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공(淸溪公) 주 잠(朱潛)
1194~1260년 (67세)
휘(諱)는 잠(潛), 자(字)는 경도(景陶), 호(號)는 청계(淸溪)
주잠은 남송 광종 소희 6년(1194년)에 건양현(建陽縣) 삼계리(三桂里) 옥침봉(玉枕峯) 아래 고정에서 태어났다. 그 당시 증조부 주희(朱熹)는 63세였다. 주잠의 나이 7세(1200년) 때 증조부 주희(朱熹: 朱子)가 사망하였다.
신안주씨(新安朱氏)는 중국에서 유래한 한국의 성씨이다. 동국시조(한국시조)로 불리는 남송(南宋) 한림원태학사(翰林院太學士)인 청계공(淸溪公) 주잠(朱潛)은 1224년(남송 영종 가정 17년) 봄에 고려로 망명하여 정착하였다.
청계공(淸溪公) 주잠(朱潛)의 본관(本貫)은 송나라 휘주부(徽州府) 신안현(新安縣)이고, 본래 남송 사람으로서 성리학(性理學: 朱子學)을 대성한 성현(聖賢) 휘국공 주자(朱子)의 증손자이다.
청계공 주잠은 부(父) 거공(鉅公)의 삼남(三男)이다. 어릴 때 황면재공(黃勉齋公)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남송이 몽골 침공을 받을 때인 1222년 29세 나이로 문과 급제하여 관직을 한림원학사(翰林院學士) 중책을 맡았다. 그 후 한림원태학사(翰林院太學士)와 비서각직학사(祕書閣直學士)에 이르렀다.
그러나 몽골의 침입으로 남송의 조정이 주화론(主和論) 화의로 점차 경도되고 사직(社稷)이 위태롭게 되자, 이를 분하게 여긴 그는 대몽(對蒙)항전을 강력하게 주장한 기개 있는 선비였다.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게 되자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가솔(家率)들과 도성하(陶成河)・두행수(杜行秀)・섭공제(葉公濟)・유응규(劉應奎)・조창(趙昶)・주세현(周世顯) ・진조순(陳祖舜)을 비롯한 문하의 한림원(翰林院) 7학사(七學士)를 거느리고 검교상장군 구존유(具存有) 등과 함께 1224년(고려 고종 11년) 뱃길을 통해 고려로 망명해서 금성(현재 지명, 나주)에 이르렀다. 당시 주잠의 나이 31세이었다. 정착 후 고려 고종이 수차례 초빙하여 문하시랑에 제수하고자 하였으나 그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뜻을 품고 남송의 신하로서 고려의 벼슬을 극구 고사(固辭)하였다. 오히려 여송제휴(麗宋提携)에 의한 구국(救國)의 모책(謀策)을 제시하여 고종의 항몽(抗蒙) 결심을 촉구하였다.
그 후 몽골은 나라 이름을 원(元)으로 고치고, 원 세조는 남송의 신하들이 고려로 달아난 사실을 알고 차라대(車羅大) 장군을 보내 그들을 압송해 올 것을 고려 조정에 요구했다. 주잠은 원나라 사신(使臣)이 그의 종적을 탐색해 오자 화를 피하려고 휘를 적덕(積德), 본관은 능성(綾城)으로 고치고 아들 여(余)의 이름도 여경(餘慶)으로 바꾸어 전라도 능성 고정리(考亭里)와 전라도 진안 주천면(朱川面) 용담(龍潭)에 복거(卜居)하였다.
결국 차라대는 학사 두 사람만 수색하여 환국(還國)시켰고 다른 학사는 찾지 못했다는 보고를 본국에 했다. 이때 쓰인 학사무등(學士無登)이란 기록으로 인하여 광주 무등산 지명이 생긴 것으로 본다. 그 후 원 황제는 주잠을 포기하고 그 대신 주잠의 아우 제공(濟公)을 국사(國師)로 모셨다.
주잠의 과거 행적으로 인하여 현재까지 지명 등이 유래된 곳이 많고, 주자성리학(朱子性理學)을 고려사회에 30년 간 전수하고 서당을 열어 학문연구와 사림양성에 전념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에 성리학(性理學) 전래 기초가 되었다.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주자묘(朱子廟), 그리고 전라북도 진안군 주천면의 주천서원(朱川書院)과 청계사(淸溪祠)에 배향되어 있다. 사위는 능성 구씨(綾城 具氏) 시조인 상장군 구존유 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