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 말씀은 즈카르야 사제가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아들 요한의 탄생을 예고 받습니다. 즈카르야 사제는 천사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습니다. 이미 아이를 낳기엔 늦은 나이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즈카르야 입장에서는 간절히 바라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노부부에게 자녀가 없다는 것은 큰 아쉬움, 혹은 더 나아가 아픔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의 마지막 부분이 엘리사벳이 스스로 생각하며 말하죠.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겪어야 했던 치욕을 없애 주시려고 주님께서 굽어보시어 나에게 이 일을 해 주셨구나.” 간절히 바라지만 이미 희망을 잃어버려 오히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죠.
독서에서도 마찬가지로 삼손의 탄생 이야기가 나오죠. 임신하지 못하던 자신에게 큰 축복이 다가왔을 때 오히려 마노아라는 여인은 기뻐하기 보다는 두려워 했습니다.
자신의 좌절과 시련에 갇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너무나 잘 볼 수 있습니다. 흔히 우리에게도 수없이 나타나는 일입니다. 삶의 여러 순간에 힘들고 어려운 순간이 닥쳤을 때 그 사람에게는 인간다운 존엄한 모습이 아닙니다. 악마가 우리에게 너희는 원숭이일 뿐이야라고 유혹하는대로 마치 본능에 충실해 울부짖고 물어뜯으려하는 추악한 동물의 모습과 같이 살려고 합니다.
실제로 백종원 씨가 자신의 고향의 지역상권 활성화를 위해 팔벗고 나섰는데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물론 그 도움을 잘 받아서 열심히 함께 동참하는 이들도 있지만 오히려 백종원씨의 도움을 받고 성장하기 위해 견뎌야 하는 것들 그 힘든 것에 갇혀서 자꾸만 자신들이 잘못해온 것에 대해 받아들이지 못하고 고집부리죠. 그래서 백종원씨가 손 뺄려고 하니까 국민신문고에 신고해 버렸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나쁩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릅니다. 이미 자신들 스스로 자신들의 아픔 안에 갇혀서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습니다. 결국 구원의 손길을 스스로 쳐낸 책임도 스스로 져야겠지요. 성경에 마귀들린 이를 예수님이 고쳐주려 할 때 마귀들이 뭐라고 합니까? “예수님 당신이 저랑 무슨 상관이 있으십니까?”
오늘날 냉담자들이 많아진 것도 이와 일맥상통 합니다. 나와 하느님이 아무상관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단순히 내 삶에 도움을 주는 분 나의 온 삶 안에서 함께 하시고 사랑을 주시는 존재임을 생각못하기 때문에 집안이 어렵다고 냉담하고 좀만 아프고 힘든일 있으면 냉담하고 그런 것이죠.
그래서 복음에서도 주님께서는 즈카르야의 입을 요한이 태어나기 전까지 막아버리셨습니다. 단순히 주님을 의심해서 벌 받는 차원이 아닙니다. 즈카르야는 사제였고 그래서 제사장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 이였기에 하느님을 의심하는 자가 말씀은 전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그런 점에도 저 역시도 상당히 많은 성찰을 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결국 요한이 태어났을 때 즈카르야는 변해있었고 하느님께 순명하게 되면서 그 은총을 기쁘게 누릴 수 있게 됩니다. 그 때 입도 풀리게 되지요. 복음의 뒷부분 요한의 탄생 부분도 한번 여러분들 읽어보십시오. 얼마나 큰 기쁨의 찬미를 주님께 드리는지.
이 대림시기에 우리는 모두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단순히 예수님이 태어나면 우리집 장사좀 편안하게 잘되게 해주실까? 이런 마음에 갇혀있다면 예수님의 탄생이 나와 별 상관없는 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내 삶의 모든 아픔과 슬픔 안에서 나를 구원으로 이끌어 주실 것임을 믿고 맡길 수 있다면 그 뒤에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기뻐 찬미할 수 있게 됩니다.
떠오르는 태양이 높은 데서 우리를 찾아오시어, 우리의 발을 평화의 길로 이끌어 주시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