽고의 사신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이처럼 몽고는 처음부터 고려를 대하는 태도가 고압적이고 야만스럽기 짝이 없었습니다.
2월 기미일에 몽고의 사신 합진 등이 몽고로 돌아가는데 수하 41명을 남기면서 “너희는 고려 말을 배우면서 내가 다시 올 때까지 여기서 대기하라” 하고 떠납니다.
이 때문에 몽고 사람들이 다시 온다는 소문이 무성하게 돌자 고려 정국은 긴장감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러던 차에 동북면의 병마사가 몽고와 동진국이 군사를 보내 진명성 밖에 주둔 시키면서 공납을 독촉한다는 보고가 올라오게 됩니다. 드디어 몽고와의 전쟁의 기운이 고조되는 상황에 이른 것 입니다.
고려왕조실록(88) 고종 3 - 피할 수없는 몽고와의 전쟁
1219년 9월 임자일에 최충헌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최우가 권력을 이어받게 됩니다. 고종으로부터 왕씨 성까지 받을 정도로 부귀영화와 권력을 마음껏 주무르던 최충헌도 흐르는 세월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으니 병이 깊어 세상을 떠난 그의 나이 71세였습니다.
권력을 물려받은 최우는 교정별감이 되자마자 자신이 축적하고 있던 금은보화를 고종에게 바치고, 부친 최충헌이 빼앗은 토지와 금품들을 원래의 임자들에게 돌려주는 선심을 배풀고, 권력이 없거나 가난한 선비들 중에서 유능한 인재들을 선발하여 등용하기도 하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이규보와 최자입니다.
1221년 8월 기미일에 몽고의 사신 저고여<著古與, 혹은 착고여(着古歟)>가 일행을 이끌고 고려에 왔는데 이들은 일행 21명이 모두 대전에 올라가 몽고왕의 명령을 전달하겠다는 무례한 요구를 합니다. 옥신각신 실랑이 중에 결국 8명만이 대전에 올라가게 되었는데 기분이 상한 착고여는 무리하게 공물을 요구하며 불손한 태도를 보입니다.
그가 요구한 공물은 수달피 1만장부터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물량을 요구하였고, 몽고왕의 편지와 공물 리스트가 적힌 문건을 전달하고 대전에서 내려가면서는 제각기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고종 앞에 던졌는데, 놀랍게도 그것은 전에 선물로 주었던 거친 주포(紬布)였습니다. 마음에 안 들었던 선물이었다는 무례하기 짝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연회에도 참석하지 않고 그들이 올 때 몽고의 원수들인 찰라와 포흑이 사사로이 요구하는 편지를 보이며 추가로 더 많은 수달피와 공물들을 요구하였습니다.
9월초하루가 되자 몽고의 사신 저가가 또다시 고려에 온다는 기별이 있자 조정은 굴복파와 전쟁파로 나뉘어 논쟁을 벌였으나 어쩔 수없이 약한 고려가 비위를 맞추면서 때를 준비하자는 의견이 우세하여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게 됩니다. 고려가 몽고와의 전쟁을 차근차근 준비하는 사이에도 몽고는 수시로 사신을 보내 공물을 가져가곤 하였는데, 그들은 가져간 공물 중에서 수달피만 제외하고는 다른 물건들은 버리고 가버리곤 하였습니다.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잔뜩 요구해 놓고는 압록강에 버리고 가버리는 그들의 행태에 분노를 느낀 고려 조정은 본격적인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러한 상황 중에서 고려와 몽고의 28년간의 전쟁의 시점이 된 사건이 발생하는데, 몽고의 사신 착고여가 다시 일행 열명과 고려에 도착한 것은 1224년 11월 을해일 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번에도 압록강을 건너가면서 고려의 예물 중에서 수달피만 가져가고 나머지는 압록강 가의 들판에다 버려버립니다. 그런데 압록강을 건넌 후 몽고로 가던 착고여 일행이 중도에 도적을 만나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는데, 몽고에서는 고려가 저지른 짓이라고 덮어 씌웠고, 결국은 이일로 국교가 단절되기에 이릅니다. 물론 고려에서는 전쟁을 불사한 조치였습니다. 드디어 28년의 길고긴 몽고와의 전쟁이 시작되려는 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