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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사사기21장13~25절
제목 :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열두 지파의 존속”을 위한 첫 방안이 무산되자,
이스라엘 장로들은 다음 묘책을 제안합니다.
하지만 이것 역시 죄를 묵인하는 대책입니다.
1. 이스라엘 백성의 뉘우침(13~15절)
1) 베냐민 자손에게 평화를 공포합니다(13절).
“[13] 온 회중이 림몬 바위에 있는 베냐민 자손에게 사람을 보내어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평화를 공포하게 하였더니. - 베냐민 사람 600명은 이때까지 약 넉달 동안(20:47) 림몬 바위에 숨어 지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자손들이 평화를 공포하고 나서야 비로소 집으로 돌아올 수가 있었습니다(14, 23절).
아무튼 이스라엘 회중이 이처럼 남은 베냐민 자손들에게 평화를 공포한 것은 백번 잘한 일입니다.
성도는 비록 이웃과 다투었다 할지라도 먼저 화해를 청하는 것이 옳습니다(마 5:21-26).
뿐만 아니라 원수와 죄인조차도 회개할 때에는 용서해 주고 위로해 주어야 합니다(고후 2:7).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사랑의 정신입니다(요 13:34, 35).
2)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 중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엑 주었습니다(14절).
“[14] 그 때에 베냐민이 돌아온지라 이에 이스라엘 사람이 야베스 길르앗 여자들 중에서 살려 둔 여자들을 그들에게 주었으나 아직도 부족하므로”
야베스 길르앗 성읍에서 데려온 처녀들은 400명이고(12절),
베냐민 사람들은 600명이었기 때문에(20:47),
약 200명의 처녀가 부족한 셈입니다.
이를 위해 부득불 이스라엘 백성들은 또다시 계책을 짜내었는데 곧 실로 여인 납치극입니다(19-23절).
3)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를 빠지게 하였습니다(15절).
“[15] 백성들이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쳤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음이었더라”
본절에서 본서 기자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지파들 중에 한 지파가 빠지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베냐민 지파와의 전쟁이 단지 지파간의 갈등으로 빚어진 내전이었던 것만은 아니며, 거기에는 죄악 중에 있던 이스라엘을 심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간섭이 개입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줍니다.
2. 장로들의 고민과 해결책(16~24절)
1) 회중의 장로들이 모자라는 처여 문제를 논의 합니다(16절)
“[16] 회중의 장로들이 이르되 베냐민의 여인이 다 멸절되었으니 이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까 하고”
모자라는 200명의 처녀 때문에 다시 장로들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한편 여기서의 문제 제기(16-18절)는 6, 7절에서의 문제 제기와 거의 유사하지만 다음과 같은 새로운 내용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1) 6, 7절에서와는 달리 베냐민 지파의 실상(14절)을 분명히 목격한 뒤였습니다.
(2) 여호와께서 한 지파를 빠지게 하셨기 때문에(15절), 그들이 길르앗 야베스를 쳐서 처녀를 데려온 것으로(12절)는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음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그 남은 자들에게 어떻게 하여야 아내를 얻게 할꼬'라고 한 장로들의 탄식 및 의견 제시는 6, 7절에서 제기했던 것보다 더욱 강한 어조를 띠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 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했습니다(17절).
“[17] 또 이르되 베냐민 중 도망하여 살아 남은 자에게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그리하면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사라짐이 없으리라”
마땅히 기업이 있어야 하리니 - 여기서 '기업'에 해당하는 '예레솨'의 일반적 의미는 '산업', 또는 '소유'를 뜻합니다.
그러나 베냐민 사람 600명은 이미 자신들의 영토가 있는 곳으로 돌아와 있는 상태입니다(14절).
때문에 여기서 말하는 '기업'은 아내를 얻어 이룬 '가정'을 뜻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아내가 없으면 베냐민 지파의 후사(後嗣)를 얻을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베냐민 지파의 이그러짐은 여전히 방지할 수 없습니다.
추측컨대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모자라는 처녀 때문에 베냐민 지파간에 일어날 불화를 염려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3) 이스라엘 자손이 베냐민에게 딸을 줄 수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18절).
“[18]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못하리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맹세하여 이르기를 딸을 베냐민에게 아내로 주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하였음이로다 하니라”
이스라엘 사회에 있어선 하나님과의 맹세이든, 사람과의 맹세이든 모두를 막론하고 '맹세'는 반드시 시행되어야만 하는 불변의 약속이었습니다.
따라서 대개 히브리인들은 무엇을 맹세할 때, 그것을 이행치 못할 경우 죽음이나 어떠한 저주라도 감수하겠다는 약속을 곧 잘 첨언(添言)합니다(수6:26;삼상14:28;왕상 2:42).
본절 역시 바로 그러한 한 예인데 '맹세의 엄정성'을 잘 드러내 줍니다.
민 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참조
4)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습니다(19절)
“[19] 또 이르되 보라 벧엘 북쪽 르보나 남쪽 벧엘에서 세겜으로 올라가는 큰 길 동쪽 실로에 매년 여호와의 명절이 있도다 하고”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실로'는 12절에 나오는 '실로'와 다른 곳이 아닙니다. 성경에 언급된 '실로'(Shiloh)란 지명은 언제나 한 곳을 가리키는데 본절의 설명에 의하면 그 위치는 예루살렘 북쪽 약 32km지점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여호수아 때(수 18:1)부터 엘리 제사장 때(삼상 4:3, 4)까지 그곳에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성막이 있었는바 종교적으로 상당히 중요한 성읍이었습니다. 현재 실로는 '길벳 세일룬'(Khirbet Seilun)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르보나. - 실로와 세겜 사이에 있는 큰 길가의 마을입니다.
이 마을은 실로에서 서북쪽으로 약 5km 정도 떨어져 있는 오늘날의 '루반'(Lubban)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세겜. - 예루살렘 북쪽으로 약 49.6km 정도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8:31 주석 참조.
매년 여호와의 절기가 있도다. - 실로에서 매년 절기가 있었다는 언급은 삼상 1:3,7에도 나타납니다.
그러나 무슨 절기인지는 분명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여기서 '절기'에 해당되는 '하그'는 주로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등 3대 절기에만 사용되는 말입니다.
따라서 어떤 주석가들은 유월절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었다는 것은(21절)과거 이스라엘의 홍해 도하(渡河)후 미리암의 지도하에 이스라엘의 딸들이 춤을 춘 것(출 15:20)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Lange).
*출15:20 “아론의 누이 선지자 미리암이 손에 소고를 잡으매 모든 여인도 그를 따라 나오며 소고를 잡고 춤추니”
그러나 다른 주석가들은 그것은 실로 고유의 축제로서 신 12:10-12에 언급된 축제와 관련된다고 생각합니다.
*신12:10~12 [예배처소]“[10]너희가 요단을 건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 거주하게 될 때 또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너희 주위의 모든 대적을 이기게 하시고 너희에게 안식을 주사 너희를 평안히 거주하게 하실 때에[11]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실 그 곳으로 내가 명령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의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12]너희와 너희의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
하지만 유월절, 장막절, 오순절 이 세 절기 가운데 올리브(olive)와 포도 등의 수확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은 장막절입니다(신 16:13). 레위기 서론, '히브리절기와 축제' 참조.
*신16:13 “너희 타작 마당과 포도주 틀의 소출을 거두어 들인 후에 이레 동안 초막절을 지킬 것이요”
따라서 본절의 축제도 포도원과 깊이 결부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20, 21절) 장막절임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장막절의 주요 행사는 주로 밤에 거행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베냐민 자손들이 춤추는 여자들을 쉽게 납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만일 그들이 대낮에 여인을 납치했다면 실로에서 베냐민 땅까지 데려가기도 전에 발각되었을 것이며, 발각되었다면 율법에 따라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출 21:16;신 24:7).
5)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각각 하나를 붙들어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고 하였습니다(20,21절).
“[20] 베냐민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가서 포도원에 숨어[21] 보다가 실로의 여자들이 춤을 추러 나오거든 너희는 포도원에서 나와서 실로의 딸 중에서 각각 하나를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본절에서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처럼 철저한 계획 속에서 베냐민 사람들로 하여금 아내를 취하여 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들이 이와 같은 납치극을 꾸민 이유는 22절에서도 잘 나타납니다.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한편 베냐민 사람들 중에 아내가 없는 200명뿐만 아니라 아내가 있는 나머지 400명의 베냐민 사람들도 분명히 이 일을 돕기 위해 나섰을 것입니다.
실로의 여자들이 무도하려 나오거든. - 패트릭(Patrick) 주교에 따르면 장막절에는 이스라엘 처녀들이 춤을 추도록 허용되었는데 이들이 춤을 출 수 있도록 허용된 절기는 오직 장막절 뿐이라고 합니다.
붙들어 가지고 자기의 아내로 삼아 베냐민 땅으로 돌아가라. - 여기서
'붙들다'에 해당하는 '하타프'는 마치 죄수를 체포하듯 '꽉 붙들어 놓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베냐민 인들에게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는 이스라엘 장로들의 모습을 잘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6) 만일 시비하면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라고 하겠다고 합니다(22절).
“[22] 만일 그의 아버지나 형제가 와서 우리에게 시비하면 우리가 그에게 말하기를 청하건대 너희는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그들을 우리에게 줄지니라 이는 우리가 전쟁할 때에 각 사람을 위하여 그의 아내를 얻어 주지 못하였고 너희가 자의로 그들에게 준 것이 아니니 너희에게 죄가 없을 것임이니라 하겠노라 하매”
만일...쟁론하면. - 앞서 미스바 총회에서 자신들이 베냐민 자손에게 딸을 주지 않기로 맹세한 이스라엘 자손들(1절)은 아무도 그 같은 서원을 범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냐민 자손들이 자기들의 딸을 납치해 가려는 일이 탄로 나면 싸움이 일어날 것임이 분명합니다.
본절은 바로 그 같은 사태를 가리키는데 만일 그러한 일이 발생할 경우 이스라엘 장로들은 자신들이 친히 베냐민 인들을 위해 변호해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너희에게 죄가 없을 없을 것임이니라. - 이처럼 이스라엘 장로들이 자신들의 딸을 납치당한 실로 사람들에 대하여 그들의 무죄 성을 납득시키는 데에는 다음과 같은 두가지 논거(論據)가 있었을 것입니다.
(1) 길르앗 야베스와의 전쟁에서 베냐민 사람들의 아내를 다 마련해 주지 못한 데 대한 이스라엘의 공동 책임이 있기 때문에(10-14절) 실로 사람들이 자신들의 딸을 납치당한 것은 실로 인들의 책임만일 수 는 없다는 점입니다.
(2) 실로 인들이 고의로 자신들의 딸을 내준 것이 아니라 베냐민 사람들이 강제로 납치해 간 것이기 때문에 실로 인들은 그들이 한 맹세를 범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전쟁 때에는 자신들의 의지와는 달리 이방인들에게도 딸을 빼앗길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장로들의 이러한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습니다.
7) 베냐민 자손이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았습니다(23절).
“[23] 베냐민 자손이 그같이 행하여 춤추는 여자들 중에서 자기들의 숫자대로 붙들어 아내로 삼아 자기 기업에 돌아가서 성읍들을 건축하고 거기에 거주하였더라”
베냐민 사람들은 장로들의 계획대로 실로에서 춤을 추던 여인 200명을 데리고 그들의 기업으로 돌아갔습니다.
성읍들을 건축하고. - 이처럼 베냐민 사람들이 아내를 얻어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후 가장 시급했던 일은 거의 잿더미로 변한 성읍들을 수리하는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베냐민들에게 속한 성읍은 앞서 이스라엘 연맹군과의 싸움에서 대부분 완파(完破)되었기 때문입니다(20:48).
8) 이스라엘 자손들도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돌아갔습니다(24절).
“[24] 그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 곳에서 각기 자기의 지파, 자기의 가족에게로 돌아갔으니 곧 각기 그 곳에서 나와서 자기의 기업으로 돌아갔더라”
본절은 모든 문제가 자연스럽게 해결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즉 모든 이스라엘 지파는 베냐민 지파의 문제가 완전히 종결될 때까지 자기 기업으로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다가 이제서야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곳을 떠나 -여기서 '그곳'이란 일차적으로 실로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12절). 그러나 혹자는 16-23절의 상황에 의거해 대부분의 백성들은 미스바에서 베냐민 지파의 문제가 종결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3. 사사기의 결론(25절)
“[25]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
그 때에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 마지막으로 본서 기자는 사사기의 역사를 마감하면서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그러한 불법적인 일들이 발생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7:6 “[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17:6,18:1;19:1;21:25).
이러한 표현은 이후에도 여러 차례 나타나는데(17:6,18:1;19:1;21:25),
여기에는 왕정 제도에 대한 긍정적 의미와 부정적 의미가 동시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1) 부정적 측면 : 당시 이스라엘에는 전 민족을 통솔하는 정치 지도자가 없었으나, 통치법(統治法)은 있었습니다.
그 통치법은 바로 율법이었고 입법자는 하나님 당신 자신이셨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궁극적 통치자는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응당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여 그 통치에 순응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할 때 전 백성의 결속은 자연히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보호하심은 늘 함께 하기 마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진 않고 단지 이방 나라들의 세속적 왕정(王政)제도를 통해 당면 과제들을 해결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2) 긍정적 측면 : 시일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가 늘어가고 그로 인해 여러 부차적 문제들이 증가함에 따라 하나님의 통치를 구체적으로 대행할 지도자가 실제적으로는 강력히 요청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전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하여 자발적으로 한 마
음 한 뜻으로 결집하기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더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히4:15).
*히4:15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요컨데 이러한 요청에 따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왕정을 허락하였으나,
당신의 우려하신 바대로 이스라엘의 왕정사(王政史)는 수많은 오점들로 얼룩지게 되었습니다.
17-21장에 걸쳐 기록된 불법적인 일들에 대한 본서 기자의 이러한 결말은 사사기 시대의 예비적인 성격과 새로운 시대의 도래에 대한 기대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왕이 없이 각기 소견에 오른 대로 행하는 이스라엘을 보며 나의 삶이, 나의 왕되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사시기를 소원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1)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영원한 왕입니다(25절).
사사기를 마무리하며 저자는 사사 시대 모든 혼돈의 원인이
“왕의 부재”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다윗 왕조의 출현을 고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하나님이 왕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시대를 바라보는 저자의 깊은 한숨과 한탄입니다.
내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이 왕 되실 때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서고 인간의 악한 말과 꾀가 무너지는 곳입니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이스라엘 회중은 베냐민 자손을 다시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입니다(13~15절).
하지만 이것은 “열두 지파의 존속”을 위한 대의일 뿐 진의는 알 수 없습니다.
언약 공동체를 보존하려는 “신앙심의 발로”인지 아니면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영역 상실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자신들의 과오가 아닌 하나님께 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만용”이 아니라 “수용”입니다.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기며 불평하기보다,
내 죄가 자초한 결과라고 여기며 감당하는 것입니다.
2) 아직도 여인의 수가 부족했지만 장로들은 자신들의 딸들을 주지 않기로 서원하였기에 어기면 화를 당할 것이라고 자위합니다(16~18절).
애초부터 자신들은 희생할 의지가 없던 것입니다.
안으로는 형식적인 논리를 내세우며 신앙심을 과시하지만,
밖으로는 온갖 편법을 자행하여 타인의 희생을 강요하는 위선에 불과합니다.
타인을 희생해 문제를 해결하기보다 자신의 희생을 먼저 각오하는 자세를 보여준다면,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시고 백성의 마음도 얻었을 것입니다.
3) 첫 해결 방안이 실패로 돌아가자, 장로들은 불법적이고 비윤리적인 계획을 추진합니다(19~24절).
베냐민 남자들에게 실로의 처녀들을 납치하도록 한 것입니다(출21:16).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도자들이 앞장서서 불법을 묵인하고 편법을 자행합니다.
말씀이 없으면 죄는 실수로 바뀌고,
통회해야 할 일은 어쩔 수 없는 유감스러운 일로 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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