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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 바디흐, 옐름슬레우 언어 이론의 원리, 인식론적 기호학, 세미 바디흐, 2014.
Sémir BADIR
ÉPISTÉMOLOGIE SÉMIOTIQUE
La théorie du langage de Louis Hjelmslev
© 2014. Éditions Champion, Paris.
PARIS
HONORÉ CHAMPION ÉDITEUR 2014
www.honorechampion.com
[49]
II 장
이전 장에서 한 만남의 필연성을 결론내렸다 : 랑가주 이론과 인식론의 만남. 이 장에서는 이 만남을 세 개의 더욱 긴밀한 동심원 구역들로 조직할 것이다 : 첫 번째는 학문 분야, 즉 언어학 내에서 ; 두 번째는 이론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것이다. 세 번째는 서언들의 특정 계획에 따른 것으로, 랑가주 이론에 서설들을 제시하는 것이다. 즉, 물음 형태라면:
1° 랑가주 이론이란 무엇인가? 2° 옐름슬레우는 이론의 어떠한 개념작용은 주장하는가? 3° 우리는 서설들에 어떤 기능을 귀속할 수 있는가? 이 이론에 대한 서설들을 쓸 때 우리는 무엇에 참여하는가?
요컨대, 랑가주 이론과 인식론 사이의 이러한 만남은 옐름슬레우의 주석가들에게 널리 인정되었으며 심지어 상찬되었다. 예를 들어, 알지다 줄리앙 그헤마[Algirdas Julien Greimas]는 프랑스에서 출판된 옐름슬레우의 첫 번째 작품(Le Langage, 1966년) 서문에서 서언들[Prolégomènes]을 다음 용어로 요약한다.
서언들은 이전의 언어학 성과들을 포괄하면서 무엇보다도 인간 과학들의 인식론으로 나타나는 언어 이론을 건립한다(Greimas 1966b: 10).
거의 20년 후, 또 다른 프랑스어 번역(Nouveaux Essais의 번역)에 대한 서문에서 프랑수아 하지떼[François Rastier]는 옐름슬레우의 계획에 대해 약간 다른 소개를 한다 -- 미세한 뉘앙스에서 이러한 악센트의 변동들을 관찰하는 것은 흥미롭다 :
그의 랑가주 이론인 그로스세마띠끄[la glossématique]는 언어학을 넘어서는 범위를 가지며, 일반기호학의 정립에 기여할 수 있다 ; 게다가 그것의 인식론적 참신함은 모든 사회과학의 관심을 끌고 있다(Rastier 1985: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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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두 소개들은 서언들의 글자가 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아간다. 그밖에도, 소개들이 제시하는 독해들은 옐름슬레우의 작품의 인용으로서 전망적인 것들로 머문다. 그리하여, 랑가주 옐름슬레우 이론과 인식론 사이의 혼인 축례는 이날까지 기호론자들 환경의 바깥에 어떤 반향도 일으키지 못했다.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만의 작업에서만 그랬던 것이 아니다.
랑가주 이론
서언들에서, 옐름슬레우는 인식론과의 연관하여 거리를 신중하게 유지한다. 인식론이 언어학에 제공할 지지의 형태를 취하면서37, 그 다음으로, 언어학이 인식론을 위해 재현할 수 있는 공헌의 형태를 취하면서38, 언급들은 언어학(내포적 랑가주 이론)과 인식론 사이의 공동작업을 제안한다. 모든 경우에 이러한 분야들은 분명하게 서로서로 구별된다.
옐름슬레우의 프로젝트는 분명히 "랑그의 과학"40 또는 언어학에서 표명된 방식으로 등록된다. 상기하자, 이 시기 언어학이란 용어는, 더 전통적인 문헌학과 문법학이라는 강의들 프로그램 속에서 경쟁하면서, 제대로 자리잡히지 않고 있었다. 또한 상기하자, 심리학, 사회학 그리고 언어학과 같은 젊은 분야들을 포함하는 과학의 통합 프로젝트도 이 시기부터 헤아려진다41. 이 분야의 젊음 그리고 학문적 맥락은 왜 학문들 가운데에 언어학의 내포가, 옐름슬레우의 편에서, 의도 표명의 대상을 형성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여기에 많은 주의를 기울일 것인데, 옐름슬레우가 고전기, 소위 언어학이 “문법학” 혹은 “문헌학이라 불렸던 시기 언어학의 과학적 특질을 미심찍어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인본주의적] 전통은 원하건대, 인간 현상들은, 자연 형상들과 대조되니, 특이하거나 개체적인데, 이는 그러므로 정확한 방법들로 자연 현상들처럼 제출될 수 없고, 일반화될 수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분야들에는 완전히 다른 방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 우리는 과학보다는 시에 더 접근하여 분석할 수 있었을 뿐이다 [...]. 인문과학 전체와 마찬가지로 이 이력[l'histoire]은 그것의 전체 안에서 과학적 방법의 정당성과 가능성을 재인식하기에는 거리가 먼 것 같다(Prol., 15-16).
따라서 옐름스레우가 언어 이론을 위해 설정한 목표 중 하나는 과학 가운데 언어학을 좌정(坐定)하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언어학이 과학 가운데 좌정을 주장하려면 랑가주 이론을 통해 구성되기를 언어학은 요청한다. 언어학이 서언들에 앞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가?
1941년에 옐름슬레우는 "언어 이론에 관한 인터뷰"42라는 제목으로 코펜하겐 언어학 서클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수많은 테스트를 거쳐" 확립된 "언어학적 이론"을 발표한다. 언어학 이론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이해받기 위해 옐름슬레우는 유머 없이 언어학자의 세 가지 하위 유형들을 제시한다 : 랑가주의 전문가, 랑가주의 철학자 그리고 언어적 이론가.
전문 언어학자들은 다른 두 타입들에 독립적으로 작업할 수 있다 ; 그런데, 옐름슬레우는 전문가들까지도 떠올린다 - 전문가들 가운데에는 문헌학자들과 비교문법학자들이 꼽힌다- 언어적 이론가들에 앞서 있는 것으로 말이다.
전문가는 언어학적 건물에 자신의 돌을 제공한다. 그러나 전문가는 자신들의 고유한 방식으로 그 돌을 배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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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름슬레우는 약간 더 나아가서 덧붙인다 :
전문가들은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야만 하는데, 그들은 그들의 돌맹이들이 이론적 구성 가운데에 자리를 차지하게될지라도 이것들을 전혀 인식할 수 없다는 것이다. (Hjelmslev 1985 : 74).
따라서 전문가들은 독립적으로 작업할 수 있었지만, 과학으로서의 언어학의 구성적 목표에 따르면 이 작업은 자율성 측면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 언어학은 실제로 언어학적 이론가에 의존하는 구성의 결과이므로 제 통일성으로 인해 언어학은 랑가주 이론에 앞서 존재할 수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론가는 불법적인 권리를 내세우지 않는다. 이 권리는 언어학이 부착된 대상에서 직접 돌아온다. 실제로, 이론가가 언어학을 구축할 때 전문가들을 언어학자들처럼 간주해야 한다면, 그것은 언어학의 목적 자체가 집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충분한 전체, 고유한[sui generis] 구조"(Prol., 12)이기 때문이다. 또한 서언에서 언어학은 문헌학을 대체할 필요도 없이 문헌학과 명백히 구별된다43.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언어학은 언어 이론에 앞서만 존재할 수 있다. 이것이 옐름슬레우가 언어 이론의 "실재의" 측면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 이론은 실행에 대해 보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실행은 이론적으로 언어학의 "전제"가 되도록 요구된다. 서언들의 현대 저작인 『언어』에서는 이 구성의 이론적 가능성에 앞서 구성되어 있는 언어학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에 있는 난점이 언어학 용어의 의미론적 이화작용을 통해서 해결된다. 한 분류의 분야들이 되는 언어학이 있을 것이고, 이 분야 내에 과학이 되는 언어학이 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만, 논리학적, 역사학적, 생리학적, 물리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언어학을 특수한 언어학으로 보충함으로써, 우리는 자율적인 과학으로 [53]확고히 확립된 언어 과학을 확립할 수 있다(Hjelmslev 1963:25).
이 구절에서 비 특수 언어학들이 특수 언어학 못지않게 과학적 방법을 검토한다는 점을 관찰하는 것은 흥미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어학의 과학적 성격은 그 특수성이 인정된 후에만 "확고하게 확립"될 수 있다. 그러나 과학은 이러한 특수성을 그 대상에서만 도출할 수 있다. 랑가주 이론은 단지 랑가주에 관한 이론일 수는 없다. 또한 랑가주 이론은 접근 양태와 마찬가지인 특수성을 대상으로부터 보존해야 한다. 따라서 소유격은 객체적이고 주체적이라는 이중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론은 언어를 그 대상으로 갖고 있지만, 이론이 랑가주에 내재하지 않고서는 안 되며, 이론이 언어에 속하지 않아서도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내재성의 원리를 접하게 된다. 다음 섹션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겠다. 지금은 언어학이 이 대상에 관해 내재적인 관점을 채택한다는 조건에서만 언어학이 랑가주에 대한 특수한 지식을 구성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만 국한해 보자. 사실 서언들에서는 특수한[특정한] 관점과 내재적인 관점이 동등한 표현이다. 대조적으로, 다른 관점들은 랑가주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랑가주에 실리는 것이지], 랑가주에서 추론되는 것이 아니다. Hjelmslev는 용어의 어원적 의미에서 그것들을 초월적인 것으로 검토한다. 또한 유의해야 하는데, 서언들의 프랑스어 번역은 혼란을 예기(豫期)하고 있는데, 이 프랑스어 번역은 옐름슬레우가 (덴마크어로) 초월적[transcendent]이라고 쓴 곳마다 초월론적[transcendantal]으로 읽고 있기 때문이다.
[랑가주]는 그러므로 초월론적 인식의 방법이다 -- 고유한 의미에서, 용어의 어원론 적으로--그리고 내재적 인식이 목표가 아니다(Prol., 10).
어원학적 의미에서 (초월론적이지 않은) 초월적 지식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지식이 적용되는 대상을 넘어서는 것을 목표로 하는 지식이다. 궁극적으로 초월적인 언어적 분석들은 비언어적 대상들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언어학 분야의 한계를 아득히 넘어[55] 심리학, 논리학 또는 존재론과 뒤섞인다[se fondre](cf. Prol., 11).
그러나 초월적인 관점에 빠질 위험이 있는 사람은 전문 언어학자뿐만이 아니다. 언어적 이론가들은 종종 이러한 관점을 선택해 왔다. 옐름슬레우가 Leonard Bloomfield와 Karl Bühler의 이론을 명시적으로 반대한다면, 그것은 그가 둘 다 초월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rol., 13). 그들의 초월성은 공리화[l’axiomatisation]에 대한 주장에 기인한다.
어떠한 언어학적 이론의 공리화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신이 그렇게 알고 있듯이, 우리 시대의 다수의 언어학자들은 의식적으로 언어학적 사유의 공리화를 확립하려 애쓴다 - 마치 이러한 바가 이득을 제공하는 것 처럼. 자, 사람들이 단순하게 하기 대신에 사물들을 복잡하게 하는 전형적 예시가 있다.
보다 포괄적으로 이는 옐름슬레우가 거리를 두는 랑가주 철학자들이다. 옐름슬레우는 언어적 이론의 기호논리학화를 옹호하지 않는다.
나는 랑가주의 기호논리학적 이론과 언어학적 이론 사이의 명백한 어떠한 관계를 제기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러한 관계들은 오래가지는 않는다. 기호논리학적 이론은 언어학에 독립적으로 확립되었다. 그리고 기호논리학자들, 랑가주를 내내 말하는 이들일지라도, 랑가주의 언어학적 접근의 산물들을, 의심의 여지 없이 옹호하지 않는 방식으로, 무시한다. 이것이 랑가주의 기호논리학적 이론에 이바지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Hjelmslev 1971:41-42)
사람들은 또한 보는데, 랑가주 이론의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예름슬레브는 영지론적 투쟁을 열어젖힌다. 랑가주에 중심을 둔 지식들의 조직화에 이유를 다시 물으면서 말이다. 제 분야 가운데에서 언어적 이론가의 과업은 언어학이 내재적 언어학을 향해서 초월할 때 전문가들의 작업을 끌어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가리키기를, 언어의 이론가들이 내재적 언어학에 관한 내재적 관점을 확보할지라도, 랑가주의 학자들은 그 자체로 초월적인 관점을 채택한다.
초월적 관점 | 내재적 관점 | |
언어학적 인식들 | 전문가들의연구 >> | >> |
이론적 인식들 | 랑가주 철학 | 랑가주 이론 |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움직임은 초월적 관점을 통해 인도된 모든 언어학적 인식들이 불법이되거나 폐지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여기서 다시 랑가주 이론에게는 움직임만으로 충분하다 : 초월적인 언어학적 분석들은 외부적 기호학들[les sémiologies] 혹은 외부적 메타기호학들 속에 위치해야만 하는데, 이 기호학들은 언어학의 “마지막 결론들”을 구축한다[Prol., 151] - 챕터 V에서 더 깊이 있는 방식으로 묻게 될 것이다.
반면에 랑가주 철학도 살려내야 할 것 같지는 않다. 옐름슬레우가 주장한 언어 이론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어쩌면 상상일 수도 있으나) 그것을 헛되고, 딜레탕트적이고 선험적인 기획으로 만든다(참조, ProL, 13). 그러나 옐름슬레우에게, 이러한 한정사는 랑가주 이론에만 속한다. 왜냐하면 랑가주 이론은 랑가주의 철학자들과 그릇되게 혼동되기 때문이다 -- 이는 암시하는데, 옐름슬레우가 랑가주 철학자들을 주제로 비방하는 사람들과 의견을 공유한다는 것이다 !
이론
이론의 용어 보다 “절하되고 불신받는”(ProL, 23) 용어. 옐름슬레우는 한정된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 : 이론은 순수한 연역 시스템이다(Prol., 24). 그러므로 각각의 모두에게 분명해져야 하기를, 서언들은 이러한 이론의 표현을 구축하지 않는다. 많은 옐름스레우의 주석가들이 이 점을 알아차리는 것에 소홀했다면, 그것은 이 주석가들이 절하된 의의로 이론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로서 그들이 랑가주 이론에서 가져올 수 있는 모든 것조차 불신하면서, 그리고 그리하여 옐름슬레우가 그런데도 예방하고자 했던 결점들을 소비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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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름슬레우의 이론 개념작용 자체는 논의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 주제에 대해 말할 몇 마디의 분석들은 다음 장까지 기다릴 수 있다. 여기서 우리의 인식론적 관점에서 더 많은 관심이 필요한 것은 순수 연역 체계로 이해된 이론이 경험과학과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지이다. 실제로 옐름슬레우는 자기 이론의 개념작용이 이론과 경험적 지식의 연결이 필연이게 만들지 않는다는 점을 즉시 알린다. 또한 물음은, 이러한 연결이 예상되므로, 요컨대 여기에 있으니, 1° 이 연결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2° 어떤 결정작용을 통해 랑가주 이론의 틀 내에서 이론의 개념작용을 풍부하게 감지될 수 있는가. 각각이 구별되는 위치들에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답변들은 서언들에 우회없이 노출되어 있으니 : 1° 이론과 경험적 인식 사이의 연결은 경험적 인식들에 대한 이론의 적절성 또는 적용가능성(영어로 적절성appropriateness) 원칙에 기초한다(cf. Prol., 24) ; 2° 어떤 이론이 좋은 통제의[bon gouvernement] 규칙, 즉 “경험주의 원리”(Prol., 19)라는 원칙 하에 끌어모아진 규칙들을 따른다면 경험적 인식 이론으로 간주될 것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원칙을 차례로 검토를 위해 제시하겠고 이어서 세 번째 원칙인 내재성의 원칙을 제시하겠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원리를 바탕으로 랑가주 이론의 인식론적 기반과 칼 포퍼의 인식론적 전통을 간략히 비교하는 방안을 제안하겠다.
경험주의의 원리
먼저 서언들 19페이지에 제시된 경험주의의 원리를 다시 읽어보자 :
분석은 모순되지 않고, 철저하고, 가능한 한 단순해야 한다. 모순 없음의 요구는 철저한 분석의 요구보다 우선하며, 철저한 분석의 요구는 단순성의 요구보다 우선한다.
이론적인 주석으로 너무 멀리 나아가지 않도록 (이탤릭체는 원본임), 사람들은 이 발췌한 형식화에 만족할 수 있겠다. 그러나 옐름슬레우의 정신에는 이 원칙이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경험주의 원리로부터 우리는 단순성의 원리를 쉽게 추론할 수 있다(참조, Prol., 29). 이 원리로부터 두 가지 새로운 원리들, 즉 경제의 원리와 환원의 원리가 나올 것이며, 이 후자 원리인 환원의 원리 자체도 거두절미하여 두 가지 형식화들을 인식하겠다(참조, Prol., 80-81). 조금 더 나아가서 보충 원칙이 추가되는데, 요약에서 세론하는 일반화 원칙도 단순성의 원칙에서 연역된다. 마지막으로, “완전한 분석의 원리”라고 불리는 마지막 원리는 경험주의 원리와 환원 원리 모두에서 나온다(cf. Prol., 124; Res., 65).
주의해야 할 것은, 형식가된 이 원리에서조차, 옐름슬레우는 인식론적 담론에 미치는 주해의 필요를 느낀다는 것.
우리는 이 원리를 경험론적 원리라고 칭하는 위험을 감수한다 ; 그러나 우리는 검토하는 인식론이 그 용어가 부적절하다고 알아낸다면 이 용어를 폐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은 그 원리의 유지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 용어론의 물음거리일 뿐이다(Prol., 19).
이러한 주해는 원칙 자체가 아니라 그러한 원칙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의심을 맴돌게 한다. 경험주의라는 용어가 자신이 제시하는 원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이 반대로 단지, 랑가주 이론의 기초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용어론의 물음거리”만을 소원(訴願)하는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그렇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있는 것이 어떠한 “위험”인지 사람들은 알 수 없다. 더욱이, 경험주의라는 용어의 적절함에 던지는 의심은 같은 페이지 약간 위에서 시작되었다. 옐름슬레우는 말한다 “경험주의 자료들, 이렇게 실재적이거나 가정적인”, 혹은 “경험주의라고 말하는 주제에 대해 상기 밑그림이 될 요청”.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의심은 경험 자료들의 위상에 영향을 미치는데, 우리는 이미 독자에게 이에 대해 명백한 것은 없었으며, 이에 따라 이론의 경험적 상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고 미리 알릴 수 있었다.
경험주의 원칙에 기초하여, 마이클 라스무센(Michael Rasmussen)은 랑가주 이론이 경험주의 조류에 속할 수 있다는 생각을 거부한다(cf. Rasmussen 1997). 그에 따르면 옐름슬레우의 이론은 랑가주 연구에보다 칸트의 합리주의에 적용될 것이다. 다른 주해가들은 옐름슬레우를 기꺼이 협약론자들(Poincaré, Duhem) 편에 놓았거나, 현동화되는 판본을 선호하여 구성주의자 편에 두었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이 주해들을 이러한 일반성 수준에 두어보는 것은 옐름슬레우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가 더 많은 관심을 가질 것은 아니다. [58]더 시급하게 이해해야 할 것은 옐름슬레우가 이 분야에 대한 의심에도 불구하고 명시된 원리를 경험주의 원리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믿은 이유이다.
경험주의의 원리는 형식화할 때 극도로 간결하면서 다양한 해석들이 가능하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기초에서 - 그리고 공식화의 간결함은 우리가 상황에 맞지 않는 해석을 선택하도록 경향이 있다 - 이러한 규칙들 중 두 가지는 엄격하게 합리적인 절차를 제한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비모순의 법칙과 단순성의 법칙은 실제로 경험의 근거 없이도 형식 이론의 교시에서 매우 쉽게 읽힌다. 철저함의 원칙에 관해서도 같은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 이를 연역에 대한 완전한 설명을 요청하는 것으로 생각하면 충분하다. 그러나 옐름슬레우가 이러한 규칙들에 자기 이론의 경험주의를 기탁해버린다면, 이 규칙들을 이러한 방식으로만 해석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부적절할 수 있다. 그렇다면 더 폭넓게 다른 것을 가정할 수는 없을까? 따라서 형식화의 간결함은 우리를 표준적인 해석 타입으로 인도하는 대신 오히려 우리가 일부 비결정작용을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경향이 있다 : 발화된 규칙들은 어떠한 인식론적 선택지에도 사용할 수 있는 상태로 머문다. 그렇다면 이는 이러한 규칙들에 해석적 결정작용을 그 자체로 추가하는 경험주의의 원리로서 원리 자체에 대한 호칭이다. 이것이 옐름슬레우가 V장의 시작 부분에서 가리키는 것 같다.
우리는 선택된 용어론과 더불어 랑가주 이론의 방법을 경험주의적이고 연역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다(Prol., 23).
확실하게, 랑가주 이론에는 경험주의적 과학 이론이어야 할 필연성이 있다. 언어학자가 몰입하는 “자료들”의 경험주의적 특질이, 최소한, 명백한 가정작용으로써 대상을 만든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이 획득된 사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 용어론을 굽혀야 할 것 같다. 이러한 인식론적 규칙들도 대조되는 방식으로 해석될지라도, 이 인식론적 규칙들은 사실상 경험주의 규칙들이다.
이것은 아마도 매우 규칙이 없어 보이는 일을 하는 방법이다. 실제로 옐름슬레우는 대립들의 분쇄를 강구하는 것 같다 : 랑가주 이론에 대한, 형식적 규칙들의 외관을 갖지만, 원칙상 경험주의의 이름으로 진술되는, 규칙들이 있다. 이것이 이러한 대립들 자체인 공존이 아닌 한, 옐름슬레우의 눈에 추잡하게 보이는 모든 이론적 구성작용에 대해 이러한 공존이 함축하는 선택이 있다. 이러한 바가 끝으로 우리가 유지할 해석이다
경험주의 원리는 검증되니, (라스무센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오류로 인해서가 아니라, 도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타협이라는 목적 속에서 이렇다. 옐름슬레우가 견지하는 입장에 도발 욕구는 없다는 것, 그것들의 형식화의 간결성은 이미 그렇게 생각하도록 한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옐름슬레우가 신중하게 선언하는 사실은 이러한 화해가 승인될 수 있는 지는 인식론자들에게 결단을 맡기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사실도 있다. 경험론자와 합리론자라는, 상반되는 인식론적 두 입장들 중 옐름슬레우가 주장한 오직 하나는, 합리주의라는 용어라는 것, 그것을 라스무센이, 조심스럽게 피하면서, 서술작업 속에서 매우 강력하게 경험주의의 원리 자체로 펼친다는 것.
우리는 따라서 한편으로는 랑가주 이론과 그 해석을 결정하는 표명되어 있는 중요한 인식론적 물음을 갖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논쟁을 피하고 반대로 화해를 요구하는 답변 방식을 갖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옐름슬레우 자신은 어떻게 하는가? 글쎄, 이런 것 같다. 옐름슬레우는 단순하게 이러한 상황에 유배형을 내릴 면허를 스스로 취득한다. 즉 인식론자들에게 위임하면서, 즉 더 직접 랑가주 이론의 진행에 관심을 갖는 다른 용어들 아래 그 자체가 이 상황을 다시 취하면서 말이다. 랑가주 이론이 관찰하는 두번째 원리의 틀 속에 있는 인식론의 범위에서 상반되는 타협의 시도가 반복되는 것을 결국 우리는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러한 시도가 일으키는 난점은 요행히 감춰질 수 없을 것이다.
적합작용의 원리
서언들의 첫번째 장에서 항상, 옐름슬레우는 주장하는데, 이론은 재량것이면서도[자의적] 적합하다(cf. Prol., 24). 그는 세론하는데, 이는 여기서 수사들은 “똑같이 중요하다"(ibid.). 이러한 수사들 사이의 대립성을 더 뚜렷이 하려, 그는 또한 이론은 (언어의 재량 때문에) 비실재적[aréaliste]이면서 (언어의 적합작용 때문에) 실재적이라고 쓴다(cf. Prol., 25). 마침내 그는 적합작용 덕에, 랑가주 이론은 경험주의적 작업을 작동하게 한다고 쓴다 ; 재량있는 언어의 특질 덕에, 이론은 추산 작업을 작동하게 한다(Prol., 28).
[60]
언어의 마찬가지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미덕의 분배에는 모종의 비대칭이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살펴보자. 사람들은 평하기를, 이론을 재량이 있도록 만들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즉 이론이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다). 언어의 재량성으로서 충분근거가 있지만, 필연의 원인은 아니다. 반대로, 적합작용은 이론을 위한 필연성처럼 꽤나 나타난다 : 물론, 무엇이든지 어떠한 방법으로 적합작용은 모종의 대상에 적용되고 있어야만 한다. 적합작용으로써 이론을 만들기에는 이러한 바가 충분하지는 않지만, 적합작용이 이론이라는 것을 알아냈다면, 물론 이 적합작용은 모종의 대상에 대한 인식에 이바지해야만 한다. 이러한 바는 이론이 무엇이든 진실인 것은 아닐 것이다 - 그들의 이론이 적용작용을 지나쳐버릴 수 있는지는 수학자들과 논리학자들, 그들 사이에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랑가주 이론의 경우, 랑가주라고 불릴 수 있는 어떤 대상도 없다면 그것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랑가주라고 견지되는 대상의 현존은 일종의 '실천적 필요성'을 구성한다 : 대상이 없으면 이론도 목표가 없고 자기자신의 현존도 근거가 없다.
이는 경험의 대상에 대한 이론의 적합작용 역시 원리들의 질서에 들어간다는 점을 고려하게 한다. 언어 이론이 정교화되는 과정 자체에서 관찰되는 적합작용의 원칙은 있으나, 반면 원리상 이론의 재량성을 확립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이 원리가 경험주의의 원리와 구별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의심할 바 없이 그것은 사실은 그렇지 않다. 게다가 적합작용에 대한 요청은 서언들이나 요약의 어느 곳에서도 원칙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가 적합작용의 원리를 풀어내는 위험을 감수한다면, 그것은 경험주의 원리에 실린 긴장이 다른 용어로, 그리고 다른 각도의 관점을 따라서, 강제로 옮겨질 수 있다는 것을 밝히는 선택안 안에서만 그렇다. 옐름슬레우의 형식화의 간결함을 모방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적합작용의 원칙을 서술할 수 있다.
철저하고 또한 단순한 랑가주 이론, 상반되지 않으려면, 이 이론은 경험을 통해 재인식된 랑가주의 사실들에 대한 분석에 이바지할 수 있어야 하고 이바지하여야 한다.
경험주의의 원리와 함께 있는 것 이상으로, 옐름슬레우는는 이론의 적합작용을 다룰 때 두 가지 반대되는 인식론적 요청 사이의 긴장을 인식한다. 그러나 적합작용의 문제는 반대 각도에서 경험주의 원리에 이미 내포된 문제를 다시 몰뿐이다. 달리 말해, 인식론적 긴장이 경험론의 원리에 의해 분쇄되어 나타난다면, 이 긴장은 적합작용의 원리로 유지되며, 결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이화함으로써, 그림자 놀이에서처럼 경험주의 원리를 조명할 수 있게 한다.
경험적이지 않은 이론, 계산 작업인 이론, "순수 연역 체계"를 가정해 보자 -- 이것이 실제로 옐름슬레우가 이론의 개념을 정의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이 이론이 예를 들어 모순 없음, 철저성 및 단순성 규칙들과 같은 규칙들을 준수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정할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이 이론이 경험적 기반을 얻기에 이른다면, 이론이 준수하는 모든 방식의 규칙들에서 비롯된 속성들을 이 이론은 조금도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험적 기반이 이 속성들을 잃지 않도록 스스로 조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험주의의 원리가 형식화된 것인 이러한 전망 안에 두기 때문이다 - 혹은 또한 사람들은 이론 자체를 조정하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것은 적합작용의 원리가 형식화된 것인 이러한 각도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미 랑가주 이론을 일별한 독자라면 이 대안에서 형식과 실체 사이의 근본적인 이론적 분유를 쉽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추산인 한에서, 이론은 한 형식이다. 랑가주의 사실들에 적합한 분석인 한에서, 이론은 한 실체이다 ; 그리고 실체는 정의로 인해 형식이 된다, 소위 실체는 형식에 의존하기 때문에 가치와 적합함을 가질 뿐이다.
적합작용의 원리 안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은, 마치 랑가주 이론 안에 있는 동시적으로 견지되는 상반된 인식론적 두 경향 사이 긴장과 같은데, 우리는 서언들의 맨 마지막, 최종 논증에서 세 번째로 이것을 다시 발견할 것이다. 이번에는, 타협은 두 상반된 것들의 현전을 통해 가정적이거나 함축적이기만 하지는 않겠다 : 이 타협은 명확하게 주장을 통해 겨냥된다. 이러한 바는 또한, 세 번째 원리를 재현할 기회이기도 한데, 더 잘 말하자면, 어디에서나 작동하는 것이며 세 번째를 구성하는 것인 랑가주 이론 안에서 작품의 심층적 원리 자체의 궁긍적 형식화이다.
내재성의 원리
이론에 부여된 내재성은 대체로 오해된 채로 남아 있는데, 그럴지라도 후세는 이 내재성을 옐름슬레우 이론의 지침으로 걸맞게 유지해 왔다. 실재론[réalisme]에 관심이 있는 모든 언어학자들은 이 내재성에 부닥친다. 내재성은 물음삼을만했고, 내재성의 개념적 독창성은 우리가 실재론을 정당화하도록 한다 : 즉, 우리가 만났던 반대자들과 인식론적으로 손쉽게 타협하는 것이 바로 이 내재성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덧붙여 말한다, 옐름슬레우의 내재성에 대해 말할 때, 언뜻 보기에는 놀랍지만, 항시 이러한 주장들을 염두에 두어야만 하는데, 이 주장들과 내재성에 관한 모든 명제는 양립가능하게 머물러야만 한다 :
— 내재성은 이론을 그 대상에 적합하게 만드는 것 외에는 다른 함축을 갖지 않는다.
— 내재성은 이론에 의해 관찰되는 경험주의 원리를 강화한다.
서언들[les Prolégomènes]에서 내재성의 개념은 때때로 랑가주 이론에 적용되고46, 때로는 랑가주 이론과 일치하는 언어학에 적용된다47. 내재성은 사실 초월적인 것과 두 번 반대되고 있다 : 한편으로는 언어학 분야에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론의 평면에서 말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소쉬르와의 간략한 비교는 아마도 설득력 있게 보일 것이다.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언어학은 또한 랑그에 대한 특정한 지식, 랑그 자체로서 랑그를 지향하는 그리고 랑그 자체를 위한 지식에 대한 관점으로 구성된다48. 그러나 강의의 어디에서도 이론이 그 대상에 내재되어 있다는 사실을 찾을 수 없다. 이제, 내재적 이론과 내재적 언어학 사이의 이러한 구별은 비록 그것이 서언들에서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더라도, 일부 그릇되게 차이를 만드는 산만함 탓은 아니다. 기술(記述)은 기술된 대상에 특정해야 한다는 것, 그것은 이러한 기술과 관련된 작업이 지식의 원리를 구축하기 위한 조건이다. 그러나 이것이 이를 유도하지는 않으니, 모든 학문 분야는 또한 그 분야에 특유한 이론, 그 대상과 활동 분야에 내재된 이론을 그 자기 현실태로 삼는다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예를 들어, 언어심리학은, 대상에 대한 이러한 명확하게하기[spécification]가 이론의 명확하게하기를 수반하지 않고도 대상을, 심리학을 통해 연구한 다른 대상들 가운데 랑가주인 그 대상을 명확하게 한다고 확실히 주장할 수 있다. 그와 반대로 : 만약 심리학 이론의 틀 내에서 언어가 어떠한 명확하게하기들을 갖는 것으로 알려질 수 있다면 그것은 바로 전체 이론으로서 심리학이 이러한 대상에 내재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언어 이론에서 이론적 내재성은 언어 기술에 사용된 개념의 명확성을 입증한다. 이는 또한 설명된 대로 해당 언어가 이론을 설명하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을 뜻한다 :
언어 이론은 자기에게 고유한 방법을 도움받아 분석하고 기술할 수 있어야 하니 ; 언어 이론은 자기에게 고유한 목적이 될 수 있겠다(Hjelmslev 1985: 75).
그러므로 우리가 언어 이론을 그 대상에 내재시키는 방법은 무엇보다도 랑가주 이론 자체가 랑가주라는 점을 관찰하는 데 있다 : 랑가주 이론은 기호학에서 분석될 수 있으며, 이 기호학은 아마도 외시적 기호학[la sémiotique dénotative]과는 다를 것인데, 외시적 기호학은 용례를 통해서만 분석할 수 있다. 그런 다음 두 번째 계기에서는 기호학적 분류하기에서 언어학 이론의 위치를 규정하는 것으로 충분한데, 여기서 기호학적 분류하기는 그자체로 확립할 수 있기를 : 이론은 두 번째 수준의 메타기호학에서 분석되며, 메타기호학을 수단으로하여 다른 이론들로써 내포적 기호학으로 분류될 수도 있다.
다음 세 장은 이 주장의 기술적 발전을 추적하는 데 전념한다. 이 장에서 우리는 이러한 이론적 내재성에서 발생하는 인식론적 결과들에만 초점을 맞춘다.
영지론적 야망 — 언어 이론이 자신의 분류를 마련한다면49, 비록 이 언어 이론이 지식들 분류의 역할을 맡을 자격이 있다고 선포하더라도, 이 이론은 랑가주의 한 부분을 할당하는 다른 이론을 기대하지 않는다. 반대로, 모든 과학 이론은 랑가주이기 때문에, 과학들의 일반 이론, 즉 영지학은 과학적 랑가주들의 분류 체계로서 또한 랑가주이며, 따라서 이러한 것들을 다루는 메타기호학들에서 그 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여기서 이 메타기호학들은 언어학적 분류들의 이러한 물음들에 집중한다. 따라서 랑가주 이론이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은 전체 속에서 지식들을 조직하는 데에도 적용할 가치가 있다.
[만약] 언어 이론이 차지하는 주요 위치로부터 밝혀질 수 있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 그것은 결정적으로] 현대 언어학이 부여한 것보다 더 넓은 의미에서 받아들여진 랑가주가 제 주요 위치를 인식의 영역에서 되찾았기 때문이다. [ProL, 159 & 160의 두 인용문으로 만든 문구].
기호학으로서의 세계 — 모든 과학 이론들이 랑가주 이론이 마련한 분류하기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적어도 기호학적 대상들의 내용 평면 요소들로서 그 이론의 대상들에 대해 동일해야 한다. 옐름슬레우는 인식의 대상에 대한 포괄적 비전을 제공하려는 야망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이 대상, 그것은 랑가주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의 랑가주로 간주된다. 다른 인식론들이 그것을 우주론이나 인류학으로 제시하는 반면, 랑가주 이론은 세계의 재현작용을 기호학으로 확립한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과학들과 인문과학들이 조직되고 발전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기호학적 과학들을 말할 수 있어야 하니 : 즉 관점에 기초한 지식들의 한 집합으로서 말이다.
우리가 결국 이해해야 하는 것 - 그리고 이 이해의 결론적 측면에 대해 주장해야 할 것 - 그것은 (비언어적, 비기호적 요소들 포함해서) 모든 것이 텍스트이고 모든 것이 랑가주 체계에서 분석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론적 내재성은 서술적 내재성을 강화한다. 왜냐하면 언어 이론은 실제로 존재하는 가장 일반적인 대상의 명확성을 구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인데, 이는 즉 : 언어 대상과 경험적 텍스트 자료[la donnée]에는 특정한 일반성이 있다는 것이다.
내재론은 경험론이다. —내재성의 확대와 절대화는 랑그를 이해할 때 여전히 엄격하게 요구된다. 실제로, 텍스트들 자료체[corpus]에 따라 수행한 분석은 첫째로 해당 랑그의 가능한 모든 텍스트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하며, 둘째로 모종의 다른 랑그 텍스트로 확장할 수 있어야 한다(ProL, 27 참조). 그러나 사실적인 것으로부터 가능한 것과 일반적인 것으로의 이 이행의 타당성은 내재성이 보장한다 : 가능한 것과 일반적인 것이 분석된 사실을 초월론적인 방식으로 "뛰어넘어"갈 수 없고, 단지 그 사실들을 증산해[démultiplier] 갈 수 있는 것은 내재성 때문이다. 증산은 단순히 분석된 형태를 변이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변이형을 통해 그에 대한 표명의 고유한 규칙들을 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재적 분석은 단지 원칙 유지[une mise en ordre]일 뿐이며, 이 원칙 유지 안에, 이 체계화 안에, 대상과 관련된 가능한 모든 것과 모든 일반적인 것이 남는다.
대상, 그것이 인식 대상일 때, 따라서 이러한 특수자질들의 한계들 내에 포함될 수 없다.
내재적 이론은 처음부터 그 대상을 필연적이지만 잠정적으로 한계짓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한계짓기란 랑가주인 이 포괄적 총체성의 본질적 인자들 중 오직 하나를 제거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Prol., 31).
랑가주의 한계짓기는 단지 “전통 언어학”이 마음 쏟는 개념에 부합하는 이론화의 동기를 재현한다. 옐름슬레우가 꾀하는 언어는 "소위 자연적으로 말해진 랑그"를 표준으로, 더 정확하게는 원형으로 삼는다. 랑가주의 명확성은 본질적으로 전통적인 랑그 개념과 소통하지만, 그 안에 담겨 있지는 않다. 오히려 그것은 "포괄적인 총체성"(Prol., 32, passim)의 "궁극적 결과들"로의 확장을 촉발한다.
이것은 파라독스로 보일 수 있지만, 적어도 그것은 랑가주 이론의 미묘함 중 하나로 드러난다. 내재적 언어학은 언어의 명확성에 대한 접근 방식에서도 언어의 전체성에 도달하는 반면, 초월적 언어학은 결코 랑가주의 부분이나 일면을 파악할 수 없다. 언어 분석을 위한 경험적 데이터인 텍스트 역시 “절대적이고 분석되지 않은 총체성”이다(Prol., 21). 이는 랑가주 이론에 따르면 대상에는 [내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외부 한계가 없으며 외부에서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의 외부 한계도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는 이 대상을 관찰하고 한계지을 수 있는 초월적인 관점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경험주의는 분석이 항상 대상 자체의 관점에서, 그 한계에 관한 물음을 포함하여, 유지될 것을 주문한다. 내재론은 초월적 이상주의이다 — 이런 의미에서 내재성과 초월성이 합류할 수 있다 : 내재성은 총체적이고 절대적이며 (이 환원이 논리적 규칙이든, 존재론적 또는 현상학적 규칙이든) 더 이상 환원에 대해서만 상대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초월성을, 소위 가능한 모든 것을 흡수한다. 실제로 절대적 내재성이 자신에게 고유한 가능성 조건 - 랑가주 이론이 보장한다고 주장하는, 언어학에 귀속되는 초월적 조건들의 체계로 받아들여지는 것 - 을 스스로에게 제공할 수 있다면, 자기를 자신과 통합하는 이론 체계가 아니라면 어떤 초월성도 승인될 수 없다.
내재성은 초월성을 궁지에 몰기는커녕 오히려 새롭고 더욱 견고한 기반을 제공한다. 내재성과 초월성은 내재성을 기반으로하는 우등한 단일성 안에서 합류한다. 언어학적 이론은 언어 체계뿐만 아니라 [...] 언어에 현전하는 인간과 인간 사회를 재인식하고 이를 통해 인간 지식의 영역 전체에 접근해야 하는 내적 필연성으로 인해 도출된다(Prol., 1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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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우리는 인식론적 반대자들의 타협하기를 분명하게 발견한다 : 초월성과 내재성은 연역적 계산과 경험주의, 현실주의와 실재론처럼 타협해야 한다. 이 이론의 대상이 랑가주일 때 그것이 촉발하는 이론 속에 초월성을 포함하면서 이러한 타협하기의 기초를 제공하는 일이 바로 내재성에 달려있다. 칸트는 이런 종류의 타협하기를 시도한 (적어도 그가 주장한 바로는) 최초의 사람이었다 : 쾨니히스베르크의 대가에 따르면 이상주의와 현실주의는 타협해야 하며 심지어 결합할 방법도 찾아야 한다. 우주론들[les cosmologies]과 같은 초월적 이론에서 실재론은 초월적이다 : 우리는 우리를 한계짓는 현실을 믿는다. 그러나 이 초월적 실재론은 사실상 이상주의, 경험적 이상주의와 짝을 맺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연적으로 우리 인식의 외부에 있는 이 현실을 인식할 수 있다고 상상하기 때문이다. 완전히 반대로, 칸트가 백일하에 드러나게 하는 동시에 많은 표를 던지는 초월론적 이상주의 안에서50, 인식할 수 있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인식하는 방법을 결정짓는 바는 바로 인식하는 주체이다. 칸트가 정녕 사물들의 경험을 형성하는 것은 이러한 조건에 달려있다. 따라서 초월론적 이상주의는 옐름슬레우의 경우처럼 경험적 현실주의와 짝지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