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듯이, 국궁판에는 오랫동안 이어져 왔지만 아직 합의가 되지 않은 중요한 논쟁이 있다. 바로 사법에 관한 논쟁이다. 신사들도 활판에 들어온지 몇 달만 되고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궁사들의 사법이 제각각, 중구난방으로 다르다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다. 큰 것만 보더라도 발디딤, 화살대의 높이, 앞뒷손 움직임 등에서 사람마다 모양이 다르다. 물론 수십 년간 대한궁도협회의 영향으로, 많은 이들이 양궁과 비슷하게 비껴서기와 턱밑살대, 최소화된 양손 움직임 동작을 기본적으로 취하고 있다. 하지만 국궁을 옛 문헌으로도 진지하게 공부하는 궁사들은 그것을 비판하면서 저마다의 ‘전통 사법론’을 또한 펼치고 있는 것이다. (활판에 이름이 꽤 알려지고, 얼마간의 문하생들을 키워낸 사람만 해도 다섯은 된다. 이를테면 조영석, 백인학, 정진명, 장영민, 이정우 등. 이 외에도 인터넷이나 유투브에는 자기만의 독자적인 사법론을 전파하는 활꾼들이 족히 열은 넘을 것이다. 더 자세한 건 다음 주소의 ‘사법논쟁글’:붙임글3 참조. https://cafe.daum.net/CHOSUNarchery/oOfS/27 )
어떤 이들은 이런 상황을 사법(궁체)의 다양성이라고 긍정하지만, 세상의 어떤 스포츠나 기예도 오랜 기간동안 숱한 고수들의 경험을 통해 다듬어진 가장 효율적인 기본 자세 또는 폼이 정립되지 않은 것은 없다. 우리 활판의 위와 같은 중구난방은 좋은 의미의 다양성이 결코 아니고, 실상은 19세기 말부터 굴절된 우리 역사-민족사 그리고 활판 역사 모두-의 결과인, 하나의 난맥상으로 봐야 한다(이에 대해서도 자세한 근거를 든 글들이 우리 카페에 있다). 그리고 이는 우리 활판의 장기적 발전에 유익이 아니라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우리 활판의 지도급 인사들 그리고 활쏘기에 진심인 많은 활꾼들은 거의 대다수가 국궁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염원하고 이야기한다. 당연히 필자도 그런 활꾼 중의 하나이다. 특히 일본의 전통 활쏘기인 규도가 이미 자국내에서 각급 학교들을 중심으로 저변층이 두텁고, 월드컵 대회까지 개최할 정도로 나름 세계화를 이루어 잘 나가는 것을 부러워한다. 규도가 그렇게 발전한 이유는 여럿이 있겠지만, 가장 핵심 요소로 ‘통일된 사법’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곧, 하나의 사법을 바탕으로 교재를 만들고 사범들을 양성하여 학생이나 외국인을 비롯한 초보자들에게 가르침으로써 규도에 대한 효과적이고 광범위한 홍보와 보급이 가능하였을 터이다.
그에 비해서, 통일된 사법이 존재하지 않는 우리 활판의 발전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일단 활판의 정당한 권위와 응집력이 생기지 않고, 중급자 이상만 되면 다양한 사법 속에서 혼란을 느끼며, 대개는 그냥, 과녁 좀 잘 맞추는 사람을 따라 나름의 사법을 찾아 정착하게 된다. 물론 위에서 잠시 짚었듯, 대궁에서 나름의 교재를 편찬하고 강사와 심판을 양성하는 과정도 있긴 하다. 하지만 거기서 전하는 사법이 우리 고유의 활쏘기 전통을 거의 계승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권위있는 사법 문헌-조선의 궁술, 정사론, 사예결해 등-을 웬만큼 공부해 본 궁사라면 다 알고 있다. 그러한 관행적인 사법이, 유구한 역사를 통해 최상으로 정련된 우리 활쏘기의 정수를 전혀 반영하거나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오직 145미터 과녁만을 잘 맞추기 위해, 양궁 사법을 적당히 섞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활쏘기의 ‘정수(精髓)’라는 말을 했는데, 필자가 사법 문헌과 몸으로 공부해 온 바에 따르면 그건 적어도 네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활과 사람의 조화로운 힘을 최대로 활용하는-활쏘기다. 둘째, 아무리 많이 쏴도 몸이 상하지 않는-오히려 건강에 도움이 되는-활쏘기다. 셋째, 남이 보기에-또한 궁사 스스로 느끼기에도-매우 힘차고 시원스런 활쏘기다. 네째, 상황에 따라-단거리든 장거리든, 땅에서든 말 위에서든-궁체의 변화가 거의 없이 쏠 수 있는 활쏘기다. 과녁은 잘 맞출 수 있냐고? 과녁 맞추기는 모든 활쏘기의 기본 전제다. 그리고 그건 무엇보다 사법보다는 궁사의 자질과 노력 정도에 달려 있다. (참고로, 문헌 기록에는 맞추기의 달인이었던 옛 궁사들의 이름이 즐비하다. 심지어 200발 200중을 했던 한 무관의 이야기도 나온다. 그들이 구사했던 건 문헌에서 말하는 전통 사법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이와 같은 우리 활쏘기의 정수를 담은 사법이 바로 ‘별절’(앞손 수직 고자채기와 뒷손 엉덩이까지 뿌리기) 궁체를 기반으로 한 철전 사법이다. 필자가 속해 있는 ‘조선철전사법연구회’에서는 이정우 접장의 각고의 노력-치밀한 문헌 연구와 자기 실험-을 바탕으로 이 철전 사법을 복원하여 약 4년 전에 국궁판에 공개했다. 하지만 활판의 여론 주도층 인사들 대다수는 아예 관심이 없어서 들어보지도 못했거나 보아도 별 반응이 없고, 보통은 무시와 비난으로 끝난다. 특히 사법의 핵심인 수직 고자채기[별撇]에 관해서는 활병이다, 중국사법이다, 19세기 이후 사라졌다, 창작사법이다, 심지어 일부 몰상식한 활꾼들은 개구리(?) 사법이다 등등 온갖 비아냥까지 이어졌다. 그리고는 늘 그래왔듯 저마다 제 갈 길을 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지부진하고 답보 상태에 놓여 있던 우리 활판에, 최근 획기적인 영상 하나가 공개되었다. 한국 영상자료원이 캐나다로부터 입수하여 공개한 1930년대 초의 활쏘기 동영상인데(인터넷 국궁신문에 23.2.24일자 기사로 떠 있고, 활쏘는 영상만을 발췌하여 필자가 유투브에도 올려두었음 https://www.youtube.com/watch?v=HREnoCM4gCA), 우리 활쏘기의 최고 권위서 가운데 가장 마지막에 편찬된 <조선의 궁술>(1929)이 나온 지 얼마 안 된 시기에 서울 황학정에서 벌어진 편사 대회를 찍은 것으로서, 당대 최고의 궁사들이 시전하는 궁체를 살펴볼 수 있는 진귀한 영상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아니 어쩌면 당연하게도, 영상 속의 궁사들 대다수가 바로 <조선의 궁술>이 가장 좋은 사법이라 언급한 ‘줌손과 활장이 불거름으로 지는’ 바로 그 수직 고자채기를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한마디로, 지금까지 전통 사법 논쟁에서 가장 큰 쟁점 가운데 하나였던 (수직)고자채기[별절]의 존재 여부 논란에 종지부를 찍는, (나무아래님의 표현대로^^) ‘스모킹 건’이 나왔단 뜻이다. 이는 십여 년 전 우리 활판에서 고자채기 논란에 불을 당긴, '북관유적도첩'이 처음 공개되었을 때의 충격을 넘어서는 사건이다.
그 영상이 공개된 이상, 이제 전통 사법을 말하는 그 누구도 철전사법연구회가 수년 전부터 줄기차게 주장해 왔고 보여주었던 별절을 무시하거나 비난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던, 커다란 기본 동작의 존재 여부를 두고 벌어지는 비생산적인 논쟁이 아니라, 별절 동작을 바탕으로 나머지 디테일한 궁체들에 관한 생산적인 토론을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유감스럽게 위 동영상의 궁사들도 자세히 살펴보면, 사법 문헌들이 말하는 제대로 된 별절 궁체는 아니다. 이를테면 몸이 정면에서 많이 돌아가 있어 줌손이 정확히 불거름으로 내려오지는 않는다). 드디어 한국 고유의 전통 활쏘기를 계승하는 표준적인 사법에 관해 우리 활판 전체가 합의로 나갈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이 마련된 것이다.
그런데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한다.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우리 활판의 여러 지도자급 활꾼들 가운데 자존심과 이기심이 너무 강한 분들이 꽤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보통의 자존심과 이기심이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적어도 활을 쏘는 활꾼이라면, 한 사람의 무예인으로서 무장(武將)의 마인드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곧, 자신과 대의(大義) 앞에 정직해야 함을 가리킨다. 다른 스포츠 분야에 비하면 너무나 작디작은 우리 활판에서, 한 줌도 안 되는(?) 명예와 기득권을 내려놓지 못하고 대의와 진실을 외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리란 뜻이다. 예컨대 신사들-성인 입문자와 학생들 그리고 외국인들-에게 가르칠 표준적인 사법을 국궁계 전체 차원에서 논의하고 확정하게 되면, 일반 활꾼들은 몰라도 적어도 활터의 사범들은 그것을 먼저 배워야 하고 (반드시는 아니겠지만) 어쩌면 자신의 궁체를 바꿔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건 당연히 지금까지와 다른 시간과 수고를 들여야 하는 일이다. 곧, 우리 활판 전체의 발전-대중화와 세계화라는 ‘대의’-을 위해 자기를 얼마간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대궁 주최의 대회를 쫓아다니는 보통 활꾼들은 아무래도 시수 유지 때문에 본인의 기존 궁체를 쉽사리 포기하지 못할 것이다.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바이고, 그건 각자의 판단에 맡기면 된다. 하지만 앞으로 우리 활판에 들어와서 국궁을 진흥시켜 나갈 신사(후세)들을 위해 표준 사법을 보급하는 일선에 있는 사범들만은, 적어도 기득권을 내려놓고 대의를 위해 헌신해 주시기를 외람되나마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이상스럽게도 아직은 그 영상에 관해서 사법이나 궁체의 관점에서는, 알 만한 분들이 별로 말씀이 없다. 필요한 논의들이 활발히 이루어져서, 필자의 걱정이 그냥 기우로 끝나기를 바란다.)
필자 생각으로 우리 활쏘기가 앞으로 우리 후손들과 세계인들에게 제대로 알려지고 퍼져나가려면, 일본의 규도가 그랬듯이, 이 사법의 표준화는 필수이다. 국궁계에서 추진하는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 등재 시도도 여기서 먼저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표준 사법을 제정할 때는 확실한 문헌적(옛 사람들이 실제로 전하고 행한 것인가), 그리고 실증적(물리적으로도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활쏘기인가) 근거가 있어야만 한다. 수년 전부터 지금까지 계속 말해왔듯, 필자는 철전 사법이야말로 그 조건에 가장 부합하는 사법임을 거의 확신한다. 이제 누구도 예상치 못한 결정적 동영상이 공개된 마당에 활판의 여러 뜻있는 분들이 힘을 합쳐서, 철전사법연구회가 지금까지 밝히고 주장해 온 것들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서 함께 최선의 사법을 찾아 나갔으면 한다. 우리 활쏘기의 진정한 발전은 바로 거기서 시작될 것이라 믿는다.
첫댓글 윗글을 내일쯤 일반 밴드에도 올리려 합니다. 혹시 쓸 데 없이 문제가 될 만한 내용이 있을까요? 댓글 보신 분들은 그런 게 눈에 띄시면 알려 주세요~
뭐 문제될 만한 내용은 없는 것 같구요... 너무나 필요하고 좋은 말씀이라 생각은 하는데 활판에서 목에 힘좀 주고 사시는 분들이 그러한 '대의'에 관해 과연 관심이 있거나 솔직하실지는 의문입니다.
아마 그 양반들 대다수가 감투놀이(?) 또는 선생노릇 하는 맛에 취해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머리를 숙이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요. 진리와 진실(우리의 경우는 '사법')에 관하여, 정말 공자님처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식의 결기를 가진 분이 있다면 진짜 대인이요 무인일 테지요.
아무튼... 인터넷과 유투브를 좀 둘러보았는데, 온깍지 문파를 포함하여 그간 사법에 관해 떠들던 그 잘난 활꾼들이 이번에 공개된 1930년대 영상에 대해선 가타부타 아무런 말이 없네요. 정말 다들 꼬리 내린 강아지요, 땡감 씹은 아이들 꼴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기사 어차피 대인배들은 못되니 뭘 기대하겠습니까. 혹시라도, 회심하여 철전사법이 결국 옳았다고 커밍아웃(?) 하는 분이 있다면 꼭 알려주세요. 그런 대인과는 통성명이라도 하고 지내고 싶으니까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