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누가복음: 2:8-14
제목: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
일시: 2011. 12. 25. 하늘사랑교회 성탄주일 강단
---------------------------------------------------------
오늘은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신 성탄의 아침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과 가정 위에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마도 성탄절 하면 크리스마스 트리, 하얀 누, 구세군의 자선냄비, 산타클로스 같은 단어들이 떠오르실 것입니다. 우리가 성탄절에 즐겨 부는 찬송들 중에 찬송가 100장은 우리가 가장 애창하는 성탄 찬송입니다. 우리 이 시간에 찬송가 109장을 함께 찬송하시겠는데, 1절은 모두 함께, 2절은 오늘 특송을 부른 성가대가, 3은 교회 학교 아이들이, 4절은 다 함께 부르시겠습니다.
이 노래의 발상지는 오스트리아의 음악도시 짤쯔부르크에서 약 2km 떨어진 오베른도르프라는 작은 마음입니다. 이 노래가 만들어진 배경은 이렇습니다. 1800년대 초 이 마을에 조셉 모어(Joseph Mohr)라는 천주교 신부와 프란츠 그뤼버(Frantz Grueber)라는 학교 음악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음악도시인 짤쯔부르크에서 태어난 모어 신부는 이 마을의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서 1817년부터 1819년까지 부사제로 재직했습니다. 그뤼버 선생님은 이웃마을인 아른스도르프에서 1807년부터 1829년까지 재직하면서 성 니콜라우스 성당에서 오르간 반주를 맡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신부로, 또 한 사람은 반주자로 일하다 보니 이 두 사람이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밖에 없었겠지요. 1818년 성탄축제를 앞두고 당시 26세였던 모어 신부가 그뤼버 선생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우리 금번 성탄에 마을 주민들을 위해 뭔가 뜻깊은 일을 해 보는게 어떻겠소?” “아 그거 좋지요!” 두 사람은 의기가 투합하여 훌륭한 성탄 캐럴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모어 신부는 가사를 쓰고 그뤼버는 작곡을 하기로 했지요. 모어 신부는 “고요한 밤(Still Nacht Heilige Nacht)으로 시작되는 노랫말을 짓습니다. 원래 6절까지 되어 있는데 그 1절을 작시된 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모두가 잠들었고
오직 신앙심이 깊은 경건한 부부만이 조용히 깨어 있네.
곱슬머리의 귀여운 아가는
천국의 평화 속에 잠자고 있네. 천국의 평화 속에 잠자고 있네.”
모어 신부는 이 노랫말을 성탄 전날인 12월 24일 그뤼버 선생에게 전달하면서 합창곡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뤼버 음악선생님은 그의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여 그 날 밤에 곡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내친 김에 다음 날 성탄 예배시간에 이 곡을 연주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만 오르간이 고장 난 겁니다. 유럽의 교회는 전통적으로 피아노를 사용하지 않고 손으로 만든 오르간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성탄절을 맞아 오르간 수리공이 휴가를 가는 바람에 고장 난 오르간을 연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이 두 사람은 오르간 대신 기타를 들고 이 곡을 연주했습니다. 우리 이번에는 기타 연주에 맞추어 1절을 다 함께 불러볼까요?
시간이 지난 뒤 오르간 수리공이 눈길을 헤치고 달려와 오르간을 가까스로 수리하게 되었습니다. 이 수리공은 단지 오르간만 수리하는 게 아니라 전문적으로 오르간을 연주하는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곡을 연주해보니 너무 좋은 겁니다. 그래서 그 곡을 가지고 전문적으로 연주함으로서 많은 사람들에게 그 곡을 알리게 된 것입니다. 결국 1937년 8월 15일. 성 니콜라우스 교회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지은 모어와 그뤼버를 기념해서 교회 이름을 “고요한 밤 교회”(Stillle Nacht Kapelle)로 바꾸었습니다. 그 교회는 지금도 오스트리아를 방문하는 여행객들이 빼놓지 않고 들르는 명소가 되어 있는데 교회가 굉장히 작다고 합니다. 교회 내부에는 촛대가 놓인 제단과 10여 개의 긴 나무 의자가 놓여 있고, 벽에는 모어와 그뤼버의 이야기, 그리고 당시의 악보가 조그맣게 전시되어 있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 교회는 이 노래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서 이 노래를 1년에 딱 한 번, 성탄절에만 부른다고 합니다. 바로 성탄 전야예배 때 성찬식이 끝나면 모든 조명을 끄고 촛불을 켜고 이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1절만 다시 한 번 불러 볼까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참 가사가 좋지요? 성탄의 평화스러움이 그냥 베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실제 성탄의 밤이 그렇게 조용하고 평화로웠을까요?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은 마구간의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아니 어떻게 아기를 그런 곳에서 낳을 수 있느냐?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그게 현실입니다. 그 당시 로마의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가 온 유대 땅에 명령을 내려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가서 호적을 하도록 명령했습니다. 이것은 소위 세금을 더 많이 거둬들이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로마의 황제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돈을 더 많이 모으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이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으로 각자의 고향에 돌아가서 호적을 하도록 명령했던 거지요. 예수님의 부모 요셉과 마리아도 이 명령에 따라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 도착한 마리아가 해산 할 날이 되어 아이를 출산하게 된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를 낳기 위해 여관을 찾아 다녔겠지요. 만삭이 된 아내를 이끌고 이곳저곳을 누비며 아내가 해산할 곳을 찾는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시커멓게 타 들어 갔겠습니까?
“혹시 빈 방 있습니까? 제 아내가 지금 급하게 아이를 낳으려고 하는데 제발… 작은 방이라도 좋으니 방 하나만 빌려 주실 수 없겠습니까?”
여관 주인이 큰 배를 부여잡고 괴로이 신음하는 여인네를 위아래로 훑어봅니다. 그는 혀를 끌끌 차면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아니 이 사람이! 지금이 어느 때인 줄 알아? 지금이 황금 대목이라 빈 방이 없어 여기, 저기서 난리인데 지금 배부른 마누라를 끌고 여기까지 오면 어떻게 해. 당신 정신이 있어 없어?”
“지금 빈방은 없고 저기 뒤로 돌아가면 빈 마구간이 있으니 그리나 들어가 보던지.”
요셉은 이미 이곳저곳을 돌아다닌 터라 하는 수 없이 만삭의 아내를 이끌고 마구간에 들어갑니다. 말똥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급하게 말 여물통을 씻고 포대기를 꺼내 여물통을 덮습니다.
“아니, 아기를 낳는다는데 어떻게 방을 구할 수 없어? 최소한 출산할 아기를 위해서 방 한 칸은 내 주어야 하는 게 아니야? 아무리 시대가 각박하다고 해도 그게 예의고 사람 사는 도리 아니야?”
맞습니다. 그게 이 세상을 태어날 아기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이고, 사람 사는 도리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힘의 논리에 밀려 사람 사는 최소한의 예의를 상실한 지 오래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각박한 세상을 살다보니 인정이니, 예의니 이런 것 귀찮게 느껴진지 오래입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가리지 않아야 잘 사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해산 할 여인을 위해 방 한 칸 내어주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아기 낳을 곳이라고는 전혀 상상도 안 되는 마구간에서 아기를 낳아야 했습니다. 말이 밥 먹는 여물통을 깨끗이 씻고 거기에 흰 포대기를 깔아 아기를 받아 뉘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평화니, 고요함이니 이런 분위기가 연출되지 않는 상황입니다. 부모로서 세상의 각박함에 눈물을 머금어야 할 상황입니다. 가지지 못한 자의 비애를 온 몸으로 느껴야 할 상황입니다.
게다가 유대 왕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에게 경배하기 위해 베들레헴에 찾아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베들헴에서 2살 미만의 남자 아기들을 모조리 죽였습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대 만행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백성들은 자기들을 구원할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로마의 정치적 압력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힘 있는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마치 유럽을 정복하기 위채 어깨에 붉은 견장을 달고 흰 말을 탄 용감한 나폴레옹처럼, 지금이라도 하나님의 능력과 기사로 이 모든 상황을 압제할 정도로 충분한 힘을 가진 정치적 메시아를 기대합니다. 그 메시아가 빨리 와서 주변 열강들 속에서 숨 한 번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기를 열망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 서민들의 마음은 메시아적 힘을 지닌 영웅을 학수고대합니다. 그런 영웅이 정치계나 경제계에 나타난 이 땅을 평화롭고 부유하게 만들어 주기를 학수고대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님은 그런 것들하고는 거리가 멉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의 기대와 소망을 저버립니다.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은 뜻 밖에도 한적한 목자들에게 들려졌습니다. 배운 것이 적고, 경제적으로도 가난한 목자들에게 큰 기쁨의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리고 아기 예수님은 이름도 알 수 없는 동방박사들과 세상 적으로 전혀 기대할 것이 없는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셨습니다. 더군다나 남자를 알지 못했던 처녀가 아기를 낳았으니 이 아기는 사생아입니다. 처녀의 몸에 태어나 말구유에 누워 동방박사들과 양 치는 목자들의 경배를 받으시는 분이 세상을 구원할 평화의 왕이라는 소식을 세상의 지혜로는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표적을 구한다는 훗날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구주 예수님의 탄생은 충분히 기적적이지도 않고, 충분히 지혜롭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의 미련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볼품없는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나신 아기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더군다나 그 분은 한 번도 자신을 위해 살지 않으시고, 오로지 자기 자신을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드릴 정도로 미련한 삶의 방식을 가지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성탄의 진리는 역설적입니다. 성탄의 진리는 자기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을 버리고 낮고 천한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를 따르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라는 이 진리는 겸손히 주님의 생애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이번 성탄절을 뜻 깊게 보내기 위해 말구유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해 보아야 합니다. 일 년 간 보내며 지나온 나의 삶의 방식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세상의 힘의 논리와 손익의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자기 자신이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죄와 교만의 포로가 되어 하루하루를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예수님의 탄생소식이 우리에게 진정 기쁨이 소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예수 탄생의 기쁜 소식은 마음이 가난한 자에게 임한다는 진리를 가슴에 안고 앞으로 남은 삶이 힘이 있음에도 그 힘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과 평화의 관계를 맺어가는 귀한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