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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2월 4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이 소망으로 말미암아. / この希望を抱いているために。
본문; 사도행전 26:1-7
행 26:1 아그립바 왕이 바울에게 말하였다. "할 말이 있으면 해도 된다." 바울이 손을 뻗치고 변호하기 시작하였다. 2 "아그립바 임금님, 오늘 내가 전하 앞에서 유대 사람이 나를 걸어서 고발하는 모든 일에 대하여 변호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3 그것은 특히 임금님께서 유대 사람의 풍속과 쟁점들을 모두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쪼록 내 말을 끝까지 참으시고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4 내가 젊었을 때부터 살아온 삶을 모든 유대 사람이 알고 있습니다. 곧 그들은 내가 내 동족 가운데서,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처음부터 어떻게 살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5 그들은 오래 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으므로, 증언하려고 마음만 먹으면, 그들은 내가 우리 종교의 가장 엄격한 파를 따라 바리새파 사람으로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할 것입니다. 6 지금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에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 여기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7 우리 열두 지파는 밤낮으로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면서,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전하, 나는 바로 이 소망 때문에 유대 사람에게 고발을 당한 것입니다.
1. アグリッパはパウロに、「お前は自分のことを話してよい」と言った。そこで、パウロは手を差し伸べて辯明した。2. 「アグリッパ王よ、私がユダヤ人たちに訴えられていることすべてについて、今日、王の前で辯明させていただけるのは幸いであると思います。3. 王は、ユダヤ人の慣習も論争点もみなよくご存じだからです。それで、どうか忍耐をもって、私の申すことを聞いてくださるように、お願いいたします。4. さて、私の若いころからの生活が、同胞の間であれ、またエルサレムの中であれ、最初のころからどうであったかは、ユダヤ人ならだれでも知っています。5. 彼らは以前から私を知っているのです。だから、私たちの宗教の中でいちばん厳格な派である、ファリサイ派の一員として私が生活していたことを、彼らは証言しようと思えば、証言できるのです。6. 今、私がここに立って裁判を受けているのは、神が私たちの先祖にお与えになった約束の実現に、望みをかけているからです。7. 私たちの十二部族は、夜も昼も熱心に神に仕え、その約束の実現されることを望んでいます。王よ、私はこの希望を抱いているために、ユダヤ人から訴えられているのです。」
오늘은 대강절의 두 번째 주간을 시작하는 첫 날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 우리 주변에 진열되고 장식되어있는 많은 성탄트리와 불빛들을 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주일에 함께 나눴던 메시지를 떠올리며 크리스마스는 자신의 이기적인 일탈과 육신적인 탐욕을 제어하고 참된 복음을 고백할 기회 중의 기회인 것을 기억하셨기를 소망합니다. 주변에 아무리 말세의 징조가 넘쳐나고, 크리스마스의 참된 의미를 왜곡하고 더럽히고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인 우리는 자신의 정결함과 거룩함을 복음과 함께 견고히 붙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아울러 이번 대강절기를 통해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탄생을 생각하며 이미 받은 구원과 영생이라는 복된 선물에 어떤 헌신과 섬김으로 예배할 것인가를 기도하며 응답받을 수 있기를 또한 축복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드디어 바울은 자신의 입을 열어 다시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는데요. 기록된 본문의 흐름을 보면 마치 바울이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기회를 얻은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는 로마 제국의 총독이었던 베스도와 로마 제국의 식민지에서 분봉왕으로 임명된 아그립바 2세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입장은 달랐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여 하루라도 빨리 갇혀 있는 자신의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일반적인 범죄의 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어떤 처지에 있게 되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사도이며,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적으로 섬기는 종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소개하는 편지에서 한결같이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빌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엡 1:1)
바울이 자기 스스로를 사도라고 부르고 있는데요. 그가 이렇게 사도로 자칭했던 것은 교회 안에 어떤 높은 계급에 있다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어떤 처지에서든 주님께서 보내신 종이라는 정체성을 잊지 않기 위한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자기의 입장에서 대해서 말하게 된 것, 즉 변호(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는 표현으로 말문을 열고 있는데요. 여기서 ‘변호, 혹은 변명’이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뜻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여기서 “다행이다”라는 단어는 원어로 makarios (마카리오스)라고 하며, 뜻은 “복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 팔복의 말씀에 “복이 있나니..”하는 구절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마카리오스라는 표현입니다.
산상수훈의 말씀에 기록된 이른바 팔복의 가르침에서도 세속적으로는 도무지 복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복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이처럼 오늘 바울도 세속적으로는 도저히 복이 있다고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자기 스스로가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음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의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바울에게 혜택을 주고, 선처를 베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권력자들로부터의 선처를 기뻐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로서, 종으로 주님께로부터 받은 자신의 소명을 따라 주어진 사명의 자리에서 순종할 수 있음을 복되다고,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축복이라고 기뻐하며 선포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들 앞에 손을 들고서 말합니다. 자신에게 선처를 베푼 아그립바에게 경의를 표하며 아부하는 동작이 아닙니다. 이 상황의 모든 주도권을 쥐고 계신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었던 것이지요.
일전에 바울이 빛 가운데 예수님과 만나고 곧바로 눈이 멀어 다마스쿠스에 살던 제자 아나니아를 기다릴 때였습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바울을 찾아가서 세례를 주고 눈을 치유하여 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때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찾아 가는 것을 주저하고 있을 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행 9:15)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실 때 약속하신 말씀대로... 지금 바울은 임금들 앞에 서 있습니다. 물론 세속적이고 상식적인 시선으로 볼 때, 그리 근사하거나 멋진 모습은 아닙니다. 너무도 초라하고 궁핍한 모습이지요. 게다가 범죄 피의자(용의자)의 누명을 쓰고 있는 모습입니다. 황제에게 보내려고 베스도가 자신의 책임을 회피(면피)하기 위해 보다 분명한 죄목을 찾으려고 마련한 신문의 자리에 서 있습니다. 남들은 꺼리고 주저하는 그 자리를 바울은 ‘복 된 자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아주 기쁘고 자랑스러운 듯이 손까지 들고서 말을 시작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기쁘게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유대인들에게 고발당하는 이유에 대해서 차분하게 말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아그립바는 유대인들의 풍습과 관습, 그리고 율법에 대한 지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잠깐 설명을 드렸지만, 아그립바 왕의 가문은 로마제국의 힘을 등에 업고 유대지역에서 정치적인 실권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그립바 왕은 당시 대제사장들을 임명할 권한과 성전을 관리하는 실질적인 권력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 속에 임재하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소망으로 인해 고발의 자리에 서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소망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시는 나라에 대한 소망입니다. 모세의 5경부터 시작하여 구약성경의 모든 예언서들이 약속하시는 하나님의 나라가 곧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소망인 것이지요.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께서 자기 민족만이 그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선민 이스라엘만이 하나님 나라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선민 이스라엘을 본보기로 하여 모든 인류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 날에 이새의 뿌리에서 한 싹이 나서 만민의 기치로 설 것이요 열방이 그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거한 곳이 영화로우리라 (사 11:10)
여호와께서 열방을 향하여 기치를 세우시고 이스라엘의 쫓긴 자들을 모으시며 땅 사방에서 유다의 흩어진 자들을 모으시리니 (사 11:12)
즉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을 거룩한 도구로 활용하셔서 모든 인류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계획에 대해서 분명히 올바르게 다시 발견하게 된 바울은 이방인들을 향해 그 계획과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것을 전하고 다녔던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전도의 핵심인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범죄인 취급을 당하는 것이나, 혹은 억울한 누명을 쓰고 초라하고 궁색한 몰골로 사람들 앞에 수치를 당하는 것조차도 복된 자리라고 여겼습니다. 그 이유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고백하고 전파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이 복된 인생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어떤 즐거운 것을 누려볼까, 어떤 좋은 사람을 만나 볼까, 어떤 능력을 가져 볼까, 어떤 재미를 느껴 볼까하고 고민하고 걱정하는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복된 인생과 거리가 멀다는 것이지요.
성탄절이 조금씩 가까이 다가옵니다. 이번 성탄절은 올해의 마지막 주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웃과 가족을 초청해서 식사를 나누려고 합니다. 교회의 창립과 함께 예수님의 복음을 소개하고 고백하는 날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 하치오지영광교회가 14년 전에 이 하치오지에서 모여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구하게 해 주신 주님이 은혜와 함께 주님의 계획하심이 우리를 통해 어떻게 복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지를 고백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가 무엇인가 대단한 성취와 성공을 했다고 자랑하는 자리가 아닙니다. 아무리 초라한 모습이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모습이라도 이미 우리 안에 임재하신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뜻을 고백할 수 있는 복된 삶의 자리를 잔잔히 고백할 수 있는 자리입니다.
겉으로 화려하고 뭔가 시각적으로 주목을 끄는 행사나 이벤트는 없을지라도 이미 우리 안에 풍성한 축복으로 임재하고 계시는 주님을 실감 나게 체감할 수 있는 크리스마스가 될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말은 ‘그리스도를 예배하다’는 라틴어에서 유래합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생일이라고 고백하는 날에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예배하기로 약속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크리스마스에는 반드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예배하는 것이 주된 일과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리스도를 예배할 수 있는 날을 복되고 귀하게 여길 수 있는 믿음을 회복하는 절기가 대강절기인 것이지요. 또한 이런 귀하고 복된 날을 귀하고 복된 날답게 지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한 가장 적확한 날이라고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올해 크리스마스는 크리스마스답게 복되고 귀한 날로 주님께 예배하며 영광을 돌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람들은 바울이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한 절호의 찬스를 얻었다고 오해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의 누명을 벗기 위한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 앞에 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이 성취된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그래서 왕 앞에서 발언하게 된 것을 복되다고 고백하며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이기적인 입장에서 세속적으로 유익한 것을 얻은 삶을 축복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며, 나는 죽고 예수로 사는 사람은 오히려 자신의 손해로 인해 복음을 전할 수 있다면 그러한 삶의 자리를 복되고 귀한 자리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매일 주님께서 동행하여 주신 일상을 기록하는 것은 그래서 복되고 아름다운 흔적의 역사가 됩니다. 특별히 올해 크리스마스는 자기 욕망을 발산하는 이기적인 일탈의 기회로 삼던 자세를 회개하고, 돌이켜 진정으로 복된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아름다운 사명에 동참하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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