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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 다시 나타나실 때 / 왕상 17:8-16, 히 9:23-28
오늘 성서에는 예수님이 세가지 모습으로 나타나신 모습을 읽어보았다. 먼저 과거 2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 현재 모습, 정차 다시 오실 예수님이 모습이 그것이다. 첫째로 과거 2천년 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모습은 어떤가 보라. 히 9:26절을 잃어보면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다고 기록했고, 많은 사람들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제물이 되시려고 오셨다고 했다. 이때의 예수님은 우리 인간과 똑같은 몸을 입고, 비천한 마굿간, 가난한 요셉의 집에 오셔서 많은 고난과 고통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멸시와 천대를 받는 인간으로 오셨다. 우리 인간의 죄를 담당하시고, 세상의 죄를 없이 하시려고,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는데, 누더기 옷을 입고 오셨다. 둘째로 지금 현재는 하나님 나라, 하나님 앞에 계신다. 하나님의 보좌 옆에 앉아계시고,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다. 우리를 위하여 성령을 보내주시고, 우리 있을 곳을 예비하시고 계시다고 요 14:1절 이하에서 기록하고 있다. 셋째로 그러면 장차 미래에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실까? 히 9:28절을 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 두 번째 나타나신다고 했는데,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나타나시리라고 하셨는데, 그때 예수님의 모습은 영광과 권능으로, 심판주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계 1:7-8절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우리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 두전째로 오실 것을 믿고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로 특징지워지고 있다. 특히 처음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곧 재림하실 것으로 믿고 있었으므로 예수님의 재림의 절박감이 그들의 지배적인 삶의 감정이고 태도이며 염원이었다. 그래서 계시록의 마지막 절과 고전 16:22절에서 보는대로 ‘마라나타’ 곧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던 것이다. 가장 오래되고 중요한 기독교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고 고백되어 있다. 여기에 예수님의 과거, 현재, 미래가 있다. 우리 기독교는 어제의 예수님의 성육신 탄생과 십자가, 오늘의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내일의 예수님의 재림을 믿는 종교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할 때, 우리는 이러한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예수님을 동시에 믿는 것을 의미한다.
옛날에 암행어사는 세가지 모습을 지니고 다녓다.
첫째로 암행어사는 왕궁을 떠나 관복을 벗고 서민복을 하거나 초라한 복장을 하고 백성들이 평안히 사는가 민정시찰을 하고 다녔다. 사실 그 직위는 왕과 맞먹는 권한을 갖고 있으나 그 복장은 초라하게 하고 다녔다. 그래서 누구든지 얼른 어사인 줄을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가 잘 아는 춘향전을 보면 한양의 지체높은 어사가 남원 고을에 내려왔건만, 춘향이도, 춘향이 어머니도 모르고 문전박대 하다시피 했다. 이도령의 참 모습은 사실 누더기 입은 가난한 거지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거지처럼 하고 온 것이다. 이것은 곧 이도령뿐 아니라 옛 어사들이 민정시찰 나갈 때, 그리고 백성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민간들 속에 들어갈 때는 참 모습을 가리고 서민의 모습으로 나갔던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처음 오실 때는 하늘의 영광 다 버리시고 가난한 요셉의 집에, 여관의 말구유에 오셨다.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님은 처음 이 세상에 오실 때 문전박대를 받았다. 여관방도 구하지 못해 들어가지 못하고 마굿간에 들어가야 했다. 그뿐 아니라 헤롯왕과 당시 제사장, 서기관, 장로들에게도 박대를 받았다. 누구하나 예수님을 따뜻하게 맞아주지 않았다. 만일 예수님께서 참 모습을 나타내셨더라면 모두 다 환영했겠지만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으므로 하나님의 아들 대접을 받지 못했다. 예수님은 얼마나 세상 사람들이 죄의 억눌림을 받고 고통 속에서 사는지 실제 체험하시고, 이 죄를 없이하시고 마귀의 일을 멸하시려 친히 그 영광의 옷을 벗으시고 오셨다.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마귀를 멸하시고, 죄에서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많은 고난 속에 오셨지만 죄악에 눈이 어두운 백성은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 못하고 오늘도 문전백대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헤롯이 문전박대하고, 옛날 수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백성들이 예수님을 문전박대하여 예수님은 들어가실 곳조차 없으셨다. 이도령이 자기 장모집에 가도 반갑게 여기지 않고, 변사또 잔치 집에 가도 문전박대하듯이 오늘도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이 왜 이땅 남원 고을같이 별보잘 것없는 이 세상에 오신 줄을 모르고 문전박대 하는 것을 볼 때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른다. 예수님은 이 땅에 평화를 주시려고 오셨다. 변사또 같은 나쁜 악마의 세력을 꺾으시고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그 죄를 담당하시러 오신 예수님, 비록 남루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셨으나 그는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임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둘째로 암행어사는 민정시찰을 끝내고 나면 자기가 보고 듣고 당한 일을 왕께 보고하고 왕에게 선처를 빌어서 난민들을 구하여 달라고 상소한다. 이것이 암행어사의 둘째 모습이다. 이때는 왕이 계신 곳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왕께 배알을 드린다. 그때는 왕의 신하복을 입는다. 그리고 어사출도 할 수 있도록 어명을 기다린다. 그러면 왕은 어사의 상소를 받고 곧 그곳의 탐관오리를 몰아내고 백성을 구하도록 조치를 취하게 된다.
지금의 예수님의 모습은 과거의 예수님이 아니다. 언제나 문전박대만 받으시고 언제나 이 세상에 계신 예수님은 아니다. 지금은 하나님 계신 곳으로 승천하시어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상소하신다. 24절하에 보면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라고 했다. 지금 우리 예수님은 세상에서 주를 위해 고난 받는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고 계신다. 롬 8:34절하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요 14:12절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히 7:25절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 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고 계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에 힘입어 주께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암행어사는 어사 마패를 꺼내 차고 모든 군사들과 함께 입성하여 권능과 위엄찬 명령으로 호령하며 높은 자리 곧 심판의 자리에 앉는 출도를 하게 된다. 이때는 누더기 옷도 벗고 어사복(관복)으로 사모관대를 하고, 위엄스런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몽룡이 어사 출도하여 변사또를 봉고파직하고 절개지킨 춘향이를 불러 그 이름을 높이고 사랑하여 맞이 하듯이, 그리고 백성을 변사또의 억압에서 풀어 해방시켜 태평성대를 이루듯이 우리 주님 다시 세상에 오실 때는 과거 문전박대받던, 고난받던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고, 심판주로,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오시리라고 하셨다. 마 24:29-31절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44절까지 이곳을 읽어보면 예수님이 다시 오심은 어사출도와 같이, 예수님 출도하실 날이 있는데, 그때는 옛날 같은 모습으로가 아니다. 죄인을 심판하시고 그 사랑하시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높이시려고, 만민 앞에서 상주시고 영광이 자리에 함께 오르도록 하시기 위해 어사 출도가 있다.
특히 본문의 마지막 절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예수님이 두번째 다시 이 세상에 오신다는 뜻이 무엇인가? 주님은 어떤 목적으로 다시 오실까? 사도신경에서 보는대로 예수님이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목적은 이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함이다. 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고 했다. 곧 ‘죽은 자와 산 자를 심판하러 오신다’고 했다. 여기서 죽은 자와 산자는 과거, 현재, 미래에 살았고, 살고 있고, 살게 될 모든 인간을 포함하는 말이다. 이 마지막 날에 있을 예수님의 심판은 영원히 살 자와 죽을 자, 구원받을 자와 구원받지 못할 자를 구별하는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분이 누구인가? 그는 처음 오셨던 그 예수님이시다. 히브리서 저자는 이 분이 ‘어제의 예수’임을 비쳤다. 이 예수님은 메시야 취임사에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했던 그 주님이시다. 재림하시는 예수님은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차후 심판하시겠다고 하신 분이다.
다음으로 이러한 예수님의 재림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질 것인가? 역사적으로 교회는 예수님의 재림을 ‘진노의 날’로, ‘공포의 날’로만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두려운 날로만 볼 필요가 있을까요? 예수님의 재림은 심판의 때를 의미하지만, 그 재판장이 다른 분이 아니고 우리 주님이라는 사실이 우리에게 큰 은총이다. 만일 이 심판주가 거룩하시고 무서운 의의 하나님이라면 그의 정의 앞에 설 사람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그러므로 최후의 심판의 재판장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 그는 사랑과 구원의 심판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 우리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다. 그래서 그를 믿고 기다리는 모든 사라들에게는 이 심판의 시간이 곧 구원의 시간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시는 날은 죽은 자와 산 자들이, 세상의 모든 나라와 민족들이 그의 다스림과 보좌 앞에 나와서 그를 섬기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의 재림은 하나님 자신이신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의미한다. 희랍어 원어로 ‘재림’을 뜻하는 말은 ‘파루시아’인데, 이 말은 ‘실효성 있는 임재’란 뜻이다. 가령 군부대가 어느 도시를 함락시키고 완전히 점령하여 장악하고 있는 상태와 같이 실질적으로 임재하는 상황을 의미한다. 예수님의 재림이 있을 때에는 그의 주권과 영광이 온 우주에 실효성있게, 실질적으로 미치고 임재하고 지배할 것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1세기 때의 기독교인과 많은 점에서 크게 다르다지만, 아마도 가장 큰 차이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도, 기다림에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1세기 때의 기독교인들은 무서운 박해를 받으면서 죽음의 공포 가운데 살고 있었으며, 멸시와 천대, 차별과 가난, 불안정과 절박한 위험 가운데 살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우리들은 이들과는 아주 다른 상황에 살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그렇게 애타게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기도하지도 않는다고 할 수 있다. 현실이 안전하고 자유롭고 편안하니까, 현실에 만족하고 사니까 그런지고 모른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아마 예수님의 재림이 올가봐, 빨라 올까봐, 걱정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불신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에 꼳 다시 오신다. 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다.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러 오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러, 그의 주권과 영광으로 온 우주를 다스리러 오신다. 그의 재림은 하루하루 가까워오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생각하며 고난과 시련 중에도 믿음을 지켜 주님이 약속하신 영생을 상속받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1995-04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