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날이 장날 / 최미숙
8월 8일이 되어서야 서울 갈 짬을 냈다. 올해 첫 나들이다. 작년 11월 결혼한 큰아들 신혼집을 한 번도 가지 않아 아들 내외 사는 집과 삼성 이건희 회장이 살아생전 수집해 기증한 문화재 전시회 ‘이건희 컬렉션’〈어느 수집가의 초대-故 이건희 회장 기증 1주년 기념전〉도 보고 싶었다. 8월 28일까지가 기간이라 딸 방학에 맞춰 날을 잡았다.
중부지방에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애들 줄 반찬과 간단한 소지품만 챙겼는데 가방이 두 개다. 12시 22분 출발로 남편이 역까지 데려다준다기에 느긋하게 11시 40분쯤 나섰다. 그런데 하필 엘리베이터가 점검 중이다. 무거운 가방을 들고 13층에서 걸어 내려갔다. 역에 도착해 내리려는데 손이 허전하다. 식탁 위에 스마트폰을 두고 왔나 보다. 시계를 보니 11시 50분이다. 집에 갔다 오면 기차를 놓칠 것 같았다. 그런데 어쩌나, 모바일 승차권이랑 카드가 없는데. 차를 돌려 집으로 갔다. 13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하는데 마음이 조급해진다. 얼마나 속력을 냈는지 역에 다시 도착하니 열 두시다. 한숨 돌렸다.
매번 서울 가는 사람은 왜 그리 많은지 기차에는 빈자리가 없다. 위쪽으로 갈수록 날이 흐려지더니 천안부터 비가 내린다. 오후 3시 용산역에 내리니 딸이 마중 나왔다. 서울은 흐리기만 하다. 먼저 딸 집에 들러 짐을 풀었다. 큰아들과는 퇴근 시간에 맞춰 신혼집 부근 신당동 지하철역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다. 다섯 시, 지하철 타러 가는데 비가 내린다.
얼마만큼 갔을까, 지하철 창에 굵은 빗줄기가 내리친다. 순식간에 주변이 컴컴해지면서 소리까지 요란하다. 딸이 아들과 통화하더니 미리 나와 입구에서 기다린다고 했다. 지하철 계단을 오르려니 우산을 쓰고 웃는 아들이 보인다. 손을 흔들었다. 점점 세진 빗줄기에 입구에 선 사람 모두 물에 젖은 생쥐 꼴이다. 비는 어느새 폭우로 변했다.
바람과 함께 사방에서 비가 친다. 빗줄기가 물결 춤을 추며 달려든다. 우산이 아무짝에 쓸모가 없었다. 오 분이 겨우 지났을까, 온몸이 쫄딱 젖었다. 순식간에 도로가 강으로 변했다. 퍼붓는 비를 피해 어딘지도 모르고 따라갔다. 주변을 둘러볼 겨를도 없이 높은 건물로 들어섰다. 몸에서 물이 줄줄 흐른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서 멈췄다. 아들이 이끄는 대로 들어갔다. 방 두 개, 조그만 거실 겸 부엌, 화장실에는 샤워부스까지 집은 좁지만 아담했다. 엄마 온다고 청소까지 깨끗하게 해 놨다.
수영복 바지와 셔츠로 갈아입었다. 입고 간 반바지와 윗도리는 탈수해 선풍기에 말렸다. 비때문에 저녁밥은 시켜 먹자고 하니 나가잔다. 몸도 찝찝할 뿐 아니라 옷이 마르지 않아 난감했다. 가까운 곳에 유명한 고깃집이 있다고 해 수영복 바지를 입은 채 나갔다. 비가 계속 오면 바로 지하철역으로 가려고 덜 마른 옷을 챙겼다. 퇴근이 늦은 며느리는 식당으로 오라고 했다.
식당 앞은 사람들로 붐빈다. 줄 서 먹는 곳이라더니 젊은 사람으로 꽉 찼다. 방송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점점 는다고 난리인데 그런 말이 무색했다. 구석진 곳에 자리 잡았다. 조금 있으니 며느리가 들어온다. 남편 생일 때 보고 3개월 만이다. 반가웠다. 두꺼운 삽겹살이 나온다. 전라도와 달리 야채는 없고 대신 소스에 찍어 먹는다고 했다. 술도 한 잔씩 하며 그동안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손님이 계속 들어와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지나던 사람이 빗줄기가 약해지기를 기다리며 찻집 앞에 삼삼오오 서 있다. 그런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비는 더 세게 내리친다.
아홉 시가 넘어 집에 가려고 나왔다. 물 폭탄이 쏟아진다. 115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그냥 들어가라는 데도 아들 내외는 지하철역까지 따라온다. 비 피하려고 뛰다가 미끄러워 넘어졌다. 일어서 다시 뛰어 지하철 역사로 들어갔다. 놀란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인다.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다음날 안 사실이지만 우리가 기분 좋게 밥 먹는 시간, 서울 부자 동네 강남과 서초가 물에 잠기고 맨홀에서 솟아 나온 물에 남매가 휩쓸려 실종되었다고 했다. 갑자기 밀려온 폭우에 문도 열지 못한 채 구조를 기다리던 사람이 죽었고, 반지하 집이 물에 잠겨 모든 것을 잃었다고 했다. 모두 우리 사회 약자다. 폭우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는 처참했다. 인터넷으로 피해 영상을 보니 마음 아팠다. 없는 사람에게는 비조차도 가혹하다. 재난이 평등하지 않다는데 맞는 말이다. 강남이 물에 잠겼다지만 정작 고생하는 사람은 경비원, 관리사무소 직원, 청소노동자들이다. 같은 서울인데 분리된 세상이었다.
밤새 비가 왔다. 실시간 기사를 보니 사방에서 물난리가 났다고 했다. 거실 창을 때리는 빗소리에 놀라 문을 꼭 닫고 딸과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다행히 다음날 수요일은 언제 그랬냐 싶게 날이 맑아 벼르던 ‘이건희 컬렉션’을 보러 국립 중앙 박물관을 다녀왔다. 침수지역 사람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요란했지만 서울 간 목적은 달성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다. 일부러 비 오는 날에 맞춰 날짜를 정한 것 같다. 순천에 도착하니 이슬비가 내린다. 이곳은 아직 가뭄으로 상사댐은 바닥이 드러나 풀까지 자란다. 전문가들은 지구 온난화로 앞으로 이런 재난이 더 자주 일어날 거라 경고한다. 반지하에 사람이 사는 한 피해는 계속 될 것이다. 물이 불보다 무섭다는 것을 실감했다. 폭우가 진짜 폭탄이 돼 가난한 사람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뭐든지 넘쳐도 모자라도 안된다. 희생자의 명복을 빈다.
첫댓글 잊지못할 서울 나들이 되셨네요. 두고두고 이야기 나눌 수 있겠어요. 재미나게 잘 읽었습니다.
뭘 쓸까 감 잡지 못하고 있었는데 선배님 글 읽다 보니 글감이 떠오르네요. 그런데 너무 비슷하니 아껴 둬야겠어요.
난처한 상황이 환하게 그려집니다.
'운수 좋은 날'이네요. 글을 읽으며 최 선생님과 같이 있는 듯 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선생님 글 조마조마 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댁까지 안전하게 돌아오셨을 떼 휴우 안도의 숨이 나왔어요.
그래도 특별한 추억이 되셨네요.
기후가 비정상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큰일입니다.
선생님의 차분하고 잔잔한 글 잘 읽었습니다.
글로 그림을 그렸네요. 구체적으로 잘 썼다고 칭찬 받겠어요.
화면으로만 보았던 폭우를 직접 경험하셨네요. 내가 겪은 듯 잘 익었습니다.
출발부터 기억에 남는 여행이었네요. 물난리가 나서 긴장된 서울 모습을 선생님의 글로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