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망념
‘무엇이 부처입니까?’ 이 말이 떨어지는 순간 아주 깊은 곳에서 눈물이 핑 돌면서 예전에 한 번도 인식하지 못한 감격이 일어야 하지만, 무엇을 감격해야 할지 모르니 다른 말들이 아무 소용없어진다. 이 말 이전이야 그 놈의 집 앞마당이었으니 선뜻 들어가지 못했지만, 그 놈이 저절로 자신의 앞마당에서 나와 목을 내밀어 주니, 그때가 단번에 목을 벨 기회가 생긴 것이다. 그러나 그때 그 놈의 목을 벨 용기를 내지 않고, 주춤하면서 기회를 놓치면, 엉뚱한 방향으로 수행을 하면서 목이 저절로 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되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 것을 알아야 한다. 만약 ‘무엇이 부처입니까?’의 물음이 진심을 다하여 얻었다면, 그는 말에서 분명 자신의 근원을 보겠지만, 그저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면, 어떠한 답에도 반응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오랜 세월 동안 ‘나’라는 이름의 사용처가 어디인지를 모르고, 그저 앞에 나타난 그 모습에 다른 이가 붙여준 나 아닌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알고 있었으니, 돌아가고 싶겠지만 돌아갈 방법을 모두 잊은 탓에 기약이 요원할 뿐이다.
수억 겁을 생멸한다고 누가 나의 진짜 이름을 불러주는 것도 아니니, 허송세월이 참으로 안타깝고 안쓰럽지만 어떻게 해줄 방법이 없다. 유일한 나의 일은 그가 가장 싫어하는 말을 해야 하니, 서로가 다른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그로 살아온 육신을 그가 아니라 해야 하고, 그가 열심히 일궈낸 모든 것들을 그의 것이 아니라 해야 하고, 살아오면서 어렵게 쌓아온 명성과 존재감조차도 그가 아니라고 말해야 하니, 누가 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누가 이 말의 뜻을 알고, 누가 이 말에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같이 춤을 추며 이야기꽃을 피우겠는가!
모두가 자신을 찾아 떠나겠지만, 누구도 자신과 대면한 사람을 만날 수 없으니, 세상에 돌아다니는 불필요한 문장과 언어에 속아 시간을 보내더라도, 나중에는 누구에게도 원망할 수 없으니, 당장 쓸모없는 행위는 멈추고,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고요히 앉아, 자신이 주워 모은 것들이 자신의 늙음과 병듦 그리고 죽음에 대해 무엇을 해결해주었는지를 보면, 해결해야 하는 것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불필요한 근심만 증가하였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항상 바르게 움직였다는 생각이 들겠지만, 그는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고, 언제나 실수를 반복하면서도 실수가 무엇인지를 모르고 살아간다. 처음의 출발이 실수인 줄을 알아야 움직여서 되는 일이 아닌 줄 알게 되지만, 처음부터 구하는 것으로 앎을 얻으려 한다면, 아무리 많은 생을 살더라도 밑 빠진 독에 물을 채우는 일일 뿐이다.
그렇다고 단지를 던져 부숴버리면 된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채우는 것도 병이지만, 부수는 것도 병일뿐이다. 지금 있는 그대로 변함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는 내가 따로 그것에 대해 사유할 것이 없음을 알아야 하니, 그 사유할 것이 없는 바른 사유는 다시 다른 견해를 내지 않게 한다. 그렇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그것에 대한 다른 상태를 생각하거나 사유하게 되면, 그는 목이 달아나는 꼴이지만 목이 날아간 줄은 모를 것이다. 목이 날아가고 수행에 진전이 있기를 바라겠지만, 어찌 송장이 살아나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것보다 모름에 대한 믿음이 더 현명할 수 있으니, 지혜가 완전히 드러날 때까지 간택 없이, 답답함을 숨겨 놓은 보물처럼 여기고, 인내하여야 밝은 태양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조그마한 지견에 마음을 움직이면, 모든 일에 법으로 대입하는 잘못된 견해를 만들게 되니, 항상 조심하여야 한다. 삼계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일에는 어떤 사람에 의해, 법이라 말할 수도 없고, 법이 아니라 말할 수도 없으니,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말하는 자를 자세히 알아야 속지 않게 되고, 보고 들은 생각들이 일시에 안개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괴로움이 내가 존재하지도 않은 이미지를 가짐으로써 생긴 것이라 알고, 부족함이나 어떤 상태가 바르게 처리되지 않아 생긴 것이라고 착각하면 안 된다.
지휴 스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