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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부: 스리 비레탄티 세컨더리 휴먼스쿨
2-1) 비레탄티 휴먼스쿨
2-2) <엄홍길휴먼재단(UHGHF)>
2-3) 비레탄티 마을 & 3년간의 내 하숙집
2-4) '스승의 날' 깜짝선물
2-5) 안나푸르나 설산에 뜬 무지개꿈
2-6) 설산동자, 동녀들 드디어 한국으로…
2-7) 염소 & 교복 후원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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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비레탄티 마비 스쿨
► 비레탄티 마비 현판 로고
► 비레탄티 마비 전경
► 나의 부임 첫 행사. 이마에 처음 띠까를 찍고… 2015년 8월
► 부임인사 교직원들과 인증샷
► 미술수업
► 부임 초기에 5학년 개구쟁이 학생들과 한 장
► 학교 아침 정기 조회
► 교실 밖 수업 1, 2
► 안나푸르나 인근의 6개 연합운동회
► 방과 후 한글을 가르치는 교재
► ‘환경의 날’ 거리 캠페인
► <비레탄티 학교> 그림 Bishal Capai 작 2017비
► 특별활동 퀴즈게임 중
► 학용품 전달식
내가 3년 동안 명예교장 및 미술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곳은 네팔 중서부 포카라 근처에 있는 비레탄티 학교로 정식명칭은 <스리 세컨더리 비레탄티 휴먼 스쿨(Shree Secondary Birethanti Human school)> 이다. 1976년 공립학교로 설립되어 유아원+초등+중등으로 이루어진 10년제로 총학생수는 220여명이고 교사는 14명이다. 동네 규모나 인구수로 보아서는 학생 수가 너무 많은 게 이상하게 보이지만, 보통 한 가정에서 2~4명이 동시에 학교에 다니는 게 정상인데다가 중학교가 없는 다른 골짜기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학생들이 중등 과정이 있는 우리 학교로 몰려오기에 생각보다 학생 수가 많는 편이다.
학교 정식 이름이 길어서인지 아니면 영어식 이름이라 그런지 부락에서는 그냥 ‘비레탄티 마비(B. Mavi)’라고 부른다. 그냥 ‘비레탄티 학교’라는 뜻이다. 나도 이 말이 어감이 좋아서 즐겨 사용하는 편이다.
이 비레탄티 마비는 전에는 아주 보잘 것 없는 조그만 학교였는데, 크게 도약을 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바로 2003년에 당시 거의 천막수준의 학교를 <엄홍길휴먼재단(UHG.H.F)>에서 코이카(Koika)와 아웃도어의류 전문업체인 밀레(Millet)의 협찬으로 현대식 2층 스라브 건물로 멋지게 지어서 네팔정부에 기증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점차로 현재와 같은 규모의 학교가 되어서 그 뒤로는 ‘휴먼’ 자가 학교 명칭에 더 추가되었다. 커리큘럼은 네팔 정부가 규정한데로 네팔어+영어+수학+과학+ 사회생활을 기본으로 가르친다. 그러나 그외 미술, 음악, 체육은 시간 자체가 없고 다만 금요일에 특별활동으로 가끔씩 다루기도 한다.
내가 3년 전 네팔로 들어와 자원봉사 활동을 하려고 마음을 굳히고 휴먼재단에 자문을 해보니 네팔 전체로 미술시간 자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뭐 어정쩡하게 배운 것보다는 차라리 백지상태가 낳을 것 같아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물론 이 비레탄티 마을은 아주 오래 전에 푼힐전망대 가는 길에 잠시 스쳐 지나가기는 했다. 그러나 기억에 남는 곳은 아니었지만, 재단의 이사이고 나와 인연이 깊은 설산철안(雪山鐵眼)스님이 추천하고 재단이 꼭 집어서 지정한 곳이니만치 그냥 한 일 년 정도 봉사나 하자는 심정으로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리하여 2015년 8월 1일 재단의 네팔지부 박지부장과 함께 카트만두에서 포카라까지 국내선을 타고 와서 우선 스마트폰을 개설한 뒤에 지프차를 대절하여 비레탄티 마을로 들어오는데, 구절양장 길은 왜 그리 멀고 또한 그리 험했던지….
그 때는 마음속으로 “내가 살아서 다시 이 길을 돌아 나갈 수 있을까?” 라고 생각이 들 정도로 막막한 심정이었다.
누구나 삶의 여울목에서 고심하여 새로운 길을 선택하고 첫 발을 떼어놓을 때는 가슴이 설레기 마련이고 한편으로 망설임도 생기기 마련이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로, 문득 돌아보니 내 나이 이미 적지 않은데, 지금 내가 누구를 위한 삶을 살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 일을 잘 회향할 수 있을까? 하는 우려 반 두려움 반이 섞인 미묘한 감정이 번갈아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한 평생을 돌아보니 그런대로 열심히 살았다고는 하지만, 그 세월들은 어찌 보면 지극히 이기적인 삶이었다. 또한 내 어정쩡한 예술혼이라는 것도 평생 나를 묶고 있었던 쇠사슬이었기에 이타적인 삶은 성자들에게나 어울리는 뭐 그런 것인 줄로 여기면서 시간의 수레바퀴만 헛되이 돌리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어느 날 문득 그 사슬들이 갑자기 풀린 뒤, 이제는 남은 여생이라도 내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나아가 그들의 꿈을 이루어주기 위해 살아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결기(結己)가 가슴속 깊숙한 곳에 들어차기 시작했다. 그래서 마치 단전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에너지에게 떠밀려 설산 기슭으로 들어왔던 것이다.
그렇게 모진 마음으로 시작한 이곳 생활이었지만, 실제로는 거의 유배생활 그 자체였다. 처음에는 그래도 “인터넷은 된다니까!” 하고 자위하고 임지에 도착해서 우선 하숙집부터 구해서 방을 좀 수리하고 급한 짐을 풀어 놓았다. 그리고 노트북과 복합기까지 세팅을 해 놓고 인터넷을 점검해보니 막상 믿었던 인터넷은 느려 터져서 한국으로 사진 몇 장 보내는데, 몇 시간이 걸릴 때도 있었고 어떤 때는 중간에 스스로 인터넷이 꺼져 버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는 노트북을 집어 던지고 포카라로 달려가 페와탈 호수를 정신없이 거닐다가 해거름부터 호숫가에 죽치고 앉아 술 푸념을 할 때도 있었다.
당시가 어쩌면 첫 번째 고비였는데, 그 때 당시 학교 선생들이 SNS로 ‘페이스북(FACE BOOK)’를 많이 하고 있기에 눈여겨보니 생각이상으로 속도가 빨랐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인터넷은 느린데, 어떻게 스마트폰으로 하는 SNS는 빠를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나도 한국에서는 가입한지 오래되었지만, 별로 사용하지 않았던 페북 계정을 복구해서 사용해보니 정말 속도가 빨랐다. 스마트폰은 네팔로 들어올 때 유심칩을 네팔 거로 바꿔 꼈기에 네팔번호로 전화는 할 수 있지만, 한국으로는 걸 수가 없었으나 카카오톡은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또한 노트북이 아닌 폰으로 페북을 빠르게 접속할 수 있었다. 그것도 WI-Fi가 되는 곳에서는 공짜로 말이다. 그로부터 페북은 내 유일한 세상과의 창구노릇을 충실히 하였다. 그러니까 누가 뭐래도 나의 네팔 정착에 일등공신 노릇을 한 셈이었다.
그래서 <The letter come from Nepal Birethanti human school>이란 제목으로 내 주위의 학교생활이나 드림팀에 대한 중계방송과 히말라야에 대한 생생한 정보 그리고 내 근황에 관한 소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나를 아는 사람이외에도 생면부지의 사람들도 글을 읽어보고 댓글로 추임새를 넣어 주면서 격려를 해주거나 그냥 ‘좋아요’를 눌러주는 이른 바 ‘페친’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났다. 때로는 내가 하는 일들이 안스러워 보였던지 익명으로 후원금까지 통장으로 입금해주는 분들까지 생기면서 ‘페북질’에 가속도가 붙어서 벌써 4백회를 넘긴지 오래다.
이 책도 그 페북질에서 쌓인 정보들을 ‘데이터 베이스’로 활용하여 좀 더 수월하게 한 권의 분량을 채울 수 있었다. 혹자는 개인정보 누설 같은 부작용을 우려하여 페북을 멀리하는 분들도 많지만, 내게는 이 페북이 긍정적인 면이 많았기에 가능하면 내가 여기서 접할 수 있는 히말라야에 대한 싱싱한 정보와 학교와 드림팀 그리고 내 소식과 내 생각을 자주 페친들에게 알릴 예정이다.
우리 드림팀의 서울에서의 전시가, <엄홍길휴먼재단>의 초청으로, 2017년 9월 13일부터 서울 인사동 라메르화랑에서 열리기로 확정되었기에 이번에 그 준비 차 서울에 보름 동안 머물다 ‘귀국’ 아니 ‘귀(歸)네팔’로 돌아왔다.
다른 사람들은 카트만두 공항에서부터 네팔 일정이 시작되겠지만 나는 카트만두를 떠나는 이 포카라행 버스에서 내 보름간의 일정이 끝나는 셈이다. 아침 7시에 타멜 근처에서 일제히 떠나는 이 투어리스트 버스가 편하고 안락하긴 하지만, 가격이 좀 비싸기에, 나는 가능하면 야간 로컬버스를 타고 다니지만, 짐이 많고 피곤할 때는 가끔은 이 버스를 이용하곤 한다.
내가 자리를 비운 보름 동안 네팔은 여전하다. 네팔 특유의 냄새와 까마귀 떼 울음소리로 시작되는 새벽정취도 여전하고, 정류장의 짜이 장수의 바가지 상술도 여전하다. 몇 마디 네팔말로 가격은 반으로 내려가지만, 나도 뒤끝 있게 나간다. "머 투어리스트 호이너” 즉 “나는 투어리스트 아닌데, 왜 비싸게 받으려고 하느냐?”고 물어보면 미안한 표정하나 없이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일 뿐이다. 그 뜻은 그저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돈 많은 외국인이란 그저 차 한 잔일지라도 더불가격을 받아도 괜찮은 그런 사람들일뿐이다. 네팔에서 ‘Nepali Price’와 ‘Tourist Price’의 존재는 거의 네팔문화 그 자체이다. 오래전부터 그래 왔기에 그것은 당연한 거라는 인식이다.
그래도 나는 네팔이 좋고, 네팔사람이 좋고, 더구나 네팔 아이들이 사랑스럽다. 왜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글쎄~" 라고 대답할 뿐이지만~~
“자~ ‘잠잠(Let’s go~)’ 가자. 가자. 물안개 피어나는 포카라로, 흰 구름이 걸려 있는 안나푸르나 설산으로, 사랑스런 아이들이 기다리는 비레탄티 마비로 어서 가자~~~.”
아직도 그렇지만, 학생들과의 의사소통은 네팔에 도착할 때부터의 문제거리였다. 그러나 어떠하든 학생들과의 거리는 좁혀야 했다. 그래야지 뭘 가르치거나 뭘 할 게 아닌가 말이다. 그러나 다 늙어서 남의 나라 말을 새로 배운다는 것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위 사람들이나 나나 급하면 영어가 튀어 나왔기에 네팔어 학습은 더욱 진도가 나가지를 않았다.
그 때 생각한 방법이 ‘학생들의 이름 불러주기’였다. 꽃이라 불러주니 꽃이 되었다는 것처럼 내가 그들의 이름을 불러주니 그들이 내게로 다가와 나의 제자가 되었다. 네팔말로 하는 의사소통도 꼭 필요하진 않았다.
그러나 네팔사람들의 이름이라는 것이, 고게 고거 같고, 저게 저거 같이 비슷해서 2백여 명의 이름을 암기하는 것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우선 매일 만나는 놈들마다 “떠빠이쿠[your] 남[name]쿄 호?” 그러면 “메로[my] 남[name] ** 호(is)” 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러나 전교생의 이름을 단시간 내에 외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우선 단계와 대상을 나누어야했다. 우선 순위는 드림팀이고 그 다음이 비레탄티 본 동네에 사는 아이들은 길거리에서도 자주 부딪치니 이름을 불러줄 기회가 많았다.
그 다음이 염소를 분양받은 학생들의 이름을 외우는 일이었다. 염소를 분양해줄 때 한국식, 영어식으로 후원자들이 염소이름을 정해주기 때문에 그래서 내식대로 아이들 이름지어주기로 작전을 변경했다. 그렇게 한국식으로 별명을 지어서 이름 위에, 실물 위에 얹어 놓으면 외우기 좀 수월했다.
예를 들면 ‘1호 염소 형, 아누스’, ‘호프 염소 누나, 쇼바 파리야’, ‘털팔이, 모니카 따망’, ’세침때기 아이타수바‘, ’얌전이, 스리자냐 라이‘, ’흑진주, 수스미타 파리야‘, ‘코 찔찌리, 순아르 아차리야’, ‘똘똘이 비샬 짜파이’ 라는 식으로 말이다.
내가 학교에서 하는 일은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명예교장으로서 한국의 독지가나 후원자들과 우리 학교를 연결시켜 학교에 도움이 될 만한 후원을 추진하는 것인데, 이에 대하여는 다음 장(2부 6장에서)에서 다시 언급할 예정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미술교사로서 전교생을 상대로 기본 미술학습을 시키는 일이다. 학년에 과제가 달라지는데, 저학년은 간단한 색칠하기 같은 것을, 고학년은 주제를 주어 그림을 그려오기 같은 것을 하는데, 그중에 유난히 특별한 재능이 보이는 학생들은 따로 숙제를 여러 장 내주고 그 결과에 따라 드림팀으로 선발해 특별 미술교육을 시키는 일이다.
내가 미술교사로서 무엇보다 힘주어 가르치고 싶은 것은 “너희들이 사는, 이 안나푸르나 설산이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숭고하며, 얼마나 세계적인가?” 였다. 그러니 “너희들은 물질문명에 혹해서 조상들이 물려준, 저 위대한 설산이 주는 가르침을 잃어버리면 안 된다. 그리고 또한 저 설산을 너희 후손들에게 깨끗하게 물려주어야 한다. 이해하였느냐? 부즈누 훈처?”
참 드림팀의 활약상은 역시 다음 장(2부-5장, 6장)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겠다.
비레탄티 마비 장을 마감하면서 학교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족을 달고 싶다. 그렇다고 개선될 성질의 것이 아니지만, 그래도 문제점은 누군가는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롯지의 내 방에서 내려다보면 아침, 저녁마다 노란색 학교버스가 다리까지 와서 아이들을 데려가고 데려온다. 아랫마을인 나야풀에서 온 <영어 보딩스쿨(E. Bording school)>버스로, 이른바 사립학교의 통학차이다. 그 버스에 타는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깨끗한 교복에 차림새도 말끔하다. 한 마디로 “있는 집의 자녀들이다.”
상대적으로 가난한 우리 학교 아이들이 돈 많은 동네 또래 친구들이 노란 스쿨버스 타고 학교에 가는 그런 광경을 얼마나 선망의 눈으로 바라보는지는 굳이 설명을 안 해도 될 것이다. 우리 비레탄티 마비는 공립학교라는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다. 그래서 학비도 의무교육이라 저렴하고 학교가 한 동네에 있기에 편리할 것 같은데도, 동네 유지들과 학교의 교사들은 그들의 자녀들을 우리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교육의 질이 많이 떨어진다는 이유이다.
다른 것은 내가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출석일수’에서는 확연히 많은 차이가 난다. 공립학교가 무슨 핑계를 대 가면서 수업을 안 하는 날에도 사립학교 아이들은 학교를 가는 것을 자주 보아 왔으니까.
네팔에서는 사립학교가 동네마다 즐비하다. 기득권층 유지들이 부업삼아 마치 무슨 학원정도의 규모로 사립학교 몇 개정도는 기본으로 운영한다고 한다. 우리나라처럼 대도시에 몇 개 정도 있는, 아주 비싸고 특수한 귀족학교 같은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네팔에서는 ‘부티나는 학교’이다. 현재 네팔사회에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은 대부분 이런 보딩스쿨 출신들이다. 그들은 자식들을 절대 공립학교에 보내지 않는다. 자신처럼 중산층 이상으로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딩스쿨을 나와야 한다는 인식이다. 시골에서도 보딩스쿨의 인가조건은 별로 어렵지 않다. 나름대로 ‘특수층 사람들만의 리그’로 모종의 카르텔이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현재 네팔에서 영어는 외국어가 아니고 국어이다. 네팔의 상류계급층은 이전처럼 신분제 ‘카스트’ 제도로만 분류되지는 않는다. 물론 카스트 제도가 완전히 없어졌다는 말은 아니지만, “돈 있으면 상류층이 될 수 있다.”라는 말은 유효하다. 그들은 영어로 수업하는 보딩스쿨을 다녔기에 영어가 아주 유창하다. 그것은 영국시절 때부터의 국어이니까 당연한 것이다. 그래서 일단 영어가 유창하지 않으면 ‘그들의 리그’에 끼어 들 수가 없다.
그런데, 정작 심각한 문제는 다른 데 있다. 이런 사회분위기가 공립학교 교사들의 교육자적인 인식이나 자질에 직결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 선생들 중에도 자신의 자녀들은 노란버스에 태워 아랫마을 보딩스쿨에 보낸다. 비록 비싸더라도, 자식들이 재대로 교육 받으려면 공립학교로는 어림없다는 인식의 발로이다.
내가, 지금 마치 내부 고발자 같은 심정이라, 마음이 편치는 않지만, 우리 학교의 교장이하 대부분의 교사들은 직업적인 전업교사라기보다는 부업삼아 하는 아르바이트 같은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했다. 그들의 학교 출근 일수는 일 년의 반을 겨우 넘길 정도이고 나머지는 집에서 생업에 종사한다는 것이다. 다른 보딩학교를 운영한다든지 아니면 레스토랑이나 구멍가계를 차리거나 하다못해 농사라도 안 짓는 선생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무슨 교육자로서의 열성과 자긍심을 기대하랴? 그들의 월급이라야 고작 2~ 3백 달러 선이니 이해는 할 수 있어도 네팔의 앞날이 암울해 보인다.
참 내가 여기서 하는 일 중에 한 가지가 더 있기는 하다. 철마다 뜻이 통하는 지인들에게 탁발(托鉢)을 하거나, 때로는 내 품위유지비를 다 털어서라도, 전 교생들에게 깨끗하고 세련된 새 교복과 운동복을 맞추어 주는 일이다. 그 때만큼 아이들이 행복해 하는 것을 본적이 없는데다가 멋진 새 교복을 입을 때만큼은 노란버스 아이들이 부럽지 않고 자랑스러워하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우리 비레탄티 마비 아이들이 노랑버스 아이들한테 기죽지 말고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씩씩하게 뛰어 놀기 바란다. 그래서 노란색을 뛰어 넘어 황금색 아니 플래티넘 색의 네팔인으로 자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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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이들에게 희망과 주고 하면된다는 교훈을 주었고 지역사회에 많은 일을 하셨어요~^^
어려운 일이 많으셨을텐데~ 3년 씩이나~ 대단하십니다.
회사에서 일했던 한 네팔 얘기아빠가 영어로 수업하는 학교 나왔다고 다른 네팔얘들이 놀리던만은
그런 학교인모양이군요...
그런데 세컨더리 스쿨의 세컨더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나요??
깊은 산속에 학교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경이로웠고 스레퍼를 신고 돌 계단을 거침없이 뛰어가며 등교하는 학생들을 보는게 인상 깊었네요.
카투만두 타멜에서 즐겨다니던 식당에서 한 달에 3만원 받으며 일하는 학교를 가본적도 없다던 13살 어린 남자 아이를 한국 스님이 운영한다는 학교에 연결해주고 싶었는데 귀국 일정때문에 못하고 책이랑 학용품 사주며 앞으로 잘 살아가려면 공부해야한다고 설명하며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왔는데 지금은 어떻게 살며지내는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열악한 환경속에서 가르침을 주시며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곁에 함께 하시며 실행하시는 다정님은 보살님입니다.