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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천산북로’와 ‘초원로’의 길목인, 토크목(Tokmok)
* 수 천년간 수많은 유목민족의 각축장이었던 소그디아의 입구, 악베심
* 현장의 천축순례의 진정한 출발지, 소엽수성
* ‘안서사진(安西四鎭)’의 한 곳인, 당나라의 서역 요새 쇄엽성(碎葉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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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동의 요나라 유민이 서역에 세운 나라, 서요(西遼 Kara Kitai)의 망향곡
* 이태백의 출생지는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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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 천년 간 수많은 유목민족의 각축장이었던 소그디아의 입구, 악베심
이시쿨호수에서 서쪽으로 40km정도 달리면 토크목(Tokmok)이라는 삼거리가 나온다. 이 삼거리에서 서쪽으로 직진하면 키르기즈의 수도 비쉬켁에 도착하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카자흐스탄의 국경을 넘어 구 수도였던 알마티(Alamaty)로 넘어 간다. 그러니까 지형학적으로 보면 동쪽으로는 겨울에도 얼지 않는 천혜의 젖줄인 이식쿨호수가 펼쳐지고 서쪽으로는 황금의 땅, 소그디아(Soghdia)1)로 넘어가는 길목에 해당되는 지점이다. 다시 한 번 실크로드를 주제로 말하자면 천산산맥의 베델고개를 넘는 ‘천산북로’와 중가리아 초원을 따라 내려온 ‘초원로’가 만나는 길목이 되는 셈이다.
또한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역사적 판도를 바꾼 대회전인 탈라스(Talas)전투2)의 주무대도 먼 거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 뭔가 거창한 사건이 벌어질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넓고 푸른 초원 자체가 삶의 무대일 수밖에 없는 유목민족이라면 어느 누가 이런 노른자위 황금어장에 눈독을 들이지 않겠는가? 실제로 이 지방은 과거 수천 년 동안 비옥한 유라시아 평원의 패권을 노리는 자, 실크로드의 황금어장을 취하려는 유목민들의 각축장이었다. 이름하여 흉노족, 투르크족, 서요[西遼,카라키타이], 몽골, 칼를록족, 위구르족 같은 역대 초원의 주인들과 그리고 호시탐탐 실크로드의 패권을 노리던 중원대륙의 한족간의 뺏고 뺏기는, 피바람 부는 무대였다.
토크목의 서남쪽 8km 지점에는 고대 유적지들이 산재해 있다. 현지에서는 ‘악베심(Ak-beshim)’3) 또는 “군영[ordu]의 도시(kent)”라는 의미의 오르두켄트(Ordukent)라고도 불렀던 곳인데, 역대 초원의 패자들이 한 때 도읍지로 삼았던 곳이다. ‘악-베심’이라는 지명의 어원으로 추정해보아도 이곳이 여러 고대왕국들의 도읍지였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악베심이란 말 자체가 ‘대두령(大頭領)’이란 뜻이기 때문이다.
현 악베심을 중국의 사서에서는 쇄엽 , 세엽(細葉), 소엽(素葉)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이는 ‘스이아부(suyab)’ 를 소리 나는 대로 한자로 적는 과정에서의 오차범위일 뿐 모두 강 이름과 연관되었다는 점은 쉽게 간파된다. 페르시아어로 ‘스이’는 강 이름이고 ‘아브’는 도시를 뜻하니 ‘강가의 도시’라는 뜻이 되는 셈이다. 이런 사실을 뒷받침할 기록이『신당서』,「서역전」에 보인다.
쇄엽(碎葉)4)은 쿠차[高車, 안서도호부] 서북 천리에서 발원하여…(중략)… 북으로 흐르는 줄기는 돌궐의 땅을 거처 발하시5)호수로 들어간다. (중략)
발달령(勃達嶺, Bedel P)을 지나 북으로 천리를 가면 세엽천(細葉川)에 이른다. 세엽천의 길이는 천리이다. (중략) 이곳으로부터 물이 흘러 서해(西海, 아랄해)에 도달한다. 3월에서 9월까지 비가 오는 법이 없어 눈 녹은 물(雪水)로 밭에 물을 댄다.
동쪽으로 이식쿨호수가 있는데, 추워도 물은 얼지 않는다. 서쪽에 쇄엽성이 있으니 천보 7년(748년) 북정절도사(北庭)6) 왕정견(王正見)이 안서를 정벌할 때 그곳을 격파했다.
위 기록을 해석해보면 쇄엽성은 세엽천 동쪽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세엽천은 오늘날의 악베심 근처를 흐르는 ‘츄’ 강(Chuy R)’7)이 분명하다. 길이가 천리가 된다는 이야기처럼 북으로 흘러 다른 8개의 지류들과 합류해 카자흐스탄의 발하시 호수로 흘러들어간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의 의문이 생기는데, 그것은 왜 강의 이름이 ‘츄’ 이냐? 하는 것이다. 이는 티베트어의 강이나 시내를 말하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물론 한 때 토번제국이 이곳을 점령한 적이 있었으나, 지금까지 이런 이름을 사용한다는 것은 선뜩 납득이 가지 않는다.
하여간 구소련의 고고학자들이 1931년부터 10년 동안 소그디아나 광대한 초원을 조사하면서 고대의 도시와 성곽을 다수 발굴하였는데, 그 중 악베심 유적이 있는 츄강 유역에서만도 6~10세기 경의 크고 작은 성곽도시가 18개나 존재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당시 발굴팀을 총지휘한 키즈라소프는 이 유적들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결론지었다고 한다.
이 도시들은 소그디아나 북방초원의 상업, 수공업, 농업 그리고 문화의 일대중심지였음이 증명되었다. 도시의 기초는 화폐의 명문, 토기의 형식, 기타 고고학적 자료로 볼 때, 십중팔구 소그드인의 이민에 의해 구축된 것임이 틀림없다. 여기서 여러 종족이 거주하였는데, 소그드인 뿐만 아니라 투르크인, 시리아인들도 있으며 중국인들도 거주하기도 했다. 이 도시는 소그디아나 뿐 아니라 타림분지의 오아시스, 중국 본토와도 긴말한 통상적, 문화적 관계를 유지했다.
▼ 토크목으로 가는 길
▼ 쇄엽의 어원이 된 스이얍강. 그러니 현지민들은 티베트말의 츄강이라 부르고 있다.
▼ 토크목 삼거리의 이정표
▼ 토크목 시가지
▼ 심하게 홰손된 악베심 유지 표지판
▼ 악베심 신 분포지도
▼ 악베심 유적 사원지 2
▼ 악베심 유적의 당나라 쇄엽성 시대의 불교관련 출토물
▼ 출토된 중국 동전 <개원통보>라는 당 현종 때의 동전도 보인다.
쇄엽성의 유지
▼ 부라나 타워공원으로 들어가는 입구
▼ 12세기 카라한 왕조 시기에 세운 이슬람식 부라나 타워
▼ 멀리 천산산맥을 배경으로 부라나 타워 위에서 필자. 타워 일대에 쇄엽성 유지들이 흩어져 있다.
* 현장의 천축순례의 진정한 출발지, 소엽수성(素葉水城)
다시 현장법사의 발길을 따라 잡는다. 법사가 능산을 넘어와 서돌궐국의 칸(可汗:Khan)인 엽호가한[葉護可汗, Yabgu qaghan]을 만나서, 인도로 가는 순례의 편의를 제공받기 위해 머물렀다는 곳이 바로 소엽수성이란 곳이다.
▼ 말과 낙타를 타고 서역을 통과중인 현장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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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지의 서북쪽으로 5백여 리를 가다 보면 소엽수성에 이른다. 성의 둘레는 6∼7리이고 여러 나라의 오랑캐 상인들이 뒤섞여 살고 있다. <『대당서역기』권1>
서돌궐의 칸은 그의 군막(軍幕)에서 현장을 환대하면서 불교에 대해서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현장이 오기 전 몇 해 전에 프라바카라미트라(prabhākaramitra)8) 라는 인도 승려가 중원으로 들어가려고 이곳에서 얼마 동안 머물면서 그들에게 불법을 전하려고 애쓴 결과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아무튼 현장이 받은 칸의 첫인상은 사뭇 근엄하였다고 한다. 이 두 사람의 해후장면은『서역기』와 쌍벽을 이루는 또 하나의 대작인『자은전』에 자세하다.
소엽성에 이르러 돌궐의 칸[葉護可汗]을 만났는데, 그는 초록색의 엷은 비단옷을 입었고, 머리카락은 한길이나 되었으며, 명주로 이마를 감싸서 뒤로 늘어뜨렸다. (중략) 천막은 눈이 현란할 정도로 화려하게 금화(金花)로 장식되어 있었다. 모든 군신[達官]9)들은 천막 앞에 카펫을 깔고 두 줄로 앉아 있는데 모두 붉은 비단옷을 입고 있었으며 나머지 병사들은 천막 뒤에서 호위하며 서 있었다. 이것을 보니 비록 흉노(匈奴)의 군장(君長)이라고는 하나 매우 근엄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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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미 현장이 전통적인 루트인 ‘천산남로’를 이탈하여 어렵게 설산을 넘은 이유가 고창국왕의 안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앞에서 여러 차례 야기한 바 있다. 하여간 다시 칸의 군막으로 들어가 보자. 현장이 도착했을 당시 마침 외국사신들이 도착했던지,
잠시 후 칸이 한나라와 고창에서 온 사신을 접견하였는데, 그들이 국서와 신물(信物)을 바치자 칸은 매우 기뻐하며 사신들을 자리에 앉도록 하고 주연을 베풀며 음악을 연주토록 명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즐겼지만, 법사에게는 따로 포도즙을 올렸다. 이렇게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술잔이 계속 오가는 가운데 금말도리(僸秣兜離)라는 음악이 은은히 울려 퍼지면서 온갖 악기 소리가 울렸다. 이 역시 토번(吐蕃)풍속의 음악이긴 하나 귀와 눈을 즐겁게 하고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얼마 후에 다시 음식이 들어왔는데 삶은 양고기와 쇠고기로 만든 음식이 눈앞에 가득 쌓였다. 법사에게는 별도로 정식(淨食)을 바쳤는데 떡과 밥과 우유와 꿀과 포도 등이었다. 식사가 끝나자 다시 포도즙이 돌아가고 그런 후에 칸이 법사에게 불법을 설해주기를 청하였다.
칸의 군막에서의 극진한 손님접대는, 유목민족들은 전통적인 풍속으로 예나 지금이나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매일매일 즐거운 연회는 계속되었지만, 현장의 뒤끝은 타들어갔다.
여기서 여러 날을 머물렀는데 칸이 더 오래 머물기를 바랐다. 현장이… (중략) …이에 칸은 할 수 없이 나라에 명령을 내려 중국어와 다른 여러 나라의 말을 할 줄 아는 통역을 찾게 했다. 마침 한 소년이 있었는데, 일찍이 장안에 가서 수년 동안 살았기에 중국어에 잘했다. 그래서 즉시 통역관인 마돌달관(摩咄達官)에 임명하고 여러 나라에 보낼 국서를 만들게 한 뒤, 그로 하여금 법사를 ‘가필시국’(迦畢試國)10)에까지 모시고 가도록 했다. 그리고 비단으로 만든 법복 한 벌과 명주 50필을 보시하고 여러 신하들과 함께 10여 리 밖까지 전송하였다.
바로 위 밑줄 친 구절에서 우리는 왜? 현장이 타림분지로부터 곧바로 파미르를 넘어서 인도로 가지 않고 부득이 우회로를 택한 이유를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아무튼 인류사적으로, 이방에서 온 한 젊은 순례승을 뒷바라지하여 인류 역사상 한 걸출한 인물을 탄생하게 한 이 서돌궐의 칸은 중국 사서에도 선명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서돌궐을 통합한 엽호가칸과 고창왕이 파견사를 보내왔다. (중략) 그 아비 사궤칸이 죽고 아들 엽호칸이 왕위에 올랐다. 그는 용감하고 지모가 있어 북쪽의 철륵(鐵勒)아래 활을 쏠 수 있는 자가 수십만을 거느렸다. 오손(烏孫)의 옛 땅에 거점을 만들었고 도읍을 석국(石國)11)의 북쪽 천천(千泉)에 두었고 서역제국을 모두 신하로 만들었다. <『자치통감』권187. 唐紀3>
그러나 현장이 지나간 직후 카를룩(Karluk,葛邏祿)12)부족을 비롯한 3개부족의 반란으로 인해 한 동안 통일된 국가형태를 이루었던 서돌궐국은 다시 분산되고 자신도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것을 보면 초원의 흥망성쇠가 얼마나 무상한가를 말해준다.
1) 이른바 일반적으로 ‘서역’이라 부르는 곳의 중심지로 실크로드 ‘천산북로’와 ‘초원로’가 합류하는 지방을 말한다. 현 아무다리야[옥수스]강과 시르다리야[야크샤르] 강 사이의 오아시스 지역을 가리키는 고대지명으로 이는 현 우즈베키스탄 행정구역의 사마르칸드 주와 부하라 주, 그리고 타지키스탄 행정구역의 수그드 주와 대체로 일치하며 제라프샨[폴리티메투스,那密水] 분지와 페르가나분지를 포함한다.
2) 751년7월~8월 사이에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수 고선지 장군이 지휘하는 당나라군과 동맹군 카르룩이 압바스 왕조와 티베트연합군을 상대로 탈라스 강 유역에서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두고 싸운 전투로 당나라군에 속해있던 카를룩족이 아바스 왕조로 돌아섰기 때문에 당나라군은 괴멸하고 고선지를 비롯한 지휘관 및 소수의 병사만이 탈출했다.
그 결과 아바스왕조는 중앙아시아에서 이슬람세력의 기반을 굳히게 되었고, 유목민족들 사이에서 이슬람교가 퍼지기 시작했다. 당나라는 상당수의 병사가 포로로 붙잡히게 되었고, 그들 중에 종이를 만드는 기술을 갖고 있는 기술자가 포함되어 있기에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에 퍼지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나라는 이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나면서 국력이 쇠퇴해 더 이상의 서역경영은 어렵게 되었다.
3) 突厥词语里有这样的词,如:ak-sakar(长者;直译:白胡子 );ak-songek (贵族;直译:白骨头) , ak-beshim直译:大头领),这样看来过了千百年了,当地人还称此地是大头领,猜想这也是碎叶城当年驻扎着唐代屯守边关的队伍和首领所遗留的印迹啊。
4) 원문을 직역하면, “안서 서북 천리되는 곳에서 흘러나와, 발달령(勃達嶺,Bedel Pass)에 이르러, 남으로 중국에 이르고, 북으로 ‘돌기시’ 땅의 남쪽 경계에 이르고 서남으로 총령까지 2천리를 흘러간다.[有碎葉者,出安西西北千裏所,得勃達嶺,南抵上國,北突騎施南鄙也,西南直蔥嶺贏二千裏]라고 해야하나 이는 지리적으로 옳지 않아 생략한다.
5) 현 카자흐스탄의 남부에 있는 호수이다.
6) 북정도호부는 당나라 때 702년 최북서인 천산산맥 중북부 쪽에 있는 지무싸[濟木薩]에 있던 정주(庭州)에 설치한 변경 방비기관으로 안서도호부와 함께 중가리와와 서역지방을 진무(鎭撫)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그 뒤 안사의 난, 토번의 진출로 위축되어 790년 토번에게 함락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7) 이 강은 북쪽으로 카자흐스탄으로 흘러가 발하시 호수로 들어 간다.
8) 중인도 마가다국 출신의 학승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역경승으로 미륵·무착·세친의 공동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대승장엄경론』을 630∼633년 사이에 번역하였다.
9) 돌권(突厥)의 관명으로 칸의 시종을 말한다.
10) 범어 Kāpiśi의 음역으로 고대 북인도, 건타라국(健駄羅國)의 서쪽에 자리했던 나라이며 현재 아프가니스탄의 카불(kabul) 지방에 해당한다.
11) 석국은 현재로서는 우즈벡의 수도인 타슈켄트(Tashkent)로 비정되고 있으나, 석라국(石騾國)은 『위서』,『수서』,『당서』등 중국 쪽 자료 어디에도 나오지 않는 이름으로 그 비정에 관해 학계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아직까지 신빙성 있는 정설은 없지만, 대체로 석국과 같은 곳으로 무게가 기운다. 바로 고선지가 750년에 점령한 바로 그 곳이다.
『신당서』「서역전」은 좀 더 상세하게 “일명 자시(赭時)라고 하는 ‘석국’이 한대에 대원의 북변에 있었다. 운운” 또한 『대당서역기』에도 ‘자시국’이라 칭하면서 국토는 천여리나 되고 동남이 좁고 남북이 길며, 땅이 비옥하고 기후가 좋으며, 성읍이 수십 개이고 성의 우두머리만 있고 국왕은 없으며, 돌궐에 예속되어 있다고 하였다.
12) 카를룩부족은 고선지장군의 탈라스전투 때 배신을 한 부족이다. 세 부족의 연합으로 구성된 카를룩부족은 각 부족장이 퀼-에르킨(Kűl-Erkin)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으나, 655년경 강력한 군대의 보유와 함께 ‘야브구’라는 한층 격상 된 칭호를 사용하였다. 650년과 654년 당나라의 공격으로 나머지 부족은 천산북부 지역을 관장하는 당나라의 북정(北庭)도호부에 편입되었다. 후에 새 이슬람 왕조인 압바스 왕조가 들어서며 당군과의 충돌은 불가피하여 751년 탈라스에서 대 전투가 벌어졌다. 카를룩은 처음에는 당군을 지원했으나, 정세가 압바스군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중국을 배후에서 공격하여 압바스군이 탈라스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한 때 발라사군(Balasaghun)에 도읍을 정하여 투르크 국가의 이슬람화에 주역이 되었다가 후에 위구르부족과 함께 몽골제국에 복속되었다.

첫댓글 토크목... 살만한 곳
쇄엽성=소엽성=소엽수성=악베심 ?
細葉城까지~ 모두 'Sy-ab'의 音寫
멜론 맛이 기가 막힌 곳이지요. 아마
네 이쪽 지방의 멜론은 매우 크고 달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싸지요. ㅎㅎㅎ
새로운 자료들이 너무 많이 삽입되어 부득히 수정을 하게 되어 글을 새로 올렸심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