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서비 보아라
민구식
태백산 아래 광산에 근무할 때였다. 편지가 왔다. 이순(耳順)넘어 쪽진 머리, 숱도 얼마 남지 않은 키 작은 엄니가 보낸 답장이었다. 막내아들의 편지를 무척이나 기다리셨기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꼭 편지를 보냈다. ‘요세비, 보아라. 네 편지 받고 기뻤다. 객지에서 고생이 많을 텐데 잘 있다니 하늘에 감사 한다.’ 로 시작하는 편지는 매 번 똑 같은 내용이었고 답장을 기다리는 내 마음도 늘 같았다.
멀리 읍내에서 정오를 알리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면 엄니는 들에서 일하다 말고 달려와 편지지와 연필을 준비하고 마루 끝에 앉아 동구 밖을 바라보며 기다리셨다. 빨간 가방 자전거 앞에 걸치고 삐걱거리며 동구 밖 느티나무 아래로 따르릉 소리 들리면 얼른 샘으로 가서 시원한 물에 담가 놓은 막걸리를 한 사발 따르고 쟁반 위에 김치를 얹어놓고 기다리실 분이다.
김씨 우체부는 ‘아! 덥다’ 하고 마루로 올라오고, 엄니는 얼른 막걸리 한 대접을 권한다. 시원하게 마시고는 내 편지를 꺼내면 엄니는 봉투를 찢는 손을 따라 눈을 반짝이며 초조하게 기다릴 것이다. 우체부의 걸걸한 목소리가 촌 집 마당을 채우면 강아지와 병아리들이 봉당 아래로 모이고, 암소의 커다란 눈망울도 마루 끝을 바라본다. 여름 한 낮의 고요가 슬며시 밀려난다.
'어머니 전 상서' 로 시작하는 편지는 우체부는 안 보고도 다 읽을 것이고 가끔은 없는 말도 만들어 옛날 이야기책 읽듯이 들려준다. 물론 편지는 읽기 좋게 운율을 잘 섞어 썼다. 다 읽고 나면 엄니는 편지지와 연필을 우체부에게 건넨다. 우체부는 마루 끝에 걸터앉아 반쯤 엎드려 ‘빨리 부르슈’ 하면 기다리라고 하고 부엌으로 달려가 막걸리 한 사발을 또 가져와 상납을 한다. 그래야 독촉을 안 하고 차근히 받아 적어 줄 테니까.
헛기침 한번 하고 엄니가 말을 시작한다. 소가 새끼를 낳았다고 하면 우체부는 그 새끼가 암놈인지 수놈인지 잘 크는지, 소 값이 얼마를 한다는 둥 덧붙여 적어준다.
니가 보내준 고사리 말린 것은 하고 운을 떼면 우체부는 고추 가루 넣어서 잘 무쳐 먹었다고 문말(文末)을 장식해 줄 것인데, 고사리 무침에 고추 가루 넣는다는 말을 보고 어디까지가 엄니의 말이고 어디서부터가 우체부의 이야기 인지 다 알아서 웃음이 난다. 어제는 용사대 밭에 깨를 심었고, 가뭄이 심해서 걱정이고, 니가 좋아하는 호박도 많이 심었으니 갈에는 꼭 오거라 하는 이야기와 시집간 누이네 근황과 이웃집 이야기 몇 개 넣고, 바둑이가 밥을 안 먹는다. 염소가 텃밭의 푸성귀를 다 뜯어 먹었다는 둥, 닭들과 소와 돼지 이야기를 두루 섞어 두어 장을 채운다. 그러면 우체부는 자기 맘대로 밥 잘 챙겨먹고 몸 건강하고 사람들에게 겸손하고 등등의 마무리를 하고는 방금 쓴 편지를 큰 소리로 읽어줄 것이다.
‘요세비 보아라’ 로 시작하여 구성지게 읽는 우체부의 편지는 수정이 불가능하지만 어찌나 그럴듯하게 읽는지 엄니는 만족해하시며 몸빼 주머니에서 십 원짜리 지폐를 꺼내 쥐어 주겠지. 당시 편지 한 통 값은 7원 했으니 담에 3원을 거슬러 주던지, 아니면 시치미 뚝 떼고 막걸리 값으로 보태던지 할 것이다. 막걸리를 마저 마시고 따르릉 거리며 빨간 자전거가 떠나면 엄니는 하늘을 한번 올려다보고 만족해서 바둑이를 데리고 다시 들로 나가실 것이다.
그렇게 우체부의 대필이 몇 해를 넘기고는 오랫동안 답장이 안 왔다. 우체부가 바뀐 것이다. 나도 편지를 보내는 것이 부담이 되었다. 내 편지를 들고 이장 집이나 이웃 학생들을 찾아가 읽어 주기를 부탁하곤 했었을 것인데 차마 대필을 요구 하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하늘이 빠꼼 보이는 산 속 광산에서 외롭게 직장생활을 하던 때라 엄니의 편지는 내게도 큰 낙이었다.
엄니가 나에 대한 지극한 애정을 가지시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삼대독자인 아버지에게 시집와서 줄줄이 아들을 낳았는데 모두 가난과 질병으로 다섯이나 잃었다. 형과 18살 차이니 죽지 않고 살아난 나는 귀한 막내였다.
그 즈음 동네에 전화가 들어왔다. 마을회관에 한 대 뿐인 전화를 한낮에 하려면 모두 들에 일하러 나가고 없으니 밤이나 새벽에 해야 한다. 나도 산 아래 우체국까지 십리를 내려가야 하기 때문에 엄니 목소리 한번 듣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쉬는 날이면 꼭 산을 내려갔다. 창구에 쪽지를 디밀어 신청하면 교환원이 이 도시와 저 도시, 읍, 면을 거쳐 한참을 기다려 연결이 되었다
“예기 강원도래유! 거기 도두물이지요?”
소리소리 지르며 전화를 바꾸면
“이장님이신 가요? 가느실 할머니 좀 바꿔 주세요. 쪼매 있다 다시 전화 할께유.”
그러면 마을 회관에서 확성기로 안내 방송이 나간다. ‘가느실 할무이, 강원도 막내아들한테 전화 왔는디유, 쪼매 있다가 다시 한대유, 얼릉 말 회관으로 오셔유.’ 들에서 일하던 엄니는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마을회관으로 달려가 전화가 올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한참 만에 연결이 되면 엄니는 반가운 목소리로 ‘요세비니?’ 하시는데 목소리가 떨렸다. 지난번에 니가 보낸 산나물 잘 받았다. 아부지가 좋아 하시더라는 말끝에
“아부지 생신 때는 오냐?”
“강원도 색시 하나 데리고 온나.”
엄니는 이장네 아들이 장가를 갔다는 말을 덧붙여 은근히 장가가라는 압력이었다. 어린 나는 엄니의 그 말은 흘려듣곤 했다. 그 외에는 늘 하는 안부 말이지만 그렇게 통화를 한 날은 엄니가 해 준 밥을 몇 끼 먹은 듯 든든했다. 몇 년 후에 내 고향집에도 전화가 들어왔다.
엄니는 내게 전화를 하시고는 요세비니? 하고는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얼른 끊으셨다. 통화료가 많이 나올까 봐 얼른 끊으신 것이다. 그러면 내가 다시 전화를 하는데 그때는 느긋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으셨다. 긴 말 뒤에 갑자기
“얘! 전화세 마니 나온다, 끊자!”
벌써 50년이나 지난 이야기이다. 그 때 전화를 더 자주 못한 것이 지금까지 마음에 걸린다. 엄니가 계신 그곳에도 전화가 있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