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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 (서안(병마용)-장예(칠채산,마제석굴)-돈황(막고굴.명사산.월아천)
서안의 옛 이름은 장안, 산시성의 성도이다. 중국 6대 중심도시 중의 하나이며,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와 문화를 가진 이름난 도시이다. 끝없이 넓고 다채로운 대륙, 수천 년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세계문화유산을 탐방하고 눈과 입이 함께 행복해지는 산해진미를 만난다. 현대적인 대도시에서 아름다운 자연 속의 오지마을까지 천 가지 얼굴을 지닌 중국. 구석구석 즐거움이 넘치는 중국, 세계에서 4번째로 국토가 넓은 나라이자 지구 대륙의 15/1, 아시아 대륙의 4/1을 차지한 중국에는 사막, 초원, 고원, 만년 설산, 열대 우림 등 93개 지역, 다양한 자연이 펼쳐진다. 이 넓고 다채로운 땅에는 13억이 넘는 중국인이 살고 있다. 전 세계 인구의 19%를 차지한 중국인은 56개 민족으로 구성돼 있다. 다민족 국가인 중국은 길고 복잡한 역사를 가졌을 뿐 아니라 다양한 종교와 문화가 공존한다.
진시황의 병마용
붉은 구릉 안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비취 못으로 봉인된 방이 있다. 그의 유해는 그 방의 유리관 속에 누워 있다. 가까운 어둠 속에는 천체 모형이 놓여 있다. 둥근 천장에는 별들을 나타내는 보석이 반짝이고 수은으로 만든 쌍둥이강이 수은 바다 속으로 조용히 흘러든다.
황제의 무덤을 지키는 자동 쇠뇌는 침입자를 기다리며 지난 22세기 동안 그랬듯이 출입문 쪽을 겨냥하여 언제든지 화살을 날릴 수 있도록 장치되어 있다.
그의 이름은 영정이었고, 열세 살 때 왕위를 계승 했다. 하지만 그는 일국의 왕이 되는것 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야심만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중국대륙의 여섯 나라를 평정할 때까지 25년 동안이나 싸웠다.
백만 명의 병사와 만 필의 말, 그리고 천대의 전차를 이끌고 누에가 뽕잎을 먹어 치우듯 적을 무찌를 때까지 싸웠다.
그는 단 한 차례의 원정에서 무려 4만 명의 적병을 몰살했고, 승리를 거두자마자 적의 무기를 모조리 녹여서 그것으로 자신의 동상을 만들었다.
천하를 통일하고 나자, 그는 자신의 위세에 어울리는 새로운 칭호가 필요했다. 그것이 바로 ‘황제’라는 칭호였다. 그는 진나라 출신이고 새로운 왕조, 그는 이 왕조가 앞으로 만세까지 지속할 거라고 믿었다. 진의 창시자였기 때문에 그의 정식칭호는 진시황제가 되었다.
오늘날 영어에서 중국을 지칭하는 낱말인 차이나(China)는 바로 ‘진(Chin)에서 나온 이름이다. 시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영원히 존속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는 봉건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군현제로 재편성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의 통일국가를 세웠으며 통일된 법령으로 전국을 다스렸다. 제국의 변방들을 중앙과 연결하기 위해 방대한 도로망과 운하망을 건설했다. 관개시설은 농업의 생산성을 증가시켰다.
행정에 편리하도록 문자를 간략한 예서체로 통일하고 상업활동이 수월하게 이루어지도록 도량형도 표준화했다. 이런 진보적 조치 때문에 진시황은 20세기의 중국 지도자 마우쩌뚱 (모택동)에게 영웅이 되었다. 진시황이 지방 호족들을 토벌함으로써 근대적인 중앙집권 국가를 창시했다는 이유로 마우쩌뚱은 시 황제를 존경했던 것이다.그러나 마우쩌뚱의 ’대약진운동‘이 무자비했듯이 진시황의 개혁은 무자비했다.
마우쩌뚱의 문화 혁명 때 수많은 학자들이 핍박을 받은 것처럼 진시황 시절에도 많은 유학자들이 탄압을 받았다. 황제의 지배를 떠 받치고 있던 법과 사상만이 인정되었고, 그 밖의 사상에 대해서는 책을 불사르고 유학자들을 생매장했다. 그리고 ’진시황‘ 이라는 한 인간의 꿈을 이루기 위해 민중은 가혹한 노역과 무거운 세금 부담을 짊어져야 했다.
황제는 웅장하고 화려한 새 도시를 제국의 수도로 건설했다. 오늘날 산시성의 ’훼이허강‘ 유역에 있는 서안에서 북서쪽으로 조금 떨어진 센양이 바로 진의 도읍지였다. 이 도시는 웅장한 설계도에 따라 방대한 규모로 건설되었다. 정궁 하나만 해도 동서로 2.25km 남북으로 0.8km에 방이 수천개 였으며 특히 알현실은 만명의 신하가 동시에 앉을 수 있는 규묘였다. 하지만 이 정궁은 270개의 별궁과 이어져 있었다. 지붕을 씌운 통로를 통해 서로 연결된 별궁들은 황제가 밤마다 다른 궁전에서 잠을 잠으로써 암살을 피할 수 있도록 건설되었다. 이 도시는 결국 불태워졌는데 꼬박 석 달 동안 계속 탔다고 한다. 황제의 기념물 가운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북방을 가로지르는 장벽이었다. 이 장벽은 원래 북방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선으로 세워졌지만 또 다른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 신생 국가의 경계를 물리적으로 명시해 준 것이다. 우리는 이걸 ’만리장성‘이라고 부른다.
만리 장성
기원전 5세기에 축조된 만리장성은 사실상 그 전에 있었던 봉건시대의 성벽들을 서로 연결하여 하나의 방벽으로 만든 것이다. 만리장성을 세우는 데에는 10년이 걸렸고, 전쟁포로와 유죄 선고를 받은 유학자들의 강제 노역으로 세워졌다. 장성을 세우는 동안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전설을 믿는다면 그렇게 죽은 사람들의 뼈를 갈아서 모르타르에 섞었다고 한다. 이리하여 만리장성은 지구상에서 가장 긴 묘지가 되었다.
장성은 길다. 태평양에서 고비 사막까지 2700m나 뻗어있다. 하지만 용처럼 뒤틀리며 구불구불 뻗어 있기 때문에 그 굽이진 곳을 직선으로 펴면 두 배가 넘는다. 지구 둘레의 20분의 1에 이르는 이 장성은 인간의 손이 지구에 남긴 가장 긴 자국이며, 가장 긴 무덤이다.
평균 6m 높이의 장벽 위에는 여덟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을 만큼 넓은 도로가 있다. 그 사이사이에 12m 높이의 망루가 모두 2만 5천 개가 서 있다. 망루의 간격은 사정거리의 두 배여서 화살이 닿지 않는 사각지대가 없이 완벽한 방어가 이루어 지도록 되어있다. 반란이 일어나면 봉화를 올려 신호를 보내는데 이 망루들을 따라 전달되는 신호는 24시간 이내에 고대 중국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만리장성 축조와 쌍벽을 이루는 것 은 진시황이 자신의 마지막 휴식처를 짓는데 기울인 노력뿐이다. 전설에 따르면 시 황릉 건설에 7만 명이 강제로 동원되었다. 완성하는 데에는 10년이 걸렸다고 한다.
시 황릉은 피라미드 모양의 구릉이었다. 이 구릉은 우주의 형상에서 하늘의 정점을 상징한다. 이 황릉은 네모 난 기단의 한 변이 400m를 넘고, 모두 3층으로 되어 있지만 전체 높이는 15층 건물과 맞먹는다. 이중 담장으로 둘러싸인 이 황릉은 신전과 그 밖의 기념물과 함께 영계의 도시를 이루고 있다. 1세기 뒤에 쓰인 역사책은 무덤 안에 아름다운 가재도구와 보석 및 진귀한 물건뿐 아니라 궁전과 탑, 관청건물의 모형까지 들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부장품에는 제국의 모형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모형에서는 수은으로 만든 황하와 양자강이 기계 장치에 의해 보석들이 별처럼 아로새겨진 하늘 아래의 수은 바다로 흘러든다. 황제는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무덤의 비밀을 아는 장인들은 나중에 모조리 처형했다. 황릉의 비밀은 그 후 오랫동안 유지되었지만 1952년 안산 주변에서 쟁기질을 하던 농부들이 무릎을 꿇고 있는 인형 한 개를 발견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똑같은 모형의 인형 여러 개가 잇따라 발견되었다. 이어서 1974년 우물을 파던 농부들이 놀라운 것을 발견했다. 점토를 빚어서 구운 도용들이 출토된 것이다. 이 토용들의 키는 등신대 이상이어서 170cm, 내지 190cm 정도였다. 이것들은 중국 예술사상 지금까지 출토된 가장 큰 인물상으로 내세에서 황제를 호위하도록 황제가 죽기 전에 미리 지하에 묻어 둘 병사들의 도용이었다. 황제는 이승에서와 마찬가지로 죽은 뒤에도 역시 호위병을 거느릴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발굴이 전개됨에 따라 농부들에 발견 된 이 유적의 전체 규모가 세상에 드러났다. 그것은 몇 명의 호위병이 아니라 하나의 군단 이었던것이다. 발굴 작업이 진행됨에 따라 도용이 수백 개씩 나타나 차렷 자세로 늘어섰다. 통틀어 6천 개의 병사와 군마의 도용들이 벽돌 깔린 지하 바닥에 군대식 대형으로 배열되어 있었다. 그 갱의 넓이는 폭이 60m에 길이가 200m였다. 이것은 참으로 화려한 군대였다. 물감 흔적이 아직도 달라붙어 있었다. 어떤 부대는 자주색(조나라) 옷깃과 소매가 달린 초록 저고리에(초나라) 파란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갑옷(가죽)과 조끼는 검은 색이나(진나라) 갈색으로 칠해져 있고, 자주색이나 주황색 끈으로 묶여 있었다. 조끼에 박힌 대갈못은 하얀 색과 빨간색과 초록색이고 죔쇠는 황금색 이었다. 신발은 검은색으로 통일되어 있었지만 화려한 주황색 끈으로 메어져 있었다. 병사들의 피부는 노란색이 아니고 분홍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머리카락과 눈썹은 검은색 이었고, 모두 콧수염과 뾰족한 턱수염을 기르기까지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진나라 검은색 깃발 검은색 옷에 붉은색 띠 사용) 눈의 흰자위 안에는 검게 칠한 홍채가 있었다. 점토는 아직도 부드러웠고, 그 점토에 생생하게 새겨진 묘사는 신발 밑창에 박혀있는 징에서부터 땋아서 쪽진 머리카락에 이르기까지 정교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쪽진 머리가 머리 중앙이면 초나라 식, 쪽진 머리가 왼쪽으로 기우렸으면 진나라 식)
가장 놀라운 것은 얼굴이었다. 모든 얼굴이 저마다 또렷한 개성을 지니고 있었고, 수천 개의 얼굴 가운데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 얼굴들은 제각기 실제 황군에서 복무한 병사들의 초상이었다. 이런 예술적 접근 방식은 황군 병사들도 저 세상에서 군주와 함께 영생을 누리도록 보장해 주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토용의 머리는 모두 단단한 진흙 덩어리로 만들어져 있지만 그 머리가 얹혀 있는 몸통은 속이 비어 있고, 그 몸통 속이 꽉 찬 다리 위에 놓여 있었다.
수천 개의 토용을 구우려면 거대한 가마를 설치할 필요가 있었다. 이 가마들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 자체도 굉장히 어려운 일 이었을 것이다.
병사들은 4열 종대로 아홉 줄 늘어서 있는데 대열의 전체길이는 거의 200m에 이른다. 대열의 뒤쪽과 양쪽 옆에는 파수병들이 바깥쪽을 향해 서서 경계 태세를 취하고 있다. 전 위에는 그 부대의 화력이 자리 잡고 있다. 활을 쏘는 궁수와 쇠뇌를 들고 무릎을 꿇은 전사 200명이 사격 자세를 취하고 있다. 선두 근처에는 전차 5대가 늘어서 있는데 그 중 두 대는 지휘관이 타는 전차다. 전차는 각각 4필의 말이 끌도록 되어있다. 등신대의 군마들은 하얀 이빨과 말굽과 빨간 콧구멍까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서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전차의 목재는 오래전에 삭아 버렸지만 그 뼈대의 바퀴는 찍힌 자국으로 남아있다.
보병과 전차 외에 화살촉과 쇠뇌의 방아쇠를 비롯한 수천 점의 무기 부품이 발견 되었지만 대 다수 병사들의 손은 빈 손이고 그들을 수용했던 목조 건물의 탄화한 흔적으로 미루어 보아 땅속에 별로 깊이 묻히지 않았던 것 같다. 막사가 고대에 약탈당하고 불태워졌음을 알 수 있다.
1976년 5월에 주로 기병과 전차가 가득 들어있는 두 번째 갱이 발견되었다. 그리고 다음 달에는 지휘관들의 당당한 토용이 들어있는 사령부 갱이 발굴되었다. 이 갱들을 완전히 발굴하는 데에는 수십 년이 걸릴 것으로 추산된다. 네 번째 갱이 텅 비어 있었는데 이는 토용 군대를 묻는다는 웅장한 계획이 중도에 폐지되었음을 말해 준다. 그 이유는 아마 황제가 죽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제는 왕조가 만세까지 지속될 거라고 호언장담했지만 고작 14년 뒤에 멸망하고 만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가장 짧은 왕조였다. 황제는 북부지방을 순행하다가 승상 ’이사‘ 와 환관’ 조고‘의 음모에 희생되어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암살자들은 시간을 벌기 위해 황제가 아직 살아 있는 것처럼 꾸미고 그의 시체를 밀폐된 수레에 실어 수도로 옮겼다. 여행하는 동안 그들은 마치 황제의 식사를 나르거나 명령을 받으려는 것처럼 이따금 수레에 접근하곤 했다. 시체가 썩어서 냄새가 풍기기 시작하자 (때는 어름이었다) 그 냄새를 감추기 위해 생선을 가득 실은 수레를 가져왔다. 이리하여 시 황제는 생선 수레를 이끌며 마지막 귀로에 올랐다.
암살자들은 황제의 정당한 후계자인 맏아들을 제거하기 위해 자결을 명하는 편지를 황제의 이름으로 위조했다. 그리고 황제의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에 따라 정말로 자결했다. 그 후 암살자들은 유언장을 위조하여 자기네 마음에 드는 후보자인 황제의 둘째 아들 ’호해‘를 군주로 만들었다. 고고학자들은 이 음모의 여파를 보여주는 증거를 찾아냈다. 황제의 무덤 근처에서 그보다 작은 무덤들이 발굴된 것이다. 이 곳에 매장된 유골들은 모두 스무살에서 서른 살 사이로 비슷한 또래였다. 이는 ’호해‘를 제외한 동년배의 왕자들이 모두 동시에 죽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들의 이름이 적힌 도장과 관을 가득 채운 부장품과 더불어 그들의 최후를 말해 주는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어떤 유골에는 사지가 절단된 자국들이 남아있었다. 그렇게 절단된 신체의 일부는 관 밖에 묻혀 있었다. 어떤 유골들은 턱뼈가 탈구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교살 당했다는 증거다. 또 어떤 유골은 두개골 속에 청동 화살촉이 아직도 박힌 채 남아있다. 그들은 모두 비명에 죽었다. 제 2대 황제가 순조롭게 즉위 될 수 있도록 경쟁자가 될 만한 왕자들을 모두 살해한 것이다. 결국에는 승상 이사도 능지처참을 당했다. 그는 코와 발과 성기를 절단당하고 온몸을 난도질당한 뒤 허리가 잘려 두 동강이 냈다. 환관 ’조고‘는 자결 했다. 그리고 야심만만한 ’호해‘는 그보다 훨씬 더 야심만만한 조카에게 살해 되었다. 오늘날 진시황의 충성스러운 군대는 격납고와 비슷한 구조물 밑에 아직도 차렷 자세로 서 있다. 거기서 1.5km 떨어진 황릉 위에서는 과일나무가 자라고 있다. 황릉 입구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고고학자들은 황릉 내부를 조사하지 못했다. 아마 황릉 안에 장착된 자동 쇠뇌는 오래전에 삭아 버렸을 것이다. 구리 관은 부식되어 거의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초록빛 녹으로 뒤덮혔을 것이다. 조용한 어둠 속 어딘가에서는 보석으로 아로새겨진 별들이 다시 한번 반짝거릴 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수은으로 된 강들은 끝없는 바다로
흘러가면서 또다시 은은하게 빛날 날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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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하신 박영진선생님의 자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여러번 중국 여행을 갔지만 가장 인상적인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꼭 한번은 가고 싶은 곳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 설명이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카페 가입이 늦어 지금에야 글을 읽었습니다.
감사와 존경의 마음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