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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년법은 3,500년 전 제정한 구약시대의 '율법'으로 폐기되기보다 지금도 지키고 누려야 할 생활복음으로, "복음 중의 복음"입니다. 이 글은 지구촌 인류가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물론이고, 희년법도 준수하여 복을 받아야 할 내용들입니다. 많은 분들이 읽을 수 있도록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희년법의 세 가지 내용
이스라엘 백성들, 유대 종교는 바알 신을 섬기고, 희년법을 버려서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면 그 희년법이 무엇일까요? 희년법은 우리 집과 이웃집이 하나님이 주신 기업에서 경제적 문제가 없이 평안을 누리며 살게 하는 법입니다. 성경은 이를 두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각자 평안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합니다(왕상 4:25, 미 4:4). 이 말씀은 죽어서 천국에 가자는 말이기보다 살아 생전에 하나님이 주신 복과 평안을 누리며 살자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내가 가진 믿음으로 죽어서도 천국은 갈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제도를 거룩한 생활을 위해 제정한 레위기 생활 규례에 넣어놓고 있습니다.
거룩한 생활 규례를 알려주는 레위기는 총 27장으로 구성됩니다. 1장에서 10장까지는 제사법입니다. 11장부터 정결한 생활을 위해 음식법, 건강법, 청결법, 속죄일 행사 등이 17장까지 있고, 18장과 19장이 윤리 규범, 21장, 22장, 24장은 제사에 관련된 보충 규정, 23장은 3대 절기와 7대 절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25장은 필자가 중요시하는 희년법이 들어있습니다. 그다음 26장은 순종과 불순종에 대한 징계와 상급, 마지막 27장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 규정과 지금도 지키고 있는 십일조 제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희년법은 생활에서 이 규례를 지키면 정신계는 지은 죄가 사해지고, 물질계는 자유함을 얻어서 평안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희년법은 지키기 어려운 것이 아니며, 지켜서 복을 받으라고 제정하여 주신 것입니다(신 30:11~16).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특히 전통 유대인들은 레위기가 정한 다른 법들은 머리카락을 세듯이 지키면서도 레위기 25장에 있는 희년법만은 지키지를 않았습니다. 그들이 만든 613개의 율법에도 기업 무르기는 아예 관련 조항 자체가 없습니다. 참으로 희한합니다. 레위기 생활 규례를 집행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도 앞에 나오는 제사법은 제사에 관한 직무이므로 당연히 지키고, 십일조는 그들의 생활과 직결된 경제문제이므로 잎과 뿌리의 수를 세어가면서 지키고 있지만, 같은 레위기에 있고, 백성들의 경제생활에 관련된 희년법은 지키지 않았습니다. 가르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기업이 없으므로 지킬 필요가 없었고, 그래서 그런지 백성들에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율법인 희년이 언제인지, 기업 무르기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이 오늘날 신앙공동체도 비슷합니다. 오늘날 신앙공동체도 신앙만 필요하고 경제활동은 필요가 없으므로 기업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공동체는 레위기 규례가 정한 제사(예배)와 십일조는 알거나 지키지만, 생활공동체가 필요한 희년법과 기업 무르기는 성경이 정해 놓은 용어부터 잘 모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있지만, 사람들에게 가장 무시당하고 거부당해 온 법이 바로 희년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횃불언약(창 15:12~18)에서부터 637년간 13회 희년 주기를 세시면서 주전 1445년 출애굽 첫 희년을 계획하여 오셨습니다(출 40:1, 레 25:8,9, 민 1:1, 13:20).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해로부터 다시 1,470년간 30회 희년을 세어서 자기 기업인 베들레헴에서 출생하여, 30세에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주후 26년 7월 10일, 날짜까지 지켜가며 나사렛 회당에서 그 희년을 직접 선포하셨습니다(눅 4:16~19). 이처럼 하나님, 성령님, 예수님은 총 2,107년간 43회의 희년 주기를 날짜까지 세세히 세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희년 주기를 70 이레에 연동(이연)하여 미래의 시간도 계속 세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무시, 거부를 당해온 희년법은 3,500년 전에 사용했어야 할 구약시대의 율법이기보다 이제부터 앞으로 쓰이게 될 온전한 복음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 희년법은 지금도 생활경제에서 교통신호등처럼 지켜야 할 생활과학으로 살아 숨 쉬는 사람들에게는 “복음 중의 복음”으로 세상 끝날까지 존재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러한 희년법은 크게 보면 세 가지로 역할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먼저 사람이 생활에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제의적 역할, 그다음은 생활에서 필요한 환경적 역할, 그리고 마지막이 사람과 사람 간에 땅과 물질을 두고 지켜야 할 경제적 역할, 이렇게 세 가지입니다.
희년법의 제의적 역할
제의적(祭儀的) 역할은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나 예배에 관한 내용을 말합니다. 레위기는 앞에서 제사에 관한 규정이 1~10장이나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 대한 경배 의식으로 거룩하게 지켜야 할 안식일에 대해서도 여러 구절 나와 있습니다(레 19:3,30, 23:3,38, 24:8,26:2). 그러므로 경제생활을 말하는 희년법에 다시 제의적 역할을 반복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물질을 다룬 경제법이고, 희년법이라도 제의적 역할을 찾아보면 안식일의 연장선에 있는 안식년과 희년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시내 산에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안식하게 하라(레 25:1,2)
하나님은 안식년법과 희년법을 시작하는 초두에 먼저 땅을 여호와 앞에서 안식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경제법의 시작을 쉬는 것부터 먼저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십계명에서 안식일의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처럼(출 20:11) 안식년의 주인도 하나님이심을 천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49 안식년 다음 해 돌아오는 희년에도 안식하라고 합니다(레 25:11,20). 희년은 다른 해와 구별되는 거룩한 해라고 합니다(레 25:21). 희년도 역시 안식일, 안식년처럼 하나님께서 성별한 해입니다.
그다음 안식년은 땅을 쉬게 하는 해입니다. 본문은 “땅으로”가 아니고 “땅이”라고 하여 땅이 주도적으로 쉰다는 표현입니다. 곧 안식년은 사람이 쉰다기보다 땅이 여호와 앞에서 쉬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인정하여 예를 올리고, 창조질서를 지킵니다. 땅이 여호와 앞에서 안식이라는 혜택을 누리는 것입니다. 사람은 땅이 쉬기 때문에 수동적으로 쉬는 것입니다. 물론 안식년은 사람도 쉬면서 하나님께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6년간의 노동에서 1년을 쉬면서 하나님과 교감하며 영적인 것을 충전해야 합니다.
안식년은 땅이 쉬면서 하나님께 만물이 찬양을 올리는 것이며(시 148:5~10), 하나님이 소유자가 되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시 24:1)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안식일, 안식년, 희년은 하나님이 천지창조의 때부터 운영하여 오신 7의 서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7의 안식 주기는 7 안식일, 7 안식년, 그리고 7 안식년이 7회 반복된 다음 해 희년으로 안식의 주기가 종결되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7의 주기로 반복되는 희년 주기를 따라 490년씩 단계를 지우며, 70 이레와 2,107년의 구속사를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이어왔음을 보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희년 주기와 70 이레를 정확하게 계수하여 희년을 선포함으로써 안식일과 희년을 성취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안식일을 엄격한 금기일로만 지키려는 유대인들에게 질병을 치유하고(요 5:9), 배고픈 제자가 이삭을 잘라 먹게 하고, 성소의 진설병을 먹은 예를 들어서 안식일의 복음적 의미를 가르쳐 주었습니다(마 12:1~5).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안식일의 주인이며,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고 하십니다(막 2:27). 이러한 안식일의 복음적 의미는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7 안식년 이후 돌아오는 희년에도 같은 의미로 적용이 된다고 보아야 합니다.
이와 같이 안식년은 하나님, 땅, 그리고 사람이라는 삼수로 구성됩니다. 안식년의 실체가 주인이신 하나님, 안식의 대상인 땅과 사람, 이렇게 세 개의 개체로 존재합니다. 이것은 경작년 생산활동에도 하나님, 땅, 사람이 생산의 실체로 존재하고 운영되게 됩니다. 희년법은 쉼을 통하여 하나님을 경배하는 제의적 역할에서부터 하나님, 땅, 사람이라는 공간의 3요소와 7이라는 시간의 서수로 자연계와 세계를 운영하는 생활 시스템입니다.
희년법의 환경보호적 역할
제 칠년에는 ...너는 그 밭에 파종하지 말며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레 25:4) 네 육축과 땅에 있는 들짐승들이 다 그 소산으로 식물을 삼을지니라(레 25:7)
안식년은 6년을 경작한 땅은 7년이 되면 쉬게 합니다. 이 해는 기업을 다스리는 자가 땅을 다스리지 못하게 하여 경작을 금지합니다. 사람은 일을 하면 몸이 피곤합니다. 이런 경우 사람의 몸은 쉬어주어야 피로가 회복됩니다. 그래서 새로운 에너지를 얻어서 다시 정상적인 활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땅은 6년간 사람과 함께 경작 활동을 하였으면 경작으로 소실된 자연력의 회복을 위하여 쉬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7년째는 땅을 쉬게 합니다. 이러한 땅의 안식은 자연과 환경의 보호를 위해서 필수적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분별한 생산활동으로 인하여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다는 것은 지구촌 인류가 공감하고 있는 부분입니다. 그래서 이를 고민하며 해결책으로 “세계 기후 협약”을 맺거나 장기로는 “탄소 제로”를 표방하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공업화가 되기 이전인 농경시대부터 생산활동을 정지하고 자연과 환경을 보호하는 제도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을 하고 생활에 필요한 율법을 제정하면서 이미 3,500년 전에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환경 문제를 고려하여 안식의 법과 희년법을 만들었습니다. 일곱째 날, 일곱째 해, 그리고 일곱의 희년 주기로 생산을 멈추고 땅과 자연을 쉬게 하여 제자리로 되돌리는 방법을 제도화했던 것입니다. 이런 환경보호를 위한 제도 하나만 보아도 희년법은 사람이 세운 제도보다 선제적이며, 탁월합니다. 안식년의 의미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땅을 쉬게 하는 안식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이 사람뿐 아니라 자연과 천지 만물도 포함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롬 8:19~22).
그다음 안식년에도 땅은 스스로(독자적인) 생산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레 25:5,6)을 알려줍니다. 안식년은 사람의 노동 투자와 자본 투자를 0으로 정지시켜 놓고 "땅이 스스로 생산물이 내고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해입니다. 신앙적(영적, 정신적) 확인은 물론, 경제적 확인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만들어가는 고질적인 병폐, 부동산 문제나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금융 문제와 물가상승 등의 경제문제의 해법은 "땅이 스스로 생산물을 내는 경제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안식년 산물은 들짐승들에게도 제공해야 합니다(레 25:7). 땅을 단순하게 쉬게 하는 것은 소극적 환경 보호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식년에 땅이 스스로 낸 토지생산물을 들짐승을 위해 제공하는 것은 생태계 전체를 보호하는 적극적인 환경정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식년은 사람이 쉬기보다 땅이 쉬는 해입니다. 그런데 간혹 이 안식년법을 따라 목회자나 공직자가 쉬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도 안식년을 누릴 수는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안식년이 되면 쉬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는 데 원래 쉬게 했어야 할 땅에 대해서는 안식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것 하나만 보아도 사람은 안식년에 대한 이기적인 모습이 드러나고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통을 당한 70년의 포로 기간이 땅이 안식을 누리는 기간이라고 합니다(대하 36:21). 하나님은 이처럼 안식년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하여 직접 징계를 내리기까지 하십니다.
그리고, 안식년은 구약의 율법인데 복음시대에 와서도 지켜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있습니다. 복음시대에는 율법과 제도에 매여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안식일(土)은 신약시대에 오면 하루를 바꾸어서 주일(日)에 지킵니다. 일요일에 업무가 필요한 목회자나 특수직 종사들은 월요일에 쉬기도 합니다. 그래도 엿새는 일하고 일곱째 날은 쉬라는 십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봅니다. 그러므로 땅을 쉬게 하는 안식년도 그렇게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을 것이고, 내용적인 안식년을 지켜야 합니다.
다만, 경작과 경제활동으로 땅과 자연계가 훼손되어 있다면 그것은 신약시대에도 안식의 법을 내용적으로 위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고심하고 있는 환경 문제는 3,500년 전에 제정한 안식년의 의미를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땅과 자연(천지 만물)을 무분별하게 혹사한 탓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 주신 구약의 안식년 법은 신약시대에도 폐기되기보다 그 가치와 의미가 살아 있고, 삶에서 순종해야 할 제도입니다.
경제활동에서는 농장도, 공장도, 서비스업도 생산에만 집착하지 말고, 땅(자연 생태계)을 생산의 주체로 인정하고 보존, 보호하려는 생활 양식이 필요하고 그렇게 경제를 운영을 해야 복음시대에도 안식년법을 내용적으로 지키는 것이 됩니다.
이 외에도 안식년은 땅이 쉬는 것 외에 몸이 쉬고, 종은 속량되고, 부채가 면제되어 굴종과 억압이 사라지는 해입니다. 이것은 안식년의 환경적 역할이기보다 다음 말하는 경제적 역할에 속합니다.
희년법의 경제적 역할
희년법의 경제적 위치
희년법의 경제적 역할은 사람의 경제적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기 위해 만든 제도입니다. 그러므로 희년법이 세 가지 역할 중 경제적 역할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희년법에 대하여 제의적 역할이나 환경적 역할은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는 편이지만, 경제적 역할은 거의 모두 잘 모릅니다. 알아도 희년법은 물질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본질이 아니라면서 제대로 인정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희년법은 사실상 폐기된 율법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필자는 희년법에 대한 이런 관점이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대한 보편적 실수 중 가장 크고 중대한 실수라고 보고 있습니다.
레위기 희년법은 경제생활에 관한 내용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경제적 해석을 먼저 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희년법에 대하여 이런 경제적 해석은 염두에 두지도 않고, 땅과 물질에 대한 신앙고백만 하고 있고, 신학적 검토만 해 왔습니다. 물질계에서 다루고 해결해야 할 주제를 종교계나 정신계의 틀 안에 가두어놓고 다루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희년법에 관심을 가진 자들도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희년법을 경제적 접근보다는 윤리적, 규범적 접근만 하고 그치는 지극히 초보적인 자세와 한계를 보여왔습니다.
그래서 희년법은 오히려 사유재산제나 시장경제를 경시하거나 무시하고, 정부기능을 중시하는 진보층 그룹들이 그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왔습니다. 진보층 그룹들은 토지를 국가나 단체가 공유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거나 사유화를 해도 시장규제로 강제하고, 세금도 높게 매겨야 한다는 주장들이 그렇습니다. 이에 대해 보수층은 시장원리로 해야 한다면서 수요공급의 원칙을 해결책으로 들고 나옵니다. 그래서 부동산가격이 급등하면 주택이 부족하여 집값이 오른다는 어설픈 주장으로, 곳곳에 재건축, 재개발 붐을 일으키며,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고 집을 대량으로 짓습니다.
그러다가 지은 집이 분양을 하지 못하여 건축업이 도산 위기에 처하고, 금융계는 몸살을 앓습니다. 비공식 정보이지만, 대구지역만 해도 부동산가격 급등기를 맞았던, 최근 3년 동안 연간 1만 5천 채의 주택이 필요한데 총 7만 여채를 지었거나 짓고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원의 낭비입니다. 우리는 이런 실수를 1970년부터 50년간 5회를 반복하는 중입니다. 한두 번이면 시행착오로 볼 수 있지만, 50년간 5회나 거듭하는 실수는 인간의 무지와 오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 대구지역 아파트 분양 및 분양 예정 : 21년(17,719 가구), 23년(22,386가구), 23년(30,705가구), 24년(미정), 대구지역 아파트 공급량은 지난 23년간 연평균 14,476 가구이다(자료 출처 : 미확인 자료).
그런데 이러한 주장들은 진보나 보수의 구분 없이 한결같이 저지르는 실수가 토지의 물리적 성질이 시장기능에 미치는 영향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부동산가격이 오르면 진보층은 수요억제, 보수층은 공급증대라는 처방책만 낼 뿐입니다. 그래서 토지시장은 진보층이 정책을 수립하면 고규제와 고세금 정책을 펴서 토지와 부동산시장을 얼어붙게 합니다. 보수층이 정책을 수립하면 시장을 풀어버리기 때문에 부동산시장은 다시 고삐 풀린 망아지가 뛰어다니듯이 투기꾼이 생겨나고 가격 급등락이라는 주기적 파동이 일어납니다. 그에 따른 금융문제와 사회 갈등도 지속적으로 발생합니다. 부동산시장의 이런 접근 방식은 50년간 부동산가격의 파동 주기를 따라 5회나 똑 같은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식' 반복입니다.
희년 경제법의 9가지 기초 오해
경제를 다룬 희년법을 제대로 보지 않았기 때문에 희년법은 용어 하나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레위기 희년법 25:1~28에서 거래와 관련된 세 가지 용어에서 각각 세 가지 내용에서 오해가 있습니다. 그래서 희년법은 용어에서 총 아홉 가지의 내용 오해가 있습니다. 희년법 대한 전반적 오해는 이보다 더 많지만, 세 가지 용어에 아홉 가지 내용만 간추린 것입니다.
(1) 먼저 거래 대상물인 땅에 대한 세 가지 오해입니다. ㉠ 땅은 히브리어로 “에레쯔”이며, 이것은 영어로 “earth”에 해당합니다. 땅이 지구라는 단어와 어원이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땅을 울타리 안에 잇는 밭(field)이나 운동장(ground) 정도로 생각합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노동이 없는 땅은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space, 야생의 흙덩어리)으로 봅니다. 자본주의도 땅보다는 자본이 필수이고 우선이라면서 땅을 사람이 만든 자본에 예속시켜 버립니다. 그래서 경제활동에서 값이 작아지는 자본재와 값이 커지는 땅의 물리적 성질이나 기능 차이를 기초에서 식별을 하지 못합니다. ㉡ 희년법에서 땅은 주어로 많이 쓰입니다, ‘땅은 쉬게 하라(레 25:4)’. ‘땅은 산물을 낸다(레 25:19)’. ‘땅은 팔리지 말라(레 25:23)’ 등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땅을 사람이 팔고 사는 상품이나 가지고 다니는 물건처럼 목적어로만 생각하고 사용하기를 좋아합니다.
㉢ “땅”은 항상 단수로만 쓰입니다. 그래서 땅은 하나뿐인 지구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땅에 대해서 토막을 내어서 팔고 사는 물건이나 상품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토막을 내려고 해도 토막이 나지 않으며, 또 토막을 내어서도 되지 않는 유일한 물질, 하나의 지구라는 뜻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에서 족보를 이을 “씨(제라)”를 단수로 취급하는 것과 같은 영적인, 현실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씨가 단수인 것은 씨를 이을 믿음은 하나이며, 앞으로 이 씨를 따라서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태어난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와 같이 땅이 단수인 것은 땅은 오직 하나님만이 만들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며, 경제적, 법적 소유권도 하나님에게만 있다는 뜻입니다. 거기에 하나뿐인 땅이 사람의 생존과 자유를 보장하여 주는 유일 수단이며, 미래에도 땅은 믿음을 가진 자만이 얻게 될 기업이기 때문입니다.
(2) 그다음 레위기 25:15,16에서 팔다라는 단어에 대한 세 가지 오해입니다. “팔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동사 “마카르”입니다. ㉠ 그런데 희년법에서 “팔다”라는 단어는 주로 수동태로 쓰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능통태로 생각합니다. 번역도 수동태를 능통태로 오역합니다. 그래서 룻기 4:3은 팔려있는(수동태) 땅이 팔려는(능동태) 땅이 되어서 전혀 반대의 번역이 나와버렸습니다. ㉡ 그리고 “땅을 팔다”라는 단어는 “땅을 임대하다”라는 단어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거래의 내용을 보면 팔고 사는 것이 아니고 빌리고 빌려주는 임대차를 뜻합니다.
㉢ 그다음 희년법에서 “팔다”라는 단어가 말하는 거래는 조건이 붙습니다. 우리가 상품을 팔고 사면 거래에 조건이 붙지 않지만, 땅은 거래에서 무르기나 날짜, 기간, 변제 등에서 적어도 두 가지 이상의 조건이 붙습니다. 그래서 이런 조건을 이해하면 땅은 팔고 사는 것이 아니라 빌리고 빌려주는 임대차 거래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3) 그다음 레위기 25:24의 거래에서 나타나는 단어, "무르기"에 대한 세 가지 이해 부족입니다. ㉠ 땅이 팔릴 때 판 사람에게 무르기를 할 수 있는 우선권이 주어져 있습니다. 땅이 거래되려면 무르기 조건이 붙어야 합니다. ㉡ 무르기는 시간이 지나면 기계나 자동차처럼 가격이 계속 작아집니다. 그래서 만기가 되면 가격이 0이 되어 땅이 자유를 얻어서 다시 원주인에게 돌아옵니다. 부동산 문제는 이렇게 가격이 시간 흐름에서 작아지거나 커지지 않아야 해결이 가능합니다.
땅값이 우리가 보다시피 자꾸 커지면 사람은 이 문제를 인위적으로 해결하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땅값이 커지면 좋아하지만, 실상은 그 값이 사람에게 쓰지 못하는 값이기 때문에 인간 스스로 매겨놓은 벌금이 되어서 우리에게 되돌아 옵니다. 이것이 바로 인플레이션이고, 주기적 금융 불안으로 나타납니다.
㉢ “무르기”는 발생한 땅값은 값을 치러서 없애버리는 절차입니다. 그러므로 땅값은 시한부 거래이든, 영구거래이든 없애버려야 문제가 해결된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희년은 땅값과 이 값이 일으킨 빚이 사라져야 오개 됩니다. "무르기"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원형이 “게울라”이며, 명사로 “고엘”, 동사로 “가알”입니다. 이 단어는 노예로 잡혀있는 사람을 자유하게 할 때 대속자르르세워 “값을 치러서 풀어준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속량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실 때, 십자가의 희생으로 죗값을 치러주는데 이때 “값을 치르다(요 19:30)”는 말이 희년법의 기업 무르기에 서 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땅값을 없애버리는 기업 무르기를 경솔하게 여겨서는 아니됩니다.
(1) 땅이라는 단어에서 우리가 잘 모르는 ㉠ ㉡ ㉢의 세 가지 뜻이 있고, (2) 팔다의 의미에서 ㉠ ㉡ ㉢의 세 가지, (3) 무르기에서 ㉠ ㉡ ㉢ 의 세가지 이렇게 총 아홉 개의 뜻이 토지 거래와 토지 금융이 가진 본질적인 특성입니다. 그래서 희년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토지가 가진 물리적 특성과 이 아홉 개의 뜻을 바로 알아야 희년법에 대한 경제적 해석과 이해가 가능합니다.
희년법에 들어있는 시장의 세 가지 유형
희년법은 팔고 사는 거래물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거래의 방법과 조건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거래 방식은 세상에 어느 문헌에도 없는 독특한 내용입니다. 이 거래 방식은 물질이 가진 기본 성질, 곧 창조질서에 맞추어 놓은 과학이며, 합리적인 내용입니다. 필자는 이 세 가지 거래 방식은 지금도 우리가 생활에서 반드시 지켜야 교통신호등과 같은 것이라고 늘 말하고 있습니다.
(1) 현재 실물시장 => 자유 소유, 자유 거래(푸른 신호등)
너는 육 년 동안 그 밭에 파종하며 육 년 동안 그 포도원을 가꾸어 그 소출을 거둘 것이나(레 25:3)
현재 실물은 레위기 25:3에서 다스려(가꾸어) 거둔 물질을 말합니다. 내가 힘써 일하여 얻은 수확물이므로 “내 것”입니다. 이것이 사유재산제의 기초입니다. 내가 일하여 거둔 “내 것”이므로 이 물질은 자유롭게 팔고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유시장경제의 기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물질 또는 실물은 생산된 재화나 서비스를 총칭하는 말입니다. 농업에서는 농산물이며, 공업에서 공산품입니다. 교육, 문화, 스포츠, 종교 업무의 서비스도 여기서 말하는 실물입니다. 여기서 실물은 현재 생산된 실물입니다. 길을 가다가 노다지를 주어도, 등산하다가 산삼을 발견하여 횡재를 했어도 이것은 생산된 실물입니다. 이 실물은 사람이 사용하면 소비되어 사라지는 성질을 가집니다. 서비스는 생산 즉시 소비되어 사라지고, 채소와 음식물은 빠른 시일 내에 소비해야 합니다. 자동차는 10년 타면, 길어도 20년을 타면 수명이 다하며, 건물도 50년, 길면 100년이 지나면 수명을 다하여 사라집니다. 더 오래 지속하려면 수리를 계속해 주어야만 제 기능을 발휘합니다.
이런 물질은 모두 실물이고, 이 실물 자체를 사람이 사용할 수가 있습니다. 이 실물은 사람이 생산할 수도 있고, 사용으로 소비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이 경제활동으로 할 수가 있는 부분입니다.
성경에는 약속의 땅에 들어가서 토지를 개별적으로 분배를 하였습니다. 이것은 희년법이 집산체제보다 개별생산체제를 우선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나라가 독립한 1900년대부터 조직한 키부츠(공유체제)나 모샤브(조합형)는 집산체제에 가까운 생산조직입니다. 그러나 성경 희년법은 집산체제가 아니고, 개별생산체제이었습니다.
(2) 미래물 시장(금융시장) => 조건부 거래, 시한부 거래(노란 신호등)
그 희년 후의 연수를 따라서 너는 이웃에게서 살 것이요 그도 소출을 얻을 연수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인즉 연수가 많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많이 매기고 연수가 적으면 너는 그것의 값을 적게 매길지니 곧 그가 소출의 다소를 따라서 네게 팔 것이라(레 25:15,16)
미래물은 레위기 25:15,16에서 말하는 거래물을 말합니다. 이 거래를 말하면서 성경은 본문 앞뒤로 서로 속이지(압제하지) 말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희년법이 알려주는 이 구절을 반드시 이해해야 합니다. 본문이 속이지 말라는 말은 거래자 쌍방이 지켜야 할 도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지금 레위기 25:15,16이 말하는 거래물이 현재 존재하는 실물인지 아닌지를 식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속이지 말라는 말은 사람 간에 속이지 않는 것도 필요하지만, 팔고 사는 거래물에 대하여 가치를 바로 알아야 서로 속지를 않습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람은 이 물질이 가진 기본 성질에서 스스로 속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 팔고 사라고 하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팔고 사는 목적물이 없습니다. 땅을 팔고 사라는 말인 것 같은데 ‘땅’이라는 용어는 없습니다. ‘땅’은 뒤에 23절에서 팔고 사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거래물은 ‘땅’이 아닙니다. 개역성경은 본문에서 ‘열매’라는 단어가 들어있지만, 개정된 개역성경에는 열매라는 말도 없습니다. 그러면 소출이라는 말이 거래의 대상물일 것 같은데 그렇다고 그 소출이 지금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면 지금 팔고 사는 거래물은 무엇일까요? 거래는 하라고 하는데 그 거래물이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소출은 희년이 올 때까지 미래에 생산될 실물이지, 지금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현존하는 실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본문이 말하는 거래물은 현재 존재하는 실물이 아니고 미래에 생산될 실물이고, 미래물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거래에서 거래 대상물이 현재 실물이 아니고 미래물이라는 이해가 필수입니다.
필자가 기독경제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희년법을 알리면서 이 "미래물"이라는 용어를 쓰다가 그 모임에서 따돌림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이유는 학계에서 사용하지 않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사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거래물은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 가치물이고, 미래에 존재하게 될 미래물이고, 가격물이 맞습니다. 그들은 모두 기독인들이라서 희년법을 연구한다고 모여있지만, 희년법을 본 적이 없는 헨리 조지의 토지 세금론에만 매여있습니다. 그리고 헨리 조지를 신봉하는 외국의 경제학자들이 쓴 책들에만 심취해 있고, 성경 희년법은 눈여겨보지 않기 때문에 이런 초보적 실수를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함께 하면 좋을텐데 안타까운 현상입니다.
주) 레위기 25:3절의 생산된 생산 실물(현재물), 15,16절에서 미래에 희년까지 생산될 생산 예정물(미래물)을 말한다. 23절에서는영구거래를 금지한 토지 가격물(영구물)이다. 그러므로 자유 거래물, 제한 거래물, 금지 거래물을 개념적으로 구분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현재물, 미래물(한시 금융뮬), 영구물(영구 금융물)로 용어를 구분하지 않고는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용어는 정의부터 하고 설명을 했음에도 경제학자들과 조지스트들은 시장에서 팔고 사는 것은 모두 현재물이라는 고정관념 때문에 현재 존재하는 실물과 실물 없는 금융물과 미래물에 대한 구분을 이해하지 못하여 이런 사태가 발생하였다. 이들은 아직도 실현된 가치인 토지임료와 미실현된 땅값을 식별하지 못하여, 땅값 성장액(매매차익) 그 자체를 "소득"으로 보는 초보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 불로소득은 정상시장이 아닌 불균형시장에서 발생하며, 그것도 소유한 땅을 팔고, 토지시장을 떠날 경우에만 실현할 수 있다(이것도 사회적 실현은 아니고 개별적 실현임). 균형상태를 가정하면 땅과 집은 팔고 시장을 떠나는 경우에도 커진 양도차익, 곧 매매차익은 소유의 적자를 보상하는 가격이 크기이지, 불로소득은 아니다.
우리가 이성을 가지고 사물이 가진 경제적 성질을 있는 그대로 식별할 수 있으려면, 지금 필자가 말하는 몇 가지를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신용거래로 하게 되는 수표나 어음, 주식과 증권, 선물 등의 금융거래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 15,16이 말하는 거래의 실체와 성질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레위기 25:15,16이 말하는 미래물 거래에 대한 성경적 처방은 지금까지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모든 연구의 업적을 종합한 것보다도 더 우수합니다. 지금 필자가 하는 이 말은 과장이나 비약이 아닙니다.
오늘날 세계 시장경제는 금융에서 자꾸 문제가 발생하여 이를 이자율이나 국채 발행 등으로 조정을 하고 있고, 이런 조정에 자칫하면 위기를 초래할 소지가 있어서 늘 불안 조짐을 보입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희년법이 말하는 레위기 25:15,16에서 알려주는 미래물 거래와 23절이 말하는 영구물 거래의 금지 규정을 지키지 않아서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 노벨상을 받은 경제학자들이 고안한 연구의 업적들을 모두 적용해도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금융 불안과 물가상승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말하는 희년법은 그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레위기 25:15,16이 말하는 이 미래물 거래에 대한 성질과 내용을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합니다.
① 이 미래물 거래는 실물이 없으므로 금융물입니다. 이 거래는 실물 거래가 아니기 때문에 채권 채무가 발생하는 금융거래입니다. 미래의 경작권이 지금 담보로 잡힌 빚 거래입니다. 채권 채무는 한번 거래로 종결되는 것이 아니고, 이제 거래를 시작하는 거래의 첫 단계에 불과합니다.
② 지금 이 거래물은 거래가 있기는 하지만, 나의 욕구를 채워줄 실물은 없습니다. 미래의 경작권과 가격은 있으나, 현재에 사용할 수 있는 실물가치는 0입니다. 곧 지금 거래하는 가격은 있으나 그 가격에 해당한 실물이 없으므로, 매입자는 가격을 지불하고도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지 못했으므로 그만큼 궁핍한 상태이거나 불합리한 상태로 있게 됩니다. 이 거래에서 가격을 받은 사람은 실물은 아무것도 준 것이 없이 돈을 받았으므로, 아직 생산하는 실물로 갚아야 할 의무가 남아있는 거래입니다.
③ 이 가격물은 사회적으로도 실물이 없는 금융물입니다. 창고증권은 금융물이라도 창고에 보관된 물품이 현재 있으며, 선화증권도 지금 배에 실려있는 상품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증권은 상품인 실물과 분리되어 거래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미래물은 사회 어디에서도 현재 실물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격만 있습니다. 창고증권이나 선화증권은 실물이 있는 증권이고, 레위기 25:15,16이 말하는 미래물은 실물이 없는 증권 또는 비실물 채권입니다.
④ 우리가 통용하고 있는 화폐도 사실은 사회에 존재하는 실물을 담보로 발행되고 있을 때 그 화폐가 진성가치를 가집니다. 그런데 정부가 화폐를 남발한다면 어떤 현상이 발생합니까? 물가가 오르게 됩니다. 물론, 레위기 25:15,16의 거래물이 바로 물가를 올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이것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화폐를 남발하면 그에 상응하는 실물이 없어서 물가가 오른다는 물리적 현상을 이해해야 합니다.
단순 비교로, 시중에 실물은 사과 한 상자 1만원 가치뿐인데, 화폐를 남발하여 2만원을 통용시키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만원 짜리 사과 한 상자 가격은 2만원이 되어버릴 것입니다. 이것이 인플레이션에 대한 단순한 물리적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성경 희년법이 말하는 미래물 거래는 거래를 위해서 화폐가 필요하기는 하지만, 그 화폐에 상응하는 실물이 없다는 것을 물리적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⑤ 이 미래물 거래는 일시불 거래입니다. 현재는 실물이 없으면서 미래에 희년까지 생산될 실물을 모두 합친 가격을 일시불(이자율로 할인한 일시불)로 거래합니다. 그래서 이 거래는 실물도 아니면서 거래 금액은 매년 생산되어 거래되는 실물가격보다 월등하게 큰 목돈과 거금이 필요한 거래입니다.
⑥ 레위기 25:15,16의 거래는 실물이 없으므로 거래에서는 빚(부채)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거래입니다. 거래자 쌍방에서 어느 한 쪽(매입자)은 실물을 넘겨주고 다른 한쪽은 경작권만 넘겨주는 거래입니다. 우리가 부동산 거래는 주로 빚을 내어서 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 거래에서 부채가 발생하게 되고, 이 거래 때문에 가계부채나 국가부채가 커지게 되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부채는 원래 가난하여 남에게 곡식과 돈을 꾸는 경우에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부채는 기업의 경작권 거래, 곧 실물 없는 부동산 거래나 주식과 증권 등의 거래에서 더 큰 금액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가계나 나라가 시간이 갈수록 빚이 눈덩이처럼 커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을 값을 키우면서 자꾸 팔고 사기 때문입니다. 이런 세상은 희년이 영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⑦ 이 거래는 토지의 경작권이 넘어간 거래입니다. 농업시대나 지금의 산업 정보 사회에서도 토지는 필수재입니다. 그런데 경작권이 팔려 있으니(잡혀 있으니) 이를 가능한 한 빠르게 되찾을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희년법이 말하는 무르기로 레위기 25:24~28에서 나옵니다.
⑧ 이 거래는 희년까지를 계약 기간을 정하여 팔고 사는 시한부 거래입니다. 이렇게 보면, 7의 주기로 기한을 둔 안식년과 희년은 몸과 땅을 거래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정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거래의 성격을 말하고 있는 ①~⑧의 내용을 종합하면, 몸을 잡히거나 땅을 잡히는 거래는 이렇게 시한부로만 거래를 해야 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⑨ 이 거래에서 시간이 지나면 생산되는 산물은 땅이 낸 순수 토지가치입니다. 이 거래로 생산되는 가치물은 노동가치도 아니고, 사람이 투자한 자본가치는 더욱 아닙니다. 노동가치는 희년법에서 따로 있습니다. 레위기 25:39 이하에서 말하는 몸값이 바로 노동가치에 대한 일시불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토지를 내가 번 돈으로 사고, 개간도 하고, 투자도 하여서 나오는 가치이므로, 토지가치는 사람 투자의 대가인 자본가치라고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자본가치는 감가상각비, 금융이자, 사업이윤의 몫으로 따로 계산되고 있고 시장기능을 따라 별개로 인정을 받고 있습니다.
이 토지 경작권 가격은 가격이 결정되는 시장원리는 땅을 경작하는 데 들어간 노동력 가치나 투입된 비용(자본비용)을 모두 제외하고 남은 잔여 가치를 말합니다. 만약 산을 개간하여 밭을 만들어서 그 밭의 경작권을 희년법대로 거래했다면, 그 경작권 가격에서 개간에 투입한 노동과 자본의 투입가치는 제외한 크기가 토지가치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산을 개간하여 밭이 되면 그 커진 가치나 가격 전액을 나의 노동이나 투자의 대가로면 생각하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합니다. 아파트를 짓거나 도시개발에서 발생하는 개발이익의 분배를 두고 다툼이 발생하고 있는데 그 실체가 바로 이 문제 때문입니다.
⑩ 이 거래에서 매입자는 매겨진 가격을 지불은 했으나 그 값을 가치로 받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값을 지불한 현재는 가격만 지불하고, 그에 상응한 가치는 얻지 못했으므로 미실현가격이고 미실현가치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시한부 가격이기 때문에 시간 흐름으로 지불한 원금은 줄어들고 있고, 줄어든 원금의 크기만큼 가치가 실현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미래물 거래가 시한부가 기간이 아니고 영구 기간이라면, 이런 미실현 상태가 영구로 계속됩니다.
①~⑩의 내용을 종합하면 토지의 경작권은 시한부로 거래하지 않고, 기한을 영구로 거래하면 ①~⑩에서 발생하는 경제문제가 해소되지 않고 영속됩니다. ⑨번의 토지가치가 기업 무르기를 하는데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①~⑩의 가격 크기는 경제성장(률)을 따라서 자꾸 커지기만 하고 있어서 사람이 이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상태로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다음 말하는 영구물 시장과 거래를 금지한 희년법의 처방책입니다.
(3) 영구물 시장 => 토지 소유의 금지, 영구물 거래의 금지(빨간 신호등)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여기서 영구물은 1차로 토지를 말합니다. 그다음은 토지가 아니지만, 토지 흉내를 내는 토지 유사품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영구물은 토지를 비롯하여 사람이 토지와 유사한 영구재 상품(금융상품)을 만들어 팔고 사는 경우, 실물 없는 모든 가격물(또는 거래물)을 총칭하는 말입니다. 토지 영구물과 이에 준하는 영구 금융물 거래는 다음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① 성경 희년법에서 땅은 영구로 존재하는 물질에 대한 가격물이므로 거래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 가격은 사람보다 먼저 있고, 더 크고, 사람이 만든 인공물과는 성질이 근본에서 다른 가격물입니다. 사람은 이 가격을 생산할 수가 없고, 소비 할 수가 없는 가격물입니다.
② 땅은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소유와 매매를 금합니다. 땅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은 신앙공동체에서 신앙고백으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땅의 소유권은 실제 생활인 생활공동체에서도 하나님께 있으므로 이 사실을 인정하고, 팔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을 어기면 남의 것을 팔아먹은 도둑이 되는 것입니다. 헨리 조지는 토지 사유에서 지주를 실제로 도둑으로 보고(도둑이 팔아 먹은 장물로 보고) 토지수익 전액을 공수하는 토지단일세를 주장했습니다. 지금도 세계의 조지스트들은 이 방식에 심취해 있습니다.
③ 땅은 창조질서인 물리적 성질에서 팔리지 않습니다. ①번에서 언급했지만, 땅을 구입한 가격, 곧 토지의 투자 원금은 사용으로 그 값을 회수하지 못합니다
여기서 레위기 25:23의 거래에서 ①번은 성경이 금하고 있으므로, ②번은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으므로 토지거래를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③번은 땅의 창조질서인 물리적 성질 때문에 거래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토지의 영구 매매는 ①번과 ②번의 원인보다 ③번 물리적 성질로 인하여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은행에 예금을 하면 이자수익으로는 원금을 회수하지 못하듯이 토지의 구입 원금은 항상 그 수익물로는 회수를 못하고 원금으로만 계속 남게 되는 물리적 성질 그 자체를 뜻합니다. 은행 예금 또는 은행에 저장한 쌀과 금(金)은 원금(또는 원물)을 찾으면 물리적으로 회수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토지 원금은 그 원금을 실물로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쌀은 생산된 현재 실물이고, 땅은 영구 미래에 쌀이 생산될 기대가치이고, 현재 실물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땅이 생산한 쌀로 땅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하는 경우를 예로 들겠습니다. 쌀은 밥이 되면, 쌀이라는 몸통의 물리적 성질이 밥값으로 변했습니다. 솥도 밥이 되면 솥이라는 몸값이 서서히 밥값으로 가치 이전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땅이 밥이 되는 데에는 땅이 기여를 하기는 하지만, 자신의 몸값(땅값)이 밥값으로 물리적 변화나 가치적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땅값은 수요공급의 원리에 의하여 변하지만, 이보다 먼저 이자율에 의하여 변하고, 감가상각률과 상반된 성장률에 의하여 변합니다. 그래서 땅은 사람에게 물리적으로 팔리지 않으며(가치적 이전이 없으며), 팔고 사지 말아야 할(팔고 살 수가 없는) 특수 물질입니다.
기업 무르기와 토지시장, 그리고 십자가의 구원원리
너희 기업의 온 땅에서 그 토지 무르기를 허락할지니(레 25:24)
기업 무르기는 희년법이 가진 백미라고 할만큼 소중한 것입니다. 기업 무르기는 빚을 없애는 경제구원의 유일한 수단이자,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사하여주는 십자가 구원원리도 이 기업 무르기에서 왔습니다.
나의 기업으로 주신 땅을 경작하다가 가난하여지거나 목돈이 필요한 경우 기업을 팔아서 자금을 필요한 곳에 쓰게 됩니다. 그러나 기업을 판 자는 경작할 토지가 없으므로 앞으로의 생활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레위기 희년법은 “만일 네 형제가 가난하여 그의 기업 중에서 얼마를 팔았으면 그에게 가까운 기업 무를 자가 와서 그의 형제가 판 것을 무를 것이요, 만일 그것을 무를 사람이 없고 자기가 부유하게 되어 무를 힘이 있으면 그 판 해를 계수하여 그 남은 값을 산 자에게 주고 자기의 소유지로 돌릴 것이니라, 그러나 자기가 무를 힘이 없으면 그 판 것이 희년에 이르기까지 산 자의 손에 있다가 희년에 이르러 돌아올지니 그것이 곧 그의 기업으로 돌아갈 것이니라(레 25:25~28)”라고 합니다.
토지를 팔았으면 형편이 되는 형제나 친족이 값을 치러서 무르기를 해주어야 합니다. 그런 친족이 없으면 팔았던 본인이 형편이 되면 무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형편이 안될 때는 희년까지 기다리면 기업이 돌아옵니다. 이런 경우 내가 돈을 빌렸는데 그 빚을 누가 갚아줍니까? 내가 몸을 잡히고 돈을 빌렸으면, 내 몸으로 일을 하여 진 빚을 갚아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내가 풀립니다. 그런데 기업을 잡히고 돈을 빌리면 누가 갚아줍니까? 땅이 생산물을 내어서 그 빚을 갚아줍니다. 그래서 희년이면, 땅이 내가 진 빚을 다 갚아주었기 때문에 그 땅이 풀려서 내게로 돌아옵니다.
이런 거래는 레위기 25:15,16에서 말하는 희년까지 조건부로 팔고 사는 미래물 시장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무르기 시장은 앞에서 설명한 레위기 15,16의 조건부 금융시장에서 걸려있는 거래 조건을 회복시키는 거래이므로 연속되는 번호를 붙여서 설명하겠습니다.
⑪ 레위기 15,16의 거래는 현재 실물이 없는 미래물 거래로, 조건부 금융거래입니다. 그래서 조건부 금융물인 미래물 거래는 무르기를 해야 합니다. 무르기는 경작권을 판 자가 형편이 되면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가 가난하여서 기업을 팔게 되므로 이런 경우 형제나 친족이 무르기를 대신하여 줍니다. 이것이 고엘(가알), 곧 성경이 말하는 대신하여 값을 치러서 자유하게 하거나 문제를 해결하여 주는 속량(redemption)입니다.
⑫ 그런데 나와 형제, 친족이 무르기를 하지 못하면 땅에 대신하여 줍니다. 땅이 내가 진 빚을 대신 갚아줍니다. 이것이 은혜이고 속량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값을 치러서 빚을 갚거나 문제를 해결하는 시장원리입니다. 거듭하여 말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사하여서 살려주는 십자가의 구원원리가 이 기업 무르기라는 속량 제도에서 왔습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희년법의 기업 무르기는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을 예표(typology) 합니다. 그러므로 희년법에서 대속자를 세워서 문제를 해결하는 무르기의 방법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경제 구원의 유일 수단이고, 나아가서는 십자가 구원의 유일한 수단입니다.
⑬ 무르기의 경작권을 되찾거나 되찾아주는 무르기에서 그 재원은 어디서 나올까요? 내가 노동을 하여 번 재산일 수 있습니다. 내가 기업을 경작하여 얻는 소득을 저축한 재산으로 무르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무르기를 할 수 있는 재원은 나의 노동 축적물이나 자본 축적물이기보다 평소에 토지가 생산한 ⑨번의 토지가치라고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노동가치는 생계를 위하여 지출하므로 저축이 어렵습니다. 자본의 투자는 빌린 부채일 수 있고, 부채가 아니라도 재투자를 위하여 또 기업 운영(토지 경작)에서 당할 수 있는 손실의 위험을 대비(담보)하는 자가보험의 기능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⑨번의 토지가치는 원래 나의 노동과 자본 투자와는 별개로 하나님이 땅을 통하여 주신 선물(膳物)이므로, 내가 투자한 몫을 초과하는 잉여가치입니다. 그런데 마르크스 공산주의는 이를 노동가치라고 우기고, 세속경제학은 이 크기를 사람이 투자한 자본의 대가라고 여기면서 지금까지 세상을 주도해 왔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 가치를 땅이 생산한 가치라고 합니다(레 25:19, 막 4:28).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손길이 필요한 노동 투자와 자본 투자를 0으로 정지시켜 놓고, 땅이 스스로 내는 산물이 있다는 것을 안식년법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습니다(레 25:5,11). 사람이 무르기를 하지 못하면 땅이 생산물을 내어 내가 진 빚을 갚아주는 과정을 희년법으로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레 25:28).
⑭ 기업 무르기를 하려면 최초의 매입가격에서 매년 줄어드는 원금의 잔존가격이 얼마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거래는 원금이 삭아지는 사글세와 같고, 건물이나 자동차에서 감가상각비를 계산하듯이 원금을 매년 상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문헌상으로 나타나는 원금의 상각과 자본 자산에 대한 감가상각은 레위기 희년법(레 25:27,28)이 세계 최초의 규정일 것으로 보입니다. 희년법은 원금의 상환이나 감가상각에서 남은 연수가 많고 적음에 따른 기간과 가치 계산을 하는 방법까지 언급하고 있습니다(레 25:50~52).
⑮ 기업 무르기에서 부채의 원금과 잔액의 산정은 이자율로 계산하는 연금, 보험, 감채기금 등 장기 금융에서 발생하는 기간의 이자비용과 수익을 계산하는 기초가 됩니다. 레위기 25:15,16의 미래물 거래와 24~28의 무르기 거래의 가격 계산법은 세상의 모든 금융거래에서 원금과 이자를 계산하는 기초가 됩니다. 특히 이 거래는 경제학자라도 실무적 이해가 매우 둔한 원금의 변동 성질을 과학적으로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조항 하나의 바른 이해가 지금도 성장자본의 원금 변동 성질과 가격 메커니즘을 이해하지 못하는 모든 학자나 전문가들보다도 낫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말 역시 필자의 과장이 아니고 실제 상황입니다.
⑯ 기업 무르기에서 사글세의 잔금과 원리금 상환액의 계산은 소유자와 사용자가 다른 공공주택에서 임대료 징수에서 추가로 부과하는 감가상각비의 계산 방법도 알려줍니다. 이것은 감가상각비 계산에서 부채의 원리금 상환방식인 부금률로 계산을 하든지 아니면 감가상각률만큼 매년 감가상각비를 낮추어가면서 임대료를 징수를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지 않고 정액법으로 매년 일정률로만 상각하여 감가상각비를 징수하면, 징수액은 원금보다 초과하여 부당 징수를 하게 됩니다. 만약에 감가상각비를 정액법으로 일정액을 계속 징수한다면, 5% 이자율로 내용연수(임대기간) 50년간 감가상각비 총액은 원금의 4배 이상 초과 징수를 하게 됩니다(취득원가 1억원에 감가상각비 총액은 4.2억원 = 건물 원금 1억원 × 0.02 × 50년 5% 연금 종가율 209.348).
돼지고기의 식용금지와 토지의 매매금지
구약인 레위기에서 돼지고기와 비늘 없는 고기는 먹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돼지고기와 비늘 없는 고기를 먹고 있습니다. 레위기에서 금지한 음식물은 주로 종교적 이유 때문이었고, 물리적으로는 먹을 수가 있는 음식물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매일 필요가 없는 복음시대는 그것을 먹어도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땅은 팔고 사면 땅값에 매긴 가격은 사람이 가격은 지불하여도 그 몸통 가격은 1원도 소비를 하지 못하는(사용은 하지 못하는) 물리적 성질로 인하여 가격만 지불하고 사용은 못하는 벌금이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땅은 영구거래를 금지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약시대이든, 신약시대이든 구분 없이 적용되어야 할 물질의 물리적 성질입니다. 이 말은 처음 들으면 공상 소설을 읽는 것과 같은 말로 들릴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태양계의 천체 운동을 천동 현상으로만 알고 있다가 지동 현상을 말하면 받는 감정이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땅값이 벌금이 되어버리는 것은 공상 소설이 아니고, 과학적 현상이고, 피할 수 없는 실제 현실입니다.
이 말이 이해가 가지 않으면, 앞에서 설명한 토지의 시한부 가격이 미래물, 금융물, 미실현 가격물임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앞에서 미래물 가격은 가격을 지불했으나 그에 따른 실물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미래물은 시한부 가격이기 때문에 시간 흐름으로 그 값이 가치로 실현이 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자동차가 원금이 줄어들기 때문에 자동차를 굴려서 얻는 수익에서 원금과 이자가 모두 회수되는 것과 원리가 같습니다. 원금이 줄어드는 성질이 가치로 실현된다는 것은 생산된 수익이 감가상각비로 회수(보상)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영구물은 미래물에서 발생한 미실현 현상이 기한이 없어서 영구적으로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영구물에 투입한 원금은 생산물로 회수하지를 못합니다. 희년법은 그래서 토지의 영구거래를 금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땅을 만들지도(생산), 없애지도(소비), 팔지(매매)도 못하게 창조를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질서부터 하나님과 사람, 그리고 땅과 사람의 관계에 명확한 차별(구별)을 두고 있습니다.
은행 예금과 토지 원금의 비교
그러나 토지는 영구재이기 때문에 시한부 거래에서 원금이 삭아지는 사글세의 성질이 없으며, 자동차 감가상각처럼 감가상각이 없습니다. 이 말이 어려우면 은행에 예금해서 이자를 수취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면 이해가 될 수 있습니다. 은행 예금은 이자를 매년 받아도 원금은 변하지 않고 초기 원금이 그대로 남아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원금을 실물로 받아야 매입한(투자한) 원금이 모두 가치로 회수(실현)가 됩니다. 은행 예금은 그대로 두면 원금은 늘 받지 못하므로 내가 쓰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예금이라도 주택연금처럼 기한이 있거나 매년 원금도 이자가 함께 상환되는 것이면(원금이 줄어드는 부금식, 할부식), 그 원금은 가치로 실현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토지는 원금이 소비, 소멸하는 성질이 없으므로 그 값은 계속 미실현으로 남습니다. 만약에 쌀이라는 실물을 은행에 예금했으면, 그 원금도 실물이지만, 토지는 예금을 해도 현재는 쌀이 없고 미래에 쌀이 나올 기대가치나 청구권일 뿐, 현재는 항상 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토지도 이렇게 은행 예금처럼 원금이 일정하다면 발생한 미실현 가격은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처음 값이 매겨질 때 실물 없는 가격이 목돈으로 매겨지기는 하지만, 그다음은 늘 일정한 원금 크기만 유지하기 때문입니다. 은행에 맡겨둔 금값이 이런 성질을 가집니다. 금값은 금융시장이 불안정하거나 이자율이 변하면 일시적으로 가격이 움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런 변동성 금값이 경제에 고질적인 문제를 발생시키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금은 토지나 주식처럼 원금이 스스로 커지는 물리적 성질이 없기 때문입니다. 원금이 변하지 않은 채권 가격도 금값과 원리가 비슷합니다. 이자율이 급변하지 않는 한 원금 자체가 변하는 주식가격보다는 가격 성질이 훨씬 더 안정적이라는 뜻입니다.
임료와 땅값은 커집니다.
그러나 땅은 어떻습니까? 경제가 성장하면 노동 단위당 임금이 커집니다. 이와 같이 경제가 성장하면 임금처럼 토지도 단위당 임료(토지임료, 지대)가 커집니다. 토지의 단위당 임료가 커지면 그 자본가격이 땅값이 동반하여 커지는 성질을 가집니다. 그래서 성장하는 사회에서는 땅값이 매년(또는 비정기적) 커지는 성질을 가집니다.
토지의 경작권 가격은 시한부 가격이라도 기간이 경과되지 않은 원금은 미실현가치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만기가 없는 원금은 기간이 지나가도 은행 예금처럼 늘 원금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므로 원금을 받아내야(찾아야) 원리금 전액을 회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만기가 없어서 회수하지 못하는 원금 가격이 이제는 경제 성장(률)을 따라서 커지기 시작합니다. 값을 지불은 했지만, 그 값에 해당하는 실물은 회수하지 못하는데, 이제는 그렇게 회수하지 못하는 값(원금)이 매년 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실물 없는 가격이 계속 커지는 것도 문제인데, 땅값은 실물인 토지임료와 달리 불규칙적으로 커지는 성질을 가집니다. 여기에 시장은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른 가격 변동은 더 불규칙적으로 움직이게 됩니다. 그래서 부동산은 시간 흐름에서 주기적 파동을 일으키며, 가격 급등락을 반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실물 없는 가격이 계속 발생하여 실물에 대한 초과수요를 일으키며, 물가를 올리고, 가격이 불규칙적이고 불안하여 금융시장을 흔들며, 실물 경제를 어렵게 합니다.
땅값은 복수가격, 시장 폭군입니다.
자동차를 사서 영업을 하면 자동차는 자동차 운영수익 한 가지뿐입니다. 택시를 몰면 수익은 그 택시 요금 하나뿐이라는 뜻입니다. 이 택시 요금 하나로 자동차의 구입 원금과 이자를 모두 회수하게 됩니다. 그런데 땅은 사서 운영하면 운영수익 외에 다른 가격 하나가 더 생깁니다. 그것이 매년 커지는 땅값입니다.
예를 들어서 땅값이 들어있는 주택을 구입하여 임대를 하게 되면 주택(또는 토지) 소유자는 매년 주택 임대료 수익 외에 매년 집값이 커지는 가격(수익)이 발생하게 됩니다. 물론, 집값이 매년 커진다고 할 수는 없으나 성장하는 사회에서 장기로 보는 집값은 항상 커져 왔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장기로 커지는 집값은 지수로 평균값을 내어보면 매년 커지는 비율이 있고, 그 값이 소유자의 몫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땅값과 집값은 ㄱ. 운영에서 얻는 수익도 있고, ㄴ. 땅값과 집값이라는 원금이 커지는 성질도 있어서 복수가격(ㄱ+ㄴ)이 발생합니다. 자동차는 굴리면 운영수익 하나뿐인 단수가격이 발생하지만, 땅과 집은 운영수익도 생기고 원금인 몸값도 커져서 복수가격이 발생합니다.
주) 땅값이 복수가격인 것은 다음 산식에서 B와 C, Y와 Z라는 복수가격이 발생하였고, C와 Z는 커지는 성질을 가지므로, 이것이 작아지는 일반 물질과는 성질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땅값(A) = 미래 토지수익의 연금현가(B) + 미래 땅값의 현가(C)
땅값의 원리금(X) = 현재 토지수익의 연금종가(Y) + 현재 땅값의 총액(Z)
그래서 우리는 주택을 사서 임대료를 받는 주택소유자가 겉보기로 보면 주택의 소유는 임대료 수익도 누리고, 집값도 올라서 돈을 벌어서 꿩도 먹고 알도 먹는 이중 수익을 누린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토지 소유나 주택 소유는 불로소득이 발생한다는 소위 “부동산 불로소득”이라는 딱지가 붙어 다닙니다. 진보층에서는 부동산에 대한 이런 관점에서 부동산 소유에는 고율의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을 강하게 내세웁니다. 특히 부동산에 대한 고율의 보유세를 제창하고 있는 한국의 조지스트들이 그 대표적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보유세 고세금을 성경의 희년법과 동일시하면서 희년 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부동산 불로소득과 고세금론은 토지시장의 메커니즘을 잘못 이해한 오해에서 생깁니다. 땅값과 집값에서 발생한 복수가격은 부동산 소유자에게 “불로소득”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라 소유에서는 늘 돈 이자도 보상받지 못하는 “적자소득”을 가져옵니다. 여기서 불로소득은 이자를 초과한 소득을 말하고, 적자소득은 이자소득보다 더 적은 소득을 말하므로 전혀 상반된 주장입니다. 어는 것이 맞을까요?
필자도 토지시장 연구를 하던 초기에는 불로소득론을 신봉하여 조지스트들과 함께 고세금을 주장해 왔습니다. 그러나 토지시장을 바르게 알고 나니 부동산 소유는 불로소득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땅값과 집값이 제값(현재가치의 자본가격)보다 너무 높은 것이 근본 문제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부동산가격은 미래에 원금이 오를 가격까지 미리 시장가격에 모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사용가치(주거가치)인 제값보다 훨씬 더 비싸게(높게) 사야 한다는 뜻입니다.
필자는 이렇게 부동산은 사용수익 외에 오르는 땅값이 커지는 복수가격 때문에 가격이 두 배 정도 비싸므로 땅값은 시장에서 “가격 폭군”이라고 부릅니다. 땅값과 집값은 사용가치인 제값만 매겨도 미래의 장기적 사용가치를 지금 일시불로 지불해야 하는 거액의 목돈입니다. 그런게 그런 목돈을 성장하는 토지의 특수성 때문에 제값보다 두배나 더 높은 가격을 지불하여야 하니 "가격 폭군"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주택을 토지소유주택이 아닌 토지임대부 주택으로 하면 가격이 초기 기준으로 절반으로 떨어져서 소위 “반값 아파트”가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토지임대부로 하는 “반값 아파트”가 바로 부동산의 “제값 아파트” 가격입니다. 그러나 토지 소유주택은 미래에 주택이 오늘 가격까지 모두 값을 쳐주고 사야만 해서 그 오를 가격이 현재의 집값을 두 배 가깝게 올려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 토지임대부주택은 가격이 100원이라면 토지소유주택은 가격이 201원입니다.
그래서 주택에 살면서는 늘 제값 초과액인 101원에 대한 적자를 계속 당하다가 주택을 팔 때 그 적자를 본 만큼 값을 올려받아서 본전(원리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토지임대부 주택은 100원 주고 사서 100원에 대한 이자 상당액을 주거가치로 누리고 살게 되고, 이와 같은 주택을 토지소유주택으로 구입한 소유자는 201원을 주고 사서 100원 상당액은 주거가치로 누리고, 나머지 손해를 보는 101원은 주택가격이 올라서 손해를 본 101원을 비로소 뽑아내게 됩니다. 곧 제값을 초과한 101원은 현재도 실물이 아니고, 미래에 커진 가격도 실물이 아닙니다.
그리고 땅값과 집값으로 지불한 일시불 가격은 현재 바로 사용할 수도 없는 미실현가격입니다. 또 이 미실현 원금은 주거가치나 사용가치로 실현할 방법도 없는, 그리고 현재는 실물 없는 가격입니다. 원금은 땅과 집을 팔 때에나 수익으로 회수되는 가격입니다. 그런데 이런 땅값과 집값은 미래에 오를 가격까지 미리 선불로 내야 하니 가격이 두 배나 높은 것입니다. 또 정수기 하나도 리스제도가 있고, 할부 거래가 있는데 이 부동산가격만은 항상 일시불과 선불로 해야하는 현금 지급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땅과 집이 필요하여 구입하려면 빚을 지지 않고 구입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여기에 빚을 내어 땅과 집을 사더라도 소유와 사용에서는 늘 돈 이자가 나오지 않고, 손해를 봅니다. 그러다가 땅과 집을 팔 때 그 누적된 적자나 돈 이자를 비로소 보상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땅과 집을 새로 구입한 매입자는 다시 이런 적자를 따 안고 사서 그 적자 행진을 계속하게 됩니다. 이 현상은 영원합니다
땅값은 미래의 성장률이 지금 시장에 미치기 때문에 미래의 가치를 높게 평가는 하는 사람이 높은 가격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토지나 주택의 필수 수요자는 현재의 사용 또는 주거 가치에 대한 값을 매겨도 그것이 일시불이고 목독이라서 매입하기 어렵습니다. 토지와 주택은 현재의 실소유자보다, 미래가치를 높게 평가를 하거나 현재 지불할 자금력이 있는 사람이 유리합니다. 그래서 토지는 그 토지를 필요로 하는 실수요자보다 미래의 가격을 높게 매기는 부자나 투기자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땅값은 시장을 비효율적으로 운영하게 하는 시장 역기능을 초래합니다.
이와 같이 실물도 없고, 시장 역기능을 초래하는 땅값은 시장경제에서 폭군입니다. 땅과 집을 필요로 하는 시장 신규 가입자에게는 두 배나 높은 가격을 그것도 거액의 거금을 선불(선지급)로 주어야 하니 잔인하고 포악무도하다고 할만큼 부동산가격은 시장에서 “폭군 중의 폭군”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땅값과 집값의 커진 가격과 불로소득의 바른 이해
(부동산 불로소득의 바른 이해)
땅값과 집값에서 발생하는 부동산 문제는 조지스트의 주장처럼 불로소득의 발생이 문제가 아니고, 가격이 제값(사용가격)보다 두 배나 높아져서 땅과 집을 매입하기가 어려운 문제(시장 진입의 가격 장벽), 그리고 어렵게 구입을 했어도 사용과 주거에서 계속 적자가 나는 것이 근본 문제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겉보기 눈으로는 주택소유자가 임대료 수익도 생기고, 집값이 올라서 매매차익까지 챙겨가니 꿩 먹고 알 먹는 것과 같은 불로소득자로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부동산 소유에서 오해가 생기는 이유는 몇 가지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 소유자의 수익이 임대수익(사용가치)과 팔 때는 매매차익이 발생하는 복수가격이라서 그렇게 보입니다.
② 주택의 임대료만 해도 겉보기로만 보면 돈 이자보다 큰 값으로 보입니다. 그것은 주택 임대료에 들어있는 감가상각비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서 아파트를 구입하여 월세를 놓는다면 월세에는 건물가격에 대한 감가상각비를 추가하여 징수하게 됩니다. 그래서 주택가격에 건물가격 대 땅값이 3:1의 비율이라면, 3억원 주택에 건물가격은 2억원입니다. 2억원의 건물분 임대료는 5% 이자율로 계산하면 1천만원입니다. 그런데 건물분 가격은 감가상각비가 있기 때문에 내용연수 50년이면 400만원이 임대료에 추가되어야 합니다(400만원 = 2억원 * 0.02). 그러면 건물분 임대료는 1천 400만원이 됩니다.
여기서 토지분 가격 1억원에 대한 토지임료는 땅값 또는 집값 성장률을 3%로 보면, 이자율 5%보다 낮은 2%를 받아야 합니다. 따라서 토지분 임대료는 200만원입니다(200만원 = 1억원 * 0.02). 그러면 주택의 임대료 총액은 1천 600만원입니다(건물분 이자 1천만원, 건물 감가상각비 400만원, 토지분 임대료 200만원).
그러면 이 금액은 주택가격 3억원의 5% 이자율인 1천 500만원보다 100만원이 높습니다. 토지분 임대료는 500만원이어야 하지만, 토지는 땅값이 300만원 커지고 있어서 실제 임대수익은 200만원으로 적자가 나고 있지만, 겉보기 임대수익은 이자액 1천 500원보다 높은 1천 600만원의 수익이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토지소유주택은 겉보기로 보면, 임대료만 해도 돈 이자가 나오는 것 같고, 여기에 땅값까지 오르고 있으므로 그야말로 틀림이 없는 불로소득으로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③ 그다음은 땅과 집은 새로 지으면 개발이익이 크게 발생합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바와 같이 도시 재개발이나 신규 아파트를 지을 때 거액의 개발이익이 생깁니다. 이것은 실제로 발생하는 불로소득이 맞습니다. 또 내 집 주위에 신설 도로가 나거나 공공개발이 있으면 나의 땅과 집이 가격이 올라갑니다. 이것을 "외부효과(일종의 무임승차)"라고 합니다. 이것은 불로소득이 맞습니다.
④ 땅과 집을 싸게 매입하여 비쌀 때 팔면 불로소득이 발생합니다. 이것은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부동산가격의 급락기와 급등기를 잘 이용하거나 행운을 잡으면 불로소득의 행운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행운은 다른 한쪽은 손해를 보기에 사회 전체로는 제로섬 게임일 뿐입니다. 또 땅과 집은 필수재이므로 팔면 다른 땅과 집을 다시 사야함으로 이런 불로소득은 큰 문제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자본재는 시장에서 팔고 사는 거래 시점에 따라 가격 차이가 나기 마련입니다.
⑤ 성장하는 사회에서 땅과 집을 장기로 소유하면 반드시 가격이 커집니다. 그런데 이 커지는 값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적자에 대한 보상일뿐인데 우리가 느끼기로는 가격이 커져 있어서 큰돈을 번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것은 앞에서 설명한 토지임대부주택처럼 주택을 반값으로 사고, 잔여금액(나머지 반값)을 은행에 예금했으면 장기로는 큰돈이 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더구나 이 커짐은 복리로 커지기 때문에 30년, 40년 후에는 집이 낡아지고 허물어지고 있는데도 주택가격은 올라만 가고 있으니 정말 큰돈을 번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그러나 그 토지소유주택의 커진 값은 그동안 소유에서 계속 적자만 보아온 가격을 대신할 가격이 커져 있을 뿐이고, 그렇게 커진 값이 불로소득을 가져다준 것은 아닙니다.
이처럼 땅값과 집값은 ①에서 ⑤의 이유로 커지고는 있지만 ③을 제외하면 불로소득이 생기지 않거나 생긴 불로소득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③의 경우는 부동산시장 전체로 보면 평균적으로 매년 3% 미만입니다. 그러면 97% 소유자는 소유에서 불로소득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늘 적자가 납니다. 그렇지만, 임대수익과 땅값 차익의 복수가격, 감가상각비가 보여주는 임대수익의 인식 왜곡, 그리고 유일하게 부동산에서만 매년 복리 비율, 곧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는 땅값과 집값의 가격 커짐을 보면 부동산 소유는 항상 불로소득을 안겨주는 황금알로 보이게 됩니다.
이와 같이 땅값과 집값은 실물 없는 땅값의 커짐으로 인하여 97%는 소유에서 적자소득을, 나머지 3%는 매각에서 불로소득이 생기므로, 이래도 문제 저래도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희년법에 따른 부동산시장과 금융 거래의 해결책
세계의 경제문제와 금융문제는 레위기 25장 희년법이 알려준 실물시장(3,4절), 시한부 금융시장(15,16절), 영구 금지시장(23절), 그리고 십자가의 속량 수단과 시장원리가 들어있는 무르기 시장(24절)을 개념적으로 식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생활에서 땅값과 토지생산물(임료, 지대)을 식별하지 못하므로 성전에서 돈(세겔화)을 팔고 사서 웃돈을 붙인 것이 강도의 소굴이 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유대인은 중세에 유럽에서 외화를 팔고 사는 환차익으로 거부가 되고 세계금융을 지배했습니다. 주식은 1720년 남해거품사건에서 1929년 세계 대공황까지 일어나게 했었어도 그런 주식을 "자본주의 꽃"이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선물이 생기면서 영국의 영란은행은 1992년 유대인 출신 펀드매니저, 조지 소로스 한 사람을 이기지 못하고 파운드화를 폭락하게 했습니다. 태국은 1997년 바트화가 폭락하였고, 한국은 1998년 IMF 경제위기를 당했습니다. 2008년 세계 경제는 부동산 가격파동으로 금융위기를 맞았습니다. 2023년 3월에는 이자율 상승에 따란 채권가격 폭락으로 미국 16대 은행인 실리콘벨리은행(SVB)과 뉴욕 시그니처은행이 파산했고, 5월은 3대 은행인 퍼스트리퍼블릭은행이 JP모건에 인수되어 간판을 내렸습니다. 모두 레위기 25:23의 거래 금지법을 위반하여, 팔고 사는 실물 없는 가격물, 금융물이 일으키는 문제들입니다.
이런 사태는 모두 실물 없는 금융에서 발생하는 문제입니다. 레위기 25장 15, 16의 조건부 거래와 영구재, 곧 기한 없는 영구 금융거래를 금지한 레위기 25:23의 규정을 지키지 않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습니다. 계시록 18장은 하루에 몰락할 시장을 거듭거듭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도 아무것도 없는 것을 팔고 사는 야만 행위를 거치기보다 계속 키우고만 있습니다.
창조질서에는 생산이 없었고, 실물이 아닌 가격물, 토지와 같이 사용을 해도 소비(소멸)가 되지 않는 물질은 사람이 그 원금을 실물가치로 회수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창조질서입니다. 하나님은 이 창조질서를 따라 레위기 희년법을 제정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생산 없이 값이 커진 것을 이익(가치물)으로 오인(착각)한 물질은 제일 먼저 성경이 거래를 금지한 가격인 ①땅값에서 시작하였습니다(레 25:23). 그다음 ②땅값이 포함된 집값, ③화폐(환차익을 추구하는 상품성 화폐), ④주식, ⑤선물, ⑥각종 파생상품, 그리고 이제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는 ⑦가상화폐라는 가짜물(가짜자산)까지 나왔습니다.
이런 잘못을 고치려면 토지는 거래를 토지임대부로 바꾸어야 합니다. 필자는 주택 공급을 사유토지는 토지주식제 주택, 공공토지는 토지임대부 주택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토지임대부 주택은 가격이 토지소유주택보다 약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그리고 토지임대부 주택에서 발생한 토지임료는 내가 내어야 할 세금까지 대신하여 주기 때문에 이것이 확대되면, 세금 없는 사회를 시장경제 시스템으로 실현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비유로 가르쳐 준 포도원 천국 경제법입니다(마 20:1~16, 21:33~44).
그리고 주식은 레위기 15,16이 가르쳐 준 그대로 시한부 이익배당권인 한시 주식제로 바꾸어야 합니다. 그러면 같은 규모, 같은 업종, 같은 수익을 내는 성장성 기업 주식은 지금의 영구주식보다 절반 가깝게 낮아집니다. 실물을 교환하지 않는 선물(先物)은 예로부터 존재했던 선도거래나 가격보험제로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내재가치가 0에 가까운 가상자산은 폐지하고, 블록체인 기술가치는 특허권이나 요금제로 바꾸어 주어야 합니다. 가상자산은 투자된(구입한) 원금에도 실물이 거의 없고, 앞으로 생산될 실물 생산도 거의 기대할 수 없으므로, 거의 100% 가까운 가짜자산이고, 가짜화폐입니다.
1972년 시카고상업거래소(CME)는 노벨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만의 논문(The Need of Futures Market in Currency)을 참고로 세상에 선물(先物)이라는 금융물을 내어놓았습니다. 지금 이 금융물은 원금(원물)을 투자하지 않고도 매매차익이 발생하는 신종 투자기법(파생금융상품)까지 등장하였습니다. 이 투자는 원금 투자는 하지 않고 증거금만 내면 원금에서 발생하는 차익을 챙길 수 있는 투자입니다. 그러므로 이 투자는 어미도 없는 것이 새끼를 낳고, 뿌리도 없는 것이 싹을 내고 있어서, 이것은 창조질서에 반하며, 실물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거래입니다. 위험 회피를 위한 헷지(hedge) 수단으로 만들었으나, 실상은 거래의 98%가 투기를 목적으로 하는 스펙쿨레이터(speculator)가 하고 있습니다. 선물은 실물 없는 가격물, 원금 없는 차익물, 100의 물량에 200, 300의 동시적 거래량이 가능한 허구물입니다.
여기에 지금은 "최첨단 기술"인 컴퓨터와 디지털을 이용하여 "최첨단의 반과학, 반희년법 행위"라고 할 수 있는 가짜화폐가 자산 흉내를 내면서 가격 요물로 세상에 나왔습니다. 이 요물은 청년층을 미혹하여 영혼을 빼앗고, 재산까지 탕진하게 합니다. 경제로만 보면 파생상품과 가상화폐는 "아주 가증한 것이 가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으로 경제계에서는 말세를 대표하는 상징물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희년법에 따른 토지와 금융시장의 설명은 이자율과 수치를 들어서 계산 예시를 보여주면 확실하게 검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이자율에 따른 계산이 복잡하고, 어려워서 독자들이 흥미를 잃을 수 있으며, 지면도 많이 필요하므로 여기서는 생략합니다. 희년법에 대한 상세한 시장이론과 수리적 계산은 필자의 책, 『한가위 희년나라(제1권)』 -희년과 포도원 천국-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레위기 제사법과 레위기 희년법의 복음적 적용
레위기 생활규례는 중간에 있는 음식법, 정결법, 윤리법, 절기 규정 등을 제외하면 앞 부분에 나오는 제사법과 뒷 부분에 나오는 희년법으로 나눌 수 있겠습니다. 제사법은 죄를 사하는 방법이고, 희년법은 빚을 없애고 경제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둘 다 그 해법은 짐승이 대속물로 희생이 되든지, 대속자가 있어서 희생과 값 치르기를 대신하여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여 줍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이자, 필수 수단인 속량제도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제사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성취되고, 완성되어 폐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으로 더 이상 희생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에는 삶에서 지은 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예배를 드리면 됩니다. 물론 레위기의 제사법은 신약시대에 오면 폐기되얶다고보기 보다 제사의 형식이 예배로 바뀌어서 지켜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희년법은 어떻습니까? 희년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년 선포로 성취가 되었으나 아직은 완성은 되지 못했기 때문에 폐기되었다고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희년법의 성취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 이유는 아직 희년의 경제 상태인 부채가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 커진 상태입니다. 실물 없는 땅값은 구약시대 시한부 가격에서 영구가격으로 변질하여(퇴색하여) 오히려 더 커져버렸습니다. 다만, 사람의 몸을 팔고 사던 노동시장은 신약시대에 임금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에 몸값이 소멸하여 제도적으로 성취가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노동의 자유도 제도적으로는 보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땅은 기업 무르기가 전혀 되지 못하고, 사람이 만든 땅값에 땅이 꽁꽁 묶여 있습니다. 구약 희년법에서는 희년이 오면 땅이 자유함을 얻었지만, 지금은 영구가격으로 묶여있어서 토지의 자유함은 요원합니다. 사람들 각자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토지 사용의 자유도 제값보다 두 배나 높은 땅값과 집값으로 인하여 요원합니다. 그리고 소멸되고 사라져야 할 땅값이 천문학적으로 커지면서 그 가격이 비례하여 부채도 천문학적으로 커져 있습니다. 그리고 경제는 주기적으로 금융위기가 오고 있고, 물가가 오르며, 실업 상태가 줄어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선포한 희년은 몸값 부분은 성취에서 구조적 완성 단계로 이행을 했으나, 땅값 부분은 구약의 희년법 제도보다 훨씬 더 퇴행하고, 역행하여 반희년법으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된 십자가의 값 치르기는 죗값만 사해준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매겨놓은 몸값과 땅값까지 모두 사하여주는 효력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복음시대에 와서도 몸값은 소멸을 시켰지만, 땅값은 인간의 탐욕과 거부로 소멸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키우고만 있습니다.
지금도 주식이 일으키는 가격 불안정은 희년법대로 시한부 증권, 한시적 이익배당권으로 바꾸어 주어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선물은 가격 위험을 헷지한다는 명분으로 세상에 나왔으나 가격 안정기능보다 오히려 가격을 흔들어서 불안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선물은 없애버려야 합니다. 내재가치가 0에 가까운 가짜 돈 가상화폐는 이름도 없애고 폐지해 버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년 선포로 성취된 구약의 희년법은 몸값 하나만 폐지되고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아직 희년법이 선포되어서 남은 과제는 시장에서 "가격의 폭군" 노릇을 하는 땅값을 0이 되게 해야 하고, 가계부채와 국가부채도 소멸시켜 나가야 합니다. 지금도 세계는 10억 명의 어린 생명들이 굶주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생명들도 천하보다 귀한 자들이므로(마 16:26), 생명의 말씀을 전해주고, 생명의 양식을 내는 땅을 주고, 자유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레 25:10).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에게는 영생을(요 3:16), 가난한 자에게는 복음 전하게 하시려고 기음 부음을 받고 희년을 선포하셨습니다(눅 4:1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년 선포로 성취된 희년이 제도적으로 완성되기 위해서는 아직 큰 절차나 사역, 그리고 험난한 장벽들이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구약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으로 모두 폐기되었다고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물론 복음시대는 율법이 매이지 않으므로 지킬 필요성이 없는 것은 폐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부모 공경이나 윤리 도덕을 규정한 십계명은 어느 하나도 폐기된 것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희년은 땅값을 없애고, 부채(사업성 부채 말고 생활에서 필요했던 부채)가 사라져야 오는 것이므로 희년법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년 선포와 십자가 희생 사건으로 폐기되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복음시대에도 지킬 필요가 있는 율법은 지켜야 그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지켜야 할 율법마저 복음시대라고 폐기하면 그것은 오히려 복음을 거스리는 행위가 될 것입니다.
간혹, 복음시대인데 희년법 준수를 요청하거나 윤리 도덕의 이행을 촉구하면, 그것은 은혜의 시대에 행위를 강조한 것으로 복음과는 상반된 율법적 처사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희년법을 추구하면, 신율법주의나 인본주의로 규정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율법에도 복음적 요소가 들어있고, 복음에도 십계명처럼 지켜야 할 율법적 요소가 들어있으므로 이를 이분법으로 분리하여 판단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필자가 말하는 희년법은 구약의 희년법은 문자 그대로 지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의 제사법이 신약시대는 예배로 바뀌듯이, 구약의 희년법도 신약시대는 바꾸어서 그 내용은 지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과 면제년, 49년,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도 그 연도를 그대로 지키자는 것이 아닙니다. 토지 거래와 기업 무르기도 안식년과 희년까지 연수를 세어서 지키자는 뜻이 전혀 아닙니다. 필자가 말하는 희년법의 준수는 희년법이 정해 놓은 문자적 준행이 아니고, 그 내용을 복음적으로 지키자는 것입니다. 복음시대에 맞지 않은 것은 버리고, 버려서는 아니될 것, 버릴 수도 없고 받아드리면 더 좋은 것들은 복음시대에 맞도록 개선하여 수용을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필자가 말하는 희년법의 준수는 복음시대에도 지킬 것을 지켜서 하나님이 세워주신 법과 성령의 법이 우리에게 주려는 복과 자유를 마음껏 누리며 살자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직접 선포하신 희년은 공짜로 이루어지는 "은혜의 해"가 아니고, 순종과 준행으로, 하나님께서 인정을 하는 "받아 주시는(acceptable)의 해"입니다(눅 4:19).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고, 완성하려고 왔다고 하십니다(마 5:17~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