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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李씨 ‧ 파평 尹 씨 부부
이원우/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 한국수필가협회 이사 • 국제PEN 한국본부 이사• 표암문학 자문위원•한국가톨릭문인협회 이사• 대한가수협회 중앙회원• 더 스토리 방송 홍보대사 • (전)26사단 홍보대사/ 소설집 6권 • 수필집 15 권 • 기타 3권/ 표암문학 대상•KNN문화대상 • 화쟁포럼 문화 대상• 「문예시대」문학대상 • 부산수필 대상•
부산북구문학대상• 경기PEN문학대상 • 부산PEN문학대상•경기문학인회 문학대상 외
남편 이종천(李鍾天)과 나는 참 희한한 부부다. 거짓말 좀 보태면 일세기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커플? 뭐 이 정도로 해 두자. 서두부터 더 이상 강조하다 보면, 허풍으로라도 그 뒤를 이어나갈 여력이 내게 없을 테니까. 어쨌든 ‘희한한’과 ‘일세기 운운’을 큰 명제로 삼고 이야기를 풀어 나가려는 거다.
남편과 나는 아홉 살 차이로 남들에게 알려져 있다. 물론 남편이 연상이다. 그런데 실제는 내가 열다섯 살 아래라 낭패(?)다. 보통 일반 가정이라면 옛날에 그런 경우가 더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무척이나 드물리라. 한데 아내가 몇 살 더 하는 쪽이 좋다는 명제가 회자된 지 오래다. 연예인들에겐 예사롭게 치부되더라, ‘아내 연상(年上)’ 부부 말이다. 그런 우스갯소리 비슷한 걸 들으면 우린 주눅(?)이 든다. 남편의 또 다른 직업 중 하나는 가수-대한가수협회등록 정식 가수, 콘서트를 열여덟 번 엶-이기 때문이다. 물론 난 지금 평범한 주부다. 이만하면 뒤죽박죽이지만, 앞서 ‘희한한’이란 형용사를 끌어다 쓴 당위성은 확보된 셈일까? ‘일세기’에 관련해선, 도중 어디에서든 다시 들먹이자.
내년 3월이면 우리는 금혼식을 맞는다. 다시 말해 결혼 오십 주년이란 말이다. 남편 서른여덟 살, 내 나이 스물세 살에 우린 웨딩마치를 울렸다. 소읍(小邑)의 스물 학급 규모 학교 운동장에서…. 학교장이 주례를 섰고. 남편은 그때 우리 부모에게 서른두 살이라고 속였다.
하기야 워낙 건강이 좋은 남편이라 동료들은 그 나이로도 보지 않았다. 그게 수수께끼로 남은 셈이다. 운동장에서 웨딩마치를 울렸다? 이 또한 비정상으로 여겨지리라. 남편과 나는 한 학교에서 근무하는 부부교사였던 거다. 결혼 전후 각 3년 동안 스물 학급짜리 ‘동일교(同一校) 부부교사’ 기록을 그와 내가 세웠다. 그건 아직 깨어지지 않고 있다더라. 도서 벽지라면 당시에도 그런 일쯤 오히려 권장 사항이었는지 모르지만.
사실 면(面)이 아닌 읍내 소재지의 한 학교에서 부부가 자그마치 6년을 교사로 보낸다는 건, 상상조차 못할 노릇이다. 누구에게나 고통이다. 당사자는 물론 관리직인 교감과 교장, 동료들에게도 마찬가지. 우린 동학년일 때도 있었으니, 서로가 모든 걸 참고 이겨 나가야 했고말고.
그러는 가운데서도 남편은 교내외의 어지간한 일은 자기가 맡아 해결하려 했고, 나는 공적인 매사에 소극(消極)으로 임했다. 업무를 일부러 더 맡아 땀을 흘리는 그를 보고 난 난감한 표정을 지어야 했다. 부부의 다른 점이 드러나기 시작한 단초였다.
남편은 나이를 아예 무시하고 동네 청년들과 자주 어울렸다. 학구 안팎 노인들의 회갑 잔치에 불려 나가 ‘남자 기생’ 노릇을 하는 것쯤 예사였다. 노랠 불렀다는 말이다. 어떤 때는 팁으로 받은 지폐를 내 호주머니에 넣어 주기도 했으니 두말해 무엇하랴. 나는 그게 또 싫었다. 차라리 진절머리를 쳤다는 게 낫겠다. 남자와 여자를 떠나서 말이다. 기생이라니 조선 시대도 아니고 성적(性的)으로 비하되는 결과를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 같아서였다,
이런 일도 있다. 1년에 한두 번쯤은 전 직원과 육성회 이사(학부모)들이 야외로 소풍을 나갔다. 술 먹고 노래와 춤으로 몇 시간을 보내는 행사였다. 남편은 나를 아예 무시하고 자기 혼자만 거기 합류하는 거다. 물론 다른 교사는 전원 참가했고. 그런데 현장에서의 소문을 들어보면 기가 찼다. 새삼 강조한다. 노래는 그의 취미이자 특기인데, 시 교육청 관내에서 그만큼 노래를 잘 부르는 사람이 없다 할 정도였다. 따라서 다른 데서 온 부녀자들이 그를 납치(?)하는 소동이 일어날밖에. 나 보고는 육성회 이사들에게 술 따르는 꼴을 못 보겠다는 그였으니, 그런 처신이 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것 역시 남편과 내가 다른 점 중 하나다. 남편은 난봉꾼이란 소릴 들을 만했다.
자기는 여교사들과 이런저런 농담도 하면서 내게는 입조심 혹은 말조심하라고 윽박질렀다. 복도 한 귀퉁이에서 어떤 남교사와 잠시 업무를 의논하다가 그의 눈에 뜨였다 치자. 그날 저녁 퇴근한 연후에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어린이들에게 무용을 지도할 때 동학년 남교사와 손을 잡아야 한다. 그러려면 이런 절차(?)를 나는 거쳐야 했다.
“나, 이태기 선생님과 무용 지도 시간에 손잡으면 안 될까요?”
그러니 남편은 여기저기서 의처증 환자라는 소릴 들을 수밖에. 하기야 열다섯 연하 20대 초반의 아내와 함께 사는 중년 남자로서, 그런 놀림을 받는 것은 어쩌면 당연했으리라. 하지만 분명히 밝히건대 남편과의 잠자리는 균형을 이루고 있었으니, 돌이켜보면 우습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 질이나 회수 모두에서 나는 남편에게 뒤졌다. 지금은? 내 나이 일흔둘이고 남편은 여든일곱 살인데…. 글쎄다. 그 이상은 내가 밝히기를 거부해야 할 것 같다. 다만 그의 말을 빌리면 남자는 죽을 때까지 남자고, 여자는 죽을 때까지 여자라는 거다. 이건 어느 유명한 신부(神父)의 이야기를 끌어다 쓴 것이지만….
그의 전언 하나가 내 귓전을 어지럽힌 적도 있다. 어느 노인학교에 강의를 하러 갔는데, 최고령 남학생이 이러더라는 거다. 자기 나이 아흔일곱 살, 얼마 전까지 예순 갓 넘은 여자가 하나 있었더란다. 그러다가 여학생들 앞에서 은근히 자기 정력(?)을 자랑을 하는 게 아닌가! 한데 도망을 갔단다. 그 남학생의 귀가 어두워 불편하다는 이별의 변을 남기고.
나는 아직 남편이 제정신으로 그런 말을 내게 옮겼는지 잘 모르겠다. 아찔하다. 남편이 17년을 더 살면 그 할아버지와 나이가 같아서다. 그때 내 나이는 여든두 살이다. 둘의 상황은 미지수겠지. 남녀의 관계라는 게 그렇게 묘하고 신비롭기까지 한 걸까? 어쨌거나 남편이 모르는 비밀 이야기를 나도 갖고 있다. 아까의 그 신부가 ‘고해성사’ 일화를 들먹였는데, 이러더라.
“고해소에 어떤 자매가 들어온 겁니다. 망설이더니 하는 얘기가, 자신의 나이가 여든넷인데 밤마다 욕정에 몸부림친다는 게 아닙니까? 물론 남편과는 오래전 사별했다고 했습니다. 내가 성직자로서 뭐라고 했는지 궁금하지요? 기도로 이겨나가라는 보속(補贖)을 주었습니다.”
그러고는 신부가 덧붙였다. 50대 중반인 자기 자신도 마찬가지라는 거다. 밤중에 그렇게 씨름하다가 잠옷 차림으로라도 내려와 성전에 들어간다. 그런 뒤 성체 앞에 꿇어앉아 주님께 울면서 살려 달라 매달린다나? 나는 그날 이후에 남편에게 그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남편은 외관상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다. 다섯 자 다섯 촌(寸) 단신에다가 인물은 그저 보통에 못 미치는 정도. 사범학교를 졸업하여 교직에 투신한 장삼이사였다. 나도 마찬가지, 목포에서 여자 고등학교(3년 졸)를 거쳐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인연 따라 남편이 근무하는 학교에 발령을 받았으니까. 다만 난 지방의 미인대회에서 입상한 바 있을 정도로 외모 하나는 빠지지 않았다. 하니 남들은 이러기 예사였으리라.
“이 선생 저 친구 말이야. 무슨 무기(?)가 있는지 미인, 그것도 열다섯 살 아래인 마누라와 산다는 게 신기해.”
“누가 아니래. 되레 자기가 큰소리친다고 하던데? 윤 선생이 어떨 땐 불쌍해, 쯧쯧.”
“하기야, 이 선생 몸 봐. 윤 선생은 미인 대회에 나갈 정도지만, 이 선생은 미스터 선발 대회에도 나갈 정도지 않아? 잠자리에서 오히려 이 선생이 패자(敗者)가 아닐지 모르지, 허허.”
그랬다, 솔직히 말해 맞는 말이란 뜻이다. 적어도 육신으로 하는 일 모든 게 남편은 나이를 초월해 있었으니까.
이런 걸 여담이라 하면 남들은 나를 바보로 여길 테지만, 결혼 전 남편은 여자관계가 사뭇 복잡했다. 이상하게도 그는 나이 어린 나에게 옛날 사귀었던 여인들과의 사연을 가감 없이 늘어놓는 게 아닌가? 물론 이제 스무 살을 겨우 넘긴 내게 엄포(?)를 놓고 잘난 체하려는 뜻도 있었겠지만, 꽃노래도 한두 번이라 했는데…. 나는 들을수록 불같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거기에 비해 나는 중학교 때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남자의 손 한 번 안 잡아 본 처지다. 해서 그의 일방으로 치닫는 연애 이야기에 혼절 안 한 게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중에서 제일 나에게 충격을 준 건 그의 ‘첫사랑’ 체험담이었다. 그걸 옮기려는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나락(奈落)에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니 부아가 치밀어 올라 견디기 힘들다고 하자. 그의 첫사랑은 너무나 의외의 여인이었다. 당시엔 상상조차 못 할, 자신보다 두 살 연상인 한 학교의 여선생을 혼자서 좋아했다는 것. 너무나 진지한 표정을 한 그의 이야기다.
“당신하고는 열일곱 살 차이가 나는 셈이네. 근데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보이고 그 여인 은 마치 하느님 같이 보이는 거야. 동학년을 하면서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해 보지 못하고 끙 끙 앓다가 어느 날 저녁 학교 팽나무 밑에 김 선생을 불러낸 거야.”
나는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듣기 싫으니 입 닫으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눈치가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그는 계속 입을 열었다.
“참 순수했고 아름다웠어, 그 여인 김 선생과의 순간의 만남이…. 난 여인에게 무턱대고 ‘사 랑한다’며 밑도 끝도 없이 운을 떼었단 말이야. 침묵을 지키고 있는 여인에게 손을 좀 달 라고 했지. 내 청을 거절하지 않는 여인의 손등에 입맞춤을 제법 길게 한 것. 그게 다야.”
막돼먹었는지 눈치가 없는지 아니면 모자라는 사람인지 모르지만, 남편은 틈만 나면 그 여인을 입에 올렸다. 나는 속이 쓰린 걸 참고 고소(苦笑)로써 화답(?)이라도 해야만 했다. 그 뒤로 따로 만난 적이 있거나, 최악의 시나리오인 포옹까지 한 것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자존심이 있어 앙탈을 부리는 등 그런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남편이 연상의 여인과의 만남을 순수로 포장하는 게 싫었다.
어떨 때는 그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기도 했다고 하자. 왜냐고? 조실부모(早失父母)하고 형님 댁에서 사범학교에 다니면서 우등으로 졸업을 했다는 것도 그에게는 점수였다. 주류 도매상을 하는 형님 집에서 숙식을 해결했더란다. 그것도 사업이라 가끔은 자금이 필요하다는 걸 눈치 챈 그는 자기 봉급을 한 푼도 쓰지 않았다. 부모님의 유언도 그것이었으니까. 해서 그저 검소 아니 보기 초라할 정도의 차림으로 초임 교사 시절을 보낼 수밖에. 미군 작업복 바지를 염색해서 입었고 고무신을 신고 출근할 정도였더란다. ‘연민의 정’ 운운에 남들이 손가락질을 할까 봐 내가 오히려 염려하는 까닭이다. 그만큼 나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보통 사람이 갖는 정서 세계에서도 숙맥일까?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그 여인이 세상을 뜬 것이다. 가톨릭 신자였으니 선종(善終)이라며 남편은 죽음을 표현하는 말이 종교에 따라 각기 다르다는 걸 강조했다. 불교는 열반 혹은 입적, 개신교는 소천이라나? 어쨌든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 지겹던 첫사랑 이야긴 안 들어도 될 테니까. 오랜 세월이 흐른 뒤 남편은 천릿길도 마다하지 않고 그 여인의 유택에 다녀온 사실이 드러나 내 애간장을 한 번 더 저몄지만.
순서가 어긋났는데 남편은 참으로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다시 내세우지 않을 수 없다. 노래란 노래는 장르를 넘나들면서 시도 때도 없이 불렀다. 그러더니 어느 날 ‘시 교원 예능 경진 대회’ 민요 성악 부문에 출전하겠다며 전혀 예상도 못했던 출세(?) 예약 카드를 내미는 게 아닌가? 만류를 하기엔 이미 늦었다. 그가 창원 온천에서 후학을 가르치는 인간문화재인 김평순 여사를 만나고 온 것이다. ‘태평가’를 부르기로 했단다. 이윽고 개최된 시 대회에서 남편은 당당히 최우수상을 받고 금의환향(?)했다. 이윽고 도 대회에 나갈 수밖에.
마산(馬山)에서 열린 ‘경상남도 교원 예능 경진 대회’에 나도 따라가야만 했다. 우황청심환도 챙겨 마시게 했고, 남편의 한복매무새도 손봐줘야만 했다. 머리에 동여맨 무명 수건도 매만져야 했음은 물론이다. 드디어 수백 명의 청중이 앉아 빤히 쳐다보는 가운데 남편은 무대 중앙에 섰다. 참, 잊었다. 청사초롱도 오른손에 들었었지. 두땅땅! 김평순 인간문화재가 단아한 자세로 굿거리장단 반주를 장구에 실었다.
작은 긴장감이 얼굴에 번져 있었다. 하나 남편은 청사초롱을 약간 흔드는가 싶더니 너무나 당당하게 큰소리로 ‘태평가’를 목청에 실었다가 토해낸다. 그런데 다음 순간 나는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꼈다. 그가 첫 음을 너무 높이 잡아버린 거다. 전문 국악인 중 명창이라는 칭호를 받는 사람도 소화시킬 수 없는 정도였다 하자. 다시 여기서 내가 한 번 불러보자. 청사초롱에 불 밝혀라/ 잊었던 낭군이 다시 돌아온댜/ 공수래 공수거하니 아니 놀지를 못하리라/ 니나노 늴리리야 늴리리야 니나노 얼싸 좋다/ 얼씨구나 좋다 벌 나비는…
내가 걱정했던 게 현실로 나타났다. 최고음인 두 번째 ‘니니노’에서 그야말로 돼지 멱따는 소리가 듣는 모든 사람의 귀를 아프게 하였으니…. 바야흐로 청중들은 가가대소했다. 땀을 훔치고 앉은 나를 생각해서라도, 남편은 까짓 입상 따위를 염두에 두지 말고 무대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런데 남편은 끝까지 고집을 피워, 규정인 ‘2절까지 소화하기’ 원칙을 지켰으니 나는 유구무언일 수밖에. 천자개벽이 아니고서는 결과가 좋을 리 없었고말고. 그래도 남편은 다른 부분은 워낙 열창 아닌 절창을 했기 때문에, 우수 1, 우량 2, 장려 3 안에 못 들어갔을 뿐 7위란 성적을 얻었다. 큰 우세는 면했다는 후일담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그런데 그 다음해에도 남편은 다시 시조창 ‘푸른 산중 백발옹이’로 밀양시교원예능경진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최우수상을 받았으나, 전문가들의 조언에 의해 도 대회는 안 나갔다. 하지만 남편은 포기를 몰랐다. 1년 뒤 다시 민요로써 도 대회에서 장려상을 거머쥔 거다. 승진에 필요한 0.125점도 그래서 얻었다. 그 뒤로도 두 번이나 시 대회에 나갔으니 가곡 독창과 서예. 전자(前者)에선 시 대회에서 장려상, 후자에선 최우수상을 받았다. 서예 부문에서는 도 대회에 확실한 실력 부족을 알고 쓴웃음을 짓던 남편이었다. 가곡 독창은 장려라, 최우수상 입상자에 밀려 도 대회 참가는 원천 봉쇄됐다. 나는 되레 안도했다.
이렇듯 그는 공명심에 항상 불타오르는 교직 생활을 했다. 나와는 다른…. 그는 계속 노래 실력 하나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평을 여기저기서 들었다. 나는 또 멍하니 그걸 귓전에서 흘려야만 했고. 결론이다. 남편은 지독한 사람인 데 비해 나는 그저 그런, 필부(匹婦)에 지나지 않았던 거다. ‘극명하다’는 형용사를 동원하고 싶다.
또 다른 얘기. 남편과 나는 학교 울타리 안의 간이 사택에서 일찍부터 반려견과 함께 지냈다. 신혼 초부터였으니 그것도 남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기 예사였다. 견종도 다양해서 스피츠와 셰퍼드, 도사, 요크셔테리어 등이다. 그중 스피츠를 제외하곤 전부 혈통서를 가진 녀석들이었다. 물론 그 녀석들을 한꺼번에 키웠다는 뜻은 아니다. 스피츠는 결혼 전에 새끼 한 번 빼서 무료 분양했다. 그 녀석들과의 인연은 그렇게 끝냈다. 요크셔테리어는 한참 뒤 얘기다.
셰퍼드와 도사는 행여 돈벌이나 될까 싶어 고른 암컷 한 마리였다. 특히 셰퍼드는 소파상(小波賞)까지 받은 랏츠라는 독일 수입견의 후예였고 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은 바 있었다. 도사는 투견대회에서 최고 실력을 발휘한 ‘다쯔나미’의 손녀. 요크셔테리어는 영국 오즈밀러언 견사로부터 직수입한 명혈. 녀석들과 우리 가족의 삶과 죽음은 지금도 견계(犬界)의 전설로 남아 있다. 우린 결혼 일주년 기념일, 한국셰퍼드견등록협회장에게 한국애견상을 받을 정도였다.
남편은 돈이 될까 봐 수소문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다녔다. 명견 중의 명견을 사위로 삼아야 그 바닥에서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이 그를 줄곧 지배했다. 물론 나도 부화뇌동한 측면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다가 밀양의 소읍에서 서울과 수원, 부산, 김천, 목포 등의 견주들과 ‘개 사돈’을 맺었다. ‘개 사돈’ 17명, 이게 앞서의 ‘일세기’와 관련된다. 전무후무! 개는 두 번을 교접해야 수태가 보장되기 때문에 그의 사돈집 방문도 그만큼 늘어난다는 계산이다. 물론 사위와 딸의 사랑 장면을 목격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즐거움! 사람과 개가 다른 점이다.
물론 개가 좋아서 우리는 녀석들을 우리의 반려(伴侶)로 삼았음은 분명하다. 모두 합하면 20년은 넘었으리라, 녀석들과 한 집에서 한 방에서 얼싸안기도 하며 뒹굴고 산 게 말이다. 시골의 간이 사택이나 농가에서부터 대도시의 서민 아파트가, 우리의 공통 혹은 보금자리였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녀석들의 먹거리는 챙겨 주었다. 새벽에 남편이 출장을 떠나는 날 라면을 급히 끓여 줄 때가 있었다. 달걀이 딱 하나뿐이라면, 그걸 나는 출산한 어미개의 밥-갈치 대가리와 쌀 싸라기를 섞어 끓인 죽 같은 것-에 던져 넣었다. 그런 경우는 비일비재했다.
그런데 진짜 애견 사상 면에서는 남편과 나 사이에 간극이 있음을 발견한 것은 몇 년이 지난 뒤였다. 남편은 견공의 혈통을 굉장히 따졌다. 순종 중의 순종, 명견 중의 명견 후예가 아니면 숫제 외면하는 거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셰퍼드와 요크셔테리어 등은 남편의 개 사육의 명분에 일치되었다고 하자. 하지만 나는 그게 아니었다. 설사 내 집에 들어온 개가 잡종견-물론 실제 그런 일은 없었다-이라도 사랑으로 길러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하여튼 소읍 변두리의 학교에 근무할 때 남편과 나의 생활은 정상이 아니었다, 개로 말미암아서도! 학교 울타리 안의, 오두막 같은 간이 사택에서 개들과 일상을 보냈으니까. 남들은 수군대는 모양이었다.
“저러니 둘 사이에 자식이 없지.”
그랬다. 실제 결혼한 지 몇 년이 지나서까지 나는 임신과 유산을 계속해 온 거다. 동료 여교사의 수의학을 전공한 예비역 대위가 군청에 근무했다. 그가 개 사육이 그 원인일 수 있다는 유권해석(?)까지 하는 게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었다. 하지만 반신반의할 수밖에. 그렇다고 해서 강아지들이 바글바글하는 가운데였는데, 일시에 그 녀석들을 남들에게 전부 무료로 분양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돈도 벌여야 했다.
그러는 가운데 도사견 ‘바라(일본식 이름 ’장미‘를 뜻한다)’에게 발정이 왔으니 우린 엄청나게 기뻤다. 사실 녀석이 혈통은 괜찮았지만, 어릴 때 관리 부실로 말미암아 한쪽 뒷다리를 심하게 저는 장애를 안고 있었다. 그럴수록 천하의 명견과 짝지어 주고 싶은 것은 당연한 우리의 욕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중형견은 첫 발정을 왔을 때 교배를 시키지 않는다. 18개월 미만의 어미견이 낳은 새끼에겐 혈통서에 ‘조기(早期) 번식’이라는 표시가 찍히기 때문이다. 다시 네댓 달을 기다리자 두 번째 생리가 왔다. 어미가 될 신체 조건을 갖춘 셈이다.
백방으로 수소문도 하고 여기저기 도사견 전문 번식가를 찾아다녔다, 그런데 어느 날 남편이 무릎을 친 거다. 그리고 무슨 큰 발견이라도 한 듯이 소리쳤다.
“됐다. 김천 직지사 밑에 도사견을 집단으로 사육하는 사람이 있었지! 가만있자, 어디 명함 을 받아 놓은 게 있을 거야!”
이윽고 고본(古本) 갈피에서 명함 하나를 빼들더니, 곧장 수화기를 들고 다이얼을 돌리는 것이었다. 내게는 논의를 하는 흉내만 내고 혼자서 한 결정이었다. 난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을 수밖에. 우리가 거주하는 데서 십 리 떨어져 밀양 역(驛)이 있었다. 거기까지도 문제지만, 정작 기차에 큰 개를 싣고 몇 정거장 간다는 건 일반인들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정도로 무모한 짓이었다. 수캐 중 최고의 타이틀을 가진 녀석이 식목일 앞뒤로 교배 계획이 없다는 이야기를 상대 즉 사돈이 하는 모양이었다. 마침 바라도 그때쯤이 적기였다. 나는 남편의 고집을 꺾을 수 없어 두 손을 들었다. 남편은 충격 그 자체인 비밀(?)을 하나 털어놓았다.
“사돈이 말이야. 내외가 한센(Hansen) 병 음성 환자야. 손가락도 거의 없는….”
“저런! 그런데 그분이 기르는 수캐를 ‘사위’로 삼는다는 말이에요?”
남편은 음성 한센 병이 전염이 절대 되지 않는단다, 그러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곤 돈을 벌려면 그 정도의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며 내 동의를 구했다. 드디어 4월 식목일, 공휴일이어서 남편은 바라를 데리고 김천으로 출발한다. 4킬로미터를 경운기로, 밀양역에서 김천역까지는 수화물로 바라를 싣고 간다며….
고생문이 훤할밖에. 역 담당자는 난감을 표시했고말고. 보통 재래종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덩치를 가진 싸움개 암컷! 국부(局部)로부터의 분비물과 악취…. 그걸 실어 준다? 나중에 신문에라도 날지 모른다는 생각을 그가 왜 하지 않았으랴! 남편은 자신도 수하물 칸에 타겠다며 사정사정하여 바라를 실을 수 있었다. 그건 정상인으로서는 엄두조차 못 낼 일이었다.
늦게 김천역에 내려 절뚝거리는 바라를 끌고 남편은 사돈의 집까지 걸어서 갔다. 사육장은 집 울타리 안에 있었다. 수십 마리의 도사견들이 마구 짖어댔다. 그런 가운데 최고 수캐를 지목해 교배를 시키고, 남편은 사돈의 곁방에서 잠을 잤다. 이튿날은 일요일이라 괜찮은데 월요일이 문제였다. 남편은 연가를 내어 놓았던 참이라 스물 몇 시간을 사돈의 집에 머무를 수밖에. 애면글면 강아지를 받아낸다는 욕심 하나로 버텨내었다. 그러니 그 극성을 기준으로 하면 남편은 견계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다시 두 녀석이 짝짓기를 하는 현장을 비가 내리고 있는 가운데 지켜보고 나서, 오후 늦게 김천역에서 밀양역으로 출발했다. 한 시간이나 걸려 바라 녀석 목줄을 잡고 집찰구(集札口)로 나올 땐 초저녁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아침부터 내리는 비는 그칠 줄 몰랐다. 철길가의 작은 길은 이미 물에 잠겨 걸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남편은 철길 위를 택할 수밖에.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기관차 헤드라이트나 소리에 따라 왕복 4차선을 번갈아 옮겨가며 곡예를 할밖에. 그러다가 중간인 남포리쯤에서 철교가 나타나는 게 아닌가? 그 밑으론 샛강의 물이 불어나서 건널 수 없었다. 남편은 녀석을 가슴에 안았다. 온몸이 비에 젖은 둘이 포옹을 한 거다. 그가 몇 발짝을 뗀 중간에서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맞은편에서 달려오는 기차! 무시무시한 굉음을 뿜으며 달려오는 철마(鐵馬)와 맞부딪힌다면? 죽음밖에 없다.
순간 남편은 바라와 함께 샛강에 뛰어내린다. 이윽고 정신을 차렸을 순간 쓰러진 나뭇가지에 둘이 걸려 있었다. 겨우 부둥켜안은 채 둘이 남천강 본류(本流)에서 빠져나왔을 땐 그야말로 초주검이었다. 그렇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귀가했을 땐 밤 열두 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한데 수태(受胎)의 기미가 안 보이는 거다. 설상가상이라더니 바라는 국부로부터 심한 농이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동물병원에 전화로 문의를 한 결과 그게 폴립(polyp)이라는 성병이란 걸 알았을 때의 절망감이란! 속수무책이었다. 병원에 데리고 오면 제거 수술을 해서 치료가 가능하다 했지만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 시절 우린 승용차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학교 울타리 뒤에 있는 폐가 기둥에 묶어 두고 사료를 제공하는 것으로 울면서 나날을 보냈다. 녀석은 비가 오는 날 밤엔 비명을 질러대었다. 대처하는 방법을 의논해 봤으나 뾰족한 수가 없었다. 나는 수십만 원을 주더라도 동물병원장에게 하소연, 왕진을 청했으면 했는데 남편은 그게 ‘쇠귀에 경 읽기’였다. 너무나 혼이 났던 터라 생긴 트라우마로 여기려 했지만, 난 납득하기가 쉽지 않았다.
남편은 그러다가 자연사하더라도 어쩔 도리 없다는 심보였는지 모른다. 어쨌거나 바라는 그 끝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모든 걸 남편의 책임으로 돌릴 순 없지만, 냉혈한(冷血漢) 닮은 그 성격을 보고 난 혀를 내둘렀다. 오죽하면 여섯 달 동안 잠자리까지 같이하지 않았을까?
남편은 그토록 모진 성정(性情)을 드러낼 때가 있었다. 나는 유순하기만 하고, 남편과는 달리 목적이 아니라 과정을 아름답게 여겼다. 남편과 나의 상이점을 증명(?)하는 극적 사례다.
남편의 잔재주는 끝이 없다. 음악 특히 성악(노래) 부문에선 장르를 넘나들면서 실력을 발휘한다. 민요 일흔 곡을 완창(完唱)할 정도다! 앞서 내 이야기 중 그런저런 사연을 소개했으니 남들이 믿어 주리라. 대형 오케스트라 협연도 두 번 했다. 부산어머니오케스트라와 부산현대오케스트라(현대백화점문화센터 부설)의 연주회 때였다. 각기 고신대 오충근 교수 및 숭실대 김헌경 교수가 지휘한…. ‘도라지꽃’, ‘떠나가는 배’,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 ‘사랑으로(대중가요)’ 등 네 곡이었다.
민요야말로 그가 경지에 도달해 있음은 전술한 바와 같다.
그 밖에 또 있다. 남편은 ‘문학’을 빼버리면 시체랄 정도로 거기 빠져 있다. 그에게 음악만큼 소중한 생활의 일부분이 바로 그거다. 실은 남편과 내가 신혼 시절부터 문학을 공부했다. 둘이서 ‘개 사육 실천기(實踐記)’부터 손을 댔다. 이윽고 초등학교 교사들이 보는 전문지 <새교실><교육자료>의 문학 지면을 보며 원고지와 씨름했다. 둘 다 수필이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추천을 세 번씩 받았다. 한데 그 뒤가 문제였다.
나는 정식으로 문단에 나오길 포기한 대신 남편은 계속 도전하여 몇 년 뒤에 당당히 한국수필가협회 명단에 이름을 올린다. 그는 수필집을 서너 권 내었지만, 각광을 받지 못했다. 14년 뒤 남편은 늦깎이 소설가가 되었다. 소설 일곱 편을 빚어내도 그걸 책으로 묶어낼 엄두조차 못 내는 그가 안타까울 때가 많았고, 지금도 그렇다. 내가 보면 남편은 수필보다 소설 창작에 열정을 쏟았으면 한데, 그는 나의 말에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 거다. 그냥 엉거주춤 지내는 그를 보면 나는 약간은 답답하다. 그러는 그가 가끔 강조하는 말이다.
“누가 말했었지. ‘시(詩)’는 소나기요, ‘소설’은 흙탕물, ‘수필’은 지하수(地下水)라고 말이야.”
그래 나도 화답한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명제인 것 같아요. 난 수필 공부를 하다 그만두었고 당신 문학은 소설로까지 진화했잖아요?”
“그래서?”
“당신은 미안한 표현이지만 워낙 험하게 세상을 살아오지 않았어요? 해서 말인데 당신은 오 늘에 이르기까지 흙탕물속에서 몸부림도 쳤고, 때론 그 속을 첨벙첨벙 건너 왔으니 그걸 소설로 그려내는 게 당연하지요.”
“또 그 소리야? 하기야 맞는 말이긴 해.”
“문학이 가치 있는 체험의 기록이라는 정의가 있지요. 나도 그 정도는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이 지금 출간을 준비하고 있는 소설집 <도주(逃走)> 말이에요. 거기서 상황을 극적으로 나타낸 장면이 나오잖아요. 거기선 현우라는 화자(話者)가 누가 봐도 당신 자신이지요. 삼랑 진에서 스무 살을 조금 넘긴 휴직 교사가 어린애를 칼로 찌른 뒤 완행열차를 타고 광주까지 가서는 유곽(遊廓)을 찾아들지요.”
그랬었다. 소설 속에서 경주 이 씨 상서공파 현우가 주인공이었다. 도주의 목적지가 아닌 광주의 유곽(遊廓)을 찾아든 것까지는 맞지만, 상대가 동성동본이라는 사실을 알고 여자에게 손끝 하나 대지 않는다. 그걸 누가 믿으랴. 어쨌거나 소설 속의 현우는 여자의 도움으로 목포를 거쳐 가거도로 가서 몇 년을 버텨내는 거다. 남편은 경주 이 씨가 그만큼 양반이고 명문거족이란 걸 강조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런 걸 수필로는 나타내기는 힘들겠지요. 유곽과 여자, 성합(性合)이 어쨌느니 한다는 이 야기는 결코 지하수가 될 수 없어요,”
“….”
“오늘은 당신이 내 말에 귀를 제대로 기울여 주는 것 같아 고마워요. 내친김이라 보탤게요. 수필에 허구(虛構)를 도입한다는 명제는 이미 낡았어요. 수필의 교과서라는 윤오영의 ‘방망 이 깎던 노인’도 허구랍디다. 당신은 그런 글을 쓸 수 없다고 봐요. 차라리 소설로써 흙 탕물(?)을 튕겨 보세요. 어쨌든 이것저것 떠나서 경주 이 씨로 남고 싶어 하는 점은 높이 평가해야지요. 백사 휘(諱) 항복(恒福) 할아버지 같은 조상님들의 선비 정신을 본받으셔야 하구요.”
“당신이야말로 파평 윤 씨, 양반의 후예구려. 파주(坡州)엔 나도 수시로 가는 편인데, 조상 이 휘 신달(莘達)이셨어요. 조선 시대 과거 급제자 숫자로 보면 전주 이씨, 안동 권씨, 다음에 파평 윤 씨가 많았다고 해요. 그래요. 윤동주 시인, 윤석중 아동문학가, 윤여정 배우, 윤여준 정치가 등이 내가 알고 있는 유명 인사요. 특히 가수이기도 한 윤항기 목사 와는 서로 아끼는 사이요. 복음성가를 같이 부르기로 했지. Amazing Grace!”
“아니 누구보다 윤석열 대통령 후보가 있잖아요?”
“그렇지. 내가 슬쩍 넘기려 했는데…. 우리 경주 이 씨는 근래 인물로 휘(諱) 병철 삼성그룹 창업주, 휘 건희(健熙), 현존하는 재용(在鎔) 동(同) 그룹 부회장 등이 있어요. 국민들이면 누구나가 아는 사람들이지. 재명은 나한테 증손자뻘 되는 사람이야. 그가 대통령 후보로 선 출됐으니 내가 고민이란 말씀!”
“고민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3년 전 내가 난생 처음으로 경주 이 씨 화수회 회관에 갔다 왔지 않소? 당신도 동행했 었지. 경주 이 씨와 여덟 분적(分籍) 종친 문인들이 모여 만든 <표암문학상 대상>도 받 았고.”
“맞아. 종친이지만 나는 언론에 비쳐진 그의 행실이 맘에 걸려. 마누라는 또 어떤가 말이야. 걔가 법인카드를 마구 그었다더군. 여북하면 내가 경주 이 씨라는 걸 부끄러워할까?”
“단단히 화가 났군요, 여보.”
“3년 전 우리가 화수회 회관에서 그 마누라를 만나지 않았소? 재명 대신에 걔가 참석했더구 먼. 걔가 또 항렬이 한참 높은 어른들 앞에서 버릇없이 똑똑한 척했어. 병철 종친이 없었으면 화수회 회관이 있었겠어? 그런데도 삼성을 폄훼하기 예사였는데, 그 공간엔 왜 들렀을 까?”
강산이 다섯 번이나 변하는 동안. 난 남편과 일치(一致)보다 상충되는 삶을 살았었다. 하지만 그런대로 후회는 없었고 세월이 갈수록 남편의 호기로움도 줄어드는 것 같이 측은지심(惻隱之心)마저 느꼈을 수밖에. 하나만 첨언하자. 남편이 정치와는 담쌓고 살아온 점이 자랑스럽다.
그런데 모처럼 남편이 올바른 판단을 해 주니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다. 남편의 결심과 결론 덕분이다. 그럴수록 나는 경주 이 씨와 파평 윤 씨의 후손인 우리 자손들에게 조상들의 얼을 기리는 가르침에 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윤여정이 오스카상을 시상한다는 기쁜 소식이다. 경주 이 씨 중에서도 그런 거인이 한 분 나타났으면 좋고말고.
내친 김에 나도 문단에 몸담고 싶다. 남편과 나란히 컴퓨터 앞에 앉아 작품 빚는 그날을 기 다린다. 대통령 선거가 끝나면 나도 졸저 한 권을 선보이고 싶다. 과욕일지 몰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