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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역사스폐셜 12회 '미륵사는 무왕의 승부수였다 ' (1999.01.30.)
13부 : 미륵사는 무왕의 승부수였다
미륵사는 무왕의 승부수였다
방송일: 19990130 조회수 : 3055번 읽음
동영상 : 줄거리:
역사스페셜 제13회 99년 1월 30일(토) 방송
[미륵사는 무왕의 승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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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 오디오
-------------------------------------------------------------프롤로그 <미륵사를 둘러싼 전설>
#. 석양 무렵의 미륵사탑 실루엣
전라북도 익산엔 큰 절이 하나 있었다. 이 절을 둘러싸고 몇 가지 기록이 남아있지만
이 절이 왜 사라졌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단지 탑이 하나 있을 뿐이다.
#. C.G / 용이 탑을 둘러싸고
이곳엔 용으로 변한 미륵을 맞는 사찰이 있었고, 그 사찰은 세상에서 가장 컸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그 사찰의 이름은 미륵사였고, 사찰을 지은 사람은 무왕이다.
타이틀 '미륵사는 무왕의 승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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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1
#. 미륵사탑
-(미륵사탑 옆에서 걸어나온다)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미륵사지에는 탑이 하나 있습니다.
-( 탑을 가리키며 )
바로 이 탑인데요.
오래전부터 황량한 절터를 지키고 있는 유일한 탑입니다.
이 탑을 본 사람들은 우선 규모에 놀랍니다. 높이가 14미터가 넘고, 제 키의 여덟 배가 넘습니다.
모양도 독특하지요.
형태는 이렇게 부서져서 반밖에 남아있지 않지만 이 탑은 돌로 만든 최초의 탑이자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
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 탑이 서있는 미륵사에 대해선 전설처럼 전해오는 이야기와 믿기 어려운 옛 기록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미륵사지가 발굴되면서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백제의 신비가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역사스페셜에서는 미륵사에 숨어있는 백제의 비밀을 풀어보고자 합니다.
미륵사가 어떤 절인지 밝힐 수 있는 최초의 단서이자, 가장 중요한 단서는 바로 이 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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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1 <미륵사 석탑의 비밀>
#. 항공촬영 / 미륵사탑으로 줌인 25"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에 위치하고 있는 미륵사.
오래 전부터 이 터를 지키고 있는 거대한 탑이 하나 있다.
#. 기단에서 탑 틸업 10"
규모는 물론이고 독특한 생김새까지 일반석탑과는 전혀 다른 탑이다.
#. 서탑 크레인 7"
반쯤 부서져서 6층만 남아있는 탑.
#. 옥개석 팬 14"
탑 구석구석마다 배어있는 오랜 세월의 흔적.
이 탑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이자, 가장 큰 석탑으로 알려져있다.
#. 1층 중앙문으로 줌인 10"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일반석탑에서는 볼 수 없는 중앙의 문이다.
탑의 내부로 들어갈 수 있는 이러한 문은 사면에 하나씩 모두 네 개가 있다.
#. 안으로 들어가고 10"
통로를 따라서 탑 안으로 들어가면 커다란 기둥을 만날 수 있다.
#. 중앙에 기둥 30"
석탑 안에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의 중앙에 기둥이 서있다.
십자 통로 중앙에 버티고 선 기둥은 목조건물에서나 볼 수 있는 기둥이다.
이 기둥뿐만이 아니고.
#. 서탑 풀샷 4"
자세히 보면 이 돌탑이 목조건물을 빼어닮은 것을 알 수 있다.
#. 이중기단 위에 초석 8"
기단 위에 초석을 놓고, 그 초석 위에 기둥을 세운 이중기단.
#. 배흘림 기둥 12"
밑부분으로 갈수록 굵어지는 배흘림기둥. 목조건물의 기둥에 해당한다.
#. 삼단 처마 8"
삼단의 받침돌이 지붕돌을 받치고 있는 형태. 목조건물의 지붕 밑부분을 연상시킨다.
#. 추녀 끝
옥개석의 추녀 끝이 살짝 올라간 반전.
이러한 특징 때문에 이 탑은 목탑에서 석탑으로 전환한 최초의 탑으로 알려져있다.
#. 옥개석 팬 9"
목탑형태를 띤 이 탑은 현재 남은 모습만으로도 국내 최대의 탑.
#. 탑 뒤에서 돌조각들로 20"
그렇다면 이 탑의 본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이 탑을 두고 7층설과 9층설이 분분했다.
그런데 돌탑의 일부였던 노반석이 발견되면서 탑의 규모가 정확히 드러났다.
#. 윤덕향 인터뷰 "노반석으로 복원해보니 9층과 맞아떨어졌다."
#. C.G / 실사서탑이 9층으로 복원 16"
미륵사탑은 원래 9층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9층이 됐을 때 높이가 28미터, 아파트 10층 높이에 해당한다.
이렇게 거대한 석탑을 어떻게 돌로 만들 수 있었을까.
#. 탑 줄로 재기 17"
미륵사탑은 단단한 재질의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탑을 쌓기위해서 우선 화강암을 수백장 자르고 다듬어야했을 것이다.
#. 기둥다듬기 19"
익산에 있는 석재공장에서 탑의 기둥 한 개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이런 기둥 한 개를 자르고 다듬는데도 대엿새는 족히 걸린다.
#. 돌 세우기 재연 20"
이렇게 공들여 다듬은 기둥은 탑을 쌓는 곳까지 일일이 사람의 힘으로 옮겨서, 흙을 경사지게 깐 후에 나무를
대고 세워야 했다.
(현장음)
기둥 하나를 다듬고 세우는데도 이렇게 많은 노력이 필요한데.
당시 기술로 어떻게 탑을 9층까지 쌓아올릴 수 있었을까.
#. 석공 인터뷰 "이 돌 위에 또 돌을 쌓으려면 15도 각도로 흙을 쌓아야 한다..그렇게 미륵사지가 완성된 것으로
안다.."
#. 서탑에서 동탑으로 줌아웃 15"
이렇게 힘들게 쌓아올린 탑은 하나만이 아니었다.
남아있는 미륵사탑과 일직선 상에 또 하나의 탑터가 발견된다.
#. 동탑 틸업 13"
탑터와 기단, 유물들을 통해서 이 탑 역시 돌로 만들어졌고, 크기와 형태는 남아있던 미륵사탑과 같다는 것이
밝혀졌다.
#. 동탑걸려서 서탑으로 9"
이 동탑은 남아있는 석탑을 근거로 해서 1993년에 복원했다.
#. 풍경
#. 동탑으로 줌인 10"
복원 당시 인간문화재급 석수장들이 참여해서 첨단기술과 현대장비로 공사를 했는데.
#. 줌인상태에서 스틸 8"
설계기간 8개월, 공사기간 26개월이 걸렸고 석재가 천삼백톤, 인원이 이만 사천명이나 동원된 대규모 역사
였다.
#. C.G / 복원된 서탑과 동탑 20"
고대 건축기술의 결정체 미륵사탑. 미륵사에는 이러한 거대한 석탑이 두 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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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2
#. 복원된 두 개의 석탑
(MC 탑 사이에서 걸어나온다.)
미륵사탑은 지금의 기술로도 만들기 힘들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정교하게 만들어진 석탑이 한 개도 아니고, 두 개가 있었다면 미륵사가 대단한 절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완전한 절의 모습이 어떠했까요. 삼국유사에 이런 미륵사의 창건설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하루밤만에 못을 메우고 미륵삼존과 회전, 탑,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
하루밤만에 거대한 못을 메웠다는 것은 좀 과장된 이야기겠지만
이 설화는 미륵사에 대해서 몇가지 단서를 알려줍니다.
연못 위에 절을 세웠다는 것과, 절 안에 미륵삼존을 모신 금당과 탑과 복도를 각각 세 곳에 세웠다는 것입니다.
이 전설은 사실일까요.
창건 당시 미륵사는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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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2 <미륵사는 동양최대 규모의 절이었다> 6'10"
#. 항공촬영/동탑과 서탑 사이 13"
미륵사에 있던 탑은 두 개만이 아니었다. 두 탑 사이에 또 하나의 탑의 흔적이 나타난다.
#. 목탑지 크레인 5"
중간에 있던 탑터는 양쪽의 석탑터보다 2배 정도 크다.
#. 목탑지 줌아웃에서 스틸 24"
탑의 높이는 기단의 길이를 통해서 추정할 수 있다.기단 한 변은 19.2미터. 대각선은 22미터.
탑의 높이는 통상 기단 대각선의 두 배.
몸체 위에 있는 상륜부까지 합치면 전체 높이는 50-60미터로 추정된다.
#. 목탑의 기단 따라가고 6"
규모가 이렇게 거대하다면 탑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 목탑지에서 윤덕향
"이탑을 조사할 때 하층기단에서 수막새기와와 숯과 불탄흙이 많이 나와..
이 탑이 석탑이라면 기와나 불탄흙, 숯이 나올 리가 없다. 안쪽에 묘하게 생긴 석재가 깊이 박혀있었다.
그런 것들이 석탑이라면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목탑이라는 것을 입증.."
#. 슬라이드 판축사진 18"
이 목탑이 서있는 지반을 발굴한 결과 놀라운 점이 발견됐다.
마사토와 점질토를 떡판처럼 교대로 쌓은 판축의 흔적이 나타난 것이다.
#. 슬라이드 돌사진 18"
가장 아랫부분은 돌을 깔았는데.
이것은 지반 밑에 있는 물이 쉽게 빠져나갈 수 있게 한 배려다.
실제 조사결과 미륵사터는 삼국유사의 기록대로 거대한 연못이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 C.G/판축과정 18"
이러한 연못을 흙으로 메우고 그 땅을 다시 4미터 이상 파고 들어가 돌을 깔고는 시루떡처럼 47단까지 다졌다.
#. 봉으로 다진 흔적(사진+C.G) 26"
그 뿐만 아니라 한단 한단마다 지름이 3-4센치인 나무막대로 일일이 흙을 다졌다.
기초공사부터 미륵사를 얼마나 치밀하게 지었는지 알 수 있다.
#. C.G/목탑복원. 세 개의 탑 서있고 26"
이렇게 치밀하게 다진 지반 위에 화려하고 웅장한 목탑을 세웠다.
이 목탑의 높이는 양쪽 석탑의 두 배. 미륵사 창건 당시엔 이러한 세 개의 탑이 거대한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다.
탑이 세 개가 있었다는 전설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 금당지 6"
판축은 탑 뒤의 건물터에서도 발견된다. 이곳은 금당이 있던 곳이었다.
#. 금당지에서 녹유 빠져나오고 20"
금당터에서는 녹색의 유약을 바른 기와가 다량 출토됐다.
이 녹유는 국내에서 발견된 최초의 것이다. 녹유기와는 서까래 끝에 붙어 서까래의 부식을 막고,
건물을 치장하는 기능도 했다.
#. C.G/녹유박히고 금당복원 10"
당시 금당은 녹색의 서까래기와와 붉은 색의 기와가 화려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 C.G/ 세 개의 금당 실사에 박히고 8"
이러한 금당은 모두 세 개가 있었다. 가운데 금당은 2층이고, 양쪽 금당의 2배 크기다.
#. 치미 10"
이 치미는 미륵사에서 가장 큰 건물터인 강당터에서 출토됐다.
치미는 사찰이나 궁궐 지붕의 용마루 끝을 장식하는 특수기와다.
#. 치미 대강당에 박히고 12"
이러한 치미가 장식되어 있는 강당은 400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넓었다.
#. 승방터+가람배치도 23"
강당터를 통해 미륵사에 상당히 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곳 승방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승방 하나는 열 사람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다. 이러한 승방은 총 서른 두 개가 있었다..
-배치도 승방은 대강당의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에서 발견된다.
#. C.G/ 실사에 미륵사복원 22"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을 갖춘 삼원 양식.
이런 구조는 동양 어디에서도 유래를 찾아볼 수 없다. 건물지만 5만여평. 신라의 최대 사찰 황룡사보다 2배
가까이 넓다. 그렇다면 창건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렸던 것일까.
#. 황수영 인터뷰 "삼국유사에 보이는 수기에 걸려서 공사했다.
수기라는 기간은 1기를 12년으로 잡으니까 36년이다."
#. '수기'기록 13"
수는 3을, 기는 12를 의미한다. 이를 통해 창건기간은 36년으로 추정할 수 있다.
#. C.G / 미륵사복원 20"
거대한 연못을 메워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을 세운 화려하고 웅장한 사찰. 미륵사를 둘러싼 전설은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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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3
#. 복원된 미륵사
(미륵사를 향해 있다가 앞을 본다)
이렇게 미륵사는 우리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화려하고 거대한 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 그리고 왜 이런 절을 세웠는지 알고 계십니까.
삼국유사엔 백제의 제 30대 무왕이 미륵사를 세웠다고 기록되어있습니다.
무왕에 대해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 조명이 어두워지면 소나무에 걸린 달 하늘로 바뀌고
'서동요'가 들려온다. (MC 서동요에 귀를 기울이다가)
이 노래를 알고 계십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서동욥니다. 이 서동요의 주인공이, 바로 무왕입니다.
서동요의 본래 내용은
"선화공주는 밤마다 몰래 서동을 품에 안고 잔다"ㅂ니다.
지금 들어도 가사가 좀 고약하지요.
이 노래는 아이들의 입을 통해 경주에 퍼졌고, 마침내 우리 고대사에서 가장 극적인 로맨스라고 할만한 서동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서동은 마를 캐며 살았다고 해서 어릴 때 부쳐진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무왕은 마를 캐던 미천한 신분으로 왕이
되고, 또 그러한 신분으로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을 한 사람이란 겁니다.
미륵사를 세운 신비에 쌓인 인물, 무왕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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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3 <미륵사 창건의 주인공, 무왕은 누구인가?>
#. <삼국유사> 글자 17"
"제 30대 무왕의 이름은 장이다.
어머니는 서울 남쪽의 못가에 집을 짓고 살다가 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장을 낳았다.
장은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을 삼았기 때문에 어렸을 때의 이름은 서동이었다."
#. 도로 트랙킹 5"
마를 캐던 아이, 서동은 왕궁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 <동국여지승람>부터 PD, 김주성 모습
<동국여지승람>엔
'무왕의 어머니가 마룡지라는 못가에 집을 짓고 살았고 이 마룡지는 오금사 남쪽 100보에 위치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오금산성에서 팬 / 부감에서 마룡지로 줌인 16"
그런데 익산에는 오금산성이 있고 이 오금산성 밑에는 마룡지라는 이름의 연못이 있다.
#. 마룡지 팬 10"
마룡지 근처의 숲에는 서동의 어머니가 살았다고 전해지는 집터가 있다.
#. 숲으로 올라가고 10"
-김삼룡 인터뷰 "우리가 서있는 이곳이 오금사 남쪽 백여보의 서동모의 축실지가 있다고 하는 그 곳이다.
지표조사를 해보니 이 초석도 그 때 초석이고 여기에는 백제 때 기와조각이 많이 출토된다.."
#. 대나무 숲 팬 15"
이러한 유적들을 통해서 서동이 익산에서 태어난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그런데 익산 출신의 가난한 서동이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노종국 교수 인터뷰
"과부의 아들로 태어나고 서동이라는 가난한 아이로 생활했다는 점, 그리고 왕이 된 것은 기본적으로 왕족이다.
왕족이지만 가난한 생활을 하는 왕족이었다면 몰락한 왕족이다."
#. 오금산에서 평원 부감 10"
몰락왕족이었다고 해도, 익산에 사는 몰락왕족이 왕이 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 부여 부감 11"
무왕이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단서는 4대 선왕이었던 '성왕'을 통해 찾을 수 있다.
왕권강화와 백제중흥을 위해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한 성왕은,
#. 부여시가지+나무 10"
당시의 지배세력을 재편하고 국가체제를 정비하는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한다.
#. 산 트랙킹 5"
#. 백제, 신라 접경지대 팬 15"
부여로 옮긴 후 성왕은 신라와 연합해서 한강유역을 되찾지만, 바로 신라에게 한강유역을 빼앗기고 만다.
신라의 배반에 분개한 성왕은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라정벌에 나선다.
#. 관산성으로 줌인 10"
그것이 이른바 백제와 신라간에
가장 치열했던 전쟁 중에 하나인 관산성 전투.
#. 숲길 달리다가 물로 툭 떨어지고 7"
그러나 이 전투에서 성왕은 목숨을 잃는다.
-유원재 교수 인터뷰
"이곳에서 좌평 4명이 죽고 백제병사 2만 9천 명이 구천에서 죽었다.
필마무반자라, 당시 말과 사람이 살아서 돌아간 자가 없었다는 기록."
#. 시냇물 10"
왕의 죽음으로 왕권은 급속히 약화됐고 귀족들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잡는다.
#. 대성8족 기록/ C.G로 8족 발생 15"
당시의 실세귀족은 사비천도 이후 형성된 대성8족.
이들이 정국운영의 주도권을 잡은 사례를 기록에서 발견할 수 있다.
관산성 전투를 주도했던 성왕의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
#. 구름에 가린 해 5"
귀족들에게 심하게 추궁을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 이미지+<일본서기> 기록 13"
"앞날에 벌어질 일들을 고려하지 않아서 훗날에 큰 환란이 있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
#. 이미지+일본서기 기록 13"
"만약에 원로들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이런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십시오."
#. 부여 왕릉 18"
재위기간 내내 귀족들의 기세에 눌렸던 위덕왕이 죽은 후, 혜왕과 법왕이 그 뒤를 잇지만 둘 다 2년만에 단명
했고, 왕권은 더욱 약해지게 된다.
-노종국 교수 인터뷰
"그 당시 법왕을 제거한 실권귀족들은
자기들의 권력과 자기들 중심의 정치운영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자기들이 다루기 쉬운, 세력기반이 없는 사람을
왕으로 삼는 것이 제일 좋았다고 생각.. 일종의 정략적인 생각이다."
#. '서동요비' 30" 그가 바로 익산에 사는 몰락왕족 서동이었던 것이다.
관산성전투 이후 백제와 신라는 끊임없이 싸우는 적대관계였다.
그렇다면 우리 고대사의 가장 극적인 로맨스,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 전쟁 이미지 10"
그러나 적대국 왕실간에 혼인은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백제와 신라가 전쟁을 벌일 때 양국 왕실간에 결혼한 예가 있다.
#. 전쟁이미지+ <삼국사기> 기록 10"
"신라가 동북변경을 빼앗았는데, 세 달 후 성왕이 자신의 딸을 진평왕의 소비로 보냈다."
#. 삼국사기 기록 10"
"동성왕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혼인을 요청하니, 신라왕이 이찬 비지의 딸을 시집보냈다."
-노종국 인터뷰
"마침 백제 무왕은 왕실의 권위도 높이고 정치적인 기반도 확보하기 위해 결혼을 요청하자 신라 진평왕 입당
에서도 백제와의 긴장을 완화시키는 방법으로 혼인맺어.. 양자의 이해관계가 어느정도 합치되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국제결혼이 가능했다."
#. 궁남지 15"
무왕이 신라의 왕실과 혼인을 추진했던 것은, 안으로는 귀족세력을 억누르고, 밖으로는 일시적이나마 신라와의
대립을 풀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 서동비에 달밤 DISS 17"
무왕과 선화공주의 결혼을 가능하게 했던 전설의 노래.
서동요 속에는 당시 백제와 신라의 팽팽한 줄다리기를 늦추는 정략적인 화해가 담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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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4
#. 달밤
무왕은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되기까지, 극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입니다.
특히 선화공주와의 결혼은 뛰어난 수완가이자 전략가였던 무왕의 면모를 알려줍니다.
그런데 기록에서도 이런 무왕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풍채가 훌륭하고 뜻이 호방하고 기상이 걸출하였다."
삼국사기는 무왕에 대해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후대의 사가들도 그 기질에 걸맞게 '무왕'이라고 붙였습니다.
#. 미륵사 나타나고
호방하고 걸출한 영웅이었던 무왕은 거대한 절을 짓습니다.
규모 뿐만이 아니라 절의 모습도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고 했습니다.
미륵사!
무왕은 왜 이렇게 큰 절을 세웠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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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4 <3금당의 비밀>
#. 금당터 5"
무왕이 거대사찰을 창건한 단서는 금당에서 찾을 수 있다.
#. 금당터 타이트+초석 9"
이 금당터엔 다른 건물에선 볼 수 없는 유난히 키가 큰 초석들이 남아있다.
-윤덕향 인터뷰
"다른 건물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높은 주춧돌을 두었다. 높이가 90센치 정도. 기둥 아래부분에 홈을 파서
마루청이 여기에 깔렸다. 초석의 높이마큼 여기까지 지하공간을 구성한다."
#. 금당터에서 개구부로 팬 9"
금당터 한쪽엔 밖을 향해 터진 곳이 있다. 이 개구부는 출입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 C.G/ 지하공간 13"
초석과 개구부를 통해
당시 지하공간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다. 왜 이런 지하공간을 만들었던 것일까.
#. 개구부를 빠져나가는 조용헌
-조용헌 인터뷰 "이쪽을 보시면 흙으로 덮여있지만 옛날에는 배수구가 있던 자리다. 배수구를 통해서 물이
저쪽으로 연결되어있었다."
#. 금당에서 길을 따라서 연못까지 17"
금당의 지하공간은 땅속의 배수로와 연결되고, 배수로는 절터 앞쪽에 있는 연못까지 이어진다.
이 배수로와 연못은, 지하공간과 특별한 관계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 감은사지 금당터 18"
미륵사 지하공간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단서는 경주에 있는 감은사지.
#. 지하공간 구조 10"
통일신라 때 창건된 감은사지 금당터에도 이러한 지하공간이 남아있다.
#. 개구부에서 줌아웃 9"
기록에 의하면 용으로 변한 문무왕이 와서 쉴 수 있도록 이런 공간을 만들었다고 한다.
#. 감은사 전경 6"
미륵사의 지하공간도 감은사의 지하공간과 비슷한 용도였을 것이다..
#. 미륵사지 금당터 11"
미륵사의 지하공간은 연못에 있는 용이, 배수로를 통해 금당까지 드나들 수 있도록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 금당터 달리 22"
이러한 지하공간은 세 곳의 금당에서 모두 발견된다.
금당은 미륵불상을 모신 신성한 공간이다.
왜 이런 금당에 용이 드나들 수 있는 지하공간을 만든 것인가.
#. '용수' 명문기와 10"
미륵사에서는 미륵과 용의 관계를 알려주는 유물이 발견됐다.'용수'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와다.
#. '용수' 글자 빠져나오고 9"
'용수'는 늪에 사는 용을 의미한다.
-조용헌 인터뷰
"용수와는 인도말 나가에서 온말이다. 나가는 큰 뱀을 상징한다. 이것을 한문으로 번역할 때 용으로 번역한다.
그래서 이 용수와라는 의미는 미륵사지가 용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된다는 증거다."
#. C.G / 복원된 금당 7"
미륵을 용의 화신으로 여겼기 때문에, 미륵불을 모신 금당에 용의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 C.G / 3개의 금당 5"
#. C.G / 미륵사 전체 복원모습 17"
하나의 사찰 안에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을 각각 세 곳에 세운 독특한 양식의 미륵사.
미륵사를 이렇게 세운 것은 미륵사상과 연관지을 수 있다.
-김삼룡 인터뷰
"3회 설법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한다고 미륵하생경에 밝히고 있다. 그것을 그대로 재현시킨 것이다."
#. C.G / 미륵사 전체모습
미륵사는 미륵이 내려와서 세 번의 설법을 하는 장소를 그대로 구현한 절이다.
미래부처인 미륵을 기다리는 간절한 염원이 미륵사의 이런 독특한 공간을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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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5
#. 미륵사
용의 화신인 미륵을 기다린 사찰.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것은 미륵과 관련이 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륵신앙은 미래부처인 미륵이 이 땅에 내려와서 사람들은 구원한다는 신앙으로
일종의 구세주, 메시아 신앙입니다.
미륵신앙에 의하면 미륵이 출연하는 땅을 다스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최고의 통치자 전륜성왕입니다.
여기에서 무왕이 미륵사를 세운 의도를 알 수 있습니다.
메시아가 오는 약속의 땅에 미륵사를 세워서 자신은 바로 그 땅을 다스리는 전륜성왕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
입니다.
#. 삼국지도 내려오고
왜 무왕은 전륜성왕을 되고자 했던 걸까요.
그 실마리는 당시 백제의 정세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지도에 영토 표시하면서)
전성기 때는 이렇게 넓었던 백제의 영토가 밀리고 밀려서 무왕이 즉위할 당시엔 이렇게 좁아집니다.
고구려에 이어 신라에 한강 유역을 빼앗기고, 가야 지역마저도 신라가 차지한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백제가 절박한 상황에 처하자,
무왕은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을 것입니다.
#. 지도가 옆으로 사라지면서 미륵사 나타나고
미륵사를 창건한 것은 그런 무왕의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무왕은 그러한 미륵사를 수도가 아닌 익산에 지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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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CR 5 <무왕은 왜 익산에 미륵사를 세웠나>
#. 쌍릉 트랙킹 8"
미륵사지 남쪽 석왕동에는 거대한 규모의 능이 있다. 지름 30미터, 높이 5미터의 이 능은,
#. 대왕릉 주위를 걸어가고 4"
대왕릉으로 불려지고 있다.
#. 소나무 길 끝에 소왕릉 9"
대왕릉에서 150미터 떨어진 곳에 대왕릉보다는 규모가 작은 소왕릉이 있다.
#. 마을 전경 8"
이곳 사람들은 이 두 개의 무덤을 무왕과 선화공주의 능으로 믿고 있다.
-김주성 인터뷰
"이 왕뫼마을은 옛부터, 이 무왕이 어릴 적에 자랄 때 마동이라고 했다. 어릴 적 이름, 마동을 따서 말통대왕
이란 이름이 붙여졌는데 동네 사람들은 말통대왕의 능이 있다고 해서 이 마을 이름을 왕뫼로 했다."
왕뫼마을에 있는 이 두 개의 무덤은 일반적으로 쌍릉으로 불린다.
#. 대왕릉에서 석실분 빠지고 20"
이 쌍릉의 내부는 판석형의 돌을 짜서 만든 석실고분 형태.
백제말기에 유행했던 형태로 특히 왕릉에서 많이 보이는 양식이다.
#. 목관모형 빠지고 6"
발굴당시 석실 안은 이미 도굴이 된 상태였고 이 나무널만이 유일하게 출토됐다.
#. 금고리 10"
나무널에는 관못과 호사스러운 연꽃 모양의 관고리가 달려있었다. 이런 관 장식은 왕릉에서만 발견된다.
#. 목관 팬 12"
쌍릉에서 발견되는 여러 유물들은 이 무덤이 7세기 백제말기의 왕릉이라는 것을 짐작케한다.
#. 목관 대왕릉으로 들어가고 8"
그렇다면 이 쌍릉의 주인공은 무왕과 선화공주일 가능성이 높다.
#. 쌍릉 부감. 줌아웃 14"
그렇다면 무왕에게 익산은 어떤 곳이었을까.
미륵사를 창건할 당시 백제의 정세를 통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당시 무왕에게 있어 최대현안은 신라공격이었다.
-유원재 인터뷰 "진흥왕이 성왕을 배반하면서 한강하류지역을 신라가 독차지. 한강 하류지역에서 잃어버렸던
백제의 영토를 무왕대에는 이 영토를 대신해서 신라가 차지하고 있었던 가야지역으로 영토를 확장시킴으로서
백제의 영토를 확장시키려는 의도가 숨어있는 것이 무왕의 대신라공격의 목적이었다"
#. 익산 부감 16"
백제 역사상 무왕만큼
신라를 집요하게 공격한 왕은 없었다. 무왕은 무려 12번이나 신라를 침공한다.
당시의 격전지를 살펴보면 익산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 지도 /격전지 표시 13"
격전지는 대부분 익산과 가까운 곳이었고, 가야지역으로 공격하기 위해서는 익산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
했다 .
#. 부감에서 미륵사지로 줌인 14"
익산은 공격지로서 가장 적합한 전초기지였던 것이다. 이러한 전초기지에 무왕은 백제의 국력을 결집시켜
미륵사을 창건했다.
#. 미륵사 타이트 7"
전초기지와 대사찰은 어떠한 관련이 있는 것일까. 익산과 미륵사의 관계를 풀 수 있는 흥미로운 유물이 출토
됐다.
#. 미륵사지에 중부 인장와 찍히고 5"
미륵사에서 '중부'라고 쓰여진 기와가 출토된 것이다.
#. 5부 표시 10"
당시 백제는 수도를 5부로 나누었다. '중부'는 이 5부의 하나를 뜻한다.
#. 왕궁평 헬기촬영 16"
미륵사에서 2키로 떨어진 왕궁평. 이곳에서도 수도의 행정구역을 뜻하는 전부, 하부 기와가 출토되었다.
#. 왕궁평 출토 인장와 12"
이러한 기와는 익산이 수도와 어떤 관계가 있다는 증거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기록은 발견되지 않는다.
#. 일본 교토시 부감 6"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기록이 일본에서 발견됐다.
#. 청련원 입구 11"
교토에 있는 청년원.
중국 천태종을 섬기는 사찰로 대대로 중국문물을 수입했던 유서깊은 곳이다.
#. 취재팀 교토의 청년원으로 들어가고 8"
이 청년원의 창고에서 문헌 한 권이 발견됐다.
#. 상자에서 책 꺼내고 합장 20"
중국 6조 때 편찬된 문헌인 관세음응험기. 마끼다 다이료 교수가 발견한 이 관세음응험기는 관세음신앙의
영적인 체험을 모아서 기록한 문헌이다.
그런데 이 문헌에서는 백제의 천도와 관련된 기록이 발견된다.
#. 마끼다 교수
"(천도했다는) 지모밀지는 지마마지가 잘못 기록된 것 같다."
#. 책에서 글자 발생 (백제 무광왕은 지모밀지로 천도했다.) 17"
여기서 무광왕은 무왕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무왕이 천도했다는 지모밀지는 어디인가.
#. 5층 석탑에서 줌아웃 11"
익산시 왕궁평의 옛이름은 지마마지다. 따라서 기록에 나오는 지모밀지는 지마마지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홍윤식 인터뷰
"관세음음험기는 관세음보살 신앙의 영험담을 모은 것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이 관세음응험기는 그렇지않다.
그 내용은 부여에서 익산으로 천도했다는 사실을 정확한 연대와 정확한 지명, 그리고 천도한 이후의 사건을
정확하게 적고 있다."
#. C.G / 책에서 시기 발생 9"
정관 13년은 서기 639년으로 무왕 40년에 해당한다.
#. 책에서 유물글자 발생 11"
탑 안에는 불사리와 채수정병, 금강반야경이 있었다고 기록되어있다.
#. 왕궁탑 줌아웃 11"
그런데 왕궁평에 있는 이 탑을 해체복원할 때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있는 유물이 그대로 출토됐다.
#. 사리함과 수정병 6"
1층 탑신 속에서 사리함과 채수정병,
#. 금강반야경 10"
금강반야경이 발견된 것이다. 이렇게 출토유물과 관세음응험기의 기록은 일치한다.
#. 왕궁탑 풀샷 6"
따라서 이 기록을 통해 익산에서 어느 정도까지 수도의 준비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성벽 달리 10"
그것을 뒷받침하는 유적들이 왕궁평 곳곳에서 발견된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이곳에 남아있는 성벽이다.
#. 성벽의 사진/부석 25"
석재를 사각형으로 반듯하게 다듬어서 쌓은 성벽, 이 성벽 양쪽에는 성벽을 보호하는 부석을 깔았다.
이런한 부석시설은 부여의 부소산성에서도 발견된다.
#. 성벽사진 팬 10"
따라서 이 성벽은 당시 중요한 건물을 둘러싸고 있던 담장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 왕궁 표시/가로, 세로 17"
5만 평의 대지를 직사각형 모양으로 둘러싸고 있는 성벽.
이 성벽은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설계한 성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 건축터 흔적 12"
그리고 성벽 안에서는 백제말기의 건물터가 여러 곳에서 발견된다.
#. 왕궁탑에서 석축흔적으로 팬 15"
탑 밑에서는 건물터를 평평하게 다지기 위한 백제말기의 석축도 나타난다.
이런 유적들을 통해 왕궁평의 공사는 백제말기에 최초로 시작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최맹식 소장 인터뷰
"백제말기 건물지와 석축 등이 가장 이른 시기의 유적이다. 유물로 봐도 많은 수막새, 인장와기와, 토기 등이
7세기 초반, 중반, 후반을 중심으로 유적이 확인된다. 통일신라 시대 유적으로는 사찰유적을 들 수 있다.
5층석탑은 약간 시기가 늦지만 금당지, 강당지 등 사찰유적은 후대유적이다."
#. 백제말기 건물터 표시 17"
지금까지 발견된 성벽과,
성벽 안에 나타나는 이러한 건물터들은 백제말기, 이곳에 왕궁과 관련된 건물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것을 뒷받침하는 유물이 계속 출토되고 있다.
#. 관궁사 기와 15"
그 중에 하나가 '관궁사'라고 쓰여진 기와다. 관궁사는 왕궁안에 있는 사찰이라는 뜻이다.
#. 중국 청자편/실물에 가서 박히고 19"
또한 중국산 청자 조각이 발견됐다. 이런 호사스러운 중국청자는 왕실이나 귀족들만 접할 수 있는 보물로,
이곳에 있었던 건물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한다.
#. 왕궁평 부감에서 대동지지 글자발생 16"
이런 익산에 대해 언급한 유일한 국내 문헌은
김정호의 대동지지다. 대동지지는 익산이 별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별도는 왕의 거처를 마련한 특별한 곳으로 때에 따라서 수도로 바뀔 수 있다.
이로서 익산은 최소한 별도로 운영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익산 부감 32"
왕궁을 비롯해서 익산은 고대국가가 수도를 경영하는데 필요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왕궁과 왕궁을 겹겹이 둘러싼 산성.
거대사찰과 왕릉이 있는 곳 왕도의 비밀을 간직한 익산.이곳은 1300년 전에 꿈꾼, 무왕의 새로운 세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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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6
#. 미륵사 실루엣으로
이처럼 익산에서 발견되는 여러 유적들과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백제에 또 하나의 수도가 준비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규모가 어느 정도고 또 어느 단계까지 진행되고 있었는지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발굴이
끝나봐야 풀릴 것입니다.
우리는 미륵사에 남아있던 석탑을 단서로 미륵사의 신비를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숨어있던 백제의 그림을
찾았습니다.
미륵사는 백제말기 걸출한 군주였던 무왕의 야심작이었고, 이 미륵사엔 힘을 잃어가는 나라를 일으키려는
무왕의 야망이 숨쉬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륵사야말로 무왕이 추진했던 '백제중흥'이란 프로젝트의 핵심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