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창원구씨 시조공은 구성길(仇成吉)이며, 구성길의 子는 구희(仇喜)이다
창원구씨 임오보 기준이다.
그러나 구성길의 일명은 구진(具鎭)이요
구희는 구족달(仇足達)이다.
2. 구진(고려사에는 具鎭으로 기록되어 있다)은 태봉국에서는 광평성 시중을 역임했고
고려에 들어와 나주도대행대시중을 역임한 것이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즉 구진은 궁예의 정권에서도 오늘날 국무총리를 역임했으며, 왕건 정권에서도
왕의 권한을 위임받아 나주권역을 통치하였다.
결론적으로 구진은 궁예, 왕건과 어떤 인척의 관계가 있을을 것으로 사뢰된다.
창원구씨 시조 구성길(=구진)은 새달사(세달사, 흥교사)와 어떤 관련성이 아마도
구성길이나 궁예은 같은 혈족 신라왕족의 후예로 보인다.
궁예가 세달사에 들어가게 되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즉 세달사는 구성길의 위대부터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증명된다.
또한 왕건과의 인척관계는 왕건의 5대조모 구치의(具置義)와 연관성이 있다.
왕씨가 송도에서 세력의 확장에는 구치의(예성강 영안촌의 부자집 딸로 기록되어 있음)의
집안과 연계되어 있고, 仇氏(具氏)는 신라왕족으로 신라 중앙정부와 연이 연결되어 있다.
3. 구씨의 사성(賜姓)는 서기940년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비는 仇足達로 되어 있고
서기943년 충주시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에는 具足達로 되어 있다.
고려사 내용을 참고하면 사성 시기는 서기940년 후반기에 이루진 것으로 사뢰된다
고로 구진(具鎭)의 관련 고려사의 기사에는 具字로 기록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려 후기 또는 조선초에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仇姓으로 복성(復姓)하였다.
타 성씨들도 조선으로 들어와 복성(復姓)을 한 가문들이 많이 있다.
구씨의 사성(賜姓)은 仇에서 具로는 서기 940년 하반기(구성길 공의 의안군 봉군은 서기 945년으로 당시에는 具字를 사용)
具에서 仇로 다시 복성은 조선초기
다시 仇에서 具로 사성은 서기 1791년으로 현재 具姓을 사용중이다.
참고적으로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에 성명(이름)을 여려개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름, 字, 號 등 예로 구성길=구진, 구희=구족달 등
4. 새달사(세달사)에서 흥교사로 개명된 시기는 고려의 개국시기와 비슷한 것으로 추정된다.
세달사는 궁예의 시대(서기918년)까지 사용한 寺名이고
서기919년 고려 수도 개경 시대부터 흥교사로 개명하여 사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흥교사는 고려 중앙정부와 계속했어 연결되어 寺勢가 확장되어 가는 데는 창원구씨와
연계되어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구성길 公이 서기945년에 의안군으로 봉군되었다.
세달사 시대와 흥교사 시대에 창원구씨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즉 기록으로 살펴보면 구족달은 불교문화 성장에 지대한 공이 있었다.
세달사는 인명에서 지명, 寺名으로 변경 발전되어 왔다.
서기600년 전후의 신라인 새달(塞達)이 있다. 새달은 아들이 7명이다.
새달의 형제는 토함, 사다함으로 경주 불굴사가 있는 山名이 토함산이고 불국사 입구에 구어란
지명도 있고, 사다함은 신라화랑의 풍월주이다.
새달(塞達)에서 한자의 기록으로 세달(世達)로 기록하게 되어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새달의 가족관계를 살펴보면 창원구씨 선대와 같이 신라왕족의 후예(后裔)이다.
세달사에서 흥교사로 이름이 변경되는 관련성의 인물은 구족달이다.
구족달의 역임 관직을 살펴 보면 원봉성대조, 흥문감경이다.
원봉성은 한림원으로 발전하는 관청이다. 흥문감도 문한의 관청으로 파악된다.
5. 구성길, 구희의 묘가 영월에 있는 이유는 아마도 위의 내용과 연관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창원구씨 임오보에 의하면 구성길, 구성길 부인, 구희, 구희 부인의 묘가 영월부 남십리
경태룡경좌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는 실전 상태이다.
혹시 세달사(흥교사) 주위에 묘를 안취했을까?
창원구씨 정사보(1797년 발행)에 따르면 구성길공과 배위의 묘는 상하분(上下墳)으로 기록되어
있으면 시조공 子 구희공과 배위의 묘는 시조공하 쌍분(雙墳)으로 기록되어 있다.
묘의 좌향(坐向)은 경태룡경좌(庚兌龍庚坐)이다
즉 기록에 따르면 묘는 총4기가 한곳에 안취되어 있다.
아래 기록에 따른 묘의 배치도이다.
▣ 구성길공 묘
▣ 구성길공 배위 묘
구희공 묘 ▣ ▣ 구희공 배위 묘
6. 창원구씨가 신라왕족으로 지방관으로 처음으로 구사(仇史) 公이 구사성제군사로 현
창원에 입군을 하게 되었으며 구성길 공은 서기945년에 의안군(현 창원)으로 봉군되었으면
묘는 영월에 있는 것으로 보아 세달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구성길 공의 묘 위치와 세달사(흥교사)의 위치와 인접한 것으로 사료된다.
7. 원경국사(?~1183년) 충희선사탑비가 왜 영월 흥교사에 있을까?
창원구씨와 어떤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여겨져 연구의 대상이 된다.
흥교사는 두곳에 존재한다.
경기도 개풍군 흥교면 흥교리 백화산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흥월리 태화산
☞ 흥교리, 흥월리의 지명에 흥 字는 구족달의 역임한 관직명 흥문감경의 흥 字에서
따온 것으로 판단된다.
대동금석명고에는 대안사 광자대사비는 개성(開城) 천마산에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현재 곡성 대안사(태안사)에도 광자대사비가 파손 된 상태로 세워져 있다.
천마산 정상에는 만경대가 있는 산이다.
8. 새달사(세달사), 흥교사와 관련한 자료(흥교분교 폐교)
흥교 명문
첫댓글 구족달공이 봉교서한 비문
서기940년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오진탑비
사찬검교흥문감경 원봉성대조 仇足達로 기록
서기943년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
사찬전수흥문감경사비은어대 具足達로 기록
서기950년 곡성 대안사 광자대사탑비(태안사 광자대사탑비)
사찬전수흥문감경사비은어대 具足達로 기록
위 3곳 지역과 창원구씨와 관련성에 대해서 검토도 필요한 것으로 사뢰 됩니다.
서기940년 하반기에 仇에서 具로 사성(賜姓)이 되었다.
창원구씨는 서기940년과 서기1791년에 각각 사성된 것이 기록으로 남아 있다.
구성길(仇成吉) 公에 대한 고찰
1. 구성길 공의 일명은 구진(仇鎭)이고
2. 구진(仇鎭) 公은 태봉국에서 광평성 시중(侍中, 현재 국무총리)을 역임 했고,
3. 고려에 들어와 서기 918년에 나주도대행대(羅州道大行臺)의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어 나주권역을 통치했으며,
4. 서기 936년에 후백제가 고려에 멸망되고 구진(仇鎭) 公은 서경유수관 시중(侍中)으로 임명되었으며,
5. 서기 945년에 구진(具鎭) 公은 서경유수관 시중으로 재임중에 왕규의 반란을 평정한 功으로
6. 내의성(內議省)의 내의령(內議令)으로 임명과 동시에
7. 의안군(義安君) 봉군과 의안군(義安郡)을 식읍으로 하사 받았다.
8. 고려시대에 구성(仇姓)에서 구성(具姓)으로 사성(賜姓)은 서기 940년 하반기에 이루어졌다.
9. 그러나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다시 대부분 구씨(具氏)들이 구씨(仇氏)로 복성(復姓)을 했으며,
10. 다시 조선시대에 서기 1791년 구씨(仇氏)에서 구씨(具氏)로 대부분 성(姓)을 고쳐 사용했다.
11. 서기 940년에 사성(賜姓)을 받은 인물은 구족달 公이고
12. 서기 1791년에 사성(賜姓)을 받은 인물은 구시창, 구정열 公이다.
관청과 관직의 설명
1. 고려 초 3성은 광평성, 내의성, 내봉성이다.
3성에서는 정책을 입안, 심의, 집행하는 기관이다.
이 기관들은 서기 930년부터 설치하여 서기 982년까지 존속하였다.
2. 광평성 시중(정1품)은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하고, 내의성의 내의령(종1품)과 내봉성의 내봉령(종1품)은 부총리에 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