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성황후 시해 후 고립된 고종, 선교사들에 의지
알렌, 미국 외교관으로
알렌은 1889년 6월 한국 참찬관 직을 사임하고 귀국해 잠시 선교사 일을 하게 된다. 하지만 여러 선교사들과 사이가 계속 편치 않아 인천과 부산 등지를 전전하다가 결국 1890년 7월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임명된다. 알렌은 그때 선교사 직을 아예 그만둔다. 알렌은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외교업무에 전념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말단직인 서기관으로 시작해 1897년 7월 미국공사에까지 오른다.
선교사들과 친했던 명성황후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발생한다. 명성황후는 매우 총명했으며 특히 여자 선교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명성황후를 여러 차례 만났던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은 명성황후가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보다 더 슬기롭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명성황후가 시해되기 1년 전 크리스마스 때의 일이다. 언더우드 선교사의 부인이 미국이 부강하고 자유로운 나라라는 이야기를 했더니 명성황후는 거침없이 “우리도 그런 나라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느냐”고 단호하게 말했다. 여걸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자 언더우드 부인은 그 나라보다 더 좋은 나라가 있다고 했다. 하늘나라가 그렇다는 말을 한 것이다. 그랬더니 명성황후는 애처로운 얼굴로 그런 나라에 상감과 우리 백성들이 다 가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선교사들은 명성황후를 통해 기독교를 한국의 국교로 선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 계획
일본의 해군 중장 미우라 고로가 한국 주재 일본 공사로 부임하면서 일본은 명성황후를 시해할 음모를 꾸민다. 직전 공사인 이노우에는 일본의 거물급 정치가로 미리 시해 계획을 다 꾸몄고, 후임자 미우라에게 실행을 맡겼던 것이다. 명성황후만 제거하면 한국 정복은 손쉬울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명성황후는 이노우에의 음모를 눈치 채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미국공사관 대리공사로 있던 알렌이 명성황후를 안심시켰다. 알렌이 그만큼 순진했다는 뜻이다. 이노우에는 고종 임금과 명성황후를 여러 차례 만나 한국왕실은 일본이 꼭 지켜준다고 공문까지 써서 넘겨준다. 돌이켜 보면 우리나라를 기만한 것이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발생
1895년 4월 청국을 이긴 일본은 세계열강으로 급부상했고, 동시에 한국침략 계획을 구체화했다. 먼저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했다.
일본 자객 20여명을 보냈다. 명성황후가 잠든 새벽 옥호루에 들이닥친 자객들은 궁녀들을 살해하다가 방구석에 숨어 있던 왜소한 명성황후를 찾아낸다. 그리고 도살한다. 이 참혹했던 광경을 당시 건축기사로 서울에 와 있었던 러시아의 사바스틴이 목격한다. 알렌은 어둠 속에서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뛰어가는 무리들을 우연히 멀리서 볼 수 있었다. 일본 살인자들은 궁궐 뒤뜰의 우물에 사체를 던졌다가 다시 떠오르자 건져내 경복궁 뒷문 녹문 곁에 던져 놓고는 기름을 계속 부어 태운다. 사흘 동안 태운다. 명성황후의 흔적은 뼈 몇 개만 남았을 뿐이다. 일국 왕비의 최후의 모습은 이토록 비참했다.
고종이 기댔던 성벽
명성황후 시해 소식을 들은 고종은 몸을 떨면서 용상 위에 앉아 꼼짝 못한다. 밤을 지새운 그는 새벽에 “밖에 외국 선교사들이 없느냐”고 간신히 소리친다. 군주가 붙들고 울 기둥은 선교사들뿐이었다. 소식을 듣고 알렌, 언더우드, 헐버트 등 선교사 네 명과 윤치호의 아버지가 달려갔다. 고종은 알렌을 보고 반기며 안도했다. 이들은 총을 가지고 가서 고종을 지켰다. 이 가련한 임금을 마지막까지 지킨 사람들은 알렌과 미국 선교사들뿐이었다. 우리 정승들과 군인들은 다 어디 갔던가.
이들은 매일 당번을 정해서 두세 사람씩 고립된 고종 임금을 지켰다. 무려 7주 밤낮 동안 그랬다. 선교사들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은 핏기가 하나도 없이 떨고 있었다고 한다. 알렌은 고종의 음식에 혹시 누가 독을 타 넣을까 해서 미국공사관에서 만든 식사를 세끼 때마다 배달했다고 한다. 수개월이 지나 어느 정도 평정을 찾은 고종은 “당신들이 나를 지켜주었다. 감사하다”며 이들과 일일이 악수를 했다. 알렌은 명성황후가 일본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을 때 안심시켰던 것이 죄책감으로 남았다. 알렌은 일본에 의한 배신감을 일생 잊지 못하고 산다.
알렌은 계속 타전했으나
이 난리 통에 들어선 친일내각은 명성황후를 가장 낮고 천한 신분으로 폐한다. 알렌은 구미 각국의 공사관들과 손잡고 일본의 야만적인 행동을 성토하며 단죄한다. 알렌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명성황후 시해가 일본공사관 안에서 조직적으로 계획됐고, 그들이 바로 살인자들이라는 것을 워싱턴과 세계 언론에 지속적으로 타전한다. 하지만 일본의 승승장구를 바라보던 미국 정부로서는 알렌이 손톱 밑의 가시였다. 오히려 미국 정부는 알렌의 활동을 제지하며 공식석상에서 발언도 못하게 하고, 왕실 출입도 금지했다. 일본도 가세해 알렌을 본국으로 송환하라고 다그쳤다. 세상이 달라지고 있었다.
민경배 백석대 석좌교수
[출처] [한국선교 130년 최초 선교사 알렌 이야기] (17) 명성황후 시해 참극에 맞선 알렌|작성자 뱅갈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