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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신부터 성인까지 아이 1인당 양육비용(2016년) | |||
1000만원 | 임신부터 출산까지 | 7500만원 | 초등학교(8-13세) |
출산비용, 산후조리원,출산,육아용품 | 학원, 용돈 | ||
3000만원 | 영아기(1-4세) | 8900만원 | 중-고등학교(14-19세) |
기저귀,분유,옷,예방접종,어린이집 | 외국어학원, 입시학원, 과외, 용돈 | ||
3500만원 | 유아기(5-7세) | 7800만원 | 대학교(20-23세) |
장난감,학원(태권,음악,미술), 유치원 | 대학등록금, 용돈 |
그런데 자녀양육비를 두고 싸다 비싸다는 표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녀양육은 투자가 아니라, 가족간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자녀는 잘 키워서 부모의 노후대책으로 사용하는 투자가 아니라, 지금 함께하는 것이 좋고,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관계이다. 그러므로 자녀양육비를 계산하면서 싸다 비싸다고 판단하면 그때부터 가족은 행복이 아니라, 짐이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자녀양육이 행복과 기쁨이 되어 있는가? 아니면 짐이 되어져 있는가?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교회공동체 안에서 함께 함이 기쁘고 즐거운 사람은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 다니는데 왜 나는 어렵고 힘든 일이 줄어들지 않는거야! 하는 불평이 있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관계가 아니라, 투자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바른 신앙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여러분의 신앙은 어떠한가? 유다의 3대왕인 아사왕은 왕에 등극한 후 이방 제단과 산당을 없애고 종교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렇게 아사왕이 순수한 신앙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을 때 구스 사람 세라가 100만대군과 300대의 병거를 이끌고 유다를 공격하였다. 그때 아사왕의 병력은 유다가 30만명, 베냐민이 28만명이었다. 유다의 총병력이 58만명인데, 구스왕 세라는 백만대군을 이끌고 온 것이다. 아니 유다의 무기는 큰 방패와 작은 방패 그리고 창과 화살이었다. 그런데 구스왕 세라는 병거를 이끌고 온 것이다. 쉽게 말하면 유다는 소총들고 있는데, 구스는 탱크몰고 왔다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누가 이기겠는가? 아사왕의 병력과 무기로는 구스를 도무지 이길 수 없었다. 그런데 아사왕은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하건대 사람이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대하 14:11) 하며 하나님께 기도한다. 이렇게 아사왕이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하나님이 구스 사람을 쳐서 유다의 아사가 승리하게 하여 주었다. 아사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전쟁에서 승리하여 많은 전리품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사왕 35년까지 전쟁이 없었다.
그런데 아사왕 36년에 북이스라엘왕 바아사가 유다의 라마를 공격하였다. 미스바와 예루살렘 사이에 위치한 라마는 유다의 군사적요충지였는데, 바아사는 그 라마를 침략하여 성을 빼앗고, 거기에 성읍을 건축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사왕은 라마를 빼앗기 위하여 전략을 세우지만, 자신의 힘으로는 빼앗을 수가 없었다.
그때 아사왕은 라마를 다시 빼앗기 위하여 기발한 방법을 사용하였다. 아사왕은 왕궁과 곳간에 있는 은금을 모아서 그것을 아람왕 벤하닷에게 보내면서 동맹을 제안한 것이다. 그래서 아람왕 벤하닷이 이스라엘의 북쪽을 공격하였을 때 이스라엘은 라마에 있던 병력들을 북쪽으로 배치할 수 밖에 없었다. 그때 아사왕은 라마를 점령하고, 이스라엘이 성을 세우기 위하여 준비한 돌과 목재를 게바와 미스바의 성을 보수하였다.
아사왕은 기가 막힌 잔꾀로 쉽게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이제 평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그때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왕을 찾았다. 그리고 하나니는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구스 사람에게서 구원해 주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아사왕을 책망하였다. 그때 아사왕은 하나니의 말을 듣고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를 감옥에 넣어 버렸다.
아사왕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랬던 아사왕이 39년에 발이 병들어 위독하게 되었다. 그때도 아사왕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방법으로 해결하려다가 결국 41년에 죽게 된다. 그런데 아사왕의 죽음이유를 역대기는 이렇게 기록한다.
(대하 16:12) 아사가 왕이 된 지 삼십구 년에 그의 발이 병들어 매우 위독했으나 병이 있을 때에 그가 여호와께 구하지 아니하고 의원들에게 구하였더라
아사왕은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겼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하고, 또 자기 잔꾀를 부려서 승리도 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이제 아사왕은 그래 내 머리로도 승리할 수 있어! 하는 것을 배운 것이다. 그랬던 아사왕은 이제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오직 자신의 방법만 믿고 의지한 결과 망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사의 이런 모습이 어리석어 보이지 않는가? 어떤 남매가 한날에 죽어서 천국문 앞에 도착했다. 그때 베드로가 나와서 두 남매를 맞이하면서 천국생활의 오리엔테이션을 해 주었다. 천국생활은 자매가 원하는데로 마음껏 누리며 살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길을 걸을 때 오리를 조심하라고 하였다. 만약 오리를 밟게 되면 감당하지 못하는 벌을 받게 될 것이다고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남매는 천국에는 오리가 많은가보다 조심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천국 안에 들어가니 정말 오리가 많이 있었다. 그래서 거리를 다닐 때마다 조심하며 걸었는데, 하루는 언니가 그만 실수로 오리를 밟았다. 너무 놀란 언니는 두려움과 놀람에 벌벌 떨고 있는데, 그 순간 저 멀리에서 정말 못생긴 남자가 걸어왔다. 그리고 언니의 손과 발을 자기 손과 발에 묶고는 멀리 가버렸다.
순식간에 언니가 엄청나게 못생긴 남자에게 손과 발이 묶여서 가는 것을 본 동생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오리는 절대 밟으면 안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래서 정말 조심조심하며 살았는데, 어느날 너무 멋진 남자가 동생에게 달려와서 동생의 손에 자기 손을 묶고, 동생의 발에 자기 발을 묶는 것이었다. 이제 동생은 멋진 남자와 함께 먹고, 자고, 모든 일을 함께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너무 좋아서 왜 나의 손과 발에 당신의 손과 발을 묶었는지를 물었다. 그랬더니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아무 것도 모르고 오리를 밟았더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부부 중에 누가 오리를 밟았는가? 이제 오늘 본문을 보시기 바란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은 요셉이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요셉이 가만히 끊고자 하였을 때 주의 사자가 요셉의 꿈에 현몽하였다. 그리고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마리아는 성령으로 잉태하였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면 나오는 말씀이 오늘 본문이다. 이제 오늘 본문 마태복음 1:23을 읽어보기 바란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지난 주 설교한 것처럼 이사야 7장의 말씀이다. 그런데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침략앞에 벌벌 떠는 아하스왕에게 이사야는 표적을 구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표적을 구하지 않았던 아하스왕에게 이 말씀을 표적으로 주었다. 그런데 주의 사자는 아하스에게 준 그 표적은 예수님 탄생에 관한 것이었다고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이 임마누엘이다. 주의 사자는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성경 어디를 보아도 예수님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른 적은 없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지구촌에 임마누엘을 이름으로 사용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런데 주의 사자가 아들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다. 오늘 본문이 23절인데, 사실 21절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였다. 이미 주의 사자는 아기의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고작 2절 만에 다시 이름을 지어주고 있는 것이다.
왜 주의 사자는 또 이름을 지어주고 있는가? 총회출판국에서 발간한 마태복음 주석에서 황원하박사는 임마누엘은 실제 이름이 아니라, 사역적 성격을 보여준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하여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님은 임마누엘의 사역을 감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임마누엘은 이름이 아니라,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12명의 제자를 부르시고 제자들과 함께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당시 병들고 소외된 자들과도 함께하였다. 그러한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 28:19-20)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20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태는 마태복음을 기록하면서 제일 마지막에 증거하는 것이 예수님은 임마누엘의 사역을 온전히 이루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드리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여서 우리의 죄악을 대속하신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주님이 되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예수님께서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사람은 임마누엘의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러면 저와 여러분은 임마누엘의 주님을 체험하고 있는가? 런던타임즈지가 독자들을 중심으로 어떤 사람을 나의 참된 친구라고 생각하십니까?하고 질문을 하였다. 그 질문에 독자들은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릴 때 그때에도 나를 찾아오는 친구가 참된 친구이다는 말을 선정해 주었다. 참된 친구는 세상이 나를 버려도 나와 함께할 수 있는 그 사람이 참된 친구이다.
여러분은 그런 친구가 있는가? 경찰대학교 교양과정의 박상미교수 아버지는 중학교때 암으로 돌아가셨다. 그때 사람들은 니네 아버지가 경제적 어려움을 주지 않으려고 일찍 돌아가셨나보다 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렵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다는 식으로 위로를 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박상미씨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장례를 치루는데 정말 박상미씨에게 위로가 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장례식 3일동안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날 박상미교수는 그 친구가 기둥 뒤에 숨어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왜 거기에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그 친구는 사실 3일전에 장례식장에 왔지만 아버지를 먼저 보낸 친구에게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또 얼굴을 보면 눈물이 날 것같아 주방에서 설거지하는 것을 돕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때 박상미 교수의 눈에 들어온 것이 친구의 퉁퉁부어있는 손이었다.
그 순간 박상미 교수는 친구를 부둥켜 안고 왈칵 울었다고 한다. 장례식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다녀가면서 위로의 말을 하였지만, 그 말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는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지 못해서 머뭇거리는 그 친구가 박상미 교수의 참된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박상미 교수는 아버지의 장례식 때 있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말을 한다.
위로는 말로 하는 것이 아니라, 체온으로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런데 우리에게도 박상미교수의 친구와 같은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내가 죄악가운데 고통할 때 나보다 더 고통하였다. 그래서 아무 말없이 이 땅에 오셔서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이제 우리와 늘 함께하는 임마누엘의 주가 되신 것이다.
이제 그 예수님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있는 저와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그 분으로 인하여 평화와 기쁨을 가지는 복된 성탄과 삶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이 시간 다 함께 천사의 노래를 외칠 수 있기를 바란다.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성탄의 기쁨은 하나님께 영광이고, 하나님이 기뻐하는 사람들 즉 성도들에게 임하는 평화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 평화가 여러분의 삶에 충만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