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작
채선정
봄, 새의 부리는 아직
쌉쌀한 맛이 난다
그 쌉쌀한 새의 부리에
보글보글 끓는 물을 부으면
세작 한 잔에선
느닷없이 뾰족한 맛이 난다
주전자 속엔
맹물의 새가 다글다글 울고 있다.
그 울음에 찻잎을 넣으면
수십 마리의 새들의 혀가
봄볕처럼 따뜻하게 퍼진다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우리는 봄날의 정인
세속의 소문에게 혀를 빼앗긴다 해도
말없이 몇 번의 봄쯤은 파릇파릇하겠다
세작 한잔 삼키면 내 속엔
수십 마리의 새가 포르르 난다
언젠가 손끝으로 쥐어뜯었던
내 어린 말이 생각난다
시린 날 세작 한잔 따라놓고
새소리에 취한다.
채선정 회장님의 시집 [천년웃음]을 받고, 무심히 펴들고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방 시속에 빠져들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단숨에 읽어치웠다. 그만큼 재미있고 새로웠다. 뛰어난 감각과 감수성을 풍성한 상상력으로 마구 휘저어놓은 것 같은, 언어의 유희가 난무하는 향연에 초대된 느낌이었다.
여기 소개한 [세작]은 그의 시들 중에 그저 평범한 하나를, 손가는 대로 뽑은 것이다. 아마 의도가 개입되었다면 비교적 짧아서 올리기 쉽다는 생각은 작용했을 것이다. [세작]이 그의 작품 중에서 평범한 작품이지만, 그냥 평범한 것이 아니다. 그만큼 채선정 시인의 시들은, 감성과 감각의 흐름에 대한 탁월한 지각을, 자유분방한 상상력으로 사차원의 세계를 활짝 열고 훨훨 날아다니도록 안내하는 느낌을 준다.
이 시는 마지막 연에 서 보듯이 그냥 가슴시린 어느 봄날 세작 한잔 따라 놓고 차 맛을 음미하면서 그 느낌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언뜻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휘선택과 그 연결이 너무 자유분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보다는 1915년에 나타난 러시아의 형식주의 문학이론가들이 주장한, “낯설게 하기”를 매우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적용한 작품에 가깝다. 또한 그보다 조금 앞서서 발표되어 크게 반향을 일으켰던 이미지즘과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조와 운동은 현대시의 주류가 참신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방향으로 달려가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리고 이러한 추세는 지난 한 세기 내내 시의 화두가 되어, 끊임없이 변화 발전을 이루어 왔던 것이다.
물론 채선정 시인이 이러한 사조나 표현 방식을 의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오랜 세월 쌓아온 내공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몸에 밴 언어능력의 산물로 보인다.
이미지 창출의 근본 원리는 적절성과 기발성에 있다. 적절성이 좋은 이미지들은 독자들에게 쉽게 받아들여지며 정제된 느낌을 준다. 기발성은 아무도 생각 못한 보조 관념을 끌어들여 형상화하는 것인데, 이 부분이 ‘낯설게 하기’의 본령이고 정수다. 또한 현대시로 하여금 새롭고 참신하게 느껴지게 하는 요인들이다. 이 두 가지가 조화되어야 뛰어난 이미지 창출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채선정 시인의 작품은 적절성도 상당히 뛰어나지만 그 기발성은 가히 타고난 언어운용 능력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앞에서는 물을 끓이는 장면, 끓는 물속에 세작을 넣으면 새들이 그것이 좋다고 아우성치면서 따뜻하게 하나로 마음이 녹아가는 과정, 시의 화자가 좋아서 그것을 아껴 마시는 과정, 마시면서 느껴지는 미각과 촉각을 통해 전해오는 느낌에 관한 내용이다. 그 느낌과 그 이미지들이 기발하고 생생하게 전해지도록 형상화 한 것이다. 누구의 시에서도 볼 수 없는 개성 그리고 새로움, 이것이 채선정 시인의 장기(長技)라고 하겠다.
사실 이러한 이미지들은 외면적 표현과 함께 내면의 다양한 의미를 함축한다. 무릇 시는 이처럼 함축적이어야 한다. 최근에 발표되는 시들은 이런 부분에 대하여 매우 취약한 경우가 많이 발견된다. 조금 길게 쓴 시들은 그런 까닭에 시라기보다는 짧은 수필이나 잡문처럼 느껴진다. 시인들이 좀더 폭 넓은 수련과 천착의 과정을 밟을 필요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채선정 회장님이 보내주신 시집 [천년 웃음]을 읽고, 간략하게나마 소감을 써서 축하의 뜻을 표하고자 합니다. 좋은 시집 잘 읽었습니다. 시간이 될 때 두고두고 다시 읽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석규교수
서울대국문과 졸업
가천대 석좌교수
사)한국시조협회 부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