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 그 슬픔의 빛깔
김수인(德)
세상에는 여러 가지 색(色)이 존재한다. 진달래 꽃잎을 떠올리게 하는 분홍색, 병아리 깃털과도 같은 노란색, 연초록의 버드나무 이파리……. 이렇듯 다양한 색상 중에서 청색(靑色)을 보면 나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게 된다. 어린 시절, 청색의 크레파스는 늘 바다나 하늘을 칠하기 좋은 색이었다. 청색은 신비롭고 활력이 넘치며 젊음을 상징하는 청춘의 색채로도 여겨진다. 하지만 내게 있어 파란색은 단지 가슴을 저리게 하는 슬픔의 색으로만 비춰진다.
오랜 세월, 파란색에 대한 기피증으로 많은 갈등을 겪으며 살아왔다. 사람들은 내가 무슨 이유로 그처럼 색상에 연연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는 너무도 아픈 기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사십여 년 전의 일이다. 언니에겐 아들이 셋 있었다. 내겐 세 명의 조카가 되는 셈이다. 그 중 둘째조카가 중학생이 되던 해였다. 조카는 자전거를 끌고 짧게 자른 머리가 어색한 듯 멋쩍게 웃으며 집을 나섰다. 그런데 조카가 외출을 한 지 두 시간쯤 후, 언니는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 H대학병원 영안실로 옮겨졌다는 전화를 받았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조카가 신호를 무시하고 달려가던 시내버스에 부딪쳐 넘어졌다는 것이었다. 조카가 떠났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나는 허겁지겁 병원으로 달려갔다. 그 날, 바라본 조카의 모습은 해맑은 얼굴에 다친 흔적이 없었고 파란색의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까까머리 어린 조카의 흰 얼굴은 파란색 옷에 대비되어 백지처럼 보였다. 나는 순간, 흰색과 청색은 서로에게 냉기를 갖게 하는 묘한 기운을 지닌 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카가 떠난 후, 언니는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견디지 못해 벽제 부근의 절을 찾아다녔다. 나도 언니를 따라 몇 번인가 산길을 오르곤 했다. 언니는 봄이 되어도 외출을 하지 않았다. 겨울보다 더 추운 봄을 맞이하는 것 같았다. 쉽게 감기를 앓고 몸져 누워 있던 언니의 핼쑥한 모습이 그걸 말해 주었다. 언니는 꿈속에 아들이 나타나 배가 고프고, 몸이 아프다며 울었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때마다 밥과 반찬을 사고가 났던 바로 그 자리에 가져다 놓고 울며 돌아왔다. 아들을 잃은 슬픔을 견뎌내지 못하여 정신의 혼돈을 겪고 있는 언니의 모습은 계속 되었다. 언니는 아들이 다니던 목욕탕과 문구점, 학교가 있던 동네를 떠나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 조카의 사진과 옷을 소각하며 울던 언니는 무엇보다 아들이 입고 나갔던 파란색의 옷만 보면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둘째아들이 생각나 나머지 두 아들에게는 파란색 옷을 절대로 입히지 않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이후론 나도 파란색을 기피하게 되었다. 청색과는 대조적인 분홍색과 노란색 등을 선호하게 되었다.
둘째조카가 살아있다면 어느덧 오십대 초반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돌이켜 보면 더욱 이해될 수 없는 일이 있다. 왜 하필이면 조카가 파란 옷을 입고 나갔을까 하는 것이다. 아마도 청색이 아닌 다른 색의 옷을 입고 나갔더라면 얼굴이 그토록 차갑게만 보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그리고 정말 우연이었을까, 죽은 조카의 이름에 푸를 ‘청(靑)’자가 들어 있다. 생각해 보면 파란색 티셔츠와 조카의 이름에 든 ‘청’자가 아무런 연관성이 없는 건 분명할 텐데, 왠지 모르게 막연한 연관성을 짓게 된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늘이 파랗다. 물기 젖은 하늘에서 금방이라도 생(生)을 다하지 못하고 간, 한 소년의 눈물 같은 푸른 물방울이 뚝뚝 떨어져 내릴 것만 같다.
*약력
-월간문예사조 등단(1993)
-수원문인협회 사무국장(1999-2007,2019)
-수원문인협회 수필분과위원장(2009-2014, 2018)
-수원문인협회 공로상
-한국문협 경기도지회 공로상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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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외투냄새
이인숙
이른 새벽, 무거운 몸으로 차창에 기대어 밖을 내다본다. 섬뜩한 어둠이 꽉 들어차 있는 하늘은 승복을 입은 듯 울적한 내 마음처럼 잿빛으로 가득하다. 나는 멍하니 시선을 한 곳에 두고 커튼을 내리지 못한 채 한동안 서 있었다. 뜻도 모를 긴 한 숨이 후우- 후우 내뱉어졌다. 가슴에 깊은 의문이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반복되는 일상의 흐름 속에서 자신의 존재의식을 그리워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내 마음은 막 집에 들어선 아이가 엄마를 찾다가 엄마가 보이지 않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녹색의 진한 잎들을 떨어뜨린 나무들의 잔가지에 애잔함이 서려있다. 진정한 일상의 행복은 무엇일까. 다시금 나를 돌아보며 의문부호 하나를 던져 본다. 내가 원했던 몇 가지의 삶의 의미를 얻었지만 그럼에도 가슴 한켠이 시린 이유는 무엇일까. 오랜 시간, 그 의문의 근원은 알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을 종종걸음 치며 바쁘게 살아왔다. 나는 그 속에서 어느 날은 한 계절이 빨리 바뀌기를 기다렸고, 어느 날은 뒷짐을 지고 느린 걸음으로 들길을 걷듯 유유자적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한때 지루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젊음이 사라진 지금의 시간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나약함을 안겨주었다. 사람은 각자가 비슷하거나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기도 하고, 나이와 환경에 따라 가치관과 인생의 목표가 다르기도 하다. 그렇다면 나의 요즘의 희망과 생활의 지표는 무엇인지 반문하고 싶다. 하지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한 채, 오늘도 날이 밝지 않은 여명의 시간 앞에 고개를 숙일 뿐이다.
오늘도 나는 왜 이리 조바심만 나는지 그저 울고만 싶다. 아침에 눈을 뜨면 분홍빛 베개 위에 눈물방울을 떨구기도 여러 번, 그랬던 자신의 마음을 어딘가 말할 데가 없어서 나는 수신처가 없는 마음의 편지를 쓰곤 했다. 그렇게나마 누군가와 마음의 대화를 하지 않으면 하루하루를 견디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던 중, 나는 그 절실한 고독의 실체가 유년의 기억을 현실로 되돌릴 수 없다는 불가항력의 무기력함 때문이란 것을 알았다. 지나간 날을 돌이킬 수 없다는 극단적인 무기력, 그 끝에 나의 아버지가 서 있었다. 그렇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버지를 추억하며 지내온 것이다. 나의 세월의 기억들은 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아스라한 과거의 추억 속에 머물러 있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어머니라는 단어에서 많은 정감과 깊은 모성을 얻는다. 나 역시 그러하다. 나의 어머니 역시 자식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으니까. 그런데 난 때로는 아버지가 어쩌면 어머니의 보여지는 사랑보다 숨은 부성으로 나를 더 깊이 사랑하시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러면서 아버지가 내게 주셨던 짙은 사랑의 끈을 이제는 이어갈 수 없음에 마음이 시려온다. 아버지……, 나는 오늘도 이 세 글자에 머물러 아버지의 그 허름했던 외투에서 나던 그 복합적인 냄새에 잠겨본다. 아버지의 고향은 이북이다. 전쟁의 상흔은 아버지에게도 인생의 오랜 시련을 주었다. 아버지는 집을 지키시겠다고 하시던 할머니를 북에 두고 피난을 오셨다. 그 때, 할머니는 아들인 나의 아버지에게 찰밥을 지어주시고, 솜바지를 만들어 입히셨다고 한다. 또한, 아들의 피난길이 걱정되어 완수라는 머슴도 달려 보내셨다. 하지만 아버지와 할머니와의 손은 더 이상 잡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늘 고향 하늘을 보며 어머니를 그리워했고, 그때마다 아버지의 눈에 눈물이 맺혀 있었다. ‘타향살이’나 ‘비 내리는 고모령’ 등의 슬픈 노랫소리는 어린 내 가슴에도 눅눅한 습기를 전해주었다.
아버지는 맏딸인 내게 늘 말씀하셨다.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를 가로질러 피난을 와서 처음 얻은 혈육이라고. 그래서일까. 아버지와의 추억은 나에게 항상 애틋한 그리움과 행복감을 안겨준다. 아버지는 산길을 걸을 때면 나의 발에 이슬이 묻을까봐 긴 막대기로 풀잎에 맺힌 물기를 털어내며 앞장을 서셨다. 어둔 밤길에선 무서워하는 나를 앞에 세우고 뒤에서 걸어오셨다. 아버지와의 추억은 또 있다. 아버지는 새 덫을 놓아 참새를 잡곤 했는데 나는 덫에 걸린 참새의 작은 몸에서 느껴지던 그 온기가 지금도 생각이 난다. 비에 젖은 나의 운동화를 연탄불에 말려주시던 아버지, 머리맡에 놓아둔 필통엔 항상 가지런히 작은 몽당연필까지 뾰족하게 심이 깎여져 있었다.
가슴이 찡한 기억은 또 있다. 종이가 없던 시골생활 속에서 아버지는 밀가루 포대 같은 누런 종이를 고깔모양으로 만들어 그 안에 건빵과 사탕, 과자, 껌 등을 담아 크리스마스때 자식들 머리맡에 하나씩 놓아두셨다. 나는 그것이 산타가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초등학교 사오 학년때 알았다. 장이 서는 날이면 형형색색의 드롭프스 사탕을 사주시던 아버지, 직접 장작불에 구워주시던 고기 맛은 평생을 입안에 머문다. 초록색 주름치마를 내게 입혀 서울나들이를 시켜주시던 아버지, 더운 여름날이었기에 나의 다리엔 초록색 물이 들어있을 정도로 그 시절의 염색기술은 낮았지만 아버지는 마지 나를 국어책에 나오는 그림 속 소녀로 키우셨다. 가죽가방을 어깨에 메고 운동화를 신고, 모자를 쓰고, 물통을 든 소녀가 바로 나였다. 그런 나를 친구들은 동창회에서 볼 때마다 부러웠다며 한 마디씩 한다. 아버지는 자식엔 나에게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도 반존칭을 하셨다. 남자에게 부엌일을 금기시하던 그 시절에도 아버지는 설거지를 해 주곤 하셨다. 곰곰 생각해 보면 그런 아버지를 만난 어머니는 행복한 여성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제는 너무도 많은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내 곁에 안 계시지만 나는 안방에 걸려 있던 아버지의 검은 색 모직외투가 지금도 눈에 남는다. 아버지의 체취와 외투냄새가 합쳐진 그것을 나는 아버지 냄새라고 생각하며 그 옷에서 나는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것은 이삼십년 오랜 세월 검소하게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이 묻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한 해가 바뀌고 이순의 나이를 지나면서도 모직 옷에서 나던 그 특유의 냄새를 오늘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새벽의 적막이 걷히고, 여름날의 파란 잔디 위를 총총히 걸어오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투영돼 온다.
*약력
-경기도문학상 신인상
-한국작가 신인상
-경기도문학상 작품상
-한국작가 이사
-경기도문인협회 홍보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