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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를 위한 미래
THE FUTURE WE WANT(2016)
바스카 순카라⋅세라 레너드 엮음, 황성원 옮김, 동녘 2017.
생태주의적 노동은 가능한가?
앨리사 바티스토니Alyssa Battistoni
제1회 지구의 날에서 40년이 지난 지금 이제는 환경주의자가 아닌 사람이 없지만, 환경은 그 어느 때보다 형편없는 실정이다. 우리가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종들이 대대적으로 죽어가고 있고, 바다는 이류 호러 영화의 플롯 같은 소리지만 산성화되고 있으며, 무수한 어장이 황폐화되거나 곧 그럴 위험에 처해 있다. 세계 인구의 절반이 거주하는 지역의 담수원이 말라가고, 농업 용지에서 영양분이 고갈되고, 삼림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밀려나고 있으며, 물론 기후변화는 이 모든 상황을 뒤덮을 정도로 큰 골칫거리다.
집단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는 인간 활동이 우리의 거주 방식을 위협할 정도로 전 지구를 바꿔놓았다는 사실에 직면했다. 그리고 환경은 한 가지 해법으로 개선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생각 역시 문제의 일부다. 환경문제의 종류는 다양하며 이에 대한 해법은 항상 정연하지만은 않다. 피닉스의 물 부족 문제는 로스앤젤레스의 대기오염 문제나, 루이지애나의 습지 소실, 대기 중 탄소 축적 증가와는 다른 문제다. 하지만 이들 위기의 공통분모는 환경주의에는 오래전부터 친숙한 장애물인 소비와 일자리가 제기하는 도전을 공유한다는 점이다.110-111
환경주의자들은 오래전부터 미국인들은 너무 많은 천연자원을 사용하고 있다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제 과소비에 대한 주장은 익숙할 정도다. 세계 인구의 5퍼센트가 자원의 25퍼센트를 사용하고, 온실가스도 거의 25퍼센트 가까이 배출한다. 만일 전 세계인들이 미국인처럼 생활할 경우 우리에게는 지구가 네다섯 개쯤 필요할 것이다. 우리는 고기를 너무 많이 먹고, 운전을 너무 많이 하며, 너무 큰 집에서 살고,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을 너무 많이 산다. 기후문제를 살펴보면 우리의 탄소 발자국은 위의 수치들이 시사하는 것보다 훨씬 나쁘다. 서구 국가들은 자신들이 사용할 상품의 생산을 다른 나라로 이전시키면서 엄청난 양의 온실가스 배출량마저 떠넘기고 있다.
물론 이런 국제적인 격차는 국내외 정의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고민거리를 던져주었다. 전 지구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미국의 빈민들은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더 잘산다. 따라서 이들 역시 문제의 일부에 해당한다. 하지만 〔미국의 만화가 월트 켈리가 그린〕 (유명한 ‘포고’ 지구의 날 만화 <우리는 적을 만났다. 그 적은 바로 우리다We have met the enemy, and he is us>가 전형적으로 보여주듯) 소비에 대한 논의가 보편적인 “우리”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을 띠긴 하지만 국가 평균을 보며 냉소적인 조롱을 날리기보다는 부유한 국가 내부를 더 자세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소비주의에 대한 묘사는 월마트와 맥도날드 같은 곳들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게걸스럽고 욕심 많은 대중이 문제라는 암시를 준다. 친환경 자동차 프리우스를 몰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도시의 아파트에서 거주하며 갓 수확한 유기농 케일을 먹는 돈 많은 사람들이 착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는 쉽다. 하지만 우리가 환경에 대해 신경을 쓰는지 안 쓰는지, 기후변화를 믿는지 안 믿는지, 커피의 원산지를 놓고 고뇌에 빠지는지 그렇지 않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과세 등급과 거기에 딸린 소비 습관이다.
프린스턴대학교의 스티븐 파칼라가 탄소배출 문제와 관련하여 지적했듯, “부자들은 정말 눈이 휘둥그래질 정도로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한다 (…) 상위 5억 명(인류의 약 8퍼센트)이 배출하는 온실가스가 절반에 달한다. 이들은 세계 기준으로 보면 정말 부유하다. 상위 8퍼센트에 속하는 사람은 평균적인 미국 사람보다 소득이 더 높고 전 세계 모든 나라에 존재한다.” 미의회 예산국Congressional Budget Office은 상위 20퍼센트의 탄소 발자국이 하위 20퍼센트의 3배 이상이라고 추정한다. 상대적으로 평등한 나라인 캐나다에서마저 소득이 상위 10퍼센트인 집단은 하위 10퍼센트에 비해 이동성 발자국이 9배 더 높고 소비재 발자국은 4배 더 높으며 전반적인 생태 발자국은 2.5배 더 높다. 그리고 소득 불평등이 늘어나면서 소비 격차도 그에 따라 더욱 벌어졌다. 가령 비행기 여행은 가장 급속하게 증가하는 이산화탄소 배출원으로 종종 언급되지만, 이는 저가 항공사 덕에 그만큼 비행기 여행이 대중화되어서가 아니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이동성이 높은 부자들 사이에서 비행이 그야말로 폭발적으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의 차이와 초국가적인 경향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해도 국가 간의 격차를 해결할 필요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지구상의 부자들이 나머지 세상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소비하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서구의 중위 수준으로 모든 사람의 수준을 끌어올려서 세계 소비수준을 고르게 만드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일정 수준의 전 지구적 평등을 달성하고자 한다면 아무리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의 소비를 한다 해도 부유한 국가의 소비는 감소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부유한 나라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는 긴축을 옹호하는 주장과 별로 다를 바 없는 미심쩍은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우리 지금껏 방탕하게 살았으니 이제는 허리띠를 졸라매자! 이는 어쩌면 금욕적인 성향의 환경주의나, 심지어는 일부 좌파의 비평 요소들과도 쉽게 조화를 이룰지 모른다. 하지만 타락한 소비 그 자체보다는, 그걸 즐길 수 있는 건 극소수뿐이라는 사실에 더 화가 나는 사람들에게 (소련의 침울함과 식량 배급을 받으려고 줄을 늘어선 허깨비 같은 사람을 떠올리기 싫은 건 말할 것도 없고) 소비를 제한한다는 발상은 대단히 우려스럽다. 소비에 대해 이야기하다보면 좋은 물건을 갖고 싶어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그릇되었다는 식으로, 불만을 도덕으로 포장하는 일이 쉽게 벌어진다. 그러니까 한때 사회 비평가들이 열을 올리던 소비문화 비판은 너무 청교도적이거나, 너무 거만하거나, 너무 고상한 척하는 걸로 비춰져서, 심지어는 너무 하품 나는 소리처럼 들려서 대체로 한물갔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소리다.113-114
하지만 소비의 다양한 형태를 구분해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반소비주의적 환경주의와 긴축의 수사들이 울림을 갖고 있긴 하지만, 공적인 소비를 축소할 경우 이는 사실상 환경 재난이 될 것이다. 공공재의 축소는 사적인 소비의 증대를 부추기는 경향을 보인다. 사람들은 버스를 타는 대신 자가용을 몰고 다니고, 공원을 찾는 대신 마당이 딸린 집으로 이사할 것이며, 도서관과 박물관에 가는 대신 책과 가정용 오락 기기를 구입할 것이고, 수돗물을 이용하는 대신 생수를 사서 마실 것이다. 그러니까 그럴만한 돈이 있다면 말이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물론 이런 걸 누리지 못하고 그냥 견뎌야 한다. 사실 환경문제를 해결하려면 미국인의 생활수준에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약이 가해지겠지만, 동시에 긴축 조치들이 장려될 것이라는 주장보다 더 기만적인 소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주류 정치 담론에서는 이런 태도가 폭넓게 퍼져 있다.114-115
그런데 일부 과장된 반소비주의 수사가 암시하듯 물건을 소유한다고 해서 그 사람이 가련하고 영혼 없는 물질주의자가 되는 것도 아니지만, 더 행복해진다는 증거도 많지 않다. 그보다 지위의 쳇바퀴는 종종 정반대의 상황을 야기한다. 즉, 분노와 결핍감, 부채에 기름을 끼얹으면서 동시에 회사의 이윤 대부분을 챙기는 임원들을 향해 돈을 상향 재분배하고, 이 모든 것을 민주주의와 자유라는 이름으로 치장한다. 그러는 한편 소비자들은 죄책감 때문에 (재생지로 만든 화장실 휴지, 유기농 티셔츠, “100퍼센트 천연” 세제 같은) 녹색상품들을 폭발적으로 구매하지만, 대부분은 전과 동일한 낡은 제품에 녹색 분칠을 해서 사용자에게 잘하고 있다는 뿌듯함을 선사하고 개인의 선택으로 지구를 구할 수 있다는 암시를 주는 짓에 불과하다.115-116
소비자 정치를 구성하는 개별적인 고통은 세계경제가 거의 무한정 팽창하는 소비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소비를 줄이게 되면 전 세계에서 수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만다. 세계경제가 붕괴한다는 주장에 위협을 느끼는 건 노동자들뿐만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위협을 느낀다. 쓰레기마저도 다른 곳에서 일자리를 만들어내고 있다.
사실 생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소비를 말할 수 없다. 생산은 우리에게 일자리를 가져다주고, 환경주의자들은 일자리를 없애는 데 앞장선다며 오랫동안 비난을 받았다. 환경사학자 리처드 화이트Richard White는 1990년대에 태평양 연안 북서부의 한 벌목 공동체에서 본 자동차 범퍼 스티커에 적힌 문구 “당신은 환경주의자입니까, 아니면 먹고살려고 일하는 사람입니까?”를 제목으로 한 자신의 에세이에서 환경주의자들은 현대의 노동과 자연과의 관계에 대해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 관계는 “오늘날 환경 위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형성하고 있다.” 분명 환경주의의 역사는 인간의 영향을 받지 않는 자연의 편린들을 유지하는 것이 목적인 프로젝트들로 점철되어 있고, 그 과정에서 종종 자연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악마화했다. 하지만 생태 문제에 대한 관심은 바로 그 핵심적인 관계를 재고하려는 노력을 활성화하기도 했다.116-117
대공황기의 정책들은 대부분 소비 진작을 목표로 삼았지만 농업정책은 생산을 감소시키려 했다. 농업조정국은 경작 면적을 줄이는 농부들에게 경제적 인센티브를 제공함으로써 잉여 작물을 줄이려 했다. 이 프로그램이 헌법에 위배된다는 판결이 내려지자, 이번에는 취약한 토지에서 경작하지 않는 농부에게 경제적 보상을 함으로써 더스트볼(Dust Bowl: 흙모래 폭풍이 심한 황진 지대)로 인한 토양 침식을 막는다는 구체적인 목표를 담은 토양 보존 및 가정 할당법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연방 정부는 “경작한계 이하의” 토지 수백만 에이커를 영구적으로 경작지에서 제외시키고 이를 공적인 통제 하에 두는 토지 구매 프로그램에 착수했고, 그 결과 국립 초원National Grasslands이 탄생했다.117-118
평등이나 사회정의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는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설계한 이 프로그램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 “경작한계 이하의” 토지는 그것을 소유하고 거기서 일하는 농부들이 권고된 토지 보존 실천을 이행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수익성을 내지 못하는 토지로 정의되었다. 그런데, 이 정책은 본질적으로 소작농들에게 부담을 주는 한편 산업 규모의 농업이 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함으로써 환경과 사회에 재난에 가까운 영향을 미쳤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친숙한 경제적 목표와 환경상의 목표 간의 긴장 관계가 실업자 고용을 의무화하는 긴급 구제 입법과 토지 보존 정책의 효율성 규정 사이의 잦은 충돌을 통해 가시화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뉴딜 농업 개혁은 일시적인 데다가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고, 과잉생산의 인센티브는 일시적으로만 억제되었다는 점이다. 도널드 워스터가 더스트볼에 대한 역사서에서 밝히고 있듯 이런 개혁 중 그 어떤 것도 “대평원 농업의 핵심을, 즉 무제한적인 확대와 자연으로부터의 자율성이라는 거기에 수반된 감각에 대한 관념을 건드리지” 못했다. 그보다 “문화적 개혁으로서의 보존을 대평원의 문화가 그 전통적인 팽창주의적 목표에 도달하도록 도움을 주는 곳에서 실제로 그렇게 도움을 주는 한에서만 받아들여졌다.” 가뭄이 진정되기 시작하자 생산은 다시 회복되었고, 근본적인 취약성은 고스란히 남게 되었다.118-119
하지만 이 모든 문제점과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들은 생산을 조직하는 여러 방식이 있음을 보여준다. 대공황과 더스트볼에 대한 대응에서 착수된 생태적 이니셔티브들은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생태계 서비스 지불제”의 최초 사례에 속한다. 이 용어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프로그램이 포함될 수 있지만, 일반적인 개념은 다양한 생태적 과정들(가령 수분이나 토양의 비옥도)을 규명하고 이를 화폐가치로 평가하는 것이다. 이는 철저하게 신자유주의적인 전략처럼 보이는데, 실제로도 종종 그런 방식으로 전개되어왔다. 하지만 애당초 생태계 서비스 지불제에 동기를 제공한 개념은 1970년대의 급진적인 여성주의자들의 가사 노동을 위한 임금Wages for Houswork 운동과 상당히 유사하다. 가사 노동을 위한 임금 운동은 자본주의가 가정의 사회적 재생산 노동에 의존하면서 이를 사랑의 행위라고 부름으로써 공짜로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운동은 가사 노동에 대한 인정과 임금 지불을 요구함으로써 “여성의 노동”에 대한 다양한 가정들을 뒤흔들고, 저평가된 노동이 다시 인정받을 수 있도록 강제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재생산 노동과 생산적인 경제에 대한 전통적인 개념들을 재고하게 만들고자 했다.119-120
임금 지불에 대한 구체적인 요구가 도발적인 출발점으로 작용하게 된 가사 노동을 위한 임금 운동과 마찬가지로, 생태계에 행해진, 그리고 생태계가 행하는 일에 대한 지불을 요구하는 것은 기존의 관념을 뒤흔드는 은유로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인간 사회와 그것이 발 딛고 선 자연계 간의 관계를 재고하는 더 넓은 프로젝트의 첫 단계로 작용하게 되었다. 생태계 서비스 지불제는 우리가 자연이라고 부르면서 공짜라고 생각하는 노동에 가치를 매기려는 시도로 출발했다. 따라서 당연하게 여기던 자연의 서비스들을 인식하고자 했고, 환경과 분리되어서는 생존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자 했으며, 인간을 원시 상태의 환경과 분리시켜야 한다고 강조하던 오래된, 그리고 종종 인종주의로 번지기도 하는 보존 개념들을 거부하고자 했다. 생태계 서비스 지불제는 생태계에 주어진 돌봄의 가치, 그리고 생명을 부양하는데 필요한 노동의 가치를 인정하는 경제를 제시한다. 또한 나무를 베지 않는 사람들에게 돈을 지불하는 프로그램처럼 지속 가능성의 이름으로 노동을 하지 않는 것의 가치 역시 인정할 수도 있다. 전 세계 지속 가능성을 위해 포기한 소득을 보상해주는 것이다.120-121
최소한 전에는 이런 식으로 사고를 했다. 생태계 서비스 지불제의 틀은 대단힌 불균등하게 이행되었지만, 종종 그것이 보호하겠다고 주장한 서비스의 사유화와 상품화에 앞장서는 꼴을 보이기도 했다. 생태계가 만들어낸 가치는 힘 있는 지역 행위자들이 종종 가로채 버리거나, 탄소 시장의 크레딧처럼 거래 가능한 상품으로 전환된다. 그러다 보니 생태계의 가치는 대단히 포착하기 어려워졌고, 환경상의 목표나 빈곤 경감 그 어느 것도 달성하지 못했다. 평등과 소유권에는 관심을 갖지 않은 채 생태계에 가치를 할당하는 생태계 서비스 지불제 프로그램은 종종 정부나 투자들이 갑작스럽게 수익성을 갖게 된 자연 자산들을 인수하도록 장려하고, 사람들이 생계형 보유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며, 거기서 발생하는 편익을 모두 투자자들에게 쥐여준다. 그러는 한편 생태계를 거래하고 판매할 수 있는 서비스들의 묶음으로 분할하면서 원래 보존하려고 했던 자연의 복잡성과 상호 의존성에는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다. 요컨대 한때 전도유망했던 숱한 개념들처럼 생태계 서비스 지불제 역시 전체적으로 신자유주의에 포획되어버렸다.121-122
하지만 생태계의 사용가치를 인정하고, 사람들이 말하는 환경문제는 생계 문제와 분리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려는 근본적인 원칙들은 아직 살릴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는 생태계 서비스를 돌보고 유지하는 데 들어가는 노동에 대해 그리고 지속 가능성이 개인과 지역사회에 부담시키게 될 비용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통 크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 노동과 비용은 우리 생각보다 더 광범위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분명 산업계는 안전과 오염 규칙 개선에 저항하기 위해, 압력에 못 이겨 황 처리 장치를 설치하거나 작업 공간에 적절한 환기 시설을 할 경우 업계에 재앙이 닥치고 수천 명이 일자리를 잃게 되리라고 위협하면서, 일자리를 없애려는 급진적인 환경주의자라는 대중적인 고정관념을 오랫동안 이용해왔다. 사라지게 될 일자리의 추정치는 대단히 과장되는 경향이 있고 산업계의 프로젝트들이 창출한다고 주장하는 일자리들 역시 크게 과대 포장된다. 가령 [에너지 회사인] 트랜스캐나다TransCanada는 키스톤 XL 타르샌드 파이프라인을 건설하면 2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된다고 주장해왔고, 국무부는 약 5000개 이상의 일자리가 생긴다고 추정하지만, 대부분이 임시직이다. 환경 규제는 아무리 모든 것을 감안해도 때로는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지만, 어쨌든 산업계 내의 일자리를 없애고 때로는 산업 자체를 없애버리기도 한다. 그리고 석탄 광산과 오일 시추처럼 노골적인 채취 업종들은 생태 친화적인 미래가 동터오면 뒷전으로 밀리게 될 기본적인 관행의 사례에 속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게 그렇게 분명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122-123
“녹색 경제”는 그저 같은 물건의 “녹색” 버전을 만들기다. 허머자동차뿐만 아니라 태양광 패널도 만드는 그런 경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공공사업 형태의 생태 케인스주의는 경전철 시스템을 구축하고, 주택의 단열을 보강하며, 악화된 생태계를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준다. 분명 할 일은 널려 있다. 하지만 녹색 일자리의 급증은 끊임없이 확대하려는 생산력주의를 통해 일자리를 창출하지 않은 채, 모든 사람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경제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그렇게 많은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문제는 녹색 경제의 모든 세부 사항들이 완전하게 펼쳐지지 않았다는 점이 아니다. 녹색 일자리에 대한 요청은 노동과 환경주의자 간의 굴곡진 관계의 역사를 인정하고, 지속 가능성이 노동자나 노동자 공동체의 희생을 발판으로 삼지 않아야 한다는 약속으로 나아가기 위한 것일 뿐이다. 여기서 제시하는 상은 미래의 투영이 아니라 과거의 그림자다. “신경제”에 대한 대부분의 상이 오래전의 상과 똑 닮은 모습인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상들은 기후변화가 우리 세대의 뉴딜 혹은 제2차 세계대전이 되리라는 희망을 숨기지 않고, 우리를 고난의 시대에서 구원하여 일자리와 광범위한 번영의 새로운 시대로 이끌 것이라고 호들갑을 떨어댄다. 하지만 이런 시각 아래 자리한 케인스주의는 문제를 과잉생산이 아니라 과소소비라고 설정하고 이에 대한 답으로 제시한 것이다. 즉, 이때의 케인스주의는 공급을 줄이는 것이 아니라 수요를 끌어올리려는 의도에서 소환된 것이다. 만일 과잉 소비가 문제라면 아무리 상품에 생태 인증을 한다 해도 더 많은 소비로 이를 해결하지 못한다.123-124
실제로 녹색 일자리가 경제적 회복을 유도하리라는 생각은 미국에서 꾸준한 헤게모니를 유지하고 있는 생각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녹색 기술은 녹색 일자리만큼이나 중요한 일이고, 미국은 우위를 유지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전 세계 거의 모든 나라가 비슷한 희망을 품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들이 다른 나라들에게 따라 잡힐까봐 그렇게 전전긍긍한다는 사실은 꾸준한 성장이 지속되면 언젠가는 모두가 나쁘지 않은 생활수준을 만끽할 수 있는 최종 지점에 도달하리라는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다. 녹색 기술 분야의 선두 주자가 되기 위한 전 세계적 경주는 기술적 돌파구를 어느 정도 만들어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끝이 없는 경주가 될 것이다.124-125
다행히도 이를 위한 방법이 그것뿐인 것은 아니다. 뉴딜을 둘러싼 신화는 종종 대공황에 대한 노동계의 대응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주당 노동시간을 30시간으로 줄임으로써 기존의 일자리를 폭넓게 나누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가려버린다. 케인스 자신은 20세기 말이 되면 주당 노동시간이 15시간이 되리라고 예언한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 대신 금융정책을 가지고 소비를 진작하겠다는 결정은 더 깊은 구조적 변화를 피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파이를 누가 제일 많이 먹는지 캐묻는 대신 파이를 늘리기로 한 것이다. 그 이후로 여가 시간을 늘리는 대신 생산성을 향상시켜 사적인 소비를 늘리는 전략이 이어져왔고, 그 성과는 점점 더 소수의 사람들에게 집중되었다. 물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여가를 갖는다. 고용주는 노동시간을 줄이려 하고, 노동자는 필사적으로 더 길게 일을 하려는 상황이 빈번하게 연출된다. 이제는 과거보다 훨씬 적은 노동으로도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음이 분명해졌다. 하지만 점점 얇아지는 월급봉투에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들을 부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양의 노동이다. 신고전 경제학자들이 소비냐 여가냐를 개인의 선택으로 제시할 때, 일차적으로 사람들이 일을 하는지의 여부는 사회 전체 수준에서 내려진 결정에 의해 분명하게 정해진다.125-126
먼저 우리가 오늘날의 뉴딜을 어떤 식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좋을지 생각해보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우리는 더 적게 노동하는 삶으로 분명하게 넘어가고 (소비 아니면 여가라는 식의 선택에서, 사회적 수준에서의 여가로 방향 수정) 보다 균등한 상태로 남아 있는 노동을 공유할 필요가 있다. 사회학자 줄리엣 쇼어Juliet Shcor는 생활수준을 조금도 하락시키지 않고 하루 4시간만 일하며 살 수 있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신경제 재단은 주당 21시간만 노동해도 먹고 살 수 있다고 제언한다. 한편 데이비드 로스닉David Rosmick과 마크 웨이스브롯Mark Weisbrot은 주당 35시간 일하고 6주간 휴가를 갖는 서유럽과 유사한 스케줄로 바꾸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비를 20퍼센트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론 이걸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빈곤을 더욱 가속화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쇼어와 카일 나이트Kyle Knihgt, 진 로사Gene Rosa는 지난 50년간 산업국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노동시간 단축은 생태 발자국 축소와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아냈다.126-127
생계유지를 위해 사람들에게 사기를 꺾는 재미없는 일들을 시키는 것은 항상 심술궂은 일로 여겨졌지만, 이제는 자살을 유도하는 행위로 볼 때가 되었다. 경제를 성장시켜 사람들이 생계를 유지하게 만드는 것은 재난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일자리를 죽이는 환경주의를 복원할 때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노동자나 심지어는 노동을 악마화하는 프로젝트로서가 아니라 노동을 위한 노동을 거부하는 프로젝트로서 환경주의를 복원해야 한다. 실업자와 “근면하지 못한 빈민들”에게 낙인을 찍고 범죄자화하지 말고, 데이비드 그레이버David Graeber의 제언대로 이들을 “신경제 질서의 개척자”로 봐야 한다. 이 새로운 경제 질서에서 우리는 모두 적게 일하고 적게 소비하며 다른 것들을 추구할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노동을 공유하고 더 적게 일해야 한다는 요구가 그렇게 올바르지만은 않다. 환경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일자리뿐만 아니라 노동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화이트의 지적처럼 아무리 토지에서 떨어져 있다 해도 환경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노동이나 인간 활동은 없다. 물질적인 집약도가 높은 노동과 낮은 노동이 있을 뿐이다. 생태적으로 생기 있는 미래는 전형적으로 저평가되거나 아예 노동으로 간주되지 않던 종류의 노동들, 그러니까 사람과 생태계를 대상으로 이루어지던 돌봄 노동, 교육, 판매보다는 서비스와 경험을 만들어내는 노동, 지역사회를 건설하는 노동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노동을 낭만화 하는 것은 위험한 짓이다. 패스트푸드를 먹는 대신 텃밭을 가꾸고 장아찌를 만들어 먹는 것은 여성들의 중노동에 기반한 체제를 다시 부활시킬지 모른다. 하지만 제대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생태적 관점에서 노동의 재평가는 사회 세계를 빚어내는 부불 노동을 승격시킬 수 있다. 주당 노동시간을 줄이자는 제안들은 종종 사람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그러니까 가족과 시간을 보내고, 소설을 쓰고, 텃밭에서 재배한 신선한 채소들을 가지고 정성 들여 식사를 준비하는 등의 일을 하도록 더 많은 시간을 주자는 근거로 옹호된다. 하지만 이런 활동들을 “여가”라고 부를 경우 더 적은 물건들을 가지고 인생을 가치 있고 충만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 이런 활동들이 가진 중요성을 반감시킨다. 유사하게 “여가”라는 단어는 자연재해에서 살아남으려면 튼튼한 방파제만큼이나 튼튼한 공동체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특별히 신뢰하지도 않는다. 만일 우리가 튼튼한 방파제를 짓는 사람에게 돈을 준다면 튼튼한 공동체를 만드는 사람에게 돈을 주지 말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128-129
요컨대 우리는 기존의 생산 개념을 소득과 분리시키고 사회적 임금(어쩌면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보편적인 기본 소득이라는 형태일 것이다)을 도입할 필요가 있다. 기본소득은 그 자체로 환경문제를 해결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기본 소득이 석탄 발전소를 태양광 패널로 대체하거나, 고갈된 대수층에 대한 압력을 완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노동과 생산, 소비 사이의 관계를 재고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출발점이 될 것이며, 이런 관계 재고가 있어야만 환경주의는 역시 어떤 방향으로든 뻗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기본 소득은 파괴적인 산업에 의존하지 않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인 지역사회에서 일자리 갈취의 위협을 덜어줌으로써 변화를 실제 가능한 선택지로 만들고 노동자와 지역사회에 환경적인 위해를 억제할 수 있는 보호 장치를 요구할 더 많은 힘을 쥐어줄 것이다. 이는 소비격차 해소라는 영원한 게임에서 양질의 삶으로, 사회적 초점을 옮기기 시작할 수 있다. 소비의 상한선을 억제하는 데는 별 도움이 되지 못하리라는 점은 인정하지만, 대신 방향 정도는 제시해줄 수도 있다. 환경주의자들은 사람들이 모두가 공유하는 대의를 위해 소비에 대한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증거로 제2차 세계대전을 거론하곤 하지만, 소위 가장 위대한 세대[대공황기에 성장해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세대]가 정확히 애국심에 충만해서 배급품을 받아들고 전쟁에 뒤어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의 경험은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소비를 제약하는 것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보다 더 싫어하는 건 다른 사람들은 안 그러는데 자신들만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이라는 걸 분명하게 보여준다. 이 같은 정서는 반복지 정치에서도 전형적으로 동원된다.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그냥 놀면서 수당을 받는데 나는 일을 해야 하는가? 하지만 전쟁을 치르는 동안 정반대의 상황이 벌어졌다. 인구의 60퍼센트 이상이 연소득을 2만 5000달러로 제한하는 것을 지지했던 것이다. 이를 오늘날의 화폐가치로 환산하면 겨우 31만 5000달러밖에 되지 않는다.130
물론 노동의 굴레에서 벗어난 미래는 오래전부터 거론되었다. 이를 그렇게 시급한 문제의 해법으로 제안하는 것은 대단히, 심지어는 무책임할 정도로 유토피아적으로 보일지 모른다. 혁명이 때맞춰 일어나 환경 재난을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린 그런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높은 실업률이 정상이 되어버린 나라에서 기본 소득은 그렇게 설득력이 떨어지는 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이는 진지한 요구이며, 브라질, 인도, 나미비아에서는 시범 프로젝트가 시행 중이다. 아프리카의 일부 기후 활동가들은 부유한 나라에서 생태 부채로 걷은 돈을 가지고 기본 소득 재정을 마련하자는 주장을 핵심적인 요구로 삼기도 한다.131
사실 미국조차 몇 가지 흥미로운 기회를 보여준다. 정직한 탄소세나 총량 제한 거래제에 대한 가장 널리 알려진 진보적인 대안은 탄소세로 걷은 돈을 모든 시민에게 무조건적으로 분배하는 세금 배당tax-and-dividend이라고 하는 정책이다. 이는 모든 알래스카 주민에게 지불하는 석유 배당금과 유사하다.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탄소세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에너지 가격 상승에 대한 보상 메커니즘이라고 주장한다. 좀 더 직설적인 정치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인기 없는 세금에 대한 지지를 모을 수 있는 일종의 뇌물과도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다. 지금 설계된 계획에 대해서는 많은 비판이 존재한다. 특히 그것이 다른 기후 해법들과 연계되지 못할 경우 발생할 수 있는 문제에 대한 우려가 크다. 개별 배당금으로는 제방을 관리하지도, 대중교통 시스템을 지원하지도, 적정 가격의 도시 주택을 건설하지도 못한다. 하지만 이 정책에는 새로운 책임과 관계를 형성할 잠재력이 있다. 부자들의 환경적으로 파괴적인 소비 습관에 부과한 세금을 주재원으로 삼아 모두에게 일정한 소득을 보장하자는 최초의 제안이기 때문이다. 이 정책은 대기가 공공의 소유라는 선언이며, 공공 자원에 대한 참신한 주장이다. 이 정책을 조건 없는 생계 지원과 환경적 지속 가능성을 연결하는 가교로 바라볼 때, 이는 생산적인 투입물과 무관하게 모두를 위해 괜찮은 생활수준을 보장해주는 훨씬 더 큰 프로젝트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또한 이 프로젝트는 비극을 마비시켜버리는 서사로부터, 기만적이지만 끈질기게 연명하고 있는 그 서사로부터 천연자원의 공적인 소유권과 환경적인 공유재들을 되찾아올 가능성도 있다.
이런 이야기들은 어쩌면 우울한 미래에 대해 과도하게 낙관적인 태도일 수 있다. 확실한 것은 이것이 해법 그 자체라기보다는 전반적인 방향성에 대한 제언이라는 점이다. 환경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아이디어들을 과거의 경험에서 끌어올 수는 있지만, 지금 우리 앞에 놓인 문제에 완전히 부합하는 실제 실례는 존재하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말해 화석연료에는 대단히 유용한 독특한 속성이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이런 화석연료를 발판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우리는 특히 지구 자체의 변화가 우리 주위에서 감지되고 있는 이때에 이 화석연료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앞으로 이 중 일부를 밝혀내야 할 것이다. 환경문제를 다루다 보면 토지이용 계획과 도시 개발에서부터 이주, 그 외 다양한 문제들에 이르기까지 여기서 모두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변화가 나타날 것이다.132-133
사실 기후변화 자체의 영향뿐만 아니라, 기후변화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영향들은 이 문제를 유발하는 원인을 가장 적게 제공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위해를 안길 수 있다. “기후 보강”이라는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는 도시경관 개조에 대한 새로운 열광은 익히 친숙한 인종과 계급의 구분선을 따라 지역사회를 파괴하고 이주시켜버린 (뉴욕 시의 도시계획을 책임졌던) 로버트 모지스Robert Moses의 시대로 회귀할 위험이 있다. 탄소에 매겨지는 가격은 다시 활기를 띠게 된 도시 중심부의 창조 계급이 스스로의 생태적인 마음가짐에 도취해 있는 동안, 결국 갈수록 노동계급의 비중이 늘고 있는 교외 지역을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북반구에서 적응과 완화에 쓸 수 있는 재원이 줄어들 수도 있다. “균형”이라는 안정된 기본 상태를 가정하는 평형 모델은 경제에도 생태계에도 적용하기에는 뒤떨어졌다는 인식이 점점 늘고 있긴 하지만, 기본 생계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회적 보장을 약속하지 않았을 때 복원력과 유연성, 적응에 대한 논의는 영구적인 위태로움을 정당화하는 꼴을 면키 어렵다.133-134
마이클 하트는 2009년 코펜하겐 기후정상회담 담장 밖에서 이어진 시위를 관찰하고, “또 다른 지구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경고한 한계에 대한 인식과, “모두가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이라는 구호가 함의하는 무제한성 간의 명백한 긴장을 고찰하면서, 지구의 현실적인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우리의 무제한적인 창조적 역량을 배양하는(한계가 정해진 지구상에서 한계가 없는 세상을 구축할) 공통의 정치를 개발할“ 필요를 제기했다. 여기서 갑자기 버지니아 울프를 언급하는 것은 이상해보일 수도 있지만, 여성주의 논의에서 중대한 저작으로 유명한 버지니아 울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이런 정치의 선언문 역할을 할 수 있다. 이 글에서 울프는 ”소유의 본능, 습득에 대한 열광“에 대해 고찰한다. 이 본능과 열광은 ”1년에 500파운드만 있으면 한 사람이 화창한 햇볕을 받으면 살아갈 수 있음에도, 증권 중개인과 위대한 바리스타가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건물 안에 처박혀 지내게“ 만든다. 울프에 따르면 이 500파운드만 있으면 자기가 원할 때 생각에 잠기고 글을 쓸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우리는 이 목록에 몇 가지를 추가할 수도 있지만(가령 보편적인 의료 서비스와 버스 승차권), 화창한 햇볕을 받으며 70억 명이 지구상에서 살아가게 만들려면 얼마나 들지를 계산하는 것은 21세기의 중요한 과제다.134-135
노동에서 벗어난 미래는 종종 희소성에서 벗어난 사회의 특징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임금노동으로부터의 해방과 노동을 넘어선 자기실현의 꿈은 불현 듯 유토피아가 아니라 반드시 필요한 일처럼 보인다. 자원의 제약에 맞서서 그럭저럭 괜찮은 삶을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개인의 소비를 생산과 분리시키는 일인 듯하다. 그리고 소비에 부착된 도덕적 가치와, 소비와 황량함 간의 관계를 파고들기에(그러면서도 정반대 방향으로 질주하여 소비 그 자체에 가치를 매기지 않을 수 있는) 이보다 더 중요한 때는 없었다. 어쩌면 희소성에서 벗어난 사회에서는 일반화된 희소성에 대한 두려움과 일반화된 방종함의 꿈 사이 어디쯤에서 우리가 소위 풍요의 시대에는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던 것들, 그러니까 모두에게 충분한 삶과 하고 싶은 것을 할 시간을 얻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135-1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