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방 시내들같이
시편 126:1-6
시편 126편은 120편에서부터 134편에 이르는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가운데 하나입니다. 순례자는 특정한 장소를 향해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옛날에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목표점으로 삼아 순례를 하곤 했습니다. 무슬림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는 '메카'를 향한 순례를 죽기 전에 해야 할 종교적 의무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순례를 하지(Hajj)라 하는 데 무슬림들은 메카 순례를 마친 이들의 이름 앞에 핫즈라는 경칭을 붙이고, 그가 사는 집은 흰색 칠을 하여 구별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라싸에 있는 조캉사원을 순례하는 것을 일생의 소원으로 여깁니다. 어떤 이들은 오체투지로 그곳을 향해 나아갑니다. 가장 낮은 자세로 땅 바닥에 엎드리며 나아가는 그들의 모습은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각 종교의 순례자들이 향하는 장소는 다를지 몰라도, 결국 그들이 무의식중에라도 바라는 것은 우주의 중심에 가닿고자 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해 나아가는 이들은 걷고 또 걸으며 자기들의 기억을 반추하곤 했을 것입니다. 허위단심으로 살아온 나날을 떠올리고, 슬픔과 기쁨, 희망과 좌절의 순간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순례의 시간은 그 모든 삶의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는 시간입니다. 오늘의 시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 시온의 포로를 되돌리실 때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시인은 조상들이 겪은 해방의 경험에 자기 삶의 경험을 비끌어매고 있습니다. 시온의 포로들이 다시 자기 삶의 자리로 돌아오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었던 것처럼 그는 자기 삶이 하나님의 은총 속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이 시의 핵심어는 '돌려 보내다'라는 단어입니다. 히브리 성경에서 이 단어는 주님의 진노로 인해 초래된 고통의 상황이 주님의 은총이 넘치는 상황으로 회복될 때 주로 사용됩니다.
시인은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찾아온 그 회복의 경험을 표현할 적절한 말이 없었기에 '마치 꿈꾸는 것 같았다'고 말합니다. 현실이기엔 너무나 놀라운 경험이었던 것입니다. 해방의 날 그들의 입은 기쁨으로 가득 차고, 그들의 혀는 찬양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런 그들을 보고 다른 나라 사람들조차 "주님께서 그들의 편이 되셔서 큰 일을 하셨다"(2)고 수군거렸습니다.
저는 신학교 시절 아르헨티나의 신학자인 호세 미구에즈 보니노(Jose Miguez Bonino)의 책을 읽다가 '편드는 하나님'이라는 말에 놀란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불편부당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하나님다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편을 드십니다. 하나님은 약자들의 보호자를 자처하십니다. 억압과 착취에 시달리는 이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그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리도록 도우십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은 세상의 압제자들이나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이들을 학대하는 이들을 상대로 싸움을 벌이십니다. 히브리들을 자유의 새 땅으로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은 바로의 체제와 싸우셨습니다. 예언자들은 백성들을 지푸라기 강아지(芻狗)처럼 여기는 왕과 관료들, 그리고 그런 불의한 체제를 뒷받침해주고 있던 사제 계급을 맹렬하게 성토했습니다. 예수님도 폭력으로 유지되는 로마 제국에 맞서 폭력이 아니라 사랑으로 지배되는 새로운 나라,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해방 혹은 구원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가 만일 자본주의 경제 질서가 만들어놓은 행복의 주술 혹은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이웃들을 마치 내 몸인 양 사랑한다면,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것입니다.
순례자는 시온의 회복을 회상함으로써 새로운 용기를 얻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고통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 고통이 그를 끝내 좌절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그는 마음 깊이 새길 것입니다. 순례가 주는 복입니다. 순례의 길은 헛된 욕망에 사로잡혔던 자아를 해방하는 길입니다. 우리 삶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는 것은 순례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순례는 저 예루살렘 성지를 가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유명한 유적지를 휙 둘러보고 사진 한 장 찍고 돌아서는 것은 진짜 순례가 아닙니다. 하나님 마음의 중심을 향한 그 순례가 진정한 의미의 순례입니다. 하나의 중심인 하나님의 마음과 내 마음을 잇대기 위해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순례자라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은 저절로 기도의 사람이 됩니다. 16세기에 팔레스타인에 살았던 교부 도로테우스는 세계를 원이라고 상상해 볼 것을 제안합니다. 그 중심은 하나님이고 그분의 광채는 인간들의 각기 다른 삶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모든 이가 하나님이 계신 원의 중심으로 다가간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동시에 하나님께 다가가는 것이다.”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웃에게 다가서야 하고, 이웃에게 참으로 다가서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다가서야 하는 이 되먹임의 관계가 참 신비합니다.
함께 살아야 할 이들은 때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지만 때로는 걸림돌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함께 살아가는 가족이나 이웃, 동료들로 인해 우리 마음이 충만해지기도 하지만, 때때로 텅 빈 마음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 마음은 늘 '충만'과 '텅 빔' 사이를 오갑니다. 시인의 기도는 그래서 소중합니다. "주님, 네겝의 시내들에 다시 물이 흐르듯이 포로로 잡혀간 자들을 돌려보내 주십시오."(4) 네겝은 비가 올 때는 물이 흐르지만 비가 그치면 바짝 말라버리는 와디입니다. 바로 우리 마음의 풍경과 같습니다. 도시에 사는 우리 마음은 네겝의 와디처럼 모래만 버석이는 불모지입니다. 그곳에 물이 흐르게 하시고, 세상에 사로잡혔던 우리를 해방하여 자유인으로 살게 하실 분은 하나님뿐이십니다.
네겝 시내에 물이 흐르기를 소망한 시인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흘러간 것은 농부들이 씨를 뿌리는 광경입니다. 척박한 땅에 물이 흐르면 죽은 것 같았던 대지가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때야말로 파종의 때입니다. 순례자는 파종자여야 합니다. 파종은 고된 노동입니다. 하지만 파종이라는 노고가 없다면 수확도 없습니다.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사람은 기쁨으로 단을 가지고 돌아온다."(5-6)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다'는 표현은 우리에게 좀 낯설게 들리는 게 사실입니다. 노동이 고되기 때문에 눈물을 흘린다는 말일까요? 그렇다면 너무 유약해 보이지 않나요? 사실 이 말은 애굽이나 우가릿 신화를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들은 겨우내 죽음의 세계에 끌려간 곡물의 여신을 깨우기 위해서는 들판에서 울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운다는 말은 그러니까 신을 깨우는 일입니다. 히브리의 시인은 그런 풍습을 그리되, 그 의미를 바꾸어놓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것은 어쩌면 자기 욕망을 거스르는 일일 수 있습니다. 섬김, 돌봄, 나눔, 권리의 자발적 포기, 타자를 유익하게 하는 삶이 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예수와 함께 혈과 육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지만, 옛 삶의 인력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의 욕망과 치열하게 싸워야 합니다. 늘 드리는 말씀입니다. 남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힘이 있다 하고 자기와 싸워 이기는 사람은 강하다(勝人者有力, 自勝者强/노자 33장)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강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를 극복하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조금 자의적으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저는 울면서라도 씨를 뿌린다는 말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주겠다.'"(호10:12) 우리가 정의의 씨를 뿌리면 하나님께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정의의 씨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는 것,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영혼의 길입니다.
저는 신영복 선생님을 통해 석과불식(碩果不食)이라는 단어와 만났습니다. 석과란 '씨과실'을 뜻하는데, 선생님은 그것을 나뭇잎이 다 떨어지고 나목의 가지 끝에 달린 과실, 삭풍 속에 남아 있는 마지막 과실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석과불식이라 함은 그런 과일은 먹지 않고 땅에 심어서 새봄의 싹으로 돋아나게 하는 것을 일컫는 말입니다. 무릇 믿는 이들이 해야 할 일이 바로 이런 것 아닐까요? '석과'를 저는 '예수의 마음'이라 하고 싶습니다. 그 마음을 지켜내지 못하면 우리 시대에는 희망이 없습니다. 남들이 뭐라 하든 예수의 마음 하나 지키기 위해 고투하는 사람이 남아 있는 한 세상은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어느 시대이든 그런 이들이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갈6:9) 하고 성도들을 격려했습니다.
어느 목사가 아이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식이 끝난 후 그는 모두가 들을 수 있게 큰소리로 아기에게 말했습니다.
"사랑하는 아가야, 이 세례를 행함으로써 우리는 너를 앞으로 평생 동안 걸어갈 여행으로 맞아들인다. 이것은 끝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의 삶을 통해 이루실 일의 시작이란다. 하나님께서 너를 어떻게 만들어 가실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하나님께서 너를 어디로 이끄실지, 그래서 어떻게 우리를 놀라게 하실지 우리는 모른다. 우리가 아는 것, 다만 말해 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하신다는 것뿐이란다."(스탠리 하우어워스·윌리엄 윌리몬, <하나님의 나그네 된 백성>, 복있는 사람, p. 76-77)
우리 삶이 어찌 될는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디로 이끌어가실지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사실 말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희망입니다. 이것이 인생을 순례로 살려는 이들이 잊지 말아야 할 사실입니다. 부디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당신의 꿈을 이 땅에서 아름답게 펼쳐나가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당장의 결실이 보이지 않아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뿌린 씨가 썩지만 않았다면 어느 때든 싹이 움터 나올 터이니 말입니다. 여러분은 순례자입니까? 여행자입니까? 종작없는 방황을 그치고 이제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순례를 시작하십시오.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이라야 기쁨으로 단을 거두어들이게 될 것입니다. 불의한 세상에 정의를 심으십시오. 어둠의 세상에 빛을 심으십시오. 갈등의 세상에 평화를 심으십시오. 죽임의 문화가 지배하는 세상에 생명을 심으십시오. 냉랭한 세상에 포근한 정을 심으십시오. 경쟁과 독점을 삶의 원리로 삼는 세상에 협동과 나눔의 씨를 심으십시오. 네겝 땅에 물을 돌아오게 하십시오. 우리를 이 거룩한 일에 초대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우리 앞에 놓인 길을 순례길로 삼아 주님과 동행하는 기쁨을 누리며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첫댓글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사람은 기쁨으로 거둔다''
...신화적 비유로...'운다는 것'은 신을 깨우는 일
즉, 하나님의 뜻을 따르기 위해 자기의 욕망과 치열하게...싸우는 것...
碩果不食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