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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회
지은이:벌마로(김윤식)
완전히 연락을 끊고 소식도 모른 채 잊고 있던 동일 씨한테서 만나자는 전화를
받았다. 영우는 잊어 달라는 한마디 말만 하고 전화를 일방적으로 끊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영우는 한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를 못했다. 갑자기 여러 가지 상념이 얽히고 설켜서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이미 예전에 헤어졌고 기억 속에서 지워버린 인연을 다시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설령 옛정을 생각한다고 해도 지금
영우가 놓인 처지를 생각할 때 마음이 허락지 않았다. 더구나 영머의 제대 날짜가 며칠 안 남았다. 지금 시점에 동일 씨를 또 만나는 것은 영머에게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동일 씨 자신이 먼저 헤어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만들어 놓고 이제 와서 만나서 뭘 어쩌자는 말인가?
그렇게 마음의 정리를 하는 사이에 또 전화벨이 울렸다. 영우는 설마하며 수화기를 들었다. 동일 씨의 간절한 목소리가 애원하듯 울렸다. 꼭 할 얘기가 있으니 마지막 한 번만 만나 달라는 거다. 누가 무엇을 원하든 거부에 익숙치 못한 영우가
오늘 저녁 만날 약속을 하였다. 부평의 조용한 다방에서 동일 씨와 마주했다. 그 자리에서 영우에게 마음의 상처를 주게 된 사정을 변명처럼 들었다. 영우의 텅 빈 가슴에 바람이 불었다. 오늘 마지막으로 이 사람과의 인연은 확실하게 매듭을
지어야겠다고 다짐했다. 동일 씨와 분명하게 인연을 끝내고 문을 나서자 밤 바람이 시원하게 불었다. 영우의 명치끝에 거추장스럽게 매달려 있던 묵직한 덩어리
하나를 털어낸 기분으로 바람을 맞으며 골목길을 걸어 나왔다.
막바지 무더위가 서서히 꺾이기 시작하는 여름철 어느 날 짧지 않은 세월 군복무를 마친 영머가 제대를 했다. 영머를 향한 그리움과 기다림을 끝냈다는 안도감과
막연한 행복감으로 하루하루가 즐겁다. 한편으론 함께 살아갈 계획을 세워야 하는 앞날의 걱정거리가 혼재된 채 영우는 차분히 인생설계를 준비하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영머의 경제력이다. 영머가 모아둔 돈도 없지만 영머네 집 경제사정은 너무 열악했다. 한마디로 영머는 부랄 두 쪽밖에 가진 게 없었다. 이 말은 시댁 식구들이 한 말이기도 했다. 시댁 식구들은 결혼생활 내내 그 말을 하면서 영우에게 늘 미안함을 표현했다. 하는 수 없이 결혼 비용부터 신혼집 전세금에 살림 장만까지 모조리 영우가 준비했다. 그나마 영우가 아버지 회사에서 일을 하며 벌어놓은 돈이 넉넉해서 다행이었다.
매화꽃 피는 봄날 그녀가 결혼을 했다. 대구에 있는 병휘오빠에게 결혼소식을 알렸다. 그래야만 될 것 같아서,,,
결혼식 전날 병휘오빠로부터 결혼 축전을 받았다.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는 영우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느끼고 있다.
그녀 남편의 직장은 안산에 위치한 중견 기업이다. 그들 부부의 신혼생활은 안산의 작은 아파트에서 전세로 시작했다. 5층구조에 3층에 위치한 집이다. 작은방
두 개에 거실이랄 것도 없는 비좁은 공간이 있고 부엌이 따로 있는 구조다. 방은
좁고 화장실은 너무 비좁아서 사람 한 명 들어가면 꽉 차는데 여기서 빨래를 하려면 문을 열어놓고 사람이 문지방에 걸터앉아야 그나마 빨래판을 걸쳐놓을 공간이 생긴다. 겨울철 난방은 더욱 어려움이 많았다. 작은방 연탄아궁이가 바깥 계단 벽면에 있어서 겨울철 연탄을 갈아 넣으려면 부엌에 쌓아놓은 연탄을 들고 현관문을 들락거려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연탄불 상태를 확인하려면 허리를 굽히고
좁은 공간에 머리가 들어가야 하는데, 이때 연탄가스가 여지없이 코로 들어온다.
그 사이 연탄가스를 마시고 나면 어질어질 몸을 못 가눌 정도가 된다. 그나마 한
가지 편리한 점도 있는데, 부엌 한쪽에 쓰레기 버리는 구멍이 있어서 그곳에 쓰레기를 버리면 곧바로 1층의 바닥으로 떨어진다. 다행히 연탄재를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불편함은 없어서 좋다.
영우네가 여기 아파트에 살면서 첫애를 낳았다. 부부는 세상을 모두 가진 듯 행복했고 서로를 축하해 주었다. 이곳 아파트단지 안에는 영우와 비슷한 처지의 젊은 엄마들이 많이 살고 있다. 그녀들은 자연스럽게 친구가 됐고 공동의 관심사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물론 최대의 관심은 아이를 기르면서 느끼는 애로점
이지만 대부분의 가정이 남편들 월급으로는 생활이 넉넉하지 못해서 합동으로 부업을 하기로 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뜨개질이다. 뜨개질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기에 쉽게 도전할 수 있었다. 남편들이 아침에 출근을 하고 나면
주로 영우네 집에 모였다. 그 이유는 영우네가 유일하게 비디오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영우가 결혼하면서 장만해 온 거다. 새댁들은 눈으로는 비디오를 감상하면서 입으로는 또 다른 말을 하고 손으로는 뜨개질을 했다. 그들이 뜨개질로 만든 옷은 전량 일본으로 수출을 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아이의 우유 값으로 쓰는데 충분했다.
그렇게 2년쯤 지난 어느 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영우네와 몇몇 가정에 주택공사에서 최고장이 날아들은 거다. 그동안 살면서 임대료를 한 번도 안 냈으니 한꺼번에 다 납부하라는 내용인데 모두들 임대료가 뭔지 왜 그걸 우리 보고 내라는
건지 몰랐다. 그들 대부분이 아직 어린 20대 중반의 새댁들이다. 그래서 세상물정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밝혀진 내용인즉, 이곳은 주택공사에서 운영하는
임대 아파트였다. 어느 사기꾼 한 사람이 여러 채의 집을 임대 보증금만 지불하고 임대 받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임대 보증금의 다섯 배 가까운 전세금을 챙겨서 도망을 가 버린 거였다. 그러니 다달이 내야 하는 임대료도 밀려 있었던 거였다.
영우네와 새댁들은 전 재산과 다름없는 전세금을 날리게 됐고 그동안 밀린 임대료도 물어내야 했다.
별다른 방도를 찾지 못한 영우네는 살고 있는 집을 분양받기로 했다. 물론 밀렸던 임대료도 전부 납부하기로 했다. 그나마 영우네는 그녀가 결혼 전에 모아놓은
자금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고 다른 새댁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전세금을 모두 날린 채 이사를 가야 했다. 형제처럼 지내던 비슷한 처지의 새댁 친구들과는 뿔뿔이 흩어져 살게 됐고 영우네는 몇 해 뒤 돈을 모아 좀 더 큰집으로 이사를 가서 살게 됐다.
온 가족이 다 함께 집에 머물며 티브이를 보던 휴일 전화벨이 울렸다. 큰 아이가
벌떡 일어나 수화기를 들었다. 평소에도 전화벨이 울리면 동작이 빠른 큰 아이가
제일 먼저 받는다. 영우와 남편은 하던 대화를 멈추고 큰 아이 전화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수화기 너머로 남자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남편은 당연히 자신한테 온 전화일 거라고 지례 짐작하고 있었다. 틀림없이 친구 놈들 중에 누군가
술 생각이 나서 불러내려는 거라고 짐작하며 무슨 핑계를 댈까 고민하고 있었다.
영우도 남편에게 핑계꺼리를 찾아줄 생각에 짧은 순간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네 맞아요 동생하고 저요 아빠도 계셔요”
아빠라는 말에 남편이 소파에서 일어나며 “이리 줘” 하고 손을 내밀었다. 순간
영우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큰집에 제사 있다고 해”
적당한 핑계거리를 찾지 못하고 있던 남편은
“알았어” 하며 몸을 일으켰다.
큰 아이는 아빠의 그런 행동에 곤란한 표정으로 “아니 아빠 말고 엄마”하며 수화기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부부는 당황스런 얼굴로 마주 보며, 우선은 남편에게
온 전화는 아니라서 안심을 했다. 영우는 ‘휴일에 전화 올 데가 없는데,,,’ 아니 평소에도 전화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궁금증이 더해졌고 선뜻 수화기를
들지 못했다. 남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안방으로 들어갔다. 아이들도 자기들 방으로 들어가고 그녀가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영우 씨죠”
저쪽에서 낮은 목소리로 영우 이름을 불렀다.
“네 그런데요, 누구시죠”
“,,,,,,,,,,,,,,,,,,,,,,,,,”
“여보세요 말씀 하세요 저 나영우 맞는데 누구세요”
순간 영우의 머리가 혼란에 빠져 들었다. 누가 장난을 치는 걸까? 아니면 혹시
사기 전화,,,? 부동산 회사? 보험 회사? 짧은 순간 오만 잡생각이 다 들었다.
“영우야,,,”
“??????????”
혹시 병휘오빠? 순간자신도 모르게 병휘오빠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이름을 불렀다.
“병휘오빠?,,,
“,,,,,,”
맞아요? 맞지? 맞구나. 병휘오빠,,,”
“응 맞아 오랜만이구나”
“오빠,,,”
그녀는 순간 숨이 멎을 것 같았고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온갖 상상이 머리를 스쳤다. 영우가 정신을 가다듬는 사이 병휘가 말을 이어갔다. 병휘오빠는 현재까지 대구에 살고 있고 조그만 통신사업을 하고 있다고 했다.
전화로 모든 궁금증을 해결할 수 없어서, 다른 궁금함은 덮어두고 만나서 이야기
하기로 했다. 다음 주 영등포역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전화를 끊었다. 안방에서
나온 남편이 누구냐고 물었다.
“응 그냥 아는 사람”
영우는 대충 얼버무렸다. 그러다가 뭔가 조금 찜찜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다음 주 아까 전화 온 사람하고 만나기로 했는데,,,”
“그냥 아는 사람이라며,,,”
“그런데 좀 만나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어떻게 아는 사람인데 그래?”
“이담에 기회 되면 말할게”
“그때가 언젠데”
“아마 삼십 년쯤 흐른 뒤?”
아리송한 대답에 남편은 어이없다는 듯 웃고 말았다.
“알아서 해”
남편은 한결같이 가족만을 위해서 희생하며 살아온 영우에게 늘 고마워했었고
미안해했었다. 그래서 잠시 바깥바람을 쐬는 것도 배려라고 생각했다.
대구에서 먼 길을 한숨에 달려온 병휘오빠와 만났다.
“아이는?”
“딸만 둘”
“잘됐네 축하해,,,”
“오빠는? 결혼은?”
“나는 아직”
“오빠도 결혼해야지”
“그래야지”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부천집으로 전화했더니 어머님이 알려 주셨어”
병휘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보였다. 두 사람 이름이 새겨져 있다. 영우가 횡계에서 마지막 날 떠나면서 주었던 거다.
“그때 영우가 주고 간 손수건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
“나도 오빠가 사준 곰인형 지금도 있어”
한강변을 걸었다. 모든 것을 잊고 지금 이 순간 즐겁고 행복한 기분을 만끽하기로 했다. 팔짱을 끼고 걸었고 마주서서 얼굴을 쳐다보며 웃었다. 파란 잔디 위에
누워서 하늘을 보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고 고개를 돌려 눈을 마주 보고 미소 지었다. 병휘가 기쁜 마음을 표정으로 보였고 영우도 오랜만에 자유를 느끼며 첫사랑 병휘오빠와의 재회를 즐겼다.
그렇게 행복한 시간은 흐르고 있었고 하루의 시간은 너무도 짧았다. 아직 조금의
시간이 남아 있어서 영등포역에 있는 백화점에 들렀다. 특별히 무엇을 사려는 의도는 아니고 남은 시간을 역 안에서 보내려는 거였다. 무엇이 생각났는지 병휘가
영우의 손을 이끌고 보석점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보석이 박힌 반지를 한 개
골랐다. 반지 스타일이 결혼식 때 신랑이 신부의 손가락에 끼워주는 반지하고 비슷했다. 병휘는 영우와 결혼을 못한 서러움을 달래려는 마음 같았다. 영우는 말없이 손을 내밀었고 병휘가 영우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영우는 병휘의 손동작을 유심히 바라보며 병휘의 마음을 헤아려 보았다. 짠한 마음에 영우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눈가에 맺힌 눈물을 감추려고 고개를 숙이고 반지가 끼워진 손을
한참 동안 바라봤다.
행복한 시간도 잠시 어느덧 헤어짐의 시간은 다가왔고 둘은 영등포의 소박한 레스토랑에서 마주 앉았다. 식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물잔만 비우고 있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차마 보지 못했다. 마지막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병휘의 눈에서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 끝에서 떨어졌고 빈 유리잔 모서리에 부딪힌 눈물은 작은 입자가 되어 퍼져 나갔다. 몇 방울의 눈물입자가 영우의 손등에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영우는
애처로운 감정이 심장을 조여 오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영우는 차마 이대로 헤어질 수 없다고 마음먹고 대구까지 동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나 오빠 따라서 대구까지 갈게”
“안돼! 결혼까지 한 사람이 큰일 날 소리를 하는구나”
영우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병휘가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급하게 말렸다.
“상관없어 오늘 오빠 따라서 대구 가서 오빠하고 자고 내일 집에 갈 거야”
영우는 오늘도 대책 없이 병휘를 따라가려고 한다. 병휘가 속으로 생각했다.
‘지난 날 횡계까지 따라왔을 때나 지금이나 철없이 행동하는 것은 여전하구나,,,’
병휘는 헤어짐의 아쉬움과 현실의 이성사이에 갈등을 했다. 병휘의 속마음을 눈치챈 영우가 병휘의 결심에 확실한 신호를 보냈다.
“오빠 나랑 같이 있고 싶지 않아?”
“같이 있고 싶지! 하지만,,,”
“그럼 됐어. 다른 일은 생각하지 말자, 지금 느낌 가는대로 하면 되는 거야.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자. 어서 일어나, 대구 가는 비행기 표 끊어야지”
병휘가 결심을 한 듯 영우를 따라서 일어섰고 둘은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그리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비행기는 대구하늘로 날았다.
달콤하고 포근했던 밤이 지나고 대구에서의 아침이 밝았다. 방 안의 공기가 무거웠다. 영우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바깥바람이 시원하게 들어왔다. 그제서야 방안에 공기만 무거웠던 것을 알았다. 아니면 마음만 무거웠는지도 모른다. 시원한 바깥바람을 마시는 기분도 잠시뿐, 착잡한 심정이 전신을 억누르고 있다. 이제는 정말 헤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온 거다. 영우가 화장대 앞에 앉았다. 그녀 뒤에 병휘가 서 있다. 흩트러진 머리를 가다듬으며 거울에 비친 병휘를 보았다. 병휘도
거울에 비친 영우를 보고 있었다. 서로는 거울을 보며 눈을 마주쳤다. 영우의 눈가에 맺힌 이슬을 병휘가 보았다. 영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오빠 이제 나를 잊어. 지난날들 모두 잊어야 해. 오빠의 기억에서 영우를 지워야 해. 오빠도 좋은 사람 만나서 결혼도 하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그래야 나도 잘 살 수 있어.”
영우는 잊으라고 잊어야 우리 둘 다 잘 살 수 있다고 흐르는 눈물을 닦으며 흐느꼈다. 말끝을 흐리며 울먹이는 작고 가냘픈 영우의 어깨를 병휘가 뒤에서 감싸 안았다. 영우가 울먹일 때마다 어깨가 들썩였다. 영우의 애 닮픈 심정은 병휘의
손을 타고 병휘의 심장 깊은 곳까지 전해졌다. 병휘는 가슴이 저미어 왔다. 영우와 헤어지고 거의 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단 순간도 영우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몸은 멀리 있어도 마음은 항상 영우의 곁에 숨 쉬며 살고 있었다고 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고 보살피고 싶을때는 당장이라도
영우가 사는 부천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토록 살뜰한 걱정은 마음뿐이었다. 아무것도 못했다. 이미 결혼을 하고 가정을 이루며 잘살고 있는 영우에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되었다. 더구나 이제는 아이까지 둘이나 낳아서 잘 살고 있다. 이것이 현재 두 사람의 운명이었다. 지금 병휘도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결심을 하고 있다. 그것이 영우의
행복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또한 자신도 현실을 씩씩하게 살아가려면 영우와
행복했던 과거의 추억을 잊어야만 하는 거다.
영우가 거울에 비치는 병휘의 굳은 표정을 보았다. 병휘가 결심을 한 듯 영우의
겨드랑이에 팔을 끼우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래 그래야지 영우 말이 맞아, 이제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야지, 정말 우리 다시는 못 보는 거겠지?”
“그래야지,,,”
영우는 어떤 예측도 할 수 없어서 더 이상 대답을 못했다.
영우가 꽃집에 들어갔다. 이대로 집에 들어가려니 손이 허전했다. 꽃을 한 송이
사고 대구역 근처의 서점에 들러서 수필책을 한 권 사서 기차를 탔다. 병휘가 손을 흔들어 주었고 영우도 손을 들어 보였다. 두 사람은 더 이상의 만남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난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헬쓱한 표정으로 집에 도착한 영우가 손에
들고 온 책은 책상 위에 놓고 한 송이 꽃은 영머에게 주었다. 얼떨결에 꽃을 받아 든 영머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어디서 자고 이제 오는 거야. 무슨 일이 생긴 줄 알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못 오면 못 온다고 전화라도 해줘야지,”
영머는 어제 영우에게 너무 늦을 거 같으면 밤늦게 다니지 말고 안전한 데서 자고 오라고 한말을 잊은듯하다. 영우는 미안하다는 말만 한마디 하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한참을 깊은 잠에 빠졌다. 영우가 결혼 후 처음 있는 외박이다.
그렇지만 영머는 그 일에 대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